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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번호안내원 경견완증후군 산재 인정 투쟁의 기록(1)

“근무 중 어깨와 목이 굳어 병원엘 갔다. 적외선 촬영 결과 좌측 목부터 다리까지 부분적으로 혈액순환이 안 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뇌졸증 비슷한 증세였으나 뇌에는 전혀 이상이 없고 그래서 의사들은 고심을 했고 그렇게 고민 끝에 만들어진 병명은 디스크 의증이라나. 그 병원에서 8주를 입원했다. 나의 병과의 투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월간 평등>(1996년, 한국여성민우회) 한국통신 경견완증후군 환자 수기 중

 

이 글을 쓴 사람의 병은 디스크가 아니었다. 병과의 투쟁을 시작한 이는 이후 병명을 찾는 투쟁을 해야 했다. 병명을 찾았을 때는 이 질환을 ‘직업병’으로 인정받는 투쟁이 기다렸다. 그이만이 아니었다. 그와 같은 일을 한 동료들이 아팠다. 하지만 이들의 아픔을 인정해주지 않는 세상이었다. 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문화인의 신직종, 번호안내원

 

“입사한 건 1979년도. 그때는 이만한 책자로 (전화번호를) 찾았어요.”

 

전화벨이 울리면 수화기를 들고 두꺼운 전화번호부 책자를 뒤적인다. 이재숙 씨기 체신부 번호안내원으로 취직한 것은 1979년, 스물한 살 때였다. 앞서 일한 선배들은 전화번호 500개쯤은 능숙히 외워 책자도 보지 않고 말했다고 했다.

 

▲ 1970년대 전화교환원 모집 입학안내 전단이다.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2017년 4차 13-15)

 

시외전화를 연결해주던 전화교환원도 같은 체신부 소속이었다. ‘힘들이지 않고’ 앉아서 ‘목소리만’ 사용하는 일이 ‘여자가 하기엔’ 딱이라고 했다. 인기 직업이었다. 그 시절 통신기술학원 광고는 이들의 직업을 이리 소개했다. ‘문화인의 신직종.’

 

분명 새로움은 오고 있었다. 1982년 한국전기통신공사(이하 한국통신)가 설립된다. 한국통신의 목표는 ‘1가구 1전화’였다. 5년 뒤인 1987년, 전국에 전화선이 구축되고 정말로 집집마다 전화기가 놓였다. 114 번호안내원이라 불리게 된 ‘문화인’들은 더욱 바빠졌다.

 

“진짜 10분만에 밥을 먹었다니까요. 출근하면 내 개인 생활이 없는 거야. 중간에 화장실 가는 것도 눈치 보일 정도였어요.”

 

야간노동 교대근무에, 전화는 쉬지 않고 울려댔다. 보통 한 시간에 150건에서 180건 정도 콜을 받았다. “안녕하세요. 안내입니다”라는 말을 천 번쯤 뱉어야 하루 업무가 끝났다. 공식적인 점심 시간은 40분. 전화벨이 울려대는 가운데 그 시간을 느긋하게 다 누릴 수 있는 강심장은 없었다.

 

그래도 일이 재미있었다. 직장이 아닌 ‘여학교’ 교실 같았다고 기억한다. 여자끼리 모여 10년, 20년을 함께 근무했다. 서로 속사정을 알고 챙기고 그런 재미로 일했다. 동료가 있고 월급이 있기에, 일 많은 것은 그러려니 하고 다녔다. 고충이 하나 있다면, 자꾸만 새로운 기술을 배우라는 압박이었다. 통신 기술은 빠르게 변했고, 그에 맞춰 통신장비는 몇 년 단위로 교체됐다. 퇴근하고 학원으로 가는 ‘시간 외 업무’를 해야 했다.

 

“입사하고 얼마 안 돼서 우리를 테렉스 학원으로 보냈어요. 내가 동대문으로 학원을 다녔는데, 막 그때가 ‘전두환은 물러가라’ 대학생들이 외치고 데모하고 그런 시절이었어요.”

