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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현실 속에서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영국 포크싱어 바시티 버니언(Vashti Bunyan) 데뷔앨범 "Just Another Diamond Day"(1970)

덥고, 무겁고, 피곤한 어떤 하루를 보낸 뒤 집으로 돌아옵니다. 창문을 열고 시원한 바람을 청하며 침대에 누워봅니다. 혼자 있어 외로울 때도 그렇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에 힘이 들 때에도 음악은 절실해집니다. 늘 방안을 비추는 컴퓨터 화면에게서조차 벗어나고 싶을 땐 CD플레이어로 음악을 듣기도 하죠.

 
엎드려 누워 아무 말 없이 음악만 듣다 보니 새삼스레 기분이 좋아집니다. 문득 사람들은 왜 음악을 들을까, 왜 그렇게 일상적으로 향유하는 걸까 생각해봅니다. 그러다가 지난 시간들로 돌아갑니다. 즐겁고 행복하고 슬프고 아프고 답답하고 지칠 때마다 음악에 의지해왔는데, 그럴 때는 내 안에 감춰진 무언의 감정이 또렷해지는 걸 느꼈었던 것 같아요. 내가 현재의 삶 속에서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음악은 직접적인 감각으로 보여주고 또 말해주었습니다. 보지 않아도 생기가 일게끔, 읽지 않아도 상상하게끔 말이죠.
 
사람들은 흔히 음악을 ‘취향’이어서 듣거나 ‘유행’이라 멋지게 느껴져서 듣지만, 더 깊은 층위에서는 미묘하고 불분명한 감정을 끌어내고픈 심정에서 그러는 지도 몰라요. 감정을 확인하기 위해서, 기분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상황을 전환하기 위해서 음악을 듣지만, 생각해보면 그것들은 모두 욕구라는 닮은 점이 있거든요. 그 욕구들은 사실은 대단한 게 아니고 당연한 것들일 테지만 현실의 조건에서는 독특한 일이기도 하다 싶어요. 자기 욕구를 깨달아 스스로 주장하기도 힘든 사회니까요.
 
오늘의 글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사는 동안 마주치는 몇 가지 기본적인 요구들과 그 상황 속에서 읽히는 음악, 그리고 그들의 상관관계들을 말이에요.
 
몸과 마음에 평화를: 바시티 버니언
 

Vashti Bunyan의 앨범 "Lookaftering"

영국 뮤지션 바시티 버니언(Vashti Bunyan)의 [Look-aftering](2005)을 듣던 날도 그랬었지요. 먼지가 내려앉은 작은 스피커에서는 잔잔함이 풍겨나고 있었어요. 아참, 잠깐 말해두자면 그녀의 음악은 별도의 베이스기타나 드럼연주를 배제한, 선율 위주로 엮은 포크음악이에요. 듣고 있노라면 어디선가 나무냄새가 나는 듯도 하지요. 어쿠스틱 기타와 피아노, 오보에, 플루트, 하프, 그리고 허밍…. 자연적인 느낌으로 가득 차 있어요.

 
조심스럽고 애수 어린 목소리의 그녀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에 대외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했지만, 꾸준히 음악활동을 한 사람은 아니에요. 해외로 수출되는 필청 팝음악 리스트에 쉽게 올라갈 만한 뮤지션은 아니라는 얘기죠. 그런 그녀가 복고적인 사운드의 유행과 숨겨진 명반을 발굴하려는 흐름 속에서 다시 길어 올려져 보물이 되었답니다. 그녀는 삼십여 년 전의 감수성을 불러와 앨범작업을 새로이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소개하는 이 앨범입니다.
 
아트스쿨 출신 음악가들이 보편적인 팝 편곡법보다는 다소 독특한 방향을 추구하는 편이 많다고 하면, 그녀도 그렇지요. 배타적이지는 않지만 고유한 물감으로 채색된 수채화 같은 기법들이 곡을 채우고 있어요. 포크(folk)이기는 하되, 정서적으로 침잠되고 몽롱한 면이 있어서 프로그레시브 록(progressive rock)의 한 성격과 맞닿아 있다고도 볼 수 있고요.
 
나는 가만 누워서 ‘아, 정말 평화로워지고만 싶구나’ 하고 새삼스러워 했답니다. 그녀의 작업들은 포크음악이 풍미했던 한 시절에 대한 회고록은 아닙니다. 도시생활에 지친 사람들에게 그녀는 그리워지는 ‘가치’에 관해, 여러 가지 소소한 ‘사랑’에 관해 노래합니다. 1960년대 말 서구문화의 한 축을 이룬 히피운동의 정신성이 현시대 문명 속 인간의 보편 소망으로 이어지는 것이죠.
 
