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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켈 총리의 리더십 16년 (1부)

 

지난 2일 밤 베를린에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퇴임식이 있었다. 독특한 리더십으로 독일과 유럽뿐 아니라 세계 정치의 중심에 섰던 메르켈 총리의 지난 16년을 돌아보는 글을, 독일 현지에서 정치를 연구하고 있는 김인건 씨가 기고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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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7일,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은 총리로서 마지막 공식 인터뷰에 임했다. 독일 공영방송 도이체벨레(Deutsche Welle)에서 진행된 인터뷰의 첫 질문은 16년 동안 지키던 총리직을 떠나는 소감이었다. “한편으로 기쁘지만, 나는 내 일을 즐거이 해왔기 때문에 총리 일을 수행하던 때가 조금은 그리워질 것 같다.” 자기 일을 즐거이 해왔다는 메르켈의 대답에는 16년 동안 큰 잡음 없이 총리직을 수행하고 떠나는 여유로움이 드러났다. 메르켈은 총리직을 수행하는 동안 어떻게 에너지를 얻을 수 있었냐는 질문에 “호기심이 많기 때문에 다양한 상황에서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것이 에너지를 주었다.”라고 답했다.

 

▲ 독일 공영방송 도이체벨레에서 진행된 마지막 공식 인터뷰에서, 진행자의 말을 듣고 있는 메르켈. 출처: https://youtube.com/watch?v=bUN64DqXnBU&t=600s

 

여성 정치인이자,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인

 

2005년 11월 22일 메르켈은 처음으로 총리에 취임했다. 2006년, 슈피겔지는 메르켈의 임기 첫 1년을 결산하는 기사에서 늦은 시간까지 지지치 않고 정치 현황에 대해 기자들과 기꺼이 이야기를 나누는 그의 모습을 묘사했다. 전직 총리들이 자신들이 피곤해지는 밤이 되면 고압적이고 딱딱한 태도로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과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정부 내각을 운영하는 자유로운 토론 분위기도 언급되었다. 메르켈이 속한 기민당/기사당 연합과 연정 파트너인 사민당은 비슷한 규모의 의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를 효율적으로 이끌어나가기 위해서는 대화의 능력이 필요했다. 부총리이자 노동부 장관인 사민당의 프란츠 뮌터페링(Franz Münterfering)은 실무적이고 효율적으로 운영되는 현 내각과 총리에 대한 만족감을 표시했다.

 

메르켈은 임기 초반부터 지치지 않는 대화와 협상 능력을 통해 국제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2006년 포브스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위에 올랐다. 하지만, 그에게는 국내 정치에서 정국을 주도할 수 있는 강인함이 부족하다는 평가가 따랐다. 임기 초반까지만 해도 메르켈의 능력은 여성적인 소프트스킬로만 종종 평가되곤 했다. 메르켈 자신도 자신의 정치적 특성을 여성이라는 점에 기인한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새로운 선거를 목전에 둔 2009년, 메르켈은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정치 스타일이 ‘여성이자 자연과학자’라는 특성에 기인한다고 밝힌 바 있다.

 

지금에 와서는 메르켈의 정치 스타일은 더 이상 여성적인 것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2006년부터 2020년까지 단 한 번을 제외하고 계속해서 포브스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으로 뽑혔을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인’이었다. 숙고와 경청, 대화와 협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치적 스타일은 계속 유지되었지만, 메르켈의 정치는 16년 동안 자신만의 강함을 증명해냈으며, 필요한 순간에 적절한 결단력과 추진력을 보여줬다.

 

독일인들은 지난 16년 동안 여성 총리만을 경험했고, 메르켈의 정치 스타일은 가정 현대적이며 성별 구분 없이 모든 정치인에게 요구되는 덕목이 되었다. 특히 연정, 연방제, 유럽연합과 같이 복잡한 이해 당사자 간의 협력이 필수적인 독일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독일 대통령 슈타인마이어는 메르켈에게 퇴임증을 수여하는 자리에서 “메르켈이 젊은 세대에게 새로운 형태의 고유한 지도력으로 모범을 보였다”고 언급했다.

 

 

과학자 메르켈, 통일 독일에서 정치인의 길로 들어서다

 

1989년, 양자화학 박사인 메르켈은 베를린에 위치한 동독의 학문 아카데미 물리화학 센터에서 일하고 있었다. 이때까지 메르켈의 삶은 정치와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함께 그의 정치 인생이 갑작스럽게 시작되었다.