 

테렉스는 당시 국제전화 대신 사용하던 정보통신 기기이다. 그런데 새로운 기술은 단지 기술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 기술을 사용해 일을 하는 사람들의 고용 문제와 직결됐다. 앞서 전국에 자동화된 전화 연결망으로 인해, 수많은 전화교환원들이 사라졌다. 더는 읍내나 우체국에 나와 교환원을 통해 연락을 주고받을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 두꺼운 전화번호부 책자를 들추어 번호를 안내해주었던 교환원들의 노동환경은 점차 전산화되었다. ⓒ체신부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컴퓨터 보급으로 더 빨라진 일의 속도

 

1987년에는 114에 컴퓨터가 보급됐다. 더는 두꺼운 전화번호부 책을 들출 필요가 없었다. “이제 ‘서울역’ 이렇게 치면 바로 모니터에 전화번호가 뜨는 거예요.” 사라진 것은 책자만이 아니었다. 500개 넘는 전화번호를 외우던 베테랑 선배들도 사라졌다. 회사는 통신 변화에 발맞춰 나이가 많은, 아니 연차 높은 여성들에게 퇴직을 강요했다.

 

컴퓨터가 아무리 빨라도 사람 줄어드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컴퓨터가 본격 도입된 90년대에도 서울지역 114 안내 응답률은 52% 밖에 되지 않았다. 안내업무가 폭주했다. 기계는 일하는 사람을 ‘편하게’ 해준 것도 아니었다. 응답 시간이 11초가 넘어가면, 컴퓨터에 기록이 되고 관리자들은 눈치를 주기 시작했다. 일이 쉴 새 없어졌다.

 

“이들은 이제부터 규정된 처리 시간인 11초 안에 손으로 키보드를 치고 단말기 화면에 나타난 전화번호를 눈으로 확인, 입가의 송화기를 통해 전화번호를 불러줘야 한다.”(한겨레, 1989년 3월 24일자)

 

기계는 속도를 내고, 사람도 그에 맞춰 빨라져야 했다.

 

“예전에 전화기였을 땐, 내가 여기서 멈추고 좀 이따가 받고. 그러면 되거든요. 이젠 콜이 자동으로 들어와. 컴퓨터는 카운팅이 다 되잖아요. 내가 하루 몇 통화를 받았는지도. 너무 남들보다 또 뒤처지면 또 안 되니까. 또 받아야 해.”

 

그러다 골병들었다.

 

전화교환원, 골병들다

 

“종일 이렇게 앉아서 (모니터) 올려다보고 (타자를) 치기만 하니, 일한 지 10년쯤 되니까 병이 나기 시작한 거예요. 목에도 통증이 오고. 몸이 맨날 우두둑거리는 거예요. 아파도 그냥, 아픈가 봐 하고 넘긴 거지.”

 

1994년, 송윤숙 씨는 한 잡지에서 직업병(산재) 인정을 받은 방송국 타이피스트 이야기를 보게 된다. 전화교환원 일을 하다가 114 번호안내과로 옮겨 8년을 다닌 때였다. 하나둘 몸이 고장 나고 있는 게 느껴졌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싶었는데, 기사 속 인물의 증상이 자신과 똑같았다.

 

“이게 근육이 뭉쳐요. 어깨 쪽에 많이. 저는 목이 돌아갈 정도까지 심하게 왔었는데. 근육이 뭉쳐 꼼짝 못 하는 거죠. 나중에는 디스크까지 오더라고요.”

 

모니터를 보느라 목을 앞으로 수그리고, 늘 팔을 책상 위에 올려두어 어깨에 무리가 갔다. 정해진 공간에 많은 책상을 놓아 자리는 비좁고 불편했다. 그래도 “젊었을 때는 괜찮았다”. 5년, 10년이 지나니 몸이 한두 곳씩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 ‘젊었을 때는 괜찮았다’가 문제였다. 관리자들은 노동자들의 앓는 소리를 제대로 듣고자 하지 않았다.

 

“회사는 지금도 비슷하겠지만, 여자들이 퇴근하고 집에 가서 살림하고 나이 들고 그래서 아픈 거지. 이게 뭐 직업병이냐 그랬어요. 우리가 말을 해도 도저히 먹히지도 않았어. 병원을 가도 뭐 때문에 이래서 아프다고는 말을 안 해주잖아요.”

