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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래시 시대, 페미니즘 다시 쓰기] 외인구단 리부팅: 여자야구

 

“여성분들은 일단 배트에 맞으면 안타인 줄 알고 환호하는데, 파울이었습니다.”

 

5월 14일, NC 다이노스와 SSG 랜더스와의 경기에서 논란이 된 김수환 캐스터의 발언이다. 선수 출신 박재홍 해설위원 역시 맞장구를 치며 비슷한 대화를 이어가, SNS 상에서 ‘여성 혐오’ 논란이 일었다. 일반적으로 야구와 여성이 어떤 관계로 엮이게 되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이 아닐까 싶다. 여성은 야구에 돈을 얼마나 쓰든 ‘비전문가’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하다못해 ‘지갑’으로서도 제대로 존중 받지 못한다는 현타가 여성 팬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누군가는 평가하는 입장에, 누군가는 증명해야 하는 입장에 놓이게 되는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이러한 태도는 야구를 직접 하는 여성들을 향해서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 “150을 던지면 알아서 모셔간다”라는 논리로 110, 120을 던지는 여자야구 국가대표 선수에게 이것저것 가르치는 댓글이 쌓여가는 광경은 인터넷 여기저기서 심심치 않게 목격되곤 한다.

왜 여자아이들은 ‘플레이어’를 꿈꾸지 않을까?

 

120을 던지는 여성 선수? 한국에 여자 야구 선수가 있던가? 놀랍게도 2021년 기준 한국에는 49개의 여자 야구팀과 1,020여 명의 여자 야구 선수가 등록되어 있다. 연간 개최되는 경기는 약 400게임에 이르며, 이를 모두 관리하는 ‘한국여자야구연맹’이라는 기관도 존재한다. 물론 야구로 생계를 이어갈 수는 없는 사회인 야구라는 점에서 엘리트 스포츠인 남자 야구와는 명확한 차이점이 있지만, 여자 야구 이미지가 워낙 부재해서인지 취미 야구의 존재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여자들의 온몸을 던지는 피칭, 경쾌한 타격 음, 여성의 목소리로 여기저기서 들리는 작전 지시 샤우팅과 흙먼지가 이는 슬라이딩을 상상해 본 적 있는가?

 

영화 〈야구소녀〉의 첫 장면이 그토록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여자 야구 선수를 ‘본 적이 없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야구가 독재 정권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국민 스포츠가 된 시점을 지나, 2021 도쿄올림픽이 출전 선수 성비에 있어서 ‘성평등 올림픽’이라는 타이틀을 얻은 현시점까지도, 여성은 야구에 있어서만큼은 그저 관객과 치어리더라는 주어진 역할에 충실했던 것이다. ‘왜 마운드에 선 여자 야구선수는 대중이 보기 힘든지’, ‘왜 올림픽에는 여자 야구 대신 소프트볼이 있는지’, 질문도 의심도 던지지 않은 채로.

 

“볼 수 없으면 될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메이저리그 최초 여성 단장(마이애미 말린스), 킴 응, 2020

 

야구하는 여성의 이미지를 볼 수 없다는 것의 가장 큰 폐해는 야구를 ‘하고 싶은’ 여성이 생겨나기 힘들다는 점이다. 여자 사회인 야구팀의 선수들 대부분은 성인이 되고 나서 야구를 시작한 경우다. 학교 체육 시스템 안에서는 여자아이들이 ‘내가 야구를 좋아하는지’, ‘야구를 잘 하고 싶은지’ 파악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으니 어찌 보면 당연하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요점을 짚어볼 수 있다. 1)여학생과 야구의 접점이 거의 전무한 교육과정과 사회 환경 안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른이 된 후에 자신의 흥미를 탐구하고 기꺼이 야구에 도전한 이들의 열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개인적으로, 야구팬들이 프로야구 선수들에게 기대하는 정신과 태도가 여자 선수들에게 있다고 본다) 2)선수급 역량을 목표로 기초를 다지는 과정은 학생 때 시작되어야 하므로, 여자아이들이 야구에 대한 흥미와 적성을 발견하기 힘든 현재의 구조 안에서는 여성 ‘선수’가 등장하기 힘들다. 거꾸로 생각하면, 그만큼 선수 육성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여자 야구의 한계를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잠시 벅차고 멋진 이야기를 귀띔하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야구를 하는 여학생들이 크게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2022년 여자 야구 국가대표 최종 엔트리 22명 중 2000년대 생이 약 14명에 이르렀다. 2000년생 김라경 선수의 등장으로 인해 수정된 ‘리틀 야구단 나이 규정' 덕이 큰 것으로 보인다. 학교 야구부 없이 알아서 야구를 해온 여학생들이 마침내 또래의 동료를 만날 수 있을 정도로 늘어난 것이다.

 

▲ 2022년 김라경 선수를 주축으로 유소녀 선수들로만 구성된 JDB 팀이 창단되었다. 남자 사회인 야구팀과의 경기에서 승리한 후 포즈를 취하는 JDB선수들. 유튜브 채널 ‘프로동네야구 PDB’를 통해 해당 경기 영상을 볼 수 있다. ©프로동네야구 PDB

 

※김라경 특별법: 리틀 야구 졸업 이후 중학교 야구부에 입단할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해, 여학생에 한해 리틀 야구단 소속 기간을 중학교 3학년까지 연장할 수 있다. (남학생의 경우 초등학교 졸업과 함께 리틀 야구 역시 졸업하게 된다.

 

야구뿐만 아니라, 현재 학교 체육 교과는 대체로 여학생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크게 요구하지 않는다. 청소년기의 경험이 인식의 틀과 인생의 가능성을 결정짓는데 중요하다는 점에서, 여자 야구로 인해 발견된 학교 체육 현장의 맹점은 사실상 여성 스포츠 전체의 문제로 확대해 볼 수 있다. 여성 스포츠에서 유독 환경의 열악함을 극복한 특출난 개인이 ‘특별한’ 존재로서 종목 전체를 견인하는 서사가 반복되는 이유다. ‘선구자’의 덕을 본 경우는 있어도, ‘제도’의 덕을 본 경우는 거의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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