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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편에 서는 법[法] 곽현화 씨의 긴 싸움이 갖는 의미
곽현화 씨의 사건을 맡게 된 것은 2017년 초, 독립PD협회에 소속된 김영미 PD의 이야기를 통해서였다. 당시 곽현화 씨는 ‘명문대 출신 개그우먼’, ‘미녀 개그우먼’ 등으로 불리며 대중의 인기를 모으고 있었지만, 나는 사건을 맡기 전까지 그에 대해서도 그가 겪고 있던 사건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다. 김영미 PD에 따르면, 재능 있는 젊은 여성 연예인이 있는데 처음으로 주인공을 맡게 된 영화를 촬영하던 중 가슴노출 씬을 찍게 되었고, 대중에게 공개하지 않기로 했던 장면이 임의로 유포되는 피해를 입었다고 했다.
이 사건은 여러 우여곡절 끝에 기소가 되었으나, 1심에서 곽현화 씨의 노출 영상을 동의 없이 사용한 감독에게 ‘무죄’가 선고된 상태였다. 거기에 가해자인 감독으로부터 곽현화 씨가 무고죄 고소를 당하고, 이후 허위사실적시 명예훼손 고소까지 이어지던 중이었다.
▲ 곽현화 씨는 대중에게 공개하지 않기로 약속한 노출 장면이 임의로 유포되는 피해를 겪었지만, 소송 과정에서 여성 연예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맞닥뜨렸고, ‘의사에 반하는 촬영물 유포’에 있어 당시 사회의 미흡한 인식의 벽에 부딪혔다.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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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강의 사정을 전해 들은 후 곽현화 씨를 만나보기로 했다. 인터넷에서 검색했을 때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온라인에서 그는 누리꾼들로부터 제멋대로 성적 대상화로 소구되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장시간 그에게 고통을 준 영화 〈전망 좋은 집〉과 그의 가슴 부위만을 CG로 만들어 사용한 다른 영화가 크게 자리했다. ‘19금 영화에 여주인공으로 출연할 땐 각오했어야 할 일 아니냐’, ‘어차피 전망 좋은 집 찍은 후에 야한 영화를 또 찍지 않았냐’, ‘여자 연예인들이 서른 넘어 스타성 떨어지면 노출은 수순 아니냐’ 등의 비방이 난무했다. 여성 연예인을 성적으로 대상화하여 소비하는 것이 대중의 권리이자, 연예인의 의무인양 떠들어댔다. 피해자에 대한 연민이나 지지에 기대어도 힘겨울 싸움을, 곽현화 씨는 자신을 관전하고 수군대는 복판을 관통하듯 걷는 중이었다.
곽현화 씨가 입은 피해와 1심 형사재판의 결과는 우리 사회가 성적인 폭력을 둘러싸고 ‘보호할 여성’와 ‘보호하지 않아도 되는 여성’으로 이분화하는 고질적인 문제와, 가해자 중심의 사고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동시에, 이 사건은 앞으로 다가올 디지털 성폭력 사건들의 예고편 같은 것이기도 했다.
그는 노출 씬 등은 협의 하에 촬영하기로 약속 받고서 영화에 출연하기로 했다. 가슴노출 장면을 촬영할 당시, 해당 장면을 찍거나 공개하는 것에 대해 갈등했다. 감독은 촬영을 마치고 극장 상영본을 편집하면서 그를 불러 문제가 된 장면을 보여주었고, 곽현화 씨는 이를 사용하지 말라는 입장을 명시적으로 밝혔다. 영화가 극장에서 상영되었을 때는 문제가 된 노출영상이 빠졌다. 그는 약속이 지켜졌다고 믿었다. 하지만 1년 남짓 시간이 흐른 후, IPTV를 통해 배포된 영화에는 그 영상이 삽입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영화는 극장에서는 별반 호응을 얻지 못하고 며칠만에 종영되었지만, IP TV에서는 배포 순위가 높았다. 그 영화에는 포함하지 않기로 했던 곽 씨의 노출 장면이 포함되었고 표현 수위도 더 높았다.
생업이 달린 자리, 누가 증인이 되어줄 것인가
형사 항소심 재판을 맡고, 증인을 불러 실제 신문 과정을 지켜보면서, 부당하지만 당연하다는 듯 흘러온 관행과 맞선다는 것이 얼마나 외롭고 험난한 것인지를 깨달았다. 생업이 달린 자리는 별 이해관계 없이 공명심으로 움직일 수 있는 관찰자의 자리와 다르다. 계속 영화를 만들어온 감독과의 이해관계를 등지고 피해자의 입장에 서서 증언해줄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증인에게는 용기만 필요한 게 아니었다. 으레 그러려니 하며 무심하게 지나친 일들, 가령 노출 씬 촬영을 앞두고 배우가 촬영을 망설이고 이미 동원된 스텝들을 생각해 우선은 촬영에 임하는 것과 같은 상황을 시간이 흐른 후에도 기억할 이가 누구인가. 이를 기억하려면, 배우의 망설임을 단순히 촬영이 지연되는 불편이나 번거로움으로 여기는 게 아니라, 그 입장을 이해하는 시선이 전제되어야 한다. 즉, 가치관이 전제된 기억이 필요한 일이었다.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 증인을 신청했다. 가해자 측이 소환한 증인은 문제된 장면이 대본에 있고. 출연계약서에 기재된 ‘노출 씬은 상호 협의 하에 촬영한다’라는 구절은 그의 계약서에만 기재된 특별한 것도 아니라며 감독을 옹호했다. 문제의 장면이 협의 하에 촬영되었는지나 이후에 해당 장면을 삭제해달라고 하였는지 등은 알지 못했는데, 마치 곽현화 씨가 해당 장면의 촬영이나 사용에 대하여 이의제기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에 거부감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업계의 잘못된 관행에 반발하는 이를 두고 ‘남들은 너보다 못 나서 참고 사는 줄 아느냐’며 트러블메이커 취급하는 일은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일단 찍혔다면, 어쩔 수 없다?