 

골병에 이름을 붙이다

 

그러나 이름 없는 병이 아니었다. 이 골병은 1980년대 후반부터 ‘경견완 장해(증후군)’라는 이름으로 국내에 알려졌다. 언론은 이 신종(?) 질환을 두고 ‘사무자동화가 됨에 따라’ 생기는 ‘작업 자세와 깊은 연관’이 있는 ‘목, 팔, 어깨의 장해’라고 소개했다. 컴퓨터 사용이 증가하며 생긴 질환이라 하여 VDT(영상단말기) 증훈군이라고도 불렀다.(이후 이 용어는 컴퓨터 작업에 의한 질환만을 지칭하는 한계가 있다고 하여 근골격계 질환으로 명칭이 조정된다.)

 

▲ 1996년 9월 24일 한국통신노동조합 서울지방본부에서 발행한 소식지 제6호 중. (이재숙 제공)

 

1987년에는 방송국 타이피스트들이 경견완 증후군을 직업병으로 인정을 받은 사례도 있었다. 앞서 윤숙 씨가 잡지에서 본 것이 타이피스트들의 이야기였다. 한국통신도 이 사실을 모를 수 없었다. 1989년에 이미 한국통신 국제전신전화국 소속 교환원들이 경견완 증후군 진단을 받은 바 있었다. 이들이 진료를 받은 가톨릭의대는 추후 재정밀 검사가 필요하다는 소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회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터에서 집단 검진을 한다는 것은 직업병 가능성을 인정하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언론에서 아무리 VDT 증후군를 다루어도 회사가 직업병 가능성을 부정하면 그만이었다. 아픈 사람이 우선 찾게 되는 중소병원들은 경견완 증후군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의사도, 관리자도 여자들의 통증을 ‘집안일’ 하다가 생긴 병 정도로 취급했다. 그렇게 세월만 흘렀다.

 

5년이 지나도록 달라진 것은 없었고, 이번에는 114 번호안내원들이 어깨와 목의 통증을 호소했다.

 

직업병임을 인정받기 위해

 

노동조합에서 여성국장을 맡았던 이재숙 씨는 구로의원 문을 두드렸다. 당시 구로의원은 국내 최초 민중병원으로 알려진 곳이었다. 그와 같은 일터(서울 안내국)에서 일하던 송윤숙 씨가 그곳에서 처음으로 검진을 받았다.

 

“그때 임상혁 원장님(현 녹색병원 원장)을 만나게 된 거죠. 우리가 갔더니, 이건 산업재해다. 그러는 거예요.”

 

반가운 말이었다. 당시 구로의원은 은행 직원들의 VDT 증후군 실태조사를 지원하고 있었다. 한국통신만이 아니었다. 이곳저곳에서 통증을 호소하는 (특히 여성) 노동자들이 늘어났지만,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엄살로 치부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니 이 질환에 대한 대규모 실태조사가 이루어져야 했다. 회사가 직업병임을 부정하는 상황에서 이것은 싸움의 시작을 의미했다. 한국통신 114 안내노동자들은 이 대열에 합류한다. (2편에 이어집니다)

 

[참고자료]

-“사무자동화로 직업성 질환 늘어 직업병 작업 자세 깊은 연관”(한겨레, 1989년 4월 15일자), “전화교환원 30%가 경견완장애”(한겨레, 1996년 8월 19일자) 외 관련 기사

-강태선, “근골격계부담작업 유해요인조사 합시다”(오마이뉴스, 2007년 6월 15일자) 외 관련 기사

-김향수, <시민과학연대를 통한 1990년대 여성 노동안전보건운동> 시민건강증진연구소, 2012.

-구로의원 산업보건연구실, <한국통신공사 전화교환원들의 경견완장해 실태에 관한 조사연구 보고서>, 1995년 6월 10일. (출처: 일과건강 및 노동환경건강연구소)

-한국통신노동조합, <96 하반기 투쟁> 외 관련 노동조합 자료

 

[필자 소개] 희정. 기록노동자. 싸우고 견뎌내고 살아가는 일을 기록한다. 『두 번째 글쓰기』, 『퀴어는 당신 옆에서 일하고 있다』, 『노동자 쓰러지다』, 『회사가 사라졌다』(공저), 『기록되지 않은 노동』(공저) 등을 썼다.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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