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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페미니스트 기타하라 미노리 인터뷰(상)
페미니스트인 기타하라 미노리(北原みのり) 씨는 한국과의 인연과 교류가 깊다. 일본군 ‘위안부’ 운동을 비롯해 “한국 페미니즘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는 그는 최근 도쿄의과대(여성 수험자의 점수를 일괄적으로 감점하는 등 수년간 입시부정을 저질러온 사실이 밝혀짐) 앞 시위와 이토 시오리(일본에서 처음으로 미투 제기) 씨의 지원모임과 ‘플라워 시위’ 등을 활발히 이끌어가고 있다.
미노리 씨와 일본에서 비슷한 시기에 학창 시절을 보내고 지금은 성공회대학교에서 재직 중인 재일조선인 3세 조경희 교수가 그를 “팬심으로 인터뷰했다.” 조 교수는 한국에서 미투운동이 한창이었을 때 학생들로부터 “일본에서는 왜 안 나오는가?라는 질문을 자주 받았다고 한다. 그 이후 밖에서 보기엔 조용해 보이지만 일본 사회 내에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기타하라 미노리 씨를 보며 인터뷰를 요청했고, 최근 일본의 페미니즘 운동 동향 전반을 들어봤다. [일다]
싱글맘들을 보고 자란 아이
기타하라 미노리 씨. 이미 1990년대부터 그의 활동은 일본 페미니즘과 서브컬쳐 영역에서 독보적이었다. 그가 여성을 위한 섹스 굿즈숍 ‘러브 피스 클럽’(LOVE PEACE CLUB)을 설립한 것은 1996년. 그로부터 25년 동안 미노리씨는 젠더와 섹슈얼리티, 한류, 일본군 ‘위안부’ 문제, 미투운동 등 활동 영역을 확장해왔다. 그동안 그가 집필하거나 참여한 저서는 20권이 넘는다. 여성 잡지 『anan』의 섹스특집을 추적한 『앙앙의 섹스로 예뻐졌나?(アンアンのセックスできれいになれた?)』(2011), 여성 연속살인범 기지마 카나에(木嶋佳苗)의 재판 방청기 『독부(毒婦)』(2012), 한류와 일본여성들의 욕망을 기록한 『굿바이 한류(さよなら、韓流)』(2013) 등 주제의 폭도 넓다.
‘위안부’ 문제를 일본 사회에 알리는 활동을 하는 ‘희망의 씨앗’ 기금 이사를 역임하기도 하고, 2021년에는 원래 운영하던 회사에서 출판 부문 ‘아줌마 북스’를 설립해 한국의 페미니즘 서적을 일본에서 소개하기 시작했다. 회사경영, 작가, 활동가로서 자신의 역량을 멀티로 발휘해온 미노리 씨의 이야기를 꼭 한번 듣고 싶었다. SNS를 통해 다짜고짜 연락을 했는데도 흔쾌히 인터뷰에 응해주었다.
▲ 줌(zoom)을 통해 만난 기타하라 미노리 씨(왼쪽)와 필자 조경희 씨(오른쪽). 성공회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인 조경희 씨는 재일조선인 3세로, 미노리 씨와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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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생인 미노리 씨는 ”부모님이 1960년대 학생운동에 참여하는 등 전후 세대라 꽤 리버럴하고 개방적인” 분위기에서 자랐지만, 가족 중 영향력으로 보면 “외할머니의 영향이 제일 컸다”고 말했다.
“외할머니는 결혼을 안 하고 엄마를 낳으셨거든요. 그리고 여관을 운영하셨어요. 1920년대 생 여성들은 전후 결혼적령기가 되었을 때 남자들이 전쟁에서 많이 죽어서 없었던 거에요. 외할머니의 여관에서 일하던 아주머니들도 다 싱글로 사는 사람들이었어요. 일단 외할머니가 중심에서 뽐내고 있었고, 아주머니들이 당당하게 일하는 것이 당연한 환경이었던 것 같아요. 여성들이 약하다거나 남자들에게 종속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행운이었다고 생각해요.”
