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저는 자폐 스펙트럼을 진단받은 당사자이고, 신경다양성 지지모임 ‘세바다’에서 활동하는 김세이라고 합니다. 이 글을 통해, 제가 어쩌다가 한국 나이로 24살 때 성인기에까지 가서야 자폐 스펙트럼을 진단받을 수 있었는지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생의 첫 기억, 달력

 

저는 1995년 12월 27일 서울 중랑구 망우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자폐 스펙트럼을 진단받은 게 2018년이니까, 무려 20년 넘는 시간 동안 갑갑한 마음으로 홀로 고군분투해야 했습니다.

 

저는 인생 첫 번째 기억이 무엇인지가 확실한 편입니다. 생후 24개월도 안 되었을 시절부터 숫자에 몰입해서 달력과 전자계산기를 참 좋아했어요. 1997년 말에, 1998년 달력을 아버지가 들고 오셨는데 그걸 제가 제일 먼저 뜯어서 보았습니다. 1998년 달력에서 2월 1일이 일요일이거든요. 윤년이 아니니 28일 토요일로 끝나서 깔끔하게 4주밖에 안 나오는 달력이었습니다. 그걸 참 신기해하던 기억이 아직 납니다. 그게 신기한 걸 알 정도면 아마 그 전부터 달력에 몰입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미취학 아동 시절의 저는 비록 관심사가 한정되어 있지만, 그 후 수학이나 컴퓨터, 피아노 등에 많은 호기심을 가졌습니다. 20세기 말에 많이 나왔던 컴퓨터 책 중 하나를 책이 다 닳도록 읽어서 이미 대여섯 살쯤에 컴퓨터의 기본적인 사용에 익숙해져 있었고, 절대음감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컴퓨터의 윈도우 기본 계산기를 건드리다가 원주율, 일명 파이에 매료되어 구구단보다 원주율 소수점 아래 50자리를 먼저 외우기도 했습니다. 정작 구구단은 살짝만 빠를 뿐 비교적 평범한 나이 때 외웠습니다.

 

사회성을 비롯해 제가 남들과 다르다는 걸 몸으로 느껴 알 수 있었던 건 이미 유치원생 시절부터였습니다. 친구를 사귀지 못하는 인간관계 문제는 물론이고,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해 유치원을 계속 다녀서 졸업하지 못하고 6살 때 1년 다니다가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 자폐 스펙트럼을 진단받은 당사자이고, 신경다양성 지지모임 ‘세바다’에서 활동하는 필자 김세이 씨의 일상 모습.  ©김세이

 

내 아이가 ‘정상’이길 바랐던 부모

 

소개했듯이 제 생일은 한 해의 거의 마지막에 위치해있습니다. 한 자리수 연령대에서는 몇 개월 차로도 발달 차이가 보일 수 있는데, 부모님이 직접 제 늦은 신체성장과 사회성에 어려움 겪는 문제 때문에 초등학교 입학을 1년 늦출 생각이 있었다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제때 입학하게 된 이유는 학습능력에서 별 문제가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앞서갔기 때문이라고도 하셨습니다. 그 학습능력을 이유로, 부모님은 제게 자폐가 있을 거란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또한, 저는 어린 시절에 정신과에 갈 일이 없었습니다. 아마도 사회성 등에서 발달에 문제가 보여도 ‘이 아이가 체격이 작아서 또래들에게 치이는 것도 있고, 이게 다 생일이 늦어서 그렇겠거니’하고 부모님이 넘어가시지 않았을까 추측이 됩니다.

 

그렇게 8살 때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저 역시도 제가 자폐 당사자일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자폐라는 말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저는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친구를 사귈 수 없었고, 본격적인 부적응과 외부의 폭력, 따돌림이 시작되었습니다. 제 기억대로라면 저 시절에 이미 동급생들이 저를 보고 ‘자폐아’라고 부르면서 자폐를 욕설로 써서 괴롭히곤 했고, 이러한 경험은 이후에도 학교와 학원을 다니면서 꾸준히 겪었습니다.

