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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래시 시대, 다시 쓰는 페미니즘] 페미니스트는 증언하는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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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미니즘에 대한 왜곡과 공격이 심각한 백래시 시대, 다양한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로 다시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백래시 시대, 페미니즘 다시 쓰기” 스무 편이 연재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아 진행됩니다. [편집자 주] 일다
페미니즘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전, 나는 오랫동안 언어 없이 살았다. 더 거슬러 올라가 내가 엄마 뱃속에서 생긴 지 12주 즈음부터. 막 생식기가 만들어졌을 무렵이었다. 초음파 검진을 한 의사는 나를 남자아이로 판단했다. 그로 인해 나는 한국 역사상 최고의 ‘여아선별 낙태’가 이뤄졌던 1990년, 백말띠의 해에 태어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탄생의 순간부터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감각과 함께 자랐다. 딸 부잣집 셋째 딸은 얼굴도 안 보고 데려간다는 말을 들을 때면, 그것이 칭찬인지 욕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팔자가 드센 것이 백말띠 여자라는데, 내 삶의 운명을 힘찬 기세로 사는 것이 왜 나쁜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여성으로 태어나 한국 사회에서 자랐다면 누구나 겪었을 친숙하고 불편한 감각이 날 지배했다. 종종 그것은 짜증, 분노, 질투, 혐오, 두려움을 조금씩 섞은 억울함이라는 감정으로 나타나거나, 형상이 없는 부정적인 덩어리로 몸속에 쌓여갔다. 내 삶이 작동하는 방식을 문장으로 말할 수 없어 더듬거리다, 침묵하다, 울다, 미쳐갔다.
▲ <다신, 태어나, 다시>(2020) 스틸. 검은 배경을 바탕으로 구겨진 흰 종이의 스캔본. 종이 위엔 영어로 ‘1980년부터 2005년까지 한국의 출생 시 성비’ 그래프가 있다. 왼쪽 세로축(Y)은 여아 100명당 태어난 남아의 수를, 아래쪽 가로축(X)은 각 해를 상징하는 십이지 띠를 의미한다. 1990년 말띠의 해는 여아 100명당 남아 116.5명이 태어나 25년 중 최고 높은 성비를 기록한다. ©전규리, 시네마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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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 대 중반, 내 삶에 찾아온 페미니즘 물결은 이 감각들에 이름을 붙여줬다. 내게 언어를 주었다. 혼란과 함께 엄청난 해방감이 몰려왔다. 그리고 치유와 자기 돌봄의 공간을 만들어 냈다. 빠른 속도와 과열된 경쟁에 중독된 문화 속에서, 나의 내면과 직관을 우선으로 놓으라고. 설령 그것이 비생산적일 지라 해도. 천천히 걸을수록 중심으로 빠르게 돌아올 수 있다고 말해줬다.
덕분에 나는 내 삶을 재건하는 데에 온 힘을 쏟았다. 그때부터 팔자가 드세고, 집안을 망하게 하고, 밖에 나다니길 좋아하고, 재수가 없고, 남편을 잡아먹는 백말띠 여자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팔자가 드세다’라는 것에 각인된 여성혐오와 화자의 권력을 파헤쳤다. 그랬더니 일본 제국주의가 한국 사회에 남긴 미신과 가부장적 위계질서의 뿌리가 드러났다. 균열 속에서 말하기였다.
다신, 태어나, 다시 1부: 모국과 모국어라는 결박으로부터
어떤 감정은 나의 이해 너머에 있어 모국어로도 완벽하게 표현할 수 없다. 이 사실을 낯선 땅에서 낯선 언어와 살기 시작할 때까지 몰랐다. 모국에선 엄마 배 속에서부터 나이를 먹어 출생한 순간 이미 한 살이 된다. 한국 나이로 서른에 미국으로 이주한 나는 갑자기 스물여덟이 되었다. 밤낮이 반대인 나라에선 태어나기 전 남자로 살았던 시간이 삭제되고, 내가 태어난 날에 나이를 더한다. 시간 여행이라도 한 듯,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지던 스물여덟을 다시 살 게 되었다. 끝나지 않는 시차 적응과도 같았다. 미국은 한국보다 약 98배가 더 크다. 이 거대한 땅덩어리엔 여러 시간, 젠더, 날씨, 피부색이 있다. 시공간의 개념이 폭발적으로 확장했다.