주변에서 일하는 여성들을 많이 볼 수 있는 분위기는 당시로는 드물었다. 재일동포들은 장사를 많이 해서 일하는 엄마들이 많았지만, 1970년대 일본 중산증은 전업주부들이 꽤 중가하는 시기였다.
어린 시절부터 여성의 성과 자립경제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기타하라 미노리 씨. 인터뷰한 내용은 미노리 씨와의 대화를 가능한 한 그대로 옮겼다.
커리어우먼이 되고 말 거야
미노리: 사실은 ‘기타하라’는 엄마 성이거든요. 아빠 성은 ‘와타나베’인데, (너무 흔해서) 반에 3명씩은 있었어요(웃음). ‘기타하라’가 더 멋지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말한 적이 있어요. 왜 아빠 성을 썼어요? 라고 물어봤더니 아빠는 “엄마가 아빠 성을 쓰고 싶어 했다”고 말하는 거 있죠.(일본 민법은 혼인 후 부부가 같은 성을 쓰도록 정하고 있다. 현재도 96%가 남자 성을 쓴다.)
조경희: 네, 정말 ‘기타하라’가 더 좋네요.(웃음) 아버지 성을 쓰는 것에 대한 반항심이 그때 벌써 있었던 거군요. 사춘기 시절, 중고등학생 때 어떤 아이였나요?
미노리: 올곧은 성격이었던 것 같아요. 중학교 때 마침 남녀고용기회균등법(1985)이 제정되었어요. 한편에서 그 전까지는 여자들이 제대로 일할 수 없었다는 점에 놀라기도 했구요. 그때까지만 해도 일하는 여성들의 이미지는 일반적인 회사원은 아니었는데, 균등법이 생긴다면 여성들도 장래 회사를 다니고 해외에도 나가고 뉴욕 월가에도 진출하자는 그런 이미지(웃음). 커리어우먼이 되고 말 거야 라는 생각을 그때 했어요.
조경희: 남녀고용기회균등법이 중학생에게도 이슈였군요.
미노리: 네. 초등학교 3학년 때 이치카와 후사에(市川房枝: 일본의 1세대 여성활동가. 부인참정권 운동을 주도했다) 씨가 돌아가셨는데 언론에서 많이 보도되었어요. TV에서 보고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서 아버지에게 물어봤어요. 그때 여성들에게 선거권이 없었다는 것도 알게 되고 충격을 먹었어요. 그래서 『이치카와 후사에 신문』 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이런 멋진 할머니가 있었다고, 친구들에게 알리고 다녔어요.
조경희: 어렸을 때부터 깨어있는 아이였네요. 아버지의 영향으로 시사 문제에 자연스럽게 접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또 1970-80년대 당시 혁신세력의 진보적인 교육이 아직 살아있었겠네요.
미노리: 그랬을지 모르겠어요. 일교조(日教組: 교직원들의 노동조합) 선생님들이 교과서에 안 나오는 내용들을 가르쳐주셨죠. 일장기(히노마루)를 강요하는 분위기 같은 건 당시는 없었잖아요.
조경희: 그렇죠. 1990년대에 들어 일본 사회가 많이 보수화되어갔을 때 20대를 보내셨죠? 그대로 30년이 지나버렸지만요.
미노리: 네. 정말 헤이세이(平成: 1989~2019) 시대는 특히 여성들에게는 최악이었다고 생각해요. 지금도 우리가 잘 살아남았다고 서로 위로하기도 합니다.
여자들의 자립경제와 성적 욕망이라는 화두
조경희: 대학교 때 무엇을 전공하셨어요?
미노리: 아까 커리어우먼이 되고 싶었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국제금융론을 전공했어요(웃음). 좀 엉뚱한 선택이었죠. 4학년 때 국제금융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때는 이미 페미니즘 집회에 다니기도 했었고, 기업에서 일한다는 것에서 내 스스로의 미래상이 안보여서 어떻게든 시간을 더 끌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대학원에 진학했어요.