 

9살이 되고, 초등학교 2학년 때에는 더욱 눈에 띄게 되었습니다. 특이한 도형이나 숫자와 관련된 낙서를 줄 없는 노트에 계속 하고 있었고, 이게 외부에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습니다. 미술 시간에 교실 바닥에 붓으로 글자를 쓴다든지, 수업시간에 계속 돌아다니는 건 물론이고 당시 학교 문 앞에 있던 콜렉트콜 전용 전화기까지 나와서 집에 전화를 거는 등의 부적응 행동이 계속되었습니다.

 

스스로 정말 자폐 아닐까 하는 생각을 이때 처음 했던 것 같지만 차마 집에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부모님에게 머리 좋은 자식으로 기대치가 높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제가 이미 장애판정을 받았는데 부모님이 인정하지 못해서 제게 알리지 않았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이후 꽤 오랫동안 했습니다. 결국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제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이 아이 검사 한 번 받아보세요.”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크게 분노한 부모님은 교육청에 담임선생님을 고발해서 해고시키려고 시도했고, 당연히 결과는 실패였습니다.

 

그 일로 집이 이사하게 되고 저도 다른 곳으로 전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어릴 때 자폐를 진단받을 수 있던 기회를 이렇게 한 번 놓쳤습니다. 저는 이 일로, 제가 행동을 조심하지 못해서 동생까지 친구들과 헤어져 다른 동네로 이사 가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을 지속적으로 집에서 주입받게 되었죠. 한참 세월이 지나서야 이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학교에서도, 게임 커뮤니티에서도 따돌림

 

초등학교 고학년 및 중학생 때에도 집단따돌림, 학교폭력 피해와 제 부적응 행동은 계속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적어도 괴롭힘 목표물은 되지 않고 싶어서 교실에서 말도 잘 안하고 조용한 편인 보통 사람인 척 연기하려고 시도하기도 했으나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여러 스트레스 탓에 중학생 때부터는 점점 학업성적을 유지하기도 버거웠습니다. 이때 손가락 위주의 상동행동(같은 행동을 반복함)도 심해져 여전히 오른손 약지에 후유증이 있는 수준입니다.

 

그러다가 제가 17살 때, 고등학교 1학년이던 2011년, 취미로 즐겨 하던 게임에 대해 다루던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가입하였습니다. 그러나 인터넷 동호회 친목 문화의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던 저는 온라인상에서도 왕따가 되어 거센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결국 적응하지 못하고 제재를 받는 등 제대로 활동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 게임은 오락실 게임이라서 집 밖에서 커뮤니티 사람을 직접 만나게 되기 때문에 험악한 분위기를 직접 마주하는 상황이라 여러 의미로 공포심이 커졌습니다.

 

5살이던 1999년에 아버지가 쓰던 노트북 컴퓨터를 모뎀과 연결해서 PC통신을 통해 대화방에 들어가서 대화했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에 모 PC통신 서비스의 10대 청소년 대화방에서 제가 자기 소개할 때 5살이라고 했더니 아무도 믿지 않던 게 여전히 기억에 남습니다. 거짓말이 아니었는데 말이지요.

 

자폐 스펙트럼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아보기 시작한 것도 고등학교 1학년 시기에 들어서였습니다. 당시에 ‘아스퍼거 증후군’이라는 이름으로 인터넷에서 글을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그게 제가 처음으로 자세히 읽어본 자폐 관련 글이었습니다. 특성들이 하나같이 제 얘기라서 자가진단임에도 마음으로는 완벽하게 ‘이거 나다, 확신한다.’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나마 18살 때 되니까 최소한 친구를 사귈 수는 있는 수준이 된 것은 다행이었습니다. 그러나 목 근처에 사람 살갗 재질만 닿으면 몸에 전기 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놀라게 되고 하루 종일 어지러워서 아무 것도 못 할 수준의 감각과민은 여전한 상황이었습니다. 제가 제 목을 못 만질 정도인 상황에서 학교 동급생들이 이 상황을 이용해 계속 장난치고 괴롭히니 힘들었습니다.

