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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번호안내원 경견완증후군 산재 인정 투쟁의 기록(2)
“이름도 희소해서 경견완장애 일명 VDT 증후군인데 이 자리에 계신 분이 오늘 분명히 이 VDT 증후군이 산재 대상 질병이라는 것을 확실히 인식하는 기회가 되었기를 바랍니다. (…) 컴퓨터 등을 사용하는 은행 같은 금융기관에서 나타나는 VDT 증후군이 10% 수준인데 한국통신만 평균적으로 32%를 넘고 개인의 자각증상이 거의 50%에 육박하는 지경인데도, 이것은 엄청난 비율인 것이지요. 외형적으로 질병의 환부를 볼 수 없다고 해서 방치된 상태에서…”
-1995년 9월 27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질의 내용 중.
1995년 구로의원을 찾은 한국통신 114 노동자들은 자신의 질병의 이름을 찾았다. 그해 구로의원과 한국통신 노동조합은 자체적으로, 34개 전화국에서 전화교환 및 안내 업무를 하고 있는 여성 노동자 3,300여 명을 대상으로 검진을 했다.
검진자 중 목, 허리, 손목 등에 한 달 이상 통증을 호소한 사람이 1,037명(32%). 경견완 증후군이라 판단되는 이들은 498명(13%)으로, 이 중 3분의 1은 고위험군에 속해 산재요양급여 신청 과정에 들어갔다.
하지만 산재 요양을 하고 온 질환자들을 기다리는 것은 똑같은 일터였다. 오히려 병가를 쓴 직원들에게 출근을 압박하거나 산재를 신청한 이들을 승진 불이익을 주는 등 사측은 못마땅함을 드러냈다.
국정감사에 경견완 증후군 직업병 문제가 오르고서야, 한국통신은 전 직원을 대상으로 한 집단검진(1995년 12월)과 일터 환경개선을 약속한다. 1995년과 1996년에 거쳐 한국통신 직원 265명은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산재를 인정받았다.
▲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에서 소개하는 VDT 증후군의 유해위험요인 https://kosha.or.kr/kosha/business/ergonomics_e_i.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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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건 책상이 아니라, 인력 충원과 휴게시간
이들이 산재 요양을 마치고 일터로 돌아왔을 때, 달라진 것은 책상이었다.
“옛날에는 컴퓨터도 그냥 쳐다보면 됐지 뭘, 이랬잖아. 그런데 컴퓨터도 눈높이라는 게 있고. 책상도 의자도 다 (인체에 맞는 것이) 있더라고요. 그런데 가서 보니까 예쁘게만 해놓은 거야. 곡선으로. 물결 모양으로. 또 그거 가지고 엄청 싸웠어요. 이것도 걸고 싸웠지. 휴게시간.” (이재숙 씨, 당시 한국통신 노조 여성국장)
책상이 넓어지고 의자가 교체된다. 충분한 공간을 확보하는 것은 근골격계 문제를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시설만 바꾼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오래 일해 생긴 병이니 충분한 휴식과 적절한 업무량이 우선이었다. 인력 충원이 필요했다.
하지만 인력 충원과 휴게시간에 있어 회사 답변은 미적지근했다. 그 시기 한국통신은 대대적으로 희망퇴직을 준비 중이었다. 1990년대 통신산업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등장하자, 한국통신은 민영화를 향한 열망으로 들끓었다. ‘돈’을 움직이는 자유로운 기업이 되려면,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게 몸집을 줄여야 한다고 했다. 연차 높은 직원들과 적자사업이 군살 취급을 받았다.
당장 이윤을 낼 순 없어 민간기업은 회피하는, 그러나 사회적으로 필요한 공공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공공기업체(공기업)의 설립 목적은 잊혔다. 정년퇴직은 더는 명예로운 일이 아니었다. 구조조정과 인력감축이 ‘경쟁력 강화’의 다른 이름이 된 한국통신의 ‘체질 개선’ 움직임은 1995년에는 대규모 희망퇴직 신청으로 드러났다.
당시 3천 명이 넘는 직원들이 ‘스스로’ 회사를 떠났다. 그중 천여 명이 114 여성 직원이었다.