마침 1993년에 성교육 개혁 원년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HIV 문제가 터지고 성교육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담론이 문부성에서도 높아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성교육을 공부하면 젠더로 인한 고민이 조금은 해소가 될까 하는 마음으로 석사과정에서는 교육학을 전공하게 되었어요.
조경희: 페미니즘이나 성의 문제로 자신의 활동의 방향성을 정하게 된 시기도 그때였나요?
미노리: 음. 가장 첫 번째 고민은 역시 경제적으로 어떻게 먹고살 것인가. 대학 시기에 여러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50대 이상의 여성들이 일하는 곳이 하나도 없었어요.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좀 막막했어요. 회사에 들어가지 않고 스스로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방법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구요. 연구자, 작가 등 조직에 안 들어가고 일한다는 방향성은 그때 정한 것 같고요.
그리고 당시 일본에서 끔찍하고 무서운 사건들이 많았어요. 유명한 것으로는 도쿄 아야세(綾瀬)에서 있었던 콘크리트 살인사건(4명의 소년들이 여고생을 납치, 40일간 감금하고 강간, 폭행, 살인한 후 콘크리트에 암매장한 사건). 가해 남자들이 다 동갑이었고 집도 가까워서 충격을 받았어요. 피해 여학생이 언론에서 불량학생이었다는 식으로 공격대상이 되었죠.
또 하나는 미야자키 쓰토무(宮崎勤) 사건(20대 남성이 4명의 어린 소녀를 유괴, 살해한 사건). 그 사건도 보도 내용이 정말 문제가 많았어요. 피해자인 5살 여자아이가 알몸으로 살해된 상황을 언론에서 구체적으로 묘사했어요. 왜 피해자가 계속 피해를 받아야 하는지 답답함을 느끼고 있을 때쯤 페미니즘 집회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는데, 거기서 화가 나 있는 아줌마들을 많이 봤어요. 지금 나보다도 젊었을지 모르지만 아무튼 언니들이 다 분노하고 있어서 좀 마음이 편해졌거든요.
그래서 ‘이쪽 길’이 답이라는 것은 느끼고 있었는데, 집회에 가면 젊은 여자가 없어서 내가 주목을 받았거든요. 그럼 대체로 짧은 치마를 입지 말라거나 화장이 화려하다거나 그런 지적을 받는 거에요. 누구나 성욕도 있고, 섹스는 하고 싶은데… 성적 어필을 하는 것이 반드시 남자들에게 아부하는 것은 아닌데…라는 답답함이 있었어요.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면서 성폭력을 거부하는 당연한 것이 그렇게 어려웠어요.
대학원의 환경이 나쁘지는 않았는데, 철학을 공부하는 것이 고통스럽기도 했어요. 고전 철학은 다 여성혐오적이잖아요. 학문적으로 기본지식은 모두 남자로부터 배워야 하는 것이 견디기 어려웠어요. 소설도 대학교 때쯤에는 남자들이 쓴 것을 읽지 않았죠.
조경희: 1990년대 일본의 분위기가 ‘뭘 해도 괜찮다’는 가치상대주의적인 면이 있었죠. 성의 문제가 서브컬쳐가 되는 분위기 속에서 남성중심적인 문화에 휘말리지 않고 성적 욕망을 말하는 것은 참 어려웠던 것 같아요. 미노리 씨는 그때 젊은 페미니스트로 앞장서고 계셨을 텐데, 함께 하는 동지들이 있었나요?
미노리: 네, 일본이 부유했던 시대의 경박함이 있었죠.. 저는 함께 활동하는 동지들을 찾는 일에는 꽤 적극적인 편이었죠. 대학교에서 신문부를 만들어서 페미니스트를 찾아다니거나 학교 밖에서도 페미니스트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어요.