그녀가 음악으로 자연의 고요한 빛과 소리들을 기억하려 할 때 사람들은 누구나 몸과 영혼의 안정을 원하고 있을 거라는 걸 알겠어요. 그건 단지 인간이 동물이기 때문에 자연을 가까이 하려 한다는 생물학적 차원의 명제가 아니에요. 도리어 생명에 관대한 삶을 살 수 없는 구조적 결핍감을 반영하는 것이겠죠. 평화로운 삶에서 비롯하는 충만함을, 지금 ‘여기’에는 존재하지 않는 그 느낌들을 바시티 버니언으로 인해 옮겨와 심어봅니다.
 
몸의 즐거움을 경험하고 싶은 욕구: 사리타, 지플라
 

사리타(Saritah) 공연모습 ©EBS-SPACE 공감

우리들은 누구나 음악을 들으면 그 노래에 몸을 실어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음악이 다른 예술보다 더욱 감각적으로 인식되나 봐요. 미술이나 문학작품들과는 달리 대부분의 음악들은 서투른 실력으로도 흥얼흥얼 따라 하면서 즉흥적으로 즐길 수 있고, 또 거기에 몸을 맡기는 것만으로도 별 어려움 없이 타인들과 함께할 수 있으니까요.

 
예를 들면 흑인음악의 농축된 리듬감이 세계적으로 큰 호응을 얻는 것도 우리 몸이 제도적으로, 구조적으로 굳어있다는 것과 겹쳐서 받아들일 수 있는 한 현상일지 몰라요. 감각적 즐거움이 오로지 소비적인 것으로만 오해되고 환산되는 건 슬픈 일이에요. 리듬소리에 자극된 육체의 움직임은 몸과 마음에 강렬한 흔적을 남겨 억압된 개인의 쾌락은 물론, 문화적인 연대감에도 큰 도움을 줄 수 있으니까요.
 
한국계 호주 아티스트인 사리타(Saritah)는 록 기타리스트의 에너지에 아프로-아메리칸의 리드미컬한 요소를 잘 섞어서 자기 목소리를 냅니다. (국내에서 쉽게 얻을 수 없는 그녀에 대한 정보와 음악은 네이버 까페인 “음악취향 Y”의 인터뷰 기사에서 접하실 수 있어요.)
 
얼핏 생각하기로 흥겨움은 삶의 시름을 잊어버리는 데에만 유용할 것 같지만, 흑인적 모티브를 가진 많은 음악가들은 오히려 현실의 단면을 가사에 투영하여 사회적 목소리를 창조합니다. 그녀 역시 신나는 그루브(groove)로써 상실된 기쁨을 되찾으려 하고, 거기에서부터 세계의 공통된 문제들로 다가갑니다. 경직된 몸을 부드럽게 풀고 흥을 돋우며 우리의 삶을 이슈화하는 것이죠.
 
굳이 커다란 사회와 연관되지 않더라도, 몸으로 그 음악의 비트를 담아내고 반복과 변화를 기꺼워하는 일이란 굉장히 흥미로운 일이에요. 리쌍의 객원보컬로 유명했던 정인이 속해있는 밴드, 지플라(G. Fla)의 음악을 들어보세요. 메이시 그레이(Macy Gray)를 닮았지만, 보다 날카로운 음색의 정인과 세련되고 볼륨감 있는 밴드 멤버들의 연주가 일품이에요. 그들이 소화한 소울(soul), 알 앤 비(R&B)에서는 감미로움은 물론, 통통 솟아오르는 몸놀림도 느낄 수 있지요.
 
이런 음악들은 한껏 끌어올려진 신체적인 자극으로, 내 몸이 내 것이 아닌 듯 살던 우리들에게 시시각각 움직일 것을 요구하는 듯 합니다. 습관적 일상에 멈춰버린 사람들에게서 반응과 응답을 이끌어내죠.
 
경험을 노래하기, 말하고 싶은 욕망을 표현하기: 흐른, 씨벨리 
 

싱어송라이터 흐른의 공연모습 ©EBS-SPACE 공감

앞서 말한 지플라는 기타리스트를 제외하고는 모두 여성멤버로 구성되어 있는 팀인데요. 2007년에 발매한 싱글에 수록된 “음악 하는 여자”는 키보디스트인 이궐에 의해 만들어진 곡으로, ‘그들’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듯해요. 발랄한 펑키리듬 안에서 불러진 그들 자신의 경험이 “멜로디에 날개를 달아” 준 것이죠.

