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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의 경계 위에서] 여자 혹은 남자 화장실 앞에서

 

※ [젠더의 경계 위에서] 시리즈에선 확고한 듯 보이는 ‘여성’과 ‘남성‘이라는 성별 이분법에서 벗어난 다양한 경험과, ‘여성성‘과 ’남성성‘의 경계를 넘나드는 도전과 생각을 나눕니다.  [일다]

 

▲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인 나에게 ‘여자 아니면 남자’ 양자택일 화장실은 늘 어떤 증명을 요구하고 시민으로서 배제를 경험하게 했다. (이미지 출처: pixabay)

 

10대 중후반 시절 자주 들었던 얘기 중 하나는 “너는 또래보다 성숙해 보인다”는 말이었다. 상황에 따라 장난기가 섞여 ‘노안’이라 놀림 당하기도 했고, 교복을 입지 않은 상황에서는 학생/청소년 할인이 있는 대중교통 등을 이용할 때 또래보다 높은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일도 빈번했다. 여기에는 공통 전제가 있었는데, 그건 내가 여성일 것이라는 확신과 합의였다. 이 전제가 사라지는 경우, 나는 사춘기를 겪지 않은 조금 더 어린 남자 아이로 사람들에게 인식되었다. 식당, 버스터미널, 카페, 동사무소, 그리고 곳곳의 화장실에서도, 이 양자택일은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20대 중반이 되었을 즈음부턴 나는 더이상 ‘노안’인 여성은 아니었으나 좀 더 ‘앳된’ 남성이 되었다. 앳되어 보인다고 하더라도, 여자 화장실에서 마주친 남성은 사용자들에게 안전한 존재로 인식되지 않는다. 그러면 나는 나를 여성이라고 소개했다. 다른 사용자들은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 대충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고, 화장실에 가야 하니 별다른 수없이 자주 말해야 했다.

 

내가 나를 여성이라고 가장 많이 소개한 공간, 내가 가장 여성이 되어야 했던 공간인 여자 화장실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증명’이 필요했던 여자 화장실

 

10대 초반부터 줄곧 ‘귀 판 숏컷’ 내지는 투블럭 숏컷을 했고, 160 중후반대의 키, 애매한 목소리와 굽은 등 때문에 내 성별을 궁금해하고 확인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았다. 트랜스젠더 내지는 부치 등의 젠더교란자들이 자주 하는 이야기를 나도 끊임없이 반복해야 했다. 딸로 태어났다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그건 사실 애매한 표현이다. 나는 그냥 자식으로 태어났고, 인간으로 키워졌다. 애초에 젠더 역할이 강하기는커녕 사회의 기준과 반대로 굴러가던 집에서 자랐다.

 

이런 나를 ‘여성스럽지 않은 여성’이라고 규정하던 사회의 기준은 아무래도 성기였고, 가슴이었다. 클리토리스가 있고, 음경이 없고, 질이 있고, 포궁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이후 적출을 통해 있었던 것이 확인되기는 하였다), 자라면서 가슴이 나왔으니 여성이라고 했겠지. 내 벗은 몸을 보지 않은 사람들은 본 적 없는 포궁의 존재처럼 내 성기의 모양을 확신했다. 나는 여자 아이, 여성으로 규정되었다. 문제는 이러한 확신이 사람들 눈으로 직접 볼 수 없는 성기와 장기 대신 머리카락과 옷차림 등을 근거로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이렇게나 화장실에 가는 과정이 번거로울 운명이라면, 화장실을 적게 가도 되는 삶이었어야 균형이 맞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나는 화장실을 사실상 달고 다니는 삶을 살고 있다. 그건 성기나 젠더와 무관한 위장 건강 탓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별을 입증해야 하는 과정이 생략되는 건 아니었다. 찬 음료를 먹고 배탈이 나서 식은땀을 흘리더라도 여성임을, 안전한 사람임을 입증하는 과정을 건너뛸 수는 없었다. 약 1년, 머리를 쇄골께까지 기르고 치마를 종종 입던 시절에는 생략 가능하긴 했지만.