 

기존 정부가 무너지고 통일에 대한 전망이 나오고 있었던 동독에는 반정부 시민운동 무대를 중심으로 새로운 정당들이 탄생하기 시작한다. 또한 서독에 있었던 기존의 정당들이 동독에서도 생겨나기 시작한다. 급변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메르켈 또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자신이 가입할만한 정당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가 선택한 것인 신생 조직인 ‘민주변혁’(Demokratischer Aufbruch)이었다. 훗날 메르켈은 당시를 회고하며 아직 조직이 잘 갖춰져 있지 않은 민주변혁에서 자신이 쓸모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고 언급한다.

 

1990년 실시된 동독의 최초 자유 선거에서 민주변혁이 동독 기민당과 선거연합을 이루면서 메르켈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민주변혁의 지지율은 높지 않았지만, 기민당의 승리에 힘입어 선거연합은 통일 직전 동독의 과도기 정부를 이끌게 된다. 그리고 이 정부에서 메르켈은 부대변인 역할을 맡게 된다. 통일 후 민주변혁은 기민당에 완전히 흡수되었고, 메르켈도 기민당에 입당한다.

 

통일이 되면서 메르켈이 근무하던 학문 아카데미는 변화를 겪게 된다. 이 과정에서 메르켈은 학문 아카데미를 떠나 새로운 통일 독일의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한다. 큰 결단이었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지역구에서 48.5%의 득표를 기록한 메르켈은 연방 하원의원이 된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동독 출신의 여성 정치인을 새로운 내각에 포함하고 싶었던 헬무트 콜 총리가 1991년 새 내각의 여성청소년부 장관으로 메르켈을 임명한다. 정치에 입문한 지 2년 만의 일이다. 그리고 1994년, 그는 다시 한번 지역구에서 48.6%의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하고 환경부 장관에 임명된다.

 

▲ 1992년 기민당 전당 대회에서 나란히 앉아 있는 메르켈과 헬무트 콜, 출처: https://deutschland.de/de/topic/politik/angela-merkel-regiert-deutschland-16-jahre-bundeskanzlerin

 

빠른 정치적 성장에도, 메르켈은 헬무트 콜의 정치적 그늘에 있었다. 메르켈을 적극적으로 등용했던 헬무트 콜이 그를 “나의 소녀”(mein Mädchen)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에게는 오랫동안 ‘콜의 소녀’라는 별명이 따라 다닌다. 하지만 메르켈의 정치적 도약은 헬무트 콜에게 등을 돌리면서 시작되었다.

 

1998년 기민당은 16년이나 총리직을 수행한 헬무트 콜을 다시 한번 총리 후보로 내세우며 선거에 임했지만, 사민당에 패배하며 야당이 된다. 여기에다 1999년, 헬무트 콜 재임 동안 기민당이 공식적이지 않은 불법 정치자금을 운용했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당은 혼란에 빠진다. 여기에 발 빠르게 대응하고 나선 것이 메르켈이었다.

 

1999년 12월 22일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너 차이퉁’지에 메르켈의 기고문이 실린다. 헬무트 콜의 흔적을 지우고 당이 앞으로 나아가기를 요구하는 기고문이었다. 메르켈의 정치적 결단과 감각을 볼 수 있는 사건이다. 기고문은 큰 반향을 일으켰고, 당의 많은 정치인들이 메르켈을 ‘아버지를 살해한 딸’이라며 공격했다. 하지만 젊은 당원들과 당 외부에서 메르켈은 많은 지지를 받는다. 그리고 여기에 힘입어 그는 2000년 당대표로 당선된다.

 

위기에 강한 총리, 금융위기를 돌파하고 ‘탈원전’ 결정하다

 

2005년, 메르켈은 독일 연방의 총리가 된다. 메르켈 총리를 설명하는 대표적 상징 중 하나는 ‘위기 관리자’이다. 메르켈이 총리로 재임하는 기간 동안 독일과 세계는 여러 위기를 경험한다. 금융위기, 유로화 위기, 후쿠시마 원전 사고, 난민 위기 그리고 기후 위기까지. 메르켈의 정치는 이런 위기 속에서 자신의 강점을 발휘했다. 대표적인 예가 금융위기와 후쿠시마 원전 사고이다.