감축 1순위, 여성
“감축 1순위는 꼭 여자들이에요.”
지사별로 할당량이 내려온다고 했다. 퇴직자 수는 지사의 성과가 됐다. 누군가의 실직이 점수가 되어버리자,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 지사 관리자들은 여성들부터 찾기 시작했다.
114 직원을 비롯해 여성 노동자들의 개별 면담이 끈질기게 이어졌다. 퇴직금에 몇 푼 더 얹으며, 다음 사람들은 나갈 때 이 돈도 못 받을 거라고 말했다. 이번에 퇴사 안 하면 지사 변경이 있을 거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한국통신은 전국에 지사를 두고 있었다.
“여자들에게 제일 무서운 게, 직장 먼 데 보내버리겠다는 거잖아요. 그렇게 달달 볶으면 사람이 나가는 거예요.”(송윤숙 씨, 당시 한국통신 노조 복지부장)
돌봄과 가사 노동의 책임을 거의 홀로 지는 여성들이다. 이들에게 또 다른 노동의 공간인 ‘집’이 일터에서 멀어진다는 것은 큰 부담이다. 면담 후엔 꼭 퇴사자가 생겼다. 공식적인 해고도 필요 없는 일이었다
1995년은 경견완 증후군 문제를 앞세워 노조가 인력 충원을 요구하던 바로 그해였다. ‘산재 요양’ 중인 노동자는 해고할 수 없다는 산재법도, 정식 해고가 아닌 ‘퇴사 종용’ 앞에서는 유명무실했다. ‘오래 많이’ 일해서 아픈 골병이었다. 하지만 회사 논리는 오히려 ‘이래서 나이 든 사람 쓰면 안 된다’로 이어졌다. 아프니 이참에 나가라 했다.
▲ 1996년 한국통신노동조합 서울지방본부에서 만든 유인물 중. (이재숙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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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저항이 없던 것은 아니다. 그해 3대 어용노조(사용주의 압력을 받아 비민주적으로 운영되는 노동조합)라 불리던 한국통신 노조에 이변이 일어났다. 민주 집행부가 당선된 것이다. 새로 당선된 노동조합은 1995년 대규모 인력감축에 맞서 2박 3일 본사 농성을 진행한다. 전국지사에서 온 114 여성 노동자들이 함께했다. 이때 114 노동자들이 요구한 것은 ‘특별 검진 실시’와 ‘인원보강을 위한 신규채용’이었다.
“그때는 114가 강성이었어요.”
강성이라는 건, 자신들이 잘 싸웠다는 말. 이들의 싸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14 경견완증후군 산재 대상자 수십여 명이 조계사에 농성장을 차린다.
30년만에 찾은 점심시간, 휴식시간
“점심시간 1시간을 우리가 30년만에 찾은 거예요.”
이재숙 씨는 놓칠세라 이 말을 몇 번이나 했다. 그는 이미 정년퇴직을 한 상태이다. 이미 20년이나 지난 일임에도, 당시에 ‘쟁취한’ 그 1시간이 이재숙 씨에게 어떤 의미인지 표정만으로도 알만했다.
“그때 우리 진짜 잘 싸웠지. 진짜 많은 거 했다. 국회 쫓아다니고. 집회도 엄청 많이 했어요.”
1996년 9월 14일, 114 산재 대상자들은 조계사의 협조를 받아 그곳에 철야 농성장을 세운다. 그때 배포한 노동조합 유인물에는 이러한 요구가 쓰여 있었다.
<인력 신규충원, 점심시간 1시간, 40분 근무와 20분 휴식 보장, 변형 근로 폐지, 작업환경 개선, 건수 제도(통화량 순위) 폐지>
두 달간의 농성이 시작됐다. “회사에서 제발 우리 하얀 소복만 입지 말아달라고 해서” 그래서 더 입고 싸웠단다. 하얀 소복 입고 긴 현수막을 들고 종로 거리를 누볐다.
