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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 배우자 건강보험 피부양자 소송 제기한 소성욱, 김용민을 만나다
한 부부가 있다. 지금처럼 차가운 바람이 부는 2012년 12월 직장에서 처음 만났다. 한 사람의 짝사랑으로 끝날 수도 있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 오랜 연애 끝에, 둘은 결혼하기로 합의하고 2019년 5월 결혼식을 올렸다. 여느 부부처럼 때론 다투고 또 화해하며 소소한 결혼 생활을 보내고 있다.
부부의 이름은 소성욱과 김용민. 가족과 친구들의 박수를 받으며 결혼식을 진행했지만 이들의 결혼은 한국 사회 곳곳에서 ‘인정’받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가족을 꾸리고 동반자로서 서로를 돌보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거짓이 되는 건 아니다. 이들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배제되고 있을 뿐이다.
두 사람은 올해 2월, 국민건강보험공단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기자회견도 하고 언론 인터뷰도 하며 자신들의 ‘사건’을 알리는데 힘썼다. 지난 11월 5일, 서울행정법원에서 진행된 마지막 변론기일에는 증인석에 서서 증언도 했다. 힘들고 지난한 과정이 될지 모르지만, 이들의 투쟁이 세상을 한발 더 나아가게 할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 지난 2월, 서울행정법원 앞에서 진행된 <동성 배우자 건강보험 피부양자 소송 기자회견>에서 소성욱, 김용민 부부의 모습. (출처: 성소수자 가족구성권 보장을 위한 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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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일이 안정적이지 않아 지역가입자로 건강보험료를 내고 있던 성욱 씨를 용민 씨의 피부양자로 등록하기 위해 신청을 한 것. 그렇게 되면 성욱 씨는 별도로 건강보험료는 내지 않아도 된다. ‘사실혼’ 관계면 된다고 하니까 신청한 것이고, 피부양자 등록이 되었다. 이 기쁜 소식을 많은 사람에게 알려야겠다 싶어 언론에 제보했고, 인터뷰를 했다. 그리고 나서 바로 피부양자 등록이 취소되었다. 등록이 ‘실수’였단다.
시민으로서 누릴 수 있는 응당한 권리가 이렇게 사라지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부부는 공단을 상대로 소송을 시작했다. 차별을 시정하고 예방하는 일이 ‘나중에’로 밀리는 사회에서, 의미 있는 투쟁을 시작한 이 부부의 삶은 얼마나 ‘특별’할까? 혹은 ‘평범’할까? 두 사람을 만나서 연애와 결혼, 신혼여행 이야기부터 재판정에서 증언을 하기까지 이들의 삶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들어봤다.
달달하게 시작된 연애, 순조롭지만은 않았지만
동성부부의 시민권을 인정받기 위한 투쟁에 앞장선 열혈부부인 두 사람은 어떻게 만나게 되었을까? 이런 사람들은 특별한 조직?!에서 만나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의외로 ‘자만추’(자연스런 만남 추구)였다. 그것도 직장에서 말이다. 2012년 12월 사회복무요원(당시엔 공익근무요원)으로 일을 시작하게 된 성욱 씨는 자신의 선임이었던 용민 씨를 좋아하게 되었다.
“공익이지만 그래도 나름 병장과 이등병이라는 계급 차이가 있었거든요.(웃음) 근데 제가 용민이를 좋아하게 된 거죠. 마음이 가더라고요. 그리고 사실 용민이가 성소수자이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용민 씨는 당시 자신을 이성애자로 정체화하고 있었다. 성욱 씨는 포기해야 하나 싶었지만, 둘의 술친구 관계는 계속 유지되고 있었다. 한번은 술자리에서 성욱 씨가 “나한테 너무 잘해주지 마. 내가 더 좋아하게 될 것 같다”고 말했는데, 그 얘기를 듣고는 용민 씨가 “지금 나한테 전화해 봐” 했고, 성욱 씨가 전화를 걸었더니 통화연결음으로 “사랑해도 될까요?” 노래가 흘러나왔단다. 용민 씨는 “그게 내 마음”이라고 고백했다.
