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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연 기자의 사심 있는 인터뷰] 시각예술 활동가 제람을 만나다
서울의 쌀쌀한 바람과는 달리, 기온은 낮아도 포근한 바닷바람이 부는 제주에서 제람(본명: 강영훈) 작가를 다시 만났다. 지난 9월 서울 서대문구에 위치한 청년예술청에서 열린 그의 전시 <유 컴 인, 위 컴 아웃-레터스 프롬 어사일럼>에서 인사를 나눈 후 약 한 달 만이다. 제주에서 만난 작가의 모습은 조금 더 편해보였다. ‘제람’이라는 이름이 ‘제주사람’의 줄인말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제주라는 공간이 그와 좀 더 잘 맞아보였던 탓일지도 모른다. 작가에게 직접 1:1 도슨트를 받으며 둘러본 제주국제평화센터에서의 전시도, 서울에서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새삼 공간의 힘이란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 제람(본명: 강영훈) 작가의 <유 컴 인, 위 컴 아웃-레터스 프롬 어사일럼>(You come in, we come out-letters from asylum) 전시 공식 웹페이지 중 |
<유 컴 인, 위 컴 아웃-레터스 프롬 어사일럼>(You come in, we come out-letters from asylum)은 특히 ‘공간’이 중요한 전시이기도 하다. 제목에서 드러나듯 이 전시는 ‘어사일럼에서 온 편지’다. “어사일럼은 ‘망명’ 또는 ‘정신병원’이라는 의미를 가졌으며, ‘망명’의 의미로 쓰일 때는 피난처, ‘정신병원’이라는 의미로 쓰일 때는 가두는 공간으로 각각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고 작가는 설명한다. 이 전시는 “제람이 13년 전 군 복무 중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군 정신병원에 116일간 갇혔던 자신의 경험을 포함하여, 여섯 명의 동성애자 군인의 이야기를 편지의 형식으로 표현한 작업”이다.
편지는 거울 형식의 커다란 문에 증언의 방식으로 쓰여져 있다. 1998년, 2008년 그리고 2017년. 약 20년이라는 시간의 간극 속에서도 반복되는 피해가 있다. 이들의 경험은 같지만 다르고, 다르지만 또 같다. 작품을 세심히 본 사람이라면 6개의 작품 중 하나만 글씨체가 다르다는 걸 알아챘을 것이다. 그건 당사자가 직접 쓴 것이고, 나머지는 제람 작가가 (자신을 제외한) 4명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톤과 맥락을 최대한 살리되, 작가의 편집을 거쳐 쓴 것이다. 작가는 누구의 이야기인지에 따라 이야기 형식이 조금씩 다르다는 점도 짚어줬다. 어떤 이는 직접적인 당사자로서 사건을 서술한 반면, 또 다른 이는 마치 제3자가 서술하듯 거리 두기를 하며 설명했다.
그런 이야기들이 쓰인 커다란 문들은 작은 공간을 만들어 내며 배치된다. 결국 이 ‘편지들’을 읽기 위해선 관객이 그 공간 ‘안으로 들어가야’(You come in) 한다. 공간 안에서 관객인 나의 모습이 비치는 거울에 쓰인 글자들을 읽으며, 나와 이들의 이야기를 겹쳐 보게 된 사람들을 통해 이들의 이야기는 그 공간 ‘밖으로 나올’(We come out) 수 있다. 작가는 그렇게 관객들을 초대하고, 한국 사회에서 가장 금기시되는 것 중 하나인 군대 내 성소수자들의 이야기를 드러낸다.
-서울에 이어 제주에서 전시를 진행하고 있는데요. 관객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관객들과 만난다는 건) 긴장되는 일이죠. 사실 시험대에 오른 기분이었어요. 이 작품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다가갈 지는 제가 예측할 수 없는 부분이니까요. 특히 타인의 이야기를 가져온 것도 있기 때문에, 이야기가 왜곡되지 않아야 한다는 책임감도 있었고요. 서울에서 전시했을 땐 매일매일 전시장을 지켰는데, 관객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제가 배우기도 했어요. 어떤 분이 ‘이제 이 일에 제가 연류되었네요’라고 했는데 그 말이 계속 맴돌더라고요. 내가 관객들을 초대해서 이 일(군대 내 동성애자 차별과 폭력)의 목격자로 연류시켰다는 것. 그리고 전시장에 있다 보면 하루에 한두번씩, 저한테 와서 자신이 겪은 어려웠던 일들을 털어놓으며 울고 가는 분들이 있었어요. 그럴 수 있었던 건, 이 전시 공간이 안전하다고 느끼셨다는 거겠죠.”