변화는 한꺼번에 찾아왔다. 2019년 4월 11일, ‘낙태죄’ 헌법 불합치 판결이 났다. 머릿속에 딱 하나의 문장이 떠올랐다.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말이다. “I have been waiting for this moment for all my life.” 직역하면 “나는 평생, 이 순간을 기다려 왔어”라는 뜻이다. 하지만 영어의 현재완료 진행형 시제로 말했을 때, 출생 이전부터 지금까지 긴 기다림의 과정이 더 강조된다. 판결 이후 단 한 시간만에 스크립트를 완성했다. 이미 모든 이야기는 내 안에 있었다. 말하기 부끄러워 도저히 쓸 수 없을 땐 엄마의 혀 대신 영어의 낯선 힘을 빌렸다. 원래 내 것이 아닌 혀가 고통스러운 경험으로부터 나를 분리해 줬다. 2부로 짜인 <다신, 태어나, 다시>(2020)의 1부는 헌재 판결 이후 2주 만에 만들어졌다. ‘낙태죄’ 폐지 시위 현장을 담은 장면 위로, 미래에 태어날 백말띠 여성이 이 순간을 향해 보내는 전언으로 시작한다.
“나는 1930년에 태어났다가 일찍 죽어 버리고 / 1990년에 다시 태어나려 했지만 태어나지 못했고 / 2050년에 다시 태어났다 / 내가 바로 60년마다 죽지 않고 돌아오는 백말띠올시다.”
▲ 2018년 7월 7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낙태죄’ 폐지를 촉구하는 시위에 사용된 포스터. 이미지 설명: 왼) ‘백말띠 여자는 드세서 안 돼’, ‘90년생 백말띠 여자 다 모여라’, ‘살아남은 드센 우리가 낙태죄를 폐지하자’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오른쪽 하단에 말을 타고 있는 여성의 이미지가 색상이 반전되어 희게 표현되어 있다. (출처: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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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신, 태어나, 다시 2부: 영어의 시제로 과거, 현재, 미래를 다시 쓰기
거리로 쏟아져 나온 승리의 에너지가 <다신, 태어나, 다시> 1부의 물꼬를 터줬다면, 2부는 답할 수 없는 질문을 하며 확장된다. ‘태어났지만 태어나지 않은 내 존재는 뭐야?’ 나는 불가해한 세상에 묻는다. 분명 난 태어났는데, 사회가 원하는 대로는 태어나지 못했으니까. 내 존재를 위협하는 악의적인 놀림을 ‘진정한' 백말띠가 되어 갚아주고 싶었다.
60년마다 돌아오는 백말띠를 내 삶으로 초대하자 과거와 미래의 시간성도 함께 등장했다. 영어는 한국어와 다르게 현재로부터 과거와 미래를 철저하게 구분한다. 시간을 세분화해서 표현하는 열 두 가지의 시제들을 연습하며 내 존재를 증언하는 힘을 길렀다. “I will have been born when you give birth to me tomorrow.(당신이 내일 나를 낳을 때, 나는 태어났을 것입니다)”라고 나는 불가해한 세상에 답한다. 1990년 백말띠로 태어난 내가 미래 완료 시제로 말할 때, 과거-현재-미래가 한 문장에 녹아든다.
그러자 내 20대를 지배하던 질문이 산산조각이 난 뒤 새로 짜였다. 나는 더 이상 ‘진정한' 백말띠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지 않았다. 왜냐, 이미 나는 백마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나는 산부인과 의사의 실수 때문이 아니라, 나의 “거대한 보지"로 의사를 속이고 태어난 것이다. 나는 현대 기술의 허점 때문이 아니라, 여성에 반하는 기술과 통계에 저항하여 마침내 백마로 태어난 것이다. 이는 내 존재를 위협했던 언어와 기술을 내 것으로 쟁취해 무기화하는 선언이다. 다시는 내 것이 아닌 시선을 내면화한 채로 살지 않겠다는 뼈아픈 다짐이다. 페미니스트 주체성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치유가 일어났다.