“성욱이가 동성애자라는 건 알고 있었어요. 페이스북에 들어가 봤는데 자기가 동성애자라는 흔적을 다 남기고 있더라고요.(웃음) 전 원래 편견 같은 것도 없었고, 후임으로 들어왔으니까 친해지고 싶었고, 둘 다 술을 좋아해서 잘 맞았어요. 조금 더 알게 되면서 성욱이가 사회운동, 학생운동 이런 거 열심히 하는 게 멋있어 보이더라고요. 처음에 성욱이가 날 좋아한다는 걸 알았을 때만 해도 난 그런 감정이 아니라고 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제 감정이 그냥 호감이 아니더라고요. ‘나도 얘가 좋은가 보다, 그럼 난 양성애자인가 보네’라고 결론을 내리고, 저도 고백을 한거죠.”
그렇게 시작된 연애, 서로 잘 맞을 줄로만 알았는데 알면 알 수록 둘은 다른 사람이었다. “맞지 않는 부분들이 발견되고, 그 차이를 좁혀 가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그 과정은 물론 쉽지 않았다.
“너와 나는 왜 다를까 열심히 분석했어요. 각자 MBTI 검사를 한 결과지를 쫘악 펴놓고 ‘나는 이런 사람인데 너는 이런 사람이구나, 그 때 그래서 생각이 달랐던 걸까?’ 이런 얘기를 나눴죠. 정말 노력했어요. 서로의 선호가 차이 난다는 이유로 헤어지긴 싫었거든요. 차이는 차이고, 사랑은 사랑이니까.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을 계속 모색했던 것 같아요.”(성욱)
▲퀴어퍼레이드에 참여한 소성욱, 김용민 부부 (소성욱 제공) |
결혼 생각 없었던 사람과 결혼을 꿈꿔온 사람
두 사람이 동거를 결심하게 된 것은 서울 노원 근방과 경기도 오산을 오가는 장거리 연애에 조금 지친 탓이었다. 결정적인 이유는 성욱 씨가 아프기 시작하면서였다.
“성욱이 간호하러 노원에서 오산까지 통학을 했었거든요, 거의 매일매일. 왕복 4시간이었어요. 그 때 좀 힘들었죠. 성욱이가 나은 뒤로도 또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걱정되기도 했고요. 제가 그나마 노원에서 마포로 이사를 했는데, 좀 오래된 집이었거든요. 어느 날 새벽에 주방 찬장이 무너져 내린 거에요. 그릇이랑 다 깨지고 난리였는데 혼자선 해결이 안 되더라고요. 그런 일들을 겪고 나니까 파트너랑 같이 살고 싶다, 내 옆에 있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죠.”(용민)
두 사람은 각자 살던 곳의 중간 즈음에 집을 구해서 같이 살기 시작했다. 동거를 하게 된 두 사람에게 ‘결혼’이라는 이슈가 등장하면서 또 한번 서로의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용민 씨는 어릴 적부터 결혼을 꿈꿔온 반면, 성욱 씨는 결혼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열 살 때부터 결혼식을 어떻게 하겠다는 상상을 했어요. 재미있는 결혼식을 하고 싶다는 꿈이 있었고, 결혼도 서른이 되기 전에 하겠다는 목표가 있었죠.(웃음) 결혼에 대해 약간 로망이 있었는데, 그 꿈의 상대가 여성에서 남성으로 바뀐 것뿐이거든요.”(용민)
“전 (결혼에 대해) 사실 거부감이 있었어요. 성소수자로 정체화하고 살면서, 내가 그런 기존의 틀에 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고, 결혼 제도가 가부장제나 ‘정상가족’주의와 연결되어 있다는 걸 공부하게 되면서 거부감이 커졌죠.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이 결혼하고 싶다는 얘길 하니까… 좀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게 되었어요. 저도 결혼을 거부하겠다는 생각만 했지, 어떤 가족 혹은 공동체를 이룰건지에 대한 답이 없었거든요.”(성욱)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논의했다. 처음엔 결혼을 거부했던 성욱 씨도 “지금의 결혼 제도는 분명 문제가 있고 (그래서) 거부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다양한 가족 구성권리와 다양한 결합의 형태를 이야기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기존의 결혼 제도를 답습하는 것이 아닌, 둘만의 결혼을 만들기 위해 고민했다. “서로에게 어떤 제약이 되거나 제한으로 작동하는 결혼은 하지 말자”고 합의하면서, 결혼식도 구상해갔다. 누군가의 선언이나 허락 없이 우리의 다짐으로 하는 결혼이라는 의미에서 성혼선언문이 아닌 다짐문을 만들었다.