 

그러니까 위의 장황한 이야기를 사회의 기준에 맞게 다시 이야기해보자면, 나는 ‘여성’으로 태어났고, ‘남자’처럼 하고 다녀서 화장실에 들어갈 때에는 ‘여성’인 것을 ‘증명’해야 하는 삶을 살았다. 이렇게 한 문장으로 축약 가능하지만, 그렇게 축약하는 것이 곧 폭력이나 마찬가지인 나는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이다. 설명하는 것이 귀찮을 때에는 FTM 트랜스젠더라고 뭉뚱그리기도 한다. 법적 성별은 여성에서 남성으로 정정된 지 2년 정도 된 성소수자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여전히 화장실을 달고 사는, 그런데 화장실에 가는 것이 험난한 삶을 사는 사람이다.

 


한국다양성연구소에서 진행하는 ‘모두를 위한 화장실 만들기 캠페인’ 자료 중. (출처: 한국다양성연구소)

 

편함과 두려움이 공존했던 남자 화장실

 

성별정정과 의료적 트랜지션을 하기 이전에는, 그러니까 병원에서 아주 손쉽게 나를 여성으로 분류하던 시절에는 내가 화장실에서 느끼는 자괴감과 별개로 입증 과정은 간단했다. 가슴이 튀어나온 것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거나, 조금 하이톤의 목소리를 내면 되었으니까. 그러면 나는 그 공간의 사용을 허락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자격 있는 화장실 사용자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여성으로 입증되는 것이고, 그러면 나는 젠더 디스포리아(gender dysphoria, 성별 불일치로 인한 위화감)를 느꼈다. 젠더 디스포리아가 가볍지는 않았지만, 내 위장 문제도 가볍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계속해서 여자 화장실 안에서 배탈도 나고, 정신력도 축나는 사람이 되었다.

 

10대 시절에도 몇 번 남자 화장실에 들어간 적은 있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여자 화장실의 줄이 너무 길어서, 여자라고 스스로를 지칭하는 상황에 지쳐서, 여자 화장실이 공사 중이라서. 남자 화장실 안에 사용자가 있더라도 여자 화장실에서처럼 잘못 들어왔다는 지적을 받지는 않는 점은 편했다. 또 그게 남성으로 인식되어서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지속하기엔 두려웠다. 이 공간에서 성폭력을 당할 경우, 나는 남자 화장실에 제 발로 들어가서 성폭력을 당한 사람으로 몰리거나, 아예 성폭력임을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남성 아닌 존재로 살아본 사람들은 이런 생각이 지나친 비약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러니 결국 여자 화장실로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나이가 들수록 자잘한 팁만 늘어갔다. 누가 봐도 ‘여자’인 사람과 함께 들어가는 것도 그 중 한 가지 방법이었다.

 

그렇게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하지 못한 채 어찌저찌 살아가던 중에,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다. 어머니가 내가 트랜스젠더인 것을 받아들이고, 나의 의료적 트랜지션과 성별정정에 협조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너무나도 기쁜 일이었다. 이 자체만으로도 순탄치는 못하더라도 원하던 삶에 조금씩 가까워지던 차에, 임시방편으로 가려뒀던 문제가 다시 드러났다. ‘아, 화장실 어떡하지?’

 

▲ ‘모두를 위한 화장실 만들기 캠페인’을 진행 중인 한국다양성연구소 홈페이지. https://diversity.or.kr/toilet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와 고난의 화장실

 

젠더만 놓고 따지자면, 나는 남자 화장실에 가는 것이 더 마음 편한 일이다. 수술로 가슴이 납작해져서 사람들은 더욱 나를 남성으로 인식하는 일이 잦았고, 호르몬 요법으로 목소리 톤이 낮아진 것도 한몫 했다. 노안인 여성에서 그냥 여성으로, 그리고 성별이 헷갈리는 사람을 거쳐 남성이 된 것이다. 이제는 그닥 앳되어 보이지도 않는 남성.

 

그런데, 그냥 남성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내가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라는 것을 차치고서라도, 일단 남성으로만 생각하더라도 나는 음경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칸막이가 제대로 설치되어 있는 좌변기 칸이 아니면, 나는 화장실을 두고도 가지 못하는 이상한 남성이 되었다. 자격 없는 삶은 끝나지 않은 것이다. 아니, 오히려 여태까지의 팁조차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고난의 화장실, 제2막이 시작된 셈이었다.

 

화장실에서 일어나는 일이 지극히 개인적인 것임에 비해, 화장실의 구조는 시야만 차단되어 있을 뿐 많은 것을 소리로 추측할 수 있었다. 사소한 것까지 신경쓰이기 시작했다. 내가 좌변기 칸에 들어가서 소변만 누고 나오는 것이 이상하게 보이면 어떡하지? 보통의 경우에는 소변과 대변 중 무엇을 먼저 보지? 물어볼 것은 많았지만, 물어볼 곳은 없었다.