 

그렇게 고등학교 3학년이던 2013년, 19살 때 인생 처음으로 정신과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모 대학병원 정신과였는데요. 원래 부모님 성향 상 절대 허락할 리가 없는데 제가 이 상태로는 수능을 볼 수 없을 거라고 며칠을 강력히 호소했습니다.

 

당시 아직 청소년 시기라서 어머니와 동행해서 정신과를 방문했지만, 제가 힘든 이야기를 충분히 설명했는데도 담당 의사가 자폐 스펙트럼을 의심도 안 해보고 그 상태를 강박장애로 진단해서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SSRI)’ 종류의 약 하루 한 알 분량만 처방받았습니다. 당연히 효과는 없다고 해도 무방할 수준이었고 경미했던 강박장애만 나중에 더 심해졌습니다. 이렇게 자폐 스펙트럼을 조금이라도 더 일찍 진단받을 기회를 한 번 더 놓쳤습니다.

 

뒤늦은 자폐 스펙트럼 진단, 장애 등록도 어려워

 

원래의 어려움과는 큰 관련이 없던 확인강박 증상이 갈수록 심해져 저는 결국 병무청 신체검사에서 재검으로만 20개월 넘게 소요된 끝에 강박장애로 정신과 사유 4급 보충역 판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즉, 사회복무요원으로 갈 수 있되 훈련소와 예비군 훈련이 면제된다는 것입니다. 집에서는 어떻게든 제가 현역으로 입대해 군 복무를 하기를 바라던 상황이었기에, 이 모든 과정에서 집의 지원은커녕 냉랭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2017년 4월 24일, 저는 사회복무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동사무소 공무원 분들을 가까이 만나보니 거의 다 좋은 분들이셨고, 덕분에 별 탈 없이 복무를 시작하고 엑셀 파일을 다루는 업무에 있어서도 타이머 띄워놓고 빨리 처리하기도 하는 등 능력을 인정받기도 했습니다.

 

사회복무를 한창 하고 있던 2018년, 저는 제가 자폐 스펙트럼 당사자인 것을 확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는 제대로 검사해서 확실히 판정을 받고 싶었습니다. 당시에는 지금보다도 더 적었던 사회복무 월급을 모아서 제가 다니던 집 인근의 모 대학병원에서 종합심리검사, 일명 풀배터리 검사를 의뢰해서 받았습니다. 결과는 강박장애와 함께, 자폐 스펙트럼의 특징이 선명하게 나타난다는 것이었고 이후 담당 의사와의 면담을 통해 결국 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2022년 7월 15~16일 서울 양재동 aT센터 제2전시장에서 열린 제2회 오티즘 엑스포(발달장애에 대한 통합적 정보를 제공하는 박람회)에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김세이 ‘세바다’ 활동가의 모습.  (필자 제공 사진)

 

검사 과정도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풀배터리 검사를 접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게 한 가지가 아니라 많은 종류의 검사들을 묶어놓은 것이거든요. 그 검사들에서 전반적으로 자폐 스펙트럼의 특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저는 당시 24세의 법적 성인이었음에도, 어머니를 병원으로 급히 호출해야 했습니다. 일명 카스(CARS) 검사, 아동기 자폐 척도를 봐야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부모님은 제가 자폐 진단을 받는 것에 많이 부정적인 입장이시고 어떻게든 ‘정상’으로 살기를 바라는 입장이었기에, 어머니가 응답한 CARS 검사에서는 제가 눈 맞춤과 호명반응에 문제가 없었다거나 제 비언어적 의사소통이 ‘정상’ 점수를 받는 등 사실과 비교해 많이 의문스럽게 임상심리사님께 보고되어 자폐 범위의 점수가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훨씬 신뢰도가 높고 거짓응답 방지장치도 더 잘 되어있는 다른 검사에서 결과가 명백했기에, 자폐 스펙트럼을 진단받는 것 자체는 가능했습니다.