 
음악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음악으로 말하지요. 자신의 가치관이나 경험들을 문자언어가 아닌, 그/그녀 자신의 멜로디와 사운드의 결집들로 드러내죠. 일상 언어가 아닌 예술적 표현들은 때때로 우리가 쉽게 할 수 없었거나 하지 않았던 말들을 주목할 만하게 만들어 줍니다.
 
경험을 가지고 음악을 한다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질 테죠. 실제 그 일을 겪었든, 간접적으로 알게 되었든, 사람은 자기 안에 각인된 삶의 단편들을 자기가 구사할 수 있는 언어로 말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국내 인디뮤지션인 흐른은 그런 욕망에 충실한 경우 중 하나인 것 같아요. 그녀가 소탈하게 기타를 치며 자기 경험에 대해 노래하고 있을 때 주변은 묘하게 신선해집니다. 사실 우리가 사는 세상 속에서는 무언가를 주류의 법칙과 관점을 벗어나서 묘사하기란 힘들어요. 게다가 뭐든 상투어구가 되기 쉽지요. 그런데 그녀가 노래하면 사랑도, ‘어학연수’도, ‘버스’도 뻔하지 않습니다.
 
검색을 통해서도 찾아볼 수 있는 그녀의 몇몇 글과 가사를 읽어보면, 흐른이 뮤지션으로서 어떤 의지들을 소리 내고 싶어하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어요. 페미니스트로서 그녀는 사람들이 공적으로 떠올려보지 못했던 내밀한 것들을 대중음악의 주제로 삼죠. 영국적인 인디의 냄새가 묻어나지만 다른 장르에 대한 터부도 별로 없는 듯한 그 목소리는 담담하기만 합니다. 그녀는 음악을 펼쳐놓는 가운데, 청각적으로 누군가의 인생을 대신 말해주고 고민하게 하려는 듯해요.
 
존재의 표현이 극대화되면 음악은 때로 음향으로 넘실대는 바다가 되기도 합니다. 대개 브라질 대중음악을 가리키지만 문화적인 의미에 가까운 MPB(Musica Popular Brasileira) 뮤지션인 씨벨리(Cibelle)의 경우는 청취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인터넷에서도 그녀의 라이브 영상을 찾아볼 수 있는데요. 개인적으로는 “Punk da Periferia”를 추천해드리고 싶어요.
 
삼바(samba)의 열정을 일렉트로니카에 녹여낸, 한 편의 퍼포먼스 같은 그녀의 표현방식은 희뿌연 연기에 휩싸인 여신의 이미지만큼이나 신비롭습니다. 그럴 때 그녀는 자신이 가늠할 수 있는 것 이상의 깊이로 손을 뻗는 듯 하죠. 누군가 그녀를 보며 무한한 자유를 떠올린다면, 일상 언어로는 다 포착할 수 없는 감정의 파장을 감지했기 때문일 거예요.
 
음악이 불러일으키는 것들
 

브라질 뮤지션 씨벨리(Cibelle)의 첫 앨범

이 글에 쓴 것처럼 음악은 몸 전체를 자극하기에, 역설적으로 몸 외의 다른 많은 부분을 자극합니다. 더욱이 가사가 포함된 음악들은 감각과 사유의 즉각적인 동시작용을 일으키고요. 그것은 평온함과 즐거움의 추구를 인간의 본질로 노래하고, 경험을 말하고자 하는 욕구와 존재를 표현하고픈 욕망을 사회 안의 개인에게 일러줍니다.

 
여기에 소개한 그녀들의 음악도 그런 의미에서 몹시 소중한 행위들 같아요. 무릎에 누운 이에게 가벼운 부채질을 해주듯 지친 마음을 보듬는 청량한 소리들, 부정하거나 덮어둔 순간의 기분들을 되살리는 소리들, 살아 숨쉬는 모든 것에 관심을 갖는 소리들. 그것은 절제를 강요 받고 삶의 조건에 침묵하는 나의 일상을 진동하게 만듭니다.
 
평화나 쾌락, 자유라는 단어 따윈 낯설기만 한 현실생활 속에서 음악을 듣는다는 건, 이런 측면에서 공동의 소망을 반복해서 체험하는 일이기도 하지요. 사람들의 거리를 좁히고, 망각을 거부하는 가장 소박하지만 가장 행복한 방법 중 하나이지요.
 
다른 예술들처럼 음악은 어려움의 해결책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설사 그렇게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완전한 방법이 되기가 힘들죠. 다만 우리는 음악을 들으며 이렇게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욕망의 입을 열고, 갖가지 사랑을 희망하기. 
성지혜/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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