항소심의 결론은 당황스러웠다.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는 것이긴 하였으나, 배우출연계약서에 감독에게 영화와 관련된 여러 권리들이 기재되어 있고, 피해자가 밝힌 의사가 영화관 상영본에서 해당 장면을 빼달라는 것이긴 한데, 영화관 외의 상영본에서‘도’ 빼달라고 말하진 않아서라는 취지였다.
지금은 사진 스튜디오 촬영물 불법유포 문제를 제기한 양예원 씨의 사건이나, N번방 사건 등을 거쳐오면서 ‘촬영을 당한 사람의 의사에 반하는 유포’에 대한 법률의 해석이 그 입법 취지나 국민의 법 감정에 좀 더 부합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그러나 불과 5년 전의 우리 법원은 ‘일단 찍혔다면, 이를 어디 어디에 유포하지 말라고 일일이 지정하지 않았다면, 감독의 사용은 잘 몰라서였을 수 있으니 무죄’라는 수준이었다. 상식과 법률, 물증이 있는데도 ‘가해자가 잘못이지만 잘못인 줄 몰랐을 수 있어서 무죄’라는 판결이 날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현기증이 났다.
문제는 법원의 이런 판결이 가해자를 처벌하지 못하고 잘못을 범죄로서 선언하지 못한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사건의 내막을 제대로 모르는 많은 이들에게 마치 피해자가 문제 제기를 한 것이 문제고, 피해자가 우선은 동의하여 신체를 노출해 촬영했다면 이를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 돌리거나 보는 것이 정당한 일인 것처럼 잘못된 인식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급하게 합정동에 기자회견을 할 공간을 물색하고 보도자료를 작성해 기자회견을 열고 감독과의 대화가 담긴 녹음파일을 공개했다. 녹음파일이 공개되자, 적어도 대놓고 곽현화 씨의 문제 제기가 잘못이었다거나 감독이 억울하게 재판을 받았다는 식의 기사나 관련 포스팅은 사라졌다.
하지만 피해자로서나, 그를 지원한 변호사로서나 아쉬움이 너무 컸다. 곽현화 씨의 사건이 영화계의 갑을관계에서 열악한 지위에 있는 배우로 하여금 협의되지 않은 촬영을 하게 만들거나, 그런 촬영물을 사용하는 것이 잘못임을 깨닫는 계기가 되길 바랐다. 피해자가 어떤 사정에 의해 촬영에는 동의하였다고 하여도, 그걸 찍었으니 그럼 봐도 된다는 식의 생각이나 행동이 폭력임을 인식하는 전환점이 되길 바랐다.
▲ 곽현화 씨 사건은 영화 촬영과 편집, 상영 과정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에 경각심을 갖게 하였을 뿐 아니라, 이후 불거진 사진 스튜디오 비공개 촬영회의 촬영물 불법 유포 사건을 비롯한 디지털 성폭력 사건들과도 연결된다.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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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에 반하는 ‘유포’, 영화계 노출 촬영 문제 수면위로
다행히, 불법행위 손해배상소송의 시효 문제로 2017년 봄에 우선 감독에 대해 제기해 두었던 민사소송이 남아있었다. 소송을 제기한 날로부터 1심에서만 판사가 여러 차례 바뀌면서 3년 5개월 여가 흘렀다. 2017년 대한민국 형사법원에서 범죄로 선언받지 못했던 곽현화 씨의 피해는, 2020년에 민사법원을 통해 피해자의 인격권을 침해한 불법행위로 인정받으며 ‘승소’했다.
누군가의 눈에는 ‘결국 가해자에게 형사처벌이 안 되지 않았냐’, ‘민사배상 판결에 3년 5개월이나 걸리지 않았냐’의 문제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후 양예원 씨를 비롯하여 수많은 어린 나이의 피해자를 양산한 사진 스튜디오 비공개 촬영회의 촬영물 유포 사건이나, N번방 사건과 같은 디지털 성폭력 사건이 이슈가 되어 엄단하기 위한 방안이 모색되는 등 진일보를 이루는 과정에 곽현화 씨의 사건이 한 몫을 했다고 본다. 영화계 내에서 배우의 노출 장면 촬영과 관련하여 여러 자성의 목소리를 이끌어 낸 것은 말할 것도 없는 성과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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