사실은 대학 때 가장 친했던 친구가… 좀 엘리트를 추구하는 면이 있어서 소원해지기도 했는데, 나는 정말 좋아하는 친구였는데…. 회사에 들어가자마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요. 그 일이 꽤 컸어요. 국제금융론 세미나에서 만났는데 당시 모두 은행이나 대기업에 취직했어요. 그런데 친구들이 아무도 장례식에 안 온 거에요. 너무하잖아요? 23살에 죽은 친구의 장례식에 어떻게 친구들이 안 올 수가 있나요? 그때 장례식에서 세미나 담당했던 교수님과 나눈 대화가 인상 깊었는데 “역시 금융론 같은 것을 하는 놈은 차갑구나”라고 말했어요. 그 선생님이 “역시 남자들의 경제이론에 휩쓸리면 안 된다. 여자들의 경제를 만들지 않으면 여자들의 자립은 어렵다.” 그런 말씀을 해줬어요. 그때 정신이 번쩍 들었죠. 저는 컴퓨터를 좋아했고 때마침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홈페이지 회사를 만들게 되었어요.
▲ 기타하라 미노리(北原みのり)씨. 러브피스클럽에서 친구가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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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 PEACE CLUB —여성들이 원하는 제품을 만들자
조경희: 그럼 윈도우95가 나왔을 때 바로 시작하셨어요? 엄청 빠르네요.
미노리: 맞아요. 1995년. 초창기 벤처기업이에요. 페미니스트로 알려지면서도 경제적으로 확장하고 싶다는 야심이 컸어요. 돈에 크게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닌데, 역시 돈은 기본이라는 생각이었죠. 당시엔 주식회사 설립에 1000만엔, 유한회사 설립도 500만엔 필요해서 이모한테 빌렸어요. 89학번인데 본격적인 취직난이나 불황이 시작되기 전이었고 비교적 낙관적으로 시작했어요.
그런데 같은 시기에 왜 러브피스클럽(LOVE PEACE CLUB)을 시작했냐 하면, 그 당시 회사가 발주 받고 제작하는 홈페이지의 대부분이 에로, AV사이트였어요. 한편 인터넷 시대에 스스로 세계를 향해 정보발신을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해외 아티스트들의 홈페이지도 많이 보고 있었거든요. 두 가지가 연결되어서 페미니스트가 운영하는 섹스굿즈샵을 알게 되었어요. 특히 미국에서 많이 보고 배웠어요.
조경희: 남자들의 AV사이트를 만드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하나의 자극제가 된 걸까요?
미노리: 물론 그랬지만, 솔직히 처음에는 깊이 생각하지 못했어요. 남자들의 에로는 그것대로 있고, 여자들의 것이 없으니까 만들자는 정도로, 역시 저의 인식에도 시대적인 한계가 있었어요. 지금은 에로 표현이 너무나 허용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심각해졌다고 보지만, 당시는 여성들에게 즐거운 표현을 만드는 것이 페미니즘의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여성의 에로를 표현하자는 이벤트를 열거나 여러 아티스트들과 작업하면서 그것을 홈페이지에서 표현하고. 미국에서 섹스굿즈샵이 있다거나, 마스터베이션 강습을 하는 여성이 있다고 하면 바로 편지 쓰고 만나러 가거나 그런 행동력은 있었어요.
사실 홈페이지 회사는 꽤 순조롭게 갔어요. AV사이트 제작만이 아니라 큰 계약도 들어왔고 그 속에서 섹스굿즈 관련 일을 시작했으니 주변에서 반대도 있었어요. 그런데 여자들의 경제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여성 고객을 위한 제품을 만드는 것, 즉 남자를 매개하지 않고 돈이 돌아가는 것을 원했어요. 가전제품 하나를 봐도 남자들이 디자인하고 만든 ‘여성용’ 제품은 이상한 핑크색이잖아요. 그런데 여성이 만든 제품을 여성이 산다. 그것도 성 관련 상품이라면 이제까지 없었던 여성들이 원하는 것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었어요. 그후 러브피스클럽 활동이 바빠져서 홈페이지 회사는 몇 년 하다가 관뒀어요.
