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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규석 글, 그림  <대한민국 원주민> (창비) 
 
만화가 최규석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블로그와 게시판에 절찬리 스크랩되었던 패러디 만화 때문이었다.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쥬>라는 제목을 보고 아기공룡 둘리를 기대하고 클릭했다가, 임노동자가 되어버린 둘리아저씨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공장에서 일하다가 손가락이 잘린 둘리, 박카스아줌마 또치와 해부용으로 팔려가는 도우너 등등 더 이상 명랑만화의 주인공이 아닌 그들이 몸으로 겪는 세상의 황량함과 폭력성이 슬펐다.
 
그 다음으로 접한 만화는 현재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6월 민주화 항쟁을 다룬 <100도씨>이다. 매일같이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현 시점에서, 이 만화가 지난 역사의 뒷페이지가 아니라 현재형으로 느껴진다는 점이 섬뜩하기까지 하다.
 
위의 두 작품을 읽고서 내가 느꼈던 것은 1980년대적인 감수성과 문제의식이었다. 촌스럽고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다. 시대의 어떤 지점에서 멈추어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지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우리 사회가 20년 전에 멈추어 있다는 뜻일까. 2000년대의 감수성이라는 것이 아직 나타나지 않는다는 뜻일까.
 
1977년에 태어난 젊은 작가의 작품을 읽는 것이나, 1980년대에 쓰였던 뜨겁고 진지한 거대담론을 다시 꺼내 읽는 것이나 차이점이 없다면 이 현상을 어떻게 봐야하는 것일까. 그러다 세 번째 책을 집어 들게 되었다. <대한민국 원주민>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 작품은 가족들의 기억에 의지해 지난 시대의 편린들을 기록하고 있었다.
 
점차 소멸해가는 삶의 양식: 대한민국 원주민
 
[나에게 세상은 늘 새롭고 낯선 것이었다. 무엇도 익숙한 것은 없었다. 나는 그것이 그저 이 사회가 너무나 빨리 변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일제 강점기에 씌어진 소설에서 성탄절에 유치원생들이 연극을 하는 대목을 읽고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20세기 후반에 태어난 나조차 텔레비전에서나 친구들의 이야기로만 들었던 어색한 풍습이 그 까마득한 시절에도 누군가에게는 일상이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이 사람들에게 세상은 언제나 익숙한 곳이었겠구나. 이들에게 내일은 예상 가능한 것이었고 세상의 변화란 그저 가구나 옷의 변화와 다를 것이 없었겠구나.’
 
그들의 반대편에는 전통사회의 바닥에 깔려 있다가 느닷없이 닥쳐 온 파도에 밀려 끝없이 떠돌아야만 했던 사람들이 있다. 갑자기, 그리고 너무 늦게 세상의 흐름에 휩쓸려 마치 물 마른 강바닥에서 소용도 없는 아가미를 꿈벅대는 물고기처럼 미처 제 삶의 방식을 손 볼 겨를도 없이 허우적대야 했던 사람들. 그들을 키웠던 곳은 흔적을 찾을 수 없고 그들의 일상이었던 것은 박물관에 전시되어 버린 사람들. 나는 그들을 <대한민국 원주민>이라고 이름 붙였다.(<아메리카 원주민> 혹은 <호주 원주민>을 칭할 때의 어감으로 불러 주시길)
 
내 누이들의 이야기를 하면 도시에서 자란 그 또래의 사람들은 신기해했다. 어째서. 농활을 가고 노동현장에 투신할 만큼 그러한 이웃들에 특별한 애착을 가졌던 세대들이 어째서 내 누이들을 신기해하는지 나는 혼란스러웠다. 어쩌면 그들이 본 것은 농민이고 노동자일 뿐 ‘사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내 누이들의 외로움이 느껴졌다. 그것은 나의 외로움이고, 모든 <원주민>들의 외로움일 것이다. 그들이 제 이야기 하나 제대로 내놓지 못한 채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작가의 말 中
 
작가는 '과거의 스타일'로 치부된 삶의 양식과 추억들을 만화로 풀어낸다. 교양학습만화에 어울릴 법한 단정한 그림체는 거부감 없이 전달된다. 작가는 '스타일이 없는 그림체'라고 말하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에서 편안한 그림체이다.

 
단정한 그림과 날카로운 이야기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작가의 위트이다. 가난을 비참하게만 그리지 않고, 살생과 식욕을 인간의 동물적 요청으로 응시한다. 칸마다 작가의 여유와 쉼표가 느껴진다. 날카로운 관찰력으로 현상을 파고들면서도 결코 회의와 분노로 귀착되지 않는 사유의 건강함이 엿보인다.
 