결혼식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참석해 축하를 건넸다. 두 사람은 가수 프롬의 “달밤 댄싱” 노래에 맞춰 함께 춤을 추며 입장했다. 예복도 흰색이 아니라 각자 좋아하는 색인 올리브색, 핑크로즈색 양복을 입었다. 즐거운 ‘세레모니’였다. 둘은 아직도 가끔 결혼식 사진을 꺼내보며 그 때를 추억한다.
동성 커플임이 드러나도 안전한…한국에선 느끼지 못한 감각
부부는 스페인으로 열흘 간 신혼여행도 갔다. “스페인 바르셀로나가 동성애자 친화적인 도시 1위라는 이야기를 들어서”였다. 실제로 그곳 분위기는 한국과는 사뭇 달랐다. 게이클럽이나 술집을 가지 않아도 시내 곳곳에 무지개 깃발이 꽂힌 가게들을 볼 수 있었다.
토레몰리노스라는 소도시에 갔을 땐 프라이드 퍼레이드(퀴어문화축제)가 열리는 날이었다. 어느 식당이나 가게를 가도 무지개 장식이 있었고, 퍼레이드엔 소방차가 나와 물을 뿌려주며 환영했다. “온 마을이 프라이드 퍼레이드는 즐기는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었다. 한국에선 퀴어문화축제가 열리면 혐오세력이랑 싸워야 하는데, 거기선 온전히 축제를 즐길 수 있었다.
“스페인에선 우리가 동성애자라는 게 드러나도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국에선 느낄 수 없는 감각이었죠.”(성욱)
“사실 우리가 이렇게 공개적으로 결혼식도 올리고 인터뷰도 하고 소송도 하지만, 그냥 길거리에서 손을 잡거나 팔짱 끼는 일은 잘 못해요.”(용민)
국가기관을 대상으로 싸움도 거는 사람이건만 성욱 씨는 “여전히 사람들의 시선이 무섭다”고 했다. 특히 소리에 민감한 탓에 주변 사람들이 쑥덕거리는 말도 잘 들린다는 성욱 씨는 “기자회견이나 집회나 그런 공식적인 자리엔 연대하는 사람들도 함께하니까 괜찮지만, 일상 생활에서 둘 밖에 없을 땐 안전을 신경 쓸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 평등권과 차별금지를 외치는 피켓을 든 소성욱, 김용민 부부. (소성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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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하다면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이들의 연애, 결혼 이야기가 남들과 ‘달라지는’ 부분은 이런 거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걸 신경 써야 하고, 조심해야 하고, 안전을 걱정한다는 것. 또한 ‘법적 부부’가 아니다 보니 한계도 많다. 성욱 씨가 지병으로 약을 먹어야 하는데, 약을 타올 수 있는 사람은 법적 가족으로 한정되어 있다. 배우자가 병원에 못 갈 정도로 아픈 상황에서도 용민 씨는 병원에서 약을 받아 올 수 없었다.
부부는 지난 해 또 한번 커다란 차별의 벽을 만나게 된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라는.
사실혼 관계, 무언가 더 ‘특별’한 것이 있어야 하나요?