▲ 제주 서귀포시 제주국제평화센터에서 10월 11일부터 내년 1월 9일까지 진행되는 제람 작가의 <유 컴 인, 위 컴 아웃-레터스 프롬 어사일럼> 전시장에서 제람 작가 ©일다 |
-관객들은 주로 어떤 사람들이었나요?
“젊은 여성 관객들이 많았어요.”
-군대 이야기를 다룬 전시인데 왜 젊은 여성 관객들이 많았을까요?
“문제의 본질에 대한 공감대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전시에서 다루고 있는 것들(군대 내 동성 성폭력과 동성애자 탄압)이 ‘권력의 문제’라는 걸 알기 때문이겠죠. 그리고 군사주의 문화가 어떻게 사회에 확장되어 있는지, 얼마나 한국 사회에 만연한지에 대한 공감대가 여성들에게 많았던 것 같아요.
한번은 어떤 여성 분이 자신이 성폭력 피해생존자라고 하시더라고요. 정말 자신이 다 부서지는 경험을 했다고요. 그러다 저를 우연히 알게 되어 SNS를 팔로잉 하셨대요. 제가 어떻게 생존해 나가는지 지켜보았고, 제가 피해 경험을 나름대로 해석해 나가면서 뒤뚱뒤뚱 나아가는 모습을 보고 희망을 얻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전시도 보러 왔다고요. 그 분이 이런 얘길 했어요. 이렇게 끔찍한 피해를 겪고 나서도 내가 살아내야 한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생각하다 보니,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보이더라, 다른 사람의 아픔도 보이더라고요. 자기도 그런 아픔을 지닌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어떤 장을 마련해 보고 싶다는 이야기도 하셨어요.
전시 시작할 즈음에 언론에 인터뷰 기사가 나갔는데요. 그 때도 SNS를 통해서 응원 메시지를 보내주거나 자신의 이야기를 나눠준 분들은 대부분 여성이었어요. 남성들도 가끔 있긴 했지만은요. 제 생각에, 제 이야기가 많은 남성들을 좀 짜증 나게 하는 것 같아요. 군대 갔다 온 것 만으로 이미 짜증 나는데, 그 패배의 역사와 불행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는거죠. 제가 하는 이야기는 그들이 보통 하는 ‘내가 군대에서 말야~’와는 전혀 다르기도 하고요. 전 남성들한테 지지 받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웃음)”
-이 전시는 작가의 경험에서 시작된 거잖아요. 사적인 것을 예술화하는 것에 대해 여전히 야박한 평가들이 있는 것 같아요.
“일단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구분한다고 했을 때, 과연 그 ‘공’의 기준이 뭐냐는 의문이 들어요. 지금의 ‘공’은 ‘정상성’에 의존하고, 남성 위주이고, 성과/성취 위주인 것 같은데, 기준이 좀더 다양해질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공적인 영역으로 보여지는 성취와 행복이 있죠. 근데 그 행복이라는 게 가공된 틀에 맞춰져 있기도 하잖아요. 반면 불행은 떨어져 깨진 파편 같은 모양이나, 예측할 수 없는 여러 모양일 수 있고요. 우리 삶의 진실은 거기 있을 수도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 불행들이 우리 안에서 공유되고 잘 소통될 수 있도록, 사적인 영역으로서 우리 역사가 정말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전 가난하게 살았고, 이사를 자주 다녀야 해서 불필요한 건 다 버려야 했어요. 소중한 책이나 물건도요. 그런 점에서 역사라는 것도, (돈과 힘) 있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소수자나 ‘사적 영역’으로 치부되는 사람들의 역사는 너무 쉽게 없어지고요. 귀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돈이 없고 힘이 없어서죠. 그래서 전 예술이나 디자인 등 어떤 창의적인 방법으로 ‘이렇게 해도 역사가 된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 제주에서 진행되는 제람 작가의 전시는 <프로젝트 제주 - 우리 시대에>의 일환이며, 행사 홍보 디자인엔 제람 작가가 작업한 ‘길벗체’가 저정서체로 쓰이고 있다. |
-성소수자 정체성만큼이나 ‘제람’(제주사람)이라는 정체성도 중요한 것 같은데, 그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어요.