 

2008년 미국의 서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리만 브라더스 투자은행의 파산은 독일에도 충격을 준다. 독일의 주요 은행 또한 파산 위기에 처해 있었다. 처음에는 침묵 속에서 정보를 모으고 조언을 구하는데 집중하는 메르켈의 정치적 특성이 사회에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즉각적인 대응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메르켈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메르켈 총리는 차츰 상황을 주도하기 시작한다. 그는 위기에 빠진 금융권을 구제하기 위해 독일연방은행이 자금을 조달하도록 연방 은행장을 설득하고, 의회에서도 이를 위한 예산 4,800억 유로를 통과시킨다. 불안에 빠진 시민들이 은행에서 돈을 인출해 집에 현금을 쌓아두는 상황이 지속되자, 메르켈은 재무부 장관과 함께 대국민 발표를 통해 은행 예금의 안전을 보장하는 약속을 한다.

 

또한 신속하게 경기 부양 정책을 발표한다. 노후차량에 대해 신차 구입 보상금을 지급하는 정책이 도입되었다. 어려움에 빠진 기업이 직원을 해고하지 않고 임금을 줄여 단축 근무를 하면, 임금 손실분을 국가가 보상하는 ‘단축근무제’(Kurzarbeit)도 시행되었다. 2009년 독일의 국내총생산은 5.7% 하락한다. 하지만 단축근무제의 효과로 실업률은 증가하지 않았다. 메르켈의 위기관리 능력은 높은 평가를 받게 된다.

 

금융위기에 대응하는 메르켈의 방식은 자신만의 실용주의를 보여준다. 금융위기 이전까지 메르켈은 노동시장 유연화를 강화하고 사회보장을 축소해 노동에 대한 자극을 높이는 사회개혁을 강화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금융위기가 터지자 메르켈은 이전 계획을 포기한다. 이는 상황에 따라 자신, 혹은 당이 가지고 있던 기존의 노선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새로운 결정을 내리는 메르켈 정치의 특성을 보여준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의 대응도 마찬가지였다.

 

▲ 2011년 6월 30일 탈원전 결정 당시의 독일 연방 의회, 출처: https://base.bund.de/DE/themen/kt/ausstieg-atomkraft/ausstieg_node.html

 

2011년 3월 11일 후쿠시마에서 원전 사고가 일어난다. 이 사건은 핵발전소 운행에 대한 반대 여론이 높았던 독일 사회에서 더욱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자민당과의 연정을 통해 탄생한 메르켈 2기 정부가 2010년 가을 17개 원전의 운행 기한을 늘리기로 결정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메르켈 정부는 신속하게 대응한다. 4일 후인 3월 15일, 메르켈 총리는 다섯 개 주 총리들과 함께 1980년 이전에 지어진 원전 7기의 운행을 최소 3개월 동안 중단하고 철저한 안전 진단을 실시하고, 나머지 원전 또한 안전성을 점검하겠다고 발표했다.

 

3월 27일 치러진 바덴뷔르템베르크주 선거는 핵발전소에 대한 독일 시민들의 경각심을 보여줬다. 이 선거에서 오랫동안 핵발전소에 반대해왔던 녹색당이 직전 선거보다 12.5%를 더 득표하며 2위에 오른다. 58년 동안 바덴뷔르템베르크주에서 집권당 역할을 했던 기민당은 여전히 가장 많은 득표율을 기록했지만, 녹색당과 사민당이 연정에 합의하면서 정권을 넘겨주게 된다. 결국 탈원전에 대한 높은 사회적 지지를 반영하여, 메르켈 정부는 6월 6일 원전 8기의 즉각적 가동 중단과 나머지 원전에 대해 2022년까지 단계적으로 운행을 중단할 것을 발표했다. 정부안은 6월 30일 연방하원에서 600명 의원 중 513명의 찬성을 받아 통과된다.

 

탈원전뿐만 아니라, 징병제 폐지, 최저임금 도입, 동성혼 합법화 등은 메르켈이 상황의 변화와 사회의 목소리에 반응하는 정치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변화였다. 그는 상황에 따라서 자신과 기민당이 아닌 야당에서 적극적으로 요구하던 정책을 수용하는 결정을 했다. 그리고 메르켈의 정치력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독일이 난민에게 전격적으로 국경을 개방한 2015년까지 상승세를 이어간다. (2부에서 계속)  [일다]

 

[필자 소개] 김인건. 대안학교에서 철학 교사를 하다가 독일로 유학,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정치적 평등을 주제로 석사를 마치고 여행가이드를 하며 통번역, 독일 소식을 한국 언론에 소개하는 일을 해왔다. 환경과 지속가능한 삶에 관심을 둔 사람들과 움벨트(Umwelt)라는 연구모임을 만들어 번역을 하고 글을 쓴다. 역사 속 사회의 변화 과정과 이를 해석하는 이론에 관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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