▲ <다신, 태어나, 다시>(2020) 스틸 컷. 흑백의 초음파 이미지 위로 4·19혁명 시위에 참여한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있다. 입을 벌리고 무언가를 외치고 있는 얼굴이다. 초음파 이미지 하단에는 오른쪽 난소(Rt Ovary)라고 적혀있다. 오른쪽을 뜻하는 영단어 ‘right’에는 ‘올바른, 맞는'이라는 뜻도 있다. ©전규리, 시네마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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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에 태어난 백말띠 여성은 내 탄생의 순간을 기다려 왔다. 그리고 1990년에 마침내 백마로 태어난 나는, 임신중지가 자유로울 2050년에 태어날 백말띠 여성을 기다린다. “당신이 내일 나를 낳을 때, 나는 태어날 것이다.” 이는 앞선 백말띠 여성 선조들을 기억하고 호출하는 것이며, 현재의 나를 위한 각오와 결기인 동시에, 미래의 백말띠 여성에게 외치는 선언이다. 그리고 나와 같은 존재로 태어난 당신에게 바치는 헌사다. 따라서 백말띠 여자들의 세계는 단순한 가정법으로 이뤄진 SF 소설 속의 소재가 될 수 없다. 우리의 세계는 당신의 탄생이 내 존재를 증언해 주는, 미래 완료 시제로 이뤄진 연대의 세계이다.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스트는 증언하는 자이다
한국을 포함해 미국, 영국, 프랑스, 대만에서 <다신, 태어나, 다시>를 발표하며 여러 관객을 만났다. 중국의 한 자녀 정책을 겪으며 자란 여성, 자신을 트랜스젠더 혹은 논-바이너리(non-binary)로 정체화한 자, 임신중지를 선택했던 여성들이 내게 다가와 울면서 자신의 삶을 증언했다. 태어났지만 이 세계가 원하는 대로 태어나지 못한 건, 비단 여아선별 낙태에서 살아남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국가와 사회가 우리 몸을 통제하는 방식은 국경을 초월해 다른 얼굴로 나타난다.
한편 ‘한국 여자들은 여자아이를 낙태하기 위해 임신중지를 지지한다’는 오독과, ‘낙태에서 살아남은 여자가 낙태를 찬성하는 작품을 만들었다’는 악성 댓글도 받았다.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은 여아선별 낙태에서 살아남은 내가 모든 여성의 재생산권을 위해 싸우는 것이다. 아들을 낳지 못한 나의 어머니의 ‘죄책감’에 공감하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위협할지라도 가부장제를 적극적으로 작동시킬 수밖에 없던 여성들의 갈등과 비극을 주목한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결코 납작하게 설명될 수 없음을 증언한다.
‘증언하다’는 영어 숙어로 ‘bear witness’다. ‘bear’라는 동사는 ‘책임을 지다, 견디다, 무게를 지탱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아이를 낳는다’는 뜻도 있다.) 증언하는 자는 그 책임과 무게를 견디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구경꾼과는 구별된다. 각자의 자리에서 증언하기 시작한 용기 있는 여성들이, 역사를 다시 직조하고 지금을 만들었다. 우리는 기억한다. 2016년, #00계_내_성폭력 고발 운동을, 그 다음 해에 전 세계적으로 일어난 #미투 운동을.
이렇게 페미니스트는 자신의 몸에 새겨진 구조적 폭력을 증언한다. ‘여성가족부’를 ‘인구가족부’로 바꾸려는 새 정권에 대해, 자신을 이루는 다양한 정체성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장애, 퀴어, 트랜스와 같은 여러 정체성을 교차하며 ‘정상성’과 여성의 범주를 첨예하게 논의한다. 세대적 트라우마를, 집단학살을, 이방인 혐오를,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전쟁과 식민주의의 잔재를, 기후 위기를 진술한다.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스트는 팔자가 드세고, 집안을 망하게 하고, 밖에 나다니길 좋아하고, 재수가 없고, 남편을 잡아먹을 동시대 여성들이다.
2022년 4월 11일은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3년째, ‘낙태죄’ 폐지 1년째가 되는 날이다. 도래할 미래와 현재 사이의 시차를 견딘 자들의 함성과 행렬이 이어지는 기분 좋은 상상을 잠시 해본다. 일다
[필자 소개] 전규리(@kyuri.jeon) 서울과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미술 작가/감독. <다신, 태어나, 다시>(2020)와 <산증인>(2021)을 만듦. kyurije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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