시대 이야기: 세대 단절에 대한 욕망
 
사람은 쉽게 변하지만 동시에 쉽게 변하지 못한다. 삶의 양식은 몸에 각인되는 것이기 때문에, 몸을 바꾸지 않는 한 변할 수가 없다. 하다못해 담배를 끊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새로운 음식, 새로운 패션을 받아들이는 것이 녹녹할 리가 없다. 빠르게 유행을 쫓는 사람의 경우라고 해도 '유행을 쫓는다'는 반응패턴은 변하지 않는다. 목적어만 바뀔 뿐이지 서술어는 변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회가 빠르게 변하고 있다면, 그리고 그 사회가 구성원에게 속도를 강요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스스로의 고정관념을 되짚어 보았다. 1950년대가 1960년대와 다르고, 1960년대와 1970년대가 다르고, 1980년이 1990년대와 다른 사회가 과연 정상일까. 한 세기는 100년인데 어째서 대한민국의 한 세기는 10년일까. 10년마다 정치적 격변기를 겪었다고는 하지만 속도가 너무 빠르지 않은가. 40대와 30대를 구분하고, 30대와 20대를 구분하며, 20대와 10대를 구분한다. 그러니 20대를 비정치적이라고 한탄하고, 10대에게 희망을 찾는 일이 가능한 것이다.
 
이 조급함을 넘어서서, 한 세기로 시대를 바라보게 되면 무엇이 바뀔까. 지난 100년간 우리들을 짓눌렀던 문제란 과연 무엇일까. 의외로 답이 간단하다. 지난 100년간 우리들은 서구문명이라고 불리는 우월한 어떤 시스템을 선망하며, 그것을 쫓아가기 위해서 부단히도 노력했다. 그 시스템은 장점 못지않게 단점도 많아서 시스템을 도입하자 엄청난 모순과 부조리가 발생했다. 그걸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게 지난 100년간의 딜레마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1970년대의 도시화 문제를 다룬 작품을 읽으면서 2000년대에 깜짝 놀라게 되는 것이다. 아니, 왜 여전히 똑같지? 우리는 이미 이 문제를 극복했어야만 하는 게 아닐까? <삼포가는 길>의 임노동자는 왜 서울역에 지금도 있고, <난쏘공>의 낙원구가 왜 올해의 용산구가 되냔 말이다.
 
훨씬 더 앞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100년 전에 쓰인 <무정>의 이형식은 2000년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이고자 하는 대학생과 겹친다. 사회에 대해서 책임감을 가져야할 것 같은데 능력과 인식의 한계 때문에 엘리트 의식에만 그쳐버리는 안타까움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서사이다.(심지어 학비를 벌기 위해 그는 영어 과외에 힘쓴다. 이 삶의 양식이 이후 100년간 대학생 계층에게 유지되었다는 사실을 보라.)
 
극복하고, 해결했다고 믿고 싶은 과거가 현재형이 되어 불쑥불쑥 얼굴을 들이민다. 전전긍긍하며 머리를 싸매지만 해답은 쉽게 보이지 않는다. 천천히 가도 좋으련만 성질이 급하다 보니 해결책을 빨리 찾고 싶다. 한참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다가 결국 극복했다고 믿어버린다. 나는 극복 못했지만 우리는 극복했겠지. 내가 아닌 누군가가 했겠지. 그렇게 믿고 다음 시대로 넘어가고 싶어 한다.
 
세대가 단절되는 것은 단절되고 싶어하는 욕망 때문인지도 모른다. 단절에 대한 욕망을, 발전과 성장에 대한 허세를 냉정하게 들여다보는 것이 이 만화가 가진 특징이다.
 
대한민국 원주민들이라는 제목이 박힌 표지에는 농부와 인디언이 그려져 있다. 둘 다 삶의 양식이 부정당했고, 서서히 멸종하고 있으며, 개발의 이름으로 고향을 빼앗겼다. 손바닥만한 공터에도 상추와 가지를 심고, 아파트 옥상에도 화분을 놓아서 콩을 재배하는 노인들. 평생 농사를 지어왔던 그들에게, 농사를 짓는 행위가 그들 고유의 삶의 양식임을 인정하지 않았던 스스로에 대해 반성하게 된다.
 
도시적인 삶이 훨씬 편안하고, 좋은 것이라고 제시하지만, 오히려 그건 오만에서 나온 몰이해 아니었는가. 흙을 밟고, 흙냄새를 맡으며 살아가길 원하는 사람들을 콘크리트 바닥으로 내몰았던 것 아니었나.
 