“한 때 내 의사와 상관없이 주어진 이름에 대해 불만이 있었어요. 아버지와 그의 가족에 대한 상처가 있거든요. 근데 이름엔 그 흔적이 너무 많이 남아있는 거죠. 성부터 그렇잖아요? 부모님이 이혼했을 때 친권을 어머니가 가져왔는데, 아버지의 걱정은 제가 성을 바꾸는 거였대요. 그 놈의 성이 대체 뭔데 싶죠. 내가 스스로 불리고자 하는 이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했어요.
영국에 유학을 갔을 때 처음 들은 수업이 이주민에 관한 거였어요. 동그랗게 둘러 앉아서 자신의 기원(origin)에 대한 이야기를 하라고 하더라고요. 할머니와 어머니 생각을 했어요. 특히 할머니에게 사랑을 많이 받았거든요.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회사에 장기 휴가를 내고 옆을 지키기도 했고요. 그 때 할머니가 저한테 들려준 이야기가 ‘제람’이라는 정체성을 만들어줬죠. 돌아가시기 전 어느 날, 자신이 4·3 생존자라고 하셨거든요. [제주4·3이란? jeju43peace.or.kr 참조]
할머니가 젊었을 때 학살 현장에 끌려갔는데 총알이 할머니를 비켜나간 거에요. 할머닌 놀라 기절했는데, 몇 시간 뒤에 깨어 보니 모두 다 죽고 자기만 살아있었대요. 그리곤 그냥 집에 돌아와서 애들 밥을 해 먹였다고 하더라고요. 그 이야기를 평생 아무한테도 안 하셨던 거죠. 가족도 몰랐어요. 어머니는 그 일 이후에 태어나셨거든요. 그 총알이 빗나가지 않았다면 어머니도, 저도 없는거죠. 할머니의 얘길 듣고 저도 4·3의 생존자로서 정체화하게 되었다는 얘길 수업에서 하면서, ‘난 제주에서 온 사람, 제람이다’라고 말했죠. 그렇게 제람이 되었어요.
사실 군대에서 겪은 피해 이후, 아등바등 살아보려 했지만 방향을 잃은 채 10년을 보냈거든요. 그러다 도망치듯 유학을 간 건데, 제람으로 정체화하고 제주사람들이 겪은 이 트라우마를 어떻게 시각예술로 다룰 수 있을까를 석사 논문으로 쓰게 되면서 나를 이해하고,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과의 연결,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공부하게 되었어요. 처음으로 진짜 공부를 하게 된거죠. 그 석사논문으로 수석 졸업을 했어요.”
-이름에 굉장한 의미가 있네요. 할머니는 어떻게 평생 그 이야길 안 하셨을까요?
“워낙 내성적이었고, 말을 엄청 조심하는 분이었어요. 타인에 대해 안 좋은 말을 하는 걸 거의 본 적이 없어요. 동네 사람들이랑도 잘 지내셨고요. 말이 안 새는 분이셨으니까요. 전 그게 할머니가 단지 단정한 사람이라서 그런 줄 알았는데… 개인적인 경험과 연결되어 있다는 걸 몰랐죠.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에 유럽에서 4·3 연구하는 일에 제주 현지 코디네이터로 합류한 적이 있어요. 우리 동네 할머니들 이야기를 들으러 갔는데, 다들 할머니를 언급하더라고요. 4·3 이후에 상처 받은 사람, 누군가를 잃은 사람, 너무 외로운 사람들을 할머니가 돌봤다고요. 그 때 일을 잊지 못한다는 얘길 저한테 하시더라고요. 어떤 분은 자신의 아버지가 희생자였는데 아무도 수습하지 않으려 하는 시신을 우리 할머니가 수습해줬다며 평생 감사하게 생각한다는 얘기도 하셨어요. 연구 도와주러 갔다가 그런 이야기들을 들으며 한바탕 울었는데, 할머니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이야기를 이어가고 내 안에서 확장해야 할 몫이 저한테 있는 거 같고요.”