조경희: 러브피스클럽도 꽤 잘 된 거군요. 당시 하라주쿠에 작은 가게가 있었죠? 섹스굿즈샵이 생겼다는 것으로 화제가 되었어요. 대학교 때 친구와 갔던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어요.(웃음) 가족들이나 주변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어요? 미노리씨가 언론에서도 꽤 주목 받았잖아요?
미노리: 많이 응원해줬어요. 외할머니도 되게 기뻐해주시고 옛날 슌가(春画: 에도시대에 유행한 남녀의 성장면을 그린 그림) 같은 것 기증해주셨는데, 그때 필요없다고 말할 수도 없고 지금도 보관만 하고 있어요(웃음). 엄마도 좋아해주시고. 참 희한한 분이라 생각했는데, 친구들에게 바이브레이터를 배포하고 다니셨거든요. 엄마도 원래는 아버지의 눈치를 보면서 불편하게 살아온 분인데, 그 모습이 참 흥미로웠어요.
페미니즘이 아니라 ‘표현의 자유’ 문제다?
조경희: 혹시 굿즈가 아니라 컨텐츠 쪽을 만들드실 생각은 안 하셨어요? 여성들을 위한…
미노리: 물론 있었어요. 오히려 처음엔 그쪽에 관심이 있었죠. 그런데 여성들에게는 섹스를 즐기는 것 자체가 허용되지 않았으니 일단 판타지를 파는 것보다, 섹스나 프레져의 이미지를 바꾸고 싶다는 의미에서 굿즈에 고집했어요. 처음엔 페미니스트가 만든 포르노나 여성감독이 만든 AV도 팔기도 했는데 지금은 안 팔아요.
그 이유는 하나는 2014년에 내가 체포되었던 것(미노리씨는 여성기 모양으로 만든 한 예술가의 작품을 샵에 진열했다는 이유로 체포된 적이 있다). 또 하나는 최근 AV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내는 경우가 정말 많아졌죠. 아무리 여성 감독이 만들었다고 해도 여성들이 피해를 안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최근 10년은 표현물을 취급하지 않고 있어요.
조경희: 체포에 관한 이야기를 안 물어볼 수 없는데요. 부당한 체포를 당하셨고, 또 그 후 예술가 A씨와도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요. 혹시 그때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으세요?
미노리: 많이 상처를 받은 사건이에요. 그동안 여성의 성기를 아트로 표현해온 예술가들은 많았죠. 그것은 단지 ‘표현의 자유’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의 신체에 대한 임파워먼트와 연관된 일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저는 A씨가 처음 부당한 체포를 당했을 때 그를 지지했습니다.
그런데 A씨도 그렇고 그를 지지한 리버럴파들은 사태를 ‘표현의 자유’의 문제로 끌어갔어요. 나에게는 이건 표현의 자유 문제가 아니라, 남자들의 AV샵에서는 폭력적인 포르노 표현이 그렇게 넘쳐나도 아무렇지 않은데, 여성이 자신의 성기를 작품으로 만들고 홍보한 것이 ‘외설물 배포죄’가 되는 이 불평등 구조야말로 문제였어요. 그러나 A씨와 그 지지자들이 “이건 페미니즘의 문제가 아니라 표현의 자유, 반권력의 문제다”라는 방향으로 이끌어감으로써 그들과 저는 엇갈리게 되었는데...
그 와중에 내가 체포된 거예요. 그녀의 작품을 진열했다는 이유인데, 어쨌든 경찰에는 내가 A씨 그룹과 한패로 보였을 테고, 또 섹스 굿즈를 파는 사람이니 가장 데미지가 있어 보였겠죠. 모두들 내가 죄를 부인하고 A씨와 함께 싸우기를 기대했겠지만, 난 이건 내 싸움은 아니라고 판단했어요. 그래서 ‘죄’를 인정하고 3일 만에 나왔어요.