 

그 와중에 남자 화장실 시설은 대부분이 지저분하고, 같은 건물의 여자 화장실에 비해 파손의 흔적이 많았다. 제대로 잠기지도 않는 문을 불안한 손으로 붙든 채 용변을 보는 일도 잦았다. 문이 반쯤 부서져 손으로 붙들어도 누군가 마음만 먹는다면 안을 들여다 볼 수도 있는 수준의 화장실도 있었다. 조금씩 궁금해졌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화장실을 이용해야 할 때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사태가 무엇일까? 그게 내 삶과 얼마나 다를까?

 

최악을 상상해서 달라질 것도 없었고, 불행을 겨루어 나아질 것도 없었다. 그렇지만 ‘정상’의 삶과 비교하게 되는 것 또한 어쩔 수 없었다. 살아가면서 잘 먹고 잘 자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잘 싸는 것이라는데, 이걸 원활히 할 수 없는 삶은 그 자체로 정상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 서울 은평에 위치한 살림의원의 화장실. “성중립 화장실을 만들어 달라는 데에는 어떤 음모가 있는 게 아니라, 마려운 것을 싸고 싶은 것이다.”   ©일다

 

‘먹고 자고 싸고’ 당연한 일상의 권리가 아닌가

 

그런 시간 속에서 드물게 성중립 화장실을 마주치면 마음이 편해졌다. 때로는 도리어 불편해지기도 했다. 다들 이렇게 편하게 싸는데, 왜 나는? 일종의 억울함이었지만, 그러한 감정이 쌓일 만큼 자주 느끼지도 못했다. 대부분은 화장실을 성별로 구분해 두었으니, 억울한 감정조차 모른 채 살아가는 시간이 길었다. 문장이 과거형인 까닭은 성중립 화장실이 늘어났다든지 하는 긍정적 변화 때문이 아니라, 바깥의 화장실을 이용할 일이 적어져서이다. 가뜩이나 외출하지 않는 성격이었으나, 코로나 창궐 이후에는 더욱 바깥에 나갈 일이 없어졌다. 덕분에 집에 있는 단 하나의 성중립 화장실을 이용하는 빈도가 더 높아졌다.

 

세상 모든 공간이 집처럼 편안할 수는 없겠지만, 생리 현상 정도는 비슷하게 해결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밥 먹는 것도, 잠 자는 것도, 집만큼은 아니더라도 일정 수준의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외부 공간이 많이 있는데, 왜 화장실은 그렇지 못한 걸까. 사회가 만든 화장실이 나의 기준에 못 미치는 것인지, 내가 사회의 기준에 못 미치는 시민인 것인지를 의심하게 만드는 화장실만 넘쳐난다.

 

성중립 화장실을 어떤 거대한 음모로 여기는 사람들을 종종 마주했다. 그때마다 느낀 감정은 조금씩 달랐지만, 돌이켜 보면 모두 내 존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어떤 음모처럼 느껴질 수 있겠지만, 화장실은 그냥 화장실이다. 대소변을 보고, 간혹 구토를 하기도 하고, 월경용품을 교체하기도 하는 곳일 뿐이다. 화장실을 만들어 달라는 이유도 이와 같다. 마려운 것을 싸고 싶은 것이고, 다시 말해 그냥 살고 싶은 것이다.

 

온갖 대소변 이야기를 잔뜩 하고서 이런 단어를 붙이기가 머쓱하지만, 그게 삶의 존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살면서 필요한 기초적인 것들을 당연하게 보장 받는 삶. 태어난 이상, 아무리 낯설고 이해할 수 없게 보이는 사람도 그 삶을 누릴 권리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제 아무리 부정해도, 트랜스젠더는 태어나고, 살아가고, 먹고, 자고, 싸며 살아가고 있다. 마려운 건 마려운 것일 뿐, 죄악도 음모도 아니다.  [일다]

 

[필자 소개: 이한결. 하는 일 없이 바쁘게 지내는 비건 퀴어 페미니스트. 카메라를 잡고, 종종 춤을 추고, 간혹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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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삶을 따뜻하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여성 열두 명이 밀도 있게 들려주는 주거생애사이자, 물려받은 자산 없이는 나다움을 지키면서 살아갈 곳을 찾기 어려워 고개를 떨구는 독자들에게 조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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