▲ 책 『암란의 버스 | 야스민의 자전거: ‘난민됨’을 배우고 경험한 3년의 여정』(제람 강영훈, 나오미, 박이랑, 김다은, 류혜선. 출판사 제람씨)과 전시 팜플렛 |
-제주에 온 예멘 난민의 이야기를 다룬 작업으로 이미 확장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데요. 책 『암란의 버스 | 야스민의 자전거: ‘난민됨’을 배우고 경험한 3년의 여정』과 <암란의 버스> 영상 작업을 보면서, 작가의 정체성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만약 내가 성소수자가 아니었다면, 한국식 성공 가도를 달리는 ‘일반 남성’으로 그냥 살았을 것 같아요. 한국 사회 질서 안에선 그게 더 유리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내가 성소수자고, 제주에서 살았고, 할머니와 어머니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이 저한테는 너무 중요한 부분이에요. 제 삶의 방향의 키(key)에요. 그 관점으로 세상을 보니까요.
2018년 제주에 예멘 난민들이 왔을 때 전 영국에 있었어요. 한국에서 벗어나 (군대에서 있었던 일들로부터) 조금씩 회복되는 시간을 보냈지만, 내가 이곳 국적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 체류자격도 임시적이라는 사실을 마주하는 시간이기도 했어요. 그래서 제주에 온 예멘 사람들에게 관심이 갔던 것 같아요. 방학 때 무작정 제주로 왔거든요. 예멘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죠. 특히 암란이 예멘에서 돈을 벌기 위해 몰았다는 버스(대우자동차에서 생산한 하얀색 중고 다마스) 이야기가 제 맘에 들어오더라고요. 어떻게든 이 버스의 시동을 다시 걸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2019년에 첫 작업을 준비하면서 생각했던 건, 암란과 나의 거리도 줄이지 못하면 누구한테 무슨 얘기를 할 수 있겠냐는 거였어요. 그래서 그 거리를 줄이기 위한 이야기들을 개입시키기 시작했죠. 난민이라는 이름표가 의아하게 느껴지는, 이혼 후 낯선 곳으로 떠나야 했던 나오미, 유학 생활을 하며 이주민의 경험을 한 제람, 느리다는 이유로 회사/사회에서 배제되는 일을 겪은 숲까지. 난민의 스펙트럼을 좀 넓혀보고 싶었어요.
작년엔 한국에 들어와서 작업을 했는데 코로나19로 여러 어려움이 있었죠. 그래서 난민이 겪는 어려움에 집중하게 되었어요. 예를 들어, 말이 안 통한다는 언어의 어려움. 그런 부분에서 농인의 어려움과 맞닿아 있고. 또 국경과 국적 안에서도 보호 받을 수 없는 성소수자의 어려움과도 맞닿아 있고. 안정적인 노동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어려움과 맞닿아 있고. 이런 것들이 난민과 연결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어요. 난민이라는 존재를 여러 이야기를 가진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서 보여주려고 했죠.”
▲ <암란의 버스>(2020) 제니의 이야기 중 ©제람(강영훈) |
-곧 2021년 <암란의 버스>도 공개된다고 알고 있어요. 이번엔 또 어떤 내용이 담길까요?
“이번엔 난민과 난민 신청자에 좀 더 집중해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해요. 12월 중에 서울에서 공개할 예정인데, 특히 가시화되지 않았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하려고 하고요. 예멘 난민 남성과 결혼한 한국인 여성의 이야기도 포함해서 좀 더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데, 이 부분은 공동작업자들과 아직 논의 중이에요. 난민의 범위, 정의를 어떻게 볼지 늘 고민이죠.
-저도 예전엔 퀴어의 의미를 좁게 해석했는데 최근엔 좀 더 넓게 보고 있거든요. 당사자의 목소리를 뺏는 방식으로 진행되어선 안 되겠지만, 어떤 소수자의 의미와 범위를 확장하는 것, 그렇게 당사자를 늘리는 것도 운동의 방식이 될 수 있지 않나 싶어요. 전 <암란의 버스>에서 다양한 위치의 사람들이 “나는 난민입니다”라고 발화하는 것이 의미 있다고 봤어요.