그 후부터가 더 힘들었어요. 저는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권력에 굴복한 배신자가 되어 있었죠. 표현의 자유와 페미니즘이라는 기묘한 대립 구도 사이의 도랑에 빠져버린 느낌이었어요. A씨의 싸움은 ‘페미니스트의 반권력 운동’으로 포장되었지만, 저에게는 ‘표현의 자유’란 이름으로 여성 착취적인 표현물까지도 옹호하는 자칭 리버럴 남성들의 싸움에 휘말리는 것으로밖에 안보였어요. 일본 사회에서 이러한 논조는 여성의 존엄이나 인권과는 다른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어요. 실제 지금 그들은 혐오 표현마저도 옹호하고 있어요.
아직도 잘 언어화할 수 없어요. 어쨌든 그때부터 나에게 표현의 자유란 무엇인지, 폭력적이지 않는 AV가 있을 수 있는지, 내가 여기에 가담하고 있지 않는지, 계속 질문하게 되었어요.
‘한류’는 페미이자 에로다
조경희: 한국과의 인연도 각별한데요. 일본군 ‘위안부’ 운동이나 한국의 페미니즘과는 어떻게 연결되셨나요?
미노리: 1990년대부터 ‘나눔의 집’을 방문하거나 또 한국 아티스트들과 함께 활동하기도 했었어요. 또 서울국제여성영화제 1회, 2회 때도 갔었어요. 지현이라는 페미니스트 가수가 저를 불러줬는데, 2000년대 초반에 여성가족부가 생기고, LGBT 축제가 열리고, 동시대 한국에서 다양한 민주적인 움직임들이 있었죠. 그때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에게 주목하게 되었어요. 그냥 단순히 대단하다고 느꼈어요. 영화제도 정말 재미있었고, 공적자금으로 운영된다는 것도 대단했고요.
일본도 1999년에 남녀공동참획기본법이 제정되면서 여러 행사들이 있었지만, 한국이 더 뭐랄까 즐거워 보였어요. 같은 세대의 20대 페미니스트들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는 점이 컸어요. 일본에서는 어디를 가도 언제나 저는 막내였거든요. 한국은 같은 세대가 활발하니 이쪽이 더 좋다고 느꼈던 것 같아요.
‘위안부’ 운동과 관련해서는 저는 1995년 당시 ‘아시아여성기금’이 나왔을 때 기부를 하려고 했던 편이었어요. 당시 존경했던 시모무라 미츠코(下村満子), 우에노 치즈코(上野千鶴子) 등 페미니스트 선배들이 기금을 지원하고 있었으니까요. 그 후 (기금에 대한) 반론이 나왔을 때, 무엇이 옳은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고 일단 옆에 두고 판단을 보류했었죠. (당시 일본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 측은 국민 모금 방식으로 피해자들에게 위로금과 총리의 사과 편지를 전달하였는데, 이는 ‘위안부’ 당사자들이 요구해왔던 국가적, 법적 책임을 피해 가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비판을 받았고 한국에선 다수의 당사자들이 수령을 거부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스스로 좀 오만했다고 나중에 반성했어요. 그렇게 한국이 좋다고 하면서도 한국어를 공부하자는 생각은 전혀 안 했으니까요. 교류할 때 보통 한국 분들이 일본어로 말해주거나 영어로 대화했죠. “안녕하세요”조차도 하려고 하지 않았어요. 나중에 한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한 계기는 ‘장금이’였어요! 과거의 자신을 ‘장금이’를 보면서 많이 반성했어요(웃음).
정말 ‘장금이’는 내 인생을 바꿔 놨어요. 2005년쯤 한국으로 3개월 단기 어학연수 유학을 갔던 것도 <대장금>의 김영현 작가님하고 어떻게든 대화하고 싶어서. 인사 정도는 한국어로 하고 싶다고, 광고판 정도는 읽고 싶다 생각해서요. 실제로 작가님을 만나고 인터뷰도 했어요. 물론 3개월로는 엄두도 못 냈죠. 한상궁 가발만 사고 돌아왔어요(웃음). 한동안 집에서 그 가발을 쓰고 있었죠.
