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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가정기본법 개정을 위한 국회 토론회에서 모인 목소리

 

얼마 전 동네 약국에서 조제약을 기다리다, 약사가 조금 큰 목소리로 어떤 노년 여성에게 약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걸 보게 됐다. 약사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약 복용 방법을 알려주며 꼭 제 시간에 맞춰 챙겨 먹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었다. 약사의 “아셨죠?”라는 물음에 시원치 않는 대답이 나오자, 옆에 있던 다른 노년 여성 분이 “요즘 치매가 더 심해져서 그래”라고 설명해 준다. “집에서 챙겨 주는 분 없어요?”라는 물음엔 “아들이 있는데…. 전혀 관심 없어.”라는 답이 돌아온다.

 

알고 보니, 약을 받으러 온 분은 또래 친구 두 명과 함께였다. 그 친구들이 약사와 대화하며 환자의 상태를 설명했다. 약사가 “매일 제 때 꼭 먹어야 한다”고 신신당부하며 약을 넣어두는 달력을 함께 건넸다. 약 달력을 받은 친구 두 명은 “여기에 약 넣으라고 어떻게 설명해. 우리가 약을 넣어서 주자”는 대화를 나누며 환자인 친구의 손을 잡고 약국을 나갔다.

 

 

현재 한국 사회의 돌봄 제도와 현실의 틈을 단번에 체감할 수 있는 인상 깊은 장면이었다. 만약 이 환자의 질병이 더 심각해져 병원이나 약국에 직접 올 수 없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될까? 돌봄에 관심 없는 법적 가족을 대신해서 친구들이 처방전을 받을 수 있을까? 답은 ‘아니오’다. 1인가구 수가 ‘정상가족’으로 여겨지는 4인가구의 수를 한참 넘어섰음에도 불구하고, 혈연과 이성애 관계로 맺어진 가족이 아닌 다양한 가족의 형태가 등장해 이들이 돌봄을 수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법과 제도가 낡은 형태에 머물러 있는 탓이다.

 

나눔과나눔에서 제작한 장례를 치를 수 있는 가족의 범위와 가족대신장례 안내.

 

9월 28일 국회도서관 소회의실에서 “현실과 다른 가족 규정,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주제로, 〈건강가정기본법 개정을 위한 국회 토론회〉(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실, 한국여성민우회 등 공동 주최)가 열렸다. 허민숙 국회 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의료행위에서 ‘보호자/대리인’이 법적 가족으로 제한되는 한국과 달리 “호주, 영국, 미국 등지에선 의료 결정에 있어서 당사자의 평소 신념과 바람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신뢰 깊은 자이면 건강돌봄 대리인 자격이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가족이라는 개념 역시 “혈연이나 법률혼으로 연결되지 않았으나 가족처럼 가까운 관계에 있는 친밀한 사람을 가족으로 여기는 ‘선택된 가족’(chosen family)으로 확대”되었다고 했다. “스웨덴에선 친밀한 관계에 있는 자(closely-related person)을 돌보게 될 경우, 정부로부터 돌봄 수당도 받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미 다른 국가들에선 법과 제도가 사회의 변화와 발맞춰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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