“암란의 버스 이야기에 포함시키려고 하는 예멘 난민 남성과 결혼한 한국인 여성의 이야기도 그래요. 누군가는 이 사람은 난민 당사자가 아니라고 말하겠죠. 하지만 전 그가 예멘 국적인 난민이 아니어도, 예멘인과 함께 삶을 공유함으로써 당사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작업한 길벗체의 경우에도, 성소수자의 상징으로 시작된 건데(길벗체 홈페이지 rainbowfoundation.co.kr/gilbeot 참조) 지금 굉장히 다양하게 쓰이면서 의미가 확장되었거든요. 기후위기를 말하는 언어로도 쓰이고, 장애인 인권을 말할 때도 쓰이고요. 길벗체가 문화 콘텐츠로서 어떻게 더 확장될 수 있을지 주목하고 있어요. 이것이 단순히 서체로 타이핑 되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문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인지 실험하고 싶고요.”
-할 일이 너무 많은 거 아닌가 싶은데(웃음), 또 계획하고 있는 일이 있나요?
“그림책 『암란의 버스 | 야스민의 나라』에 이어 하나 더 내려고 해요. 우리 동네에 (결혼 이주 여성들로 구성된) 베트남 모계 사회가 있거든요. 여기서 태어난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시작했는데요. 내년이면 19명 중에 6명이 베트남인 엄마와 한국인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에요.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준비 중이에요. 『암란의 버스 | 야스민의 나라』는 아랍어, 영어, 한국어로 쓰여졌는데 이번 책은 베트남어, 한국어 그리고 또 하나의 언어 정도로 쓰여질 것 같아요. 이 다국어 그림책 시리즈는 꾸준히 해볼까 생각 중이에요.
▲ 그림책 『암란의 버스 | 야스민의 나라』(글 제람 강영훈, 그림 장민. 출판사 제람씨, 2020) |
난민들을 인터뷰하고, 다소 불완전하더라도 우리가 어떻게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고, 해석했는지에 대한 기록들을 계속 남기고 싶어요. 때론 그 해석이 충분치 않을 수도 있지만,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쟁점을 던질 수 있는 것들을 하고 싶어요.
그런 점에서 하고 싶은 작업이 또 하나 있는데요. 여성의 공간에 대한 거에요. 주변에선 ‘지정성별 남성인 네가 그런 거 하면 욕 먹는다’고 하는데(웃음) 전 남성들이 여성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고, 시도도 하지 않고, 욕만 안 먹으려고 한다면 계속 어떤 간극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도리스 레싱의 『19호실로 가다』에 나오는 19호실 같은 공간을 제주에서 시도해 보고 싶어요. 각자의 19호실, 내가 오롯이 나로 살아갈 수 있는 공간에 대한 이야기들을 작업화해서 공간에 채우는 거죠. 그 공간에 사람들이 와서 지내는 거에요. 그러면서 자신의 19호실도 인큐베이팅해 볼 수 있도록 여성들을 위한 편안한 공간을 만드는 것. 제가 할 수 있을까 걱정도 되긴 하는데, 너무 하고 싶거든요(웃음) 논의 중인 공간과 단체가 있기도 하고요.”
앞으로의 작업이 기대된다는 말에, 제람 작가는 “김비 작가 같은 사람이 되는 게 희망사항”이라며 “엄마손파이처럼 겹이 다 느껴지면서 담백한 맛이 나오는 작업을 하고 싶다”고 했다. 우리 함께 그런 내공 있는 50대가 되어 보자고 웃으며 얘기하자, 작가는 “일단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것, 재미있는 걸 하려고 한다”고 응답했다.
조금 늦은 나이라고도 볼 수 있는 30대 중반에 예술가로 데뷔한 그에겐 할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척 많아 보였다. 자신의 다양한 경험과 정체성을 자신의 관점으로 내보이고 있는 제람 작가가 쌓아 올릴 ‘우리의 역사’, 그것의 목격자가 된다는 게 즐거울 따름이다.
출처: 성소수자, 제주사람…사적인 이야기를 ‘우리의 역사’로 - 일다 - https://ildaro.com/9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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