한국은 갈 때마다 시대가 바뀌었다는 것을 실감했어요. 처음 간 건 1992년쯤이었는데, 뭐랄까 이렇게 가까운데 어쩜 여성들이 이리 살기 어려워 보일까 생각했어요. 엄마랑 같이 동대문에 갔는데 담배 피는 여성이 혼나는 분위기였어요. 한국 여성들의 화장이 너무 진했고, 택시 기사들이 그렇게 무서웠어요.
▲ 기타하라 미노리 씨가 2013년에 출간한 책 『굿바이 한류(さよなら、韓流)』 |
조경희: 『굿바이 한류(さよなら、韓流)』를 아주 재미있게 읽었어요. 초기에 나온 “일본 중년여성들이 순수했던 첫사랑을 떠올리면서 한류 스타에 빠진다”는 식의 이야기들은 별로 설득력이 없었어요. 더 여러 서사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은 여기에 페미니즘 혹은 여자들의 욕망으로서의 한류를 말하고 있어서 통쾌했어요.
미노리: 기쁘네요. 저도 욘사마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재방송을 보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는 외할머니를 보면서 도대체 이건 뭐야? 라고 의문이 들기 시작했어요. 신오쿠보에 갔더니 예전과 너무 다른 여자들의 동네로 바뀌어 있었죠. 또 ‘장금이’를 본 친구는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펑펑 울기 시작하는 거에요. ‘장금이’에 푹 빠지고 나서 <모래시계> 같은 드라마도 보고 한번 더 놀랐고요. 그때는 시간이 너무 부족했어요. 여자들끼리 한류 이야기를 하는 것이 그렇게 즐거웠어요.
내가 스스로 초조감을 느끼고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것처럼, 사람들이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거잖아요. 놀랍지 않나요? 이메일조차 해본 적이 없었던 60대 여성들이 한류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인터넷을 시작한다거나, 남편 벌이로는 놀 수가 없다고 처음으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거나, 이런 대단한 무브먼트를 일으켰죠. 한국 드라마는 로코물이어도 정치적 요소가 들어가잖아요. 페미니즘, 민주주의, 그리고 잘생긴 남자(웃음). 말의 두께라 할까요, 언어가 참 두텁다고 느껴졌어요.
또 하나는 동방신기에 빠지길 참 잘했다는 것(웃음). 친구가 그렇게 섹시한 남자들은 처음 본다고, 한번 같이 보자고(웃음). 한류 이야기를 하면서 좋았던 것은 여자들끼리 일본 사회를 욕할 수 있는 것이었어요. ‘반일’보다는 ‘항일’에 가까운데, 일본의 단점을 잘 인식하게 해줬고, 그동안 괜찮게 향유해왔다고 생각해온 문화도 사실은 굉장히 빈곤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한류가 알려줬어요. 한편에서 남자들의 문화라 할까요.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계기로 넷우익들이 ‘혐한’을 시작했잖아요. 이것은 여자들이 좋아하는 것에 대한 경시와 모멸이 포함되었던 것이죠. (하편에서 계속됩니다.)
[필자 소개] 조경희. 일본 출생.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부교수. 역사사회학을 전공했고 식민주의, 이주, 소수자 문제 등을 연구하고 가르친다. 주요 공저로 『전후의 탄생: 일본, 그리고 조선이라는 경계』(2013) 『아시아의 접촉지대: 교차하는 경계와 장소』(2013) 『주권의 야만: 밀항, 수용소, 재일조선인』(2017) 『〈나〉를 증명하기: 동아시아의 국적, 여권, 등록』(2017) 『두번째 ‘전후’: 1960-70년대 아시아와 마주친 일본』(201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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