 

검사 결과를 받고 나서, 자폐 판정이 나온 것 자체는 기존에도 스스로 99.9% 확신하던 거라 전혀 놀라지 않았습니다. 의사선생님은 이미 성인인 입장에서 참여해 볼 만한 프로그램이 없을 것이고, 어머니가 응답한 제 아동기 자폐 척도의 보고 내용도 그렇고, 지능 지수가 높은 편이기 때문에 법적 장애등록이 안 될 거라고 말했습니다. 실제로도 정식으로 장애등록을 시도하지 못했고, 저는 현재까지도 법적으로 장애인으로 인정되지 않는 미등록 당사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폐 당사자들에게 더 나은 사회를

 

지금도 집에서는 저를 자폐 당사자로 인정하지 않고, 언급만 해도 부모님이 불편해하셔서 언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은 단순히 ‘내 자식이 정상이어야 한다.’ 하는 마음으로 현실을 외면하려는 마음뿐만이 아니라, 자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기준으로 판단해서 ‘네가 무슨 자폐냐’ 식으로 흔히 말하는 정서와도 연관이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필요한 얘기니까 제 지능 지수를 잠깐 공개하자면, 4년 전 풀배터리 검사 받을 때 웩슬러 지능검사에서 표준편차 15로 116이 나왔는데요. 지적장애 당사자도 아니지만 서번트 증후군 천재의 이미지에도 부합하지 않습니다. 세간의 편견과 고정관념은, 이런 저 같은 사람마저도 자폐 당사자라고 생각하기 어렵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저는 잘 사는 집안 자녀도 아니고, 가족이 제 장애를 이해해주지도 않는 상황 속에서 당장 아르바이트 정도만 하려고 해도 면접에서 걸러지거나 하루 만에 잘리는 게 이젠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닐 정도로 어렵게 세상을 헤쳐나가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도 자폐 스펙트럼 진단을 받고 나서는 더욱 더 스스로 제 자폐 특성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더욱 더 매사 열심히 노력해서 살아갈 의욕을 갖게 되었습니다. (다만 자폐 당사자 정체성에 있어서 의료기관의 정식 진단에만 절대적인 권위를 두어도 되는가의 문제, 그리고 여성 당사자의 경우 현재의 기준에서 진단을 잘 받지 못하는 문제 등이 있다는 점을 덧붙입니다.)

 

그러다가 저와 같은 자폐 당사자들이 모여서 만든 모임을 찾아 활동하게 되고, 자폐 당사자의 입장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하면서 매번 깊은 공감을 나누었습니다. 자폐 당사자끼리 모이면, 또는 자폐 당사자와 어울리면 결과가 부정적일 것이라는 흔한 편견과는 달리, 제가 정말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되면서 제 삶에도 도움이 되었고 오늘 지금,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자폐 당사자들이 비당사자들 위주의 사회에 살아가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며 상황에 따라서는 도움이 필요할 수 있다는 점을 공감하고 인정하면서, 자폐 특성으로 인해 사회에서 낙오되는 게 당연한 것은 올바른 상황이 아님을 확실히 할 수 있었습니다. 자폐 당사자들이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고, 자폐 당사자들에게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저와 같은 자폐 당사자들이 오늘날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당사자의 관점을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글은 글쓴이가 7월 16일 열린 제2회 오티즘 엑스포(Autism EXPO)에서 발표한 내용을 최대한 살리면서, 언론사 게재 형식에 맞도록 문장을 조금 수정하였습니다.

 

 
댓글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