성욱 씨는 일을 하고 있지만 4대보험 가입이 안 되는 일이라서 지역가입자로 보험료를 내고 있었다. 그러다 건강보험은 법적 배우자가 아니어도 ‘사실혼’ 관계라면 직장가입자 배우자의 피부양자로 등록할 수 있다는 정보를 접했다. 작년 2월, 그게 정말 가능한지 확인하기 위해 건강보험공단 홈페이지를 통해 “동성부부로, 혼인신고는 못했지만 사실혼 관계에 있는데 피부양자 등록이 가능한지” 문의했다. “가능하다”는 말과 함께 준비해야 하는 서류를 답변으로 안내 받았다.
“어떤 서류들이 필요하고, 이런 절차를 통해서 신청하면 된다고, 굉장히 상세하고 친절하게 알려주셨더라고요. 그래서 그대로 했죠. 서류들을 팩스로 보내고 며칠이 지나도 연락이 없길래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확인을 해 보니까 성욱이가 제 ‘배우자’로 등록이 되어있었어요.”
‘배우자’라는 글자를 확인한 순간 너무 기뻤다는 용민 씨. 그 화면을 찍어서 지인들에게 동네방네 소문을 냈다. 그리고 8개월 뒤, 사실혼 관계에 있는 동성커플/부부 중 한 명이 지역가입자고 다른 한 명이 직장가입자일 경우 피부양자 등록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좀 더 적극적으로 알릴 필요가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언론 인터뷰를 했다. 기사가 나가고 불과 2시간만에 건보공단에서 전화가 왔다. 등록을 취소하겠다는 거였다.
“바로 연락이 왔더라고요. 그렇게 일처리가 빠른지 몰랐어요. (서류 등록을 담당했던) 직원이 성별을 못 보고 처리한 거였다고, 실수였다고 바로 취소하겠다고 일방적인 통보를 하더라고요.”(용민)
무엇보다 권리를 빼앗겼다는 사실에 너무 화가 났다. 이건 참을 수 없다는 생각에 올해 2월 소송을 시작했다. 첫 번째 변론기일 때는 사건 취지와 앞으로의 절차 등이 확인되었고, 두 번째 변론기일 때는 가족법 전문가인 차선자 전남대 로스쿨 교수가 참석, 전문가 증인신문이 진행되었다. 지난 5일 마지막 변론기일엔 당사자인 성욱 씨가 증언대에 섰다.
“전날부터 긴장을 많이 했어요. 대리인단 변호사들이 예상되는 질문들을 알려주기도 했지만, 어떤 질문이 나올지 알 수 없었으니까요.”
건보공단 측 변호인단은 두 사람이 부부로 인정 받은 일이 얼마나 있으며, 혼인신고는 왜 시도하지 않았는지 등을 물었다. 왜 하필 건보공단에서 그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지 알고 싶다 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두 사람은 할 수 있는 한 늘 부부로서 등록/신청을 하고자 했고, 건강보험의 피부양자 등록은 법적 배우자가 아니더라도 사실혼 관계라면 가능하다고 했기에 신청한 것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성욱 씨를 지켜보던 용민 씨는 “다시 한번 화가 나기도 하고 슬펐다”고 했다. 주변 사람들도 다 아는 관계를 “계속 ‘증명’해야 하는 일은 억울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증언대에서 성욱 씨는 침착하게 대답했고, 최후진술에서도 “우리 부부는 사랑해서 결혼했고, 가족으로서 잘 살아가고 있는데, 이런 관계를 증명해야 하는 것이 힘들다. 용기 내어 재판에 임했다는 걸 알아달라”며 의견을 명확하게 전달했다.
두 사람은 내년 1월 7일로 잡힌 선고일에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항소할 생각이라고 했다. 성욱 씨는 “(이런 투쟁은) 죽을 때까지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포기는 사실 우리 선택지에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동등한 시민으로서 살겠다는 것밖에 선택할 수 있는 게 없지 않느냐”고 반문한 두 사람은 인터뷰가 끝나고 차별금지법 제정에 목소리를 보태러 집회장으로 향했다.
세상을 바꿔야 하는 책임과 권력을 지닌 건 국회의원, 정부, 국가기관 등이건만, 여전히 ‘평범한’ 시민들의 용기가 세상을 바꾸고 있다. 이들이 ‘특별’하다면 그 이유일 것이다. (박주연)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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