▲ 1996년 9월 14일, 114 산재 대상자들이 조계사에 철야 농성장을 세우고 두 달간 농성을 벌였다. 하얀 소복을 입고 인력 충원, 점심시간과 휴게시간 보장 등을 요구하며 종로 거리에서 시위를 벌이는 모습. (이재숙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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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국장이었던 이재숙 씨는 농성장을 방문한 김대중 전 대통령(당시는 국민회의 총재)과 면담을 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김 전 대통령은 대규모 법회에 참석하기 위해 조계사를 찾았다가 농성장에 들르게 된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이재숙 씨에게 그 기억은 ‘자신들이 싸웠기’에 얻은 성과였다.
“그때가 수능 100일 기도 이런 거 한창 하던 때인 거예요. 조계사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해. 그래서 농성장에 오면 사람들이 잠을 못 자는 거죠. 그래도 나는 잘 잤어. 너무 힘드니까 쓰러져 자더라고. 진짜 와, 우리 그때 많은 거 했다. 하도 집에 안 들어가서 사람들이 나를 노처녀인 줄 알았잖아요.”(이재숙 씨)
집에서 먼 직장으로 배치한다는 말이 ‘나가라’는 말이던 시절에(지금도 그렇다), 집에도 가지 않고 싸웠다. 잘 싸운 게다. 그런데도 이재숙 씨는 말했다.
“우리가 이렇게 싸운 거 아무도 몰라.”
아무도 모르는, 잘 싸운 투쟁
잘 싸웠지? 라는 말 뒤로, 누가 우리 투쟁을 기억하지? 하는 물음이 이어졌다. 국내 최초의 근골격계 직업병 투쟁으로 기록되어 있긴 하다. 연구결과나 보고서 자료 속에서 그들의 투쟁을 찾을 수 있었다. 나 역시 그 자료를 보고 ‘한국통신 114 번호안내원 경견완증후군 산재 투쟁’을 알게 됐다. 그러나 대부분 두어줄 짜리 기록이었다.
두터운 자료로 남아 있지 않더라도 이들이 이룬 성과는 적지 않았다. 농성이 있던 그해 1996년, ‘단순 반복작업에 의한 경견완증후군 대책회의’가 만들어진다. 이에 압박을 받은 산업안전공단은 ‘VDT 취급 근로자 관리지침’을 배포한다. (하지만 안일하게도, 사무직종에 한정된 관리지침이었다. 그 결과, 2003년에 제조업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근골격계 산재 신청 투쟁을 하기에 이른다.)
114 노동자들은 농성을 마치고 일터로 복귀했다. 산재 대상자들을 향한 퇴사 종용을 멈추고, 개인이 원할 시 타부서로 재배치한다는 약속을 회사로부터 받았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던 골병이었으나, 이들은 싸움 끝에 성과를 만들어냈다. 자신들의 싸움을 누가 알려나 하지만, 그 투쟁을 뚜렷이 기억하는 이들이 있다. 바로 ‘그녀’들 자신이다. “우리 정말 잘 싸웠다”라는 말이, 그 시절을 증명했다.
하지만 (자신의 경험을 증명받는)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일도, (아프면 나가는 것이 아닌) ‘고용’을 지켜내는 일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농성을 마무리하고 일터로 돌아갔을 때, 이들을 기다린 것은 익숙하고도 새로운 위기였다. 여성 노동을 ‘잉여’ 취급하는 일터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3편에 이어집니다)
[참고자료]
-조주영, <인적 구조조정과 구성원 고용불안에 관한 연구-kt를 중심으로> 경상대학교, 2004.
-민주노총 주최 <경견완장애 예방대책 마련을 위한 간담회>, 1996년 10월 15일.
-김향수, <시민과학연대를 통한 1990년대 여성 노동안전보건운동> 시민건강증진연구소, 2012.
-<한국통신공사 전화교환원들의 경견완장해 실태에 관한 조사연구 보고서>, 구로의원 산업보건연구실, 1995년 6월 10일. (출처: 일과건강 및 노동환경건강연구소)
-한국통신노동조합 <96 하반기 투쟁> 외 관련 노동조합 자료
[필자 소개] 희정. 기록노동자. 싸우고 견뎌내고 살아가는 일을 기록한다. 『두 번째 글쓰기』, 『퀴어는 당신 옆에서 일하고 있다』, 『노동자 쓰러지다』, 『회사가 사라졌다』(공저), 『기록되지 않은 노동』(공저) 등을 썼다.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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