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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편에 서는 법[法] 여성, 40대, 초임변호사로 산다는 것
※지난 몇 년간 한국 사회에서 첨예한 논쟁이 된 성폭력과 미투 사건들을 맡아 해결해 온 이은의 변호사의 기록, ‘피해자 편에 서는 법[法]’을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41살이 끝나가는 비혼, 한국에서 삼성과 젠더 문제로 다투며, 얼굴도 이름도 공개하며 달려온 ‘여자 변호사’를 누가 고용할지, 누군가 고용은 할 건지에 대한 그림을 그리기 어려웠다.
일단 실무수습을 마친 다음 날 언니와 며칠간 마카오에 다녀왔다. 새벽에 도착한 첫날은 구시가지의 낡은 호텔에서 잠시 여장을 풀었다. 도착해서는 어두워서 몰랐는데 아침에 눈을 뜨니 방 창문 밖 저편으로 가난한 동네의 지붕들을 쭉 이어진 저 끝에 베네치아 호텔의 호사스런 지붕이 보였다. 언니가 “이 가난한 동네의 저만치 끝에 이어진 궁전이라니 닿을 수 있을 것도 같지만 닿기는 할 건지 모를 무지개 같군.”하며 웃었다. 그런 말을 들으며 웃고 떠드는데 마음 저 구석이 단단해 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냥 내가 나를 고용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이은의법률사무소 개업식날의 모습이다. 지인들의 응원을 받으며 사무실 복도에 현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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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 배려로 작은 공간을 마련해 우선은 사업자등록을 하고 임시로 사무실을 열었다. 별다른 투자 없이, 직원 없이, 혼자였다. 그렇지만 이전 실무수습 로펌에 양해를 구하고 나를 따라와 준 의뢰인들도 있었고, 내가 변호사가 된 것을 용케 알고 찾아와준 의뢰인들도 있었다. 신기하게도 매달 일이 생기고 먹고 살아졌다. 연말이 금방 왔고, 이듬해 1월 서초동에 정식으로 사무실을 알아봤다. 처음 나를 고용한 ‘이은의법률사무소’를 개소하고 싶었고, 단독개업 상태를 유지하고 싶었다. 그러다가 서울중앙지방법원과 검찰청 정문이 마주한 공간의 첫 번째 건물에 터를 잡았다.
그렇지만 개업한 후 줄곧 어떻게 해나가야 하는지 고민이 많았다. 아는 선배 변호사들에게 귀동냥이 필요한 시기였다. 그런 과정에서, 술에 취한 선배 변호사로부터 추행을 겪었다. 나름 존경했던 선배 변호사가 송년회랍시고 남자 소속변호사와 남자 사무장들이 자리한 노래주점으로 불러서는 내게 양해도 구하지 않고 접대부들을 부르고 같이 어울려 놀 것을 종용하는 일도 겪었다.
지금도 맥주를 따라주며 그 선배 변호사가 했던 말이 잊혀지질 않는다.
“도와주는 분들을 불렀는데, 괜찮죠?”
처음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생각해보니 소위 노래방 도우미를 불렀다는 말인 것 같았다. 맥주를 원샷으로 마시고, 괜찮지 않으니 가겠다고 답했다. 그런데 그 선배 변호사가 다시 맥주를 따라주며 “괜찮죠?”라고 물었다. 내 말을 못 알아들은 것인지, 알아들었지만 무시하고 동의를 강요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고, 몹시 당혹스러웠다. 조용히 “안 괜찮다니까요”라고 말하고 나가려는데 맥주 잔이 다시 채워졌다. 그때 ‘눈부신’ 여성 두 명이 홀로 들어왔다. 짧은 원피스에 가득 달린 스팡클이 조명에 반사돼 반짝거렸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서 그냥 일어나서 나왔다. 심지어 그는 내가 어떤 경로로 변호사가 됐는지를 잘 아는 변호사였다. 모욕감과 수치심을 조절하기 어려웠다.
‘을’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었다. 친구 하나가 사업을 하는 선배들이 나를 만나보고 싶어한다고 했고, 개업을 앞둔 나는 누구라도 만나둬야 할 것 같은 ‘을’의 마음이었다.
그 자리에 처음 나간 날, 업무적인 대화보다 ‘예쁘시네요’ 같은 시답지 않은 소리를 들었다. 이후 그 사람이 몇 번이나 SNS로 만남을 청해왔다. 내키지 않았지만 ‘개업할 건데’라는 을의 마음이 자꾸 발동했다. 결국 여러 명의 모임 자리로 한 번 더 나갔다. 그 자리가 파하고 헤어지는데 악수를 청해왔다. 손을 잡거나 했으면 피하거나 뿌리쳤을 텐데, 청해온 것이 악수다 보니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악수에 응했는데, 악수를 빙자해 가운데 손가락을 나의 팔목 안쪽으로 뻗어 꾹 누르고는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여러 명이 있는 상황에서 이런 일을 겪는 것도 당혹스러웠는데, 그래서 더 즉각 ‘뭐 하는 짓이냐’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손을 빼려고 애쓰면서 얼굴이 굳어지고 붉어졌다. 이후 친구에게 다시는 같이 만나는 자리에 부르지 말아달라고 당부하는 게 그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지금은, 시작하는 때니까’라는 마음이 컸고 그 마음과 타협했다.
이렇게 변호사가 된 첫 한 해 동안 기억나는 일상의 성폭력이 세 번이나 있었다. 내가 변호사인데, 직장내 성폭력이나 갑질 문제로 삼성하고도 싸우고 나온 사람인데….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만큼의 자책이 엉켜 마음이 엉망이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이런 일 따위와 타협하지 않아도 되게 하루빨리 변호사로 자리잡고 단단해지겠다고. 마음을 꼭 붙들면서도 여성 초임변호사로서 홀로서기가 위태롭고 춥게 느껴지는 겨울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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