마지막 페이지를 덮게 되면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대한민국 원주민이 보인다. 그리고 그들의 삶의 경외를 바치고, 존중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된다. 아파트 화단에 심어놓은 상추들을 보면서 꽃만큼 예쁘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나와 달라서 보이지도 않던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들을 존재하지 않는 듯 단절하고 싶었던 내 욕망의 어두운 뒷면을 본다.
 
가족 이야기: 사람에 대한 사유가 분열되는 경험
 
이 작품이 가진 최고의 매력은 아마도 타자를 동정하고 연민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농촌사회의 순박함은 때때로 무지함이 되고, 가부장제는 여성에 대한 착취와 희생을 바탕으로 했다. 작가는 결코 이 지점을 간과하지 않는다. 내게 이 작품이 매혹적이었던 것은 단순히 과거를 기록하고 정리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런 것들은 기존에 출판되어 있는 작품들만으로도 한 트럭이 넘는다.) 그보다는 성실하기 때문에, 분열되는 사유의 궤적을 읽을 수 있다. 이 작품이 현대적이며 동시대적인 까닭은, 우리들 모두가 이와 비슷한 분열을 겪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가령, 작품에서는 폭력적이며 가부장적인 아버지에 대한 에피소드들이 나온다. 그는 술을 마시며 아내를 때리고 노름으로 재산을 탕진했지만, 동시에 지적이고 유머러스하며 사교력 있는 사람이었다. 훤칠한 외모를 가졌지만 바람 한번 피우지 않은 성실함도 있었다. 한 인간의 내면에 있는 다양한 층위들은 결코 한 가지 문장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딸에게는 끔찍한 가장이며, 페미니스트들이 치를 떠는 유형의 가부장이다. 그래서 그는 사악한가. 아니다. 그렇게는 단정할 수 없는 것이다. 또,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는 강자였지만 또한 약자이기도 했다. 아내에게는 폭력적인 남편이지만 사회적으로 보면 약자계층인 빈농이었다. 이 사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러한 아버지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는 작가가 대견할 지경이다.
 
같은 질문들은 우리들에게도 적용된다. 우리가 가족들에 대해 평가하기 힘든 것은 인격적으로 훌륭한 것은 분명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함이 있다고 단정하기는 애매한 지점 때문이다. 가족이라는 제도는 사람을 분열시킨다. 사랑하면서도 미워하고, 연민하면서도 혐오하는 이상야릇한 감정을 갖게 한다. 여기에 정치색이 덧입혀지면 분열은 오색 빛으로 찬란해진다.
 
박정희를 지지하며, 광주에서 일어난 일들이 언론의 흑색선전이라고 믿는 부모를 둔 자식은 수구꼴통이라는 인터넷의 조롱에 차마 동조하지 못한다. 수구언론들의 신자유주의적 경제 논리를 비판하며 부모님을 설득하려 해도, 전세금을 제 힘으로 마련하지 못하는 아들은 국가경제를 논할 자격이 없는 마냥 한심한 자식일 뿐이다.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여자에겐 절대 교육을 시키지 않을 아버지 밑에서 자라다 일제에 의해 겨우 초등학교를 다닐 수 있었던 할머니의 친일기억은 어떠한가. 한 여인의 간절한 숙원이 식민지 착취구조에서 가능했다는 모순은 쉽게 옳고 그름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한 개인의 가족사는 대한민국의 가족사와 연결된다.
 
모순의 사회, 사회의 모순을 직시하다
 
최규석의 느린 속도는 사회 구조의 뒤틀림과 모순을 직시하는 원동력이 된다. 사회가 과거 보다 '발전'하고, '풍요'로워지며, '평등'해졌다고 믿는 순진하고 이기적인 눈빛들 앞에 실체를 까발려서 보여준다. 극복된 게 아니며 해결된 게 아니라고 항변한다. 여전히 사회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넘쳐나며, 폭력이 넘치고, 부조리가 넘친다. 그걸 응시하고 싶어 하지 않는 눈들이 있을 뿐이다. 세상은 나아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동시에 세상은 나아졌다. 배를 곪는 사람이 이전보다 줄어들었고, 지식의 전파와 보급이 빨라졌으며, 일방적인 기득권층의 폭력도 줄었다. 그렇지만 세상이 더 나아진 것은 아니다. 풍요로워졌지만 가난해졌고, 덜 폭력적인 세상에서 보다 순응적이 되었다. 이 모순들을 체험으로 오롯이 끌어안는 이 작품은 분열적이다.

현대와 근대가 공존하고, 도시와 농촌이 혼합되어 있다. 분열된 층위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사유하는 작품을 보면서, 왜 이 만화가 2000년대에 그려져야만 하는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미정/일다 ⓒwww.ildaro.com

[만화읽기] 붉은반점도, 넘치는 눈물도 없는[푸른알약] | 장애,나이,성별의 벽이 없는 은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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