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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의 현장에 ‘퀴어성’을 기입하는 실천은 계속되고 있다

 

남은 인생은요?

미국에서 출판된 한국계 미국 이민자인 저자 성sung의 첫 책을 한국어로 번역한 책이다. 아동기에 한국을 떠난 저자는 현재 대학원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하고 있는 밀레니얼 세대이다. 이민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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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퀴어한 시간들이다. These are queer times indeed.”

 

한 지인이 한국 문화예술 현장의 실천들을 목도하며 이와 유사한 표현을 내뱉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근래 부쩍 늘어난 퀴어 관련 창작물들을 접한 후, 기쁨과 감탄이 뒤섞인 소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누군가는 지금까지 이토록 다양한 퀴어 관련 콘텐츠가 문화예술계를 압도한 적은 없었다며 흥분하고, 또 누군가는 그 현장이 여전히 이성애중심적인 사유에 기울어져 있는 한, 퀴어 콘텐츠가 아무리 많아진다 한들 충분치 않다며 냉소한다. ‘이만하면 살 만한 세상이지 뭘 그리 예민하게 구는가’라며 은근히 면박을 주는 사람도 있고, 이제는 이성애자와 그 작업들에 대한 역차별이 만연하다며 투덜대는 이도 만나게 된다. 그런가 하면, 퀴어 창작자들 사이에서는 간혹 ‘무엇이 퀴어예술인가?’라는 식의 감별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부디 파이 싸움은 아니길 바란다.

 

퀴어물을 적극적으로 향유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명백히 이성애적인 콘텐츠마저 자신의 구미에 맞게 ‘퀴어링(queering)’함으로써 2차 창작물을 제작하는 새로운 생산자 그룹을 조성한다. 공중파 방송의 TV 프로그램들마저 공공연히 퀴어 소재나 퀴어 코드를 차용해 일반 대중의 안방으로 전송하는 시대다. 여하튼 참으로 퀴어한 시절인 것이다.

 

그런데 ‘퀴어’를 다루는 문화예술 콘텐츠의 양적 증가는 마냥 기뻐할만한 일일까? 그렇다면 퀴어 시민권을 지워내기 바쁜 일부 정치인들과 보수 기독교인들의 공조에 힘입어, 벌써 15년째 입법을 미룬 채 계류 중인 차별금지법의 현재에 대해서는 어떤 ‘퀴어한’ 희망을 덧붙일 수 있을까? 어째서 소비자 퀴어시민의 욕망은 환영 받지만, 정치적 퀴어시민의 욕망은 묵살되는가?

 

“퀴어한 시간들, 퀴어한 배치들”

 

서두에서 언급한 문장은 미국의 퀴어이론가 재스비어 K. 푸어의 잘 알려진 논문 「퀴어한 시간들, 퀴어한 배치들(Queer Times, Queer Assemblages)」(Social Text 84-85, Vol.23, Duke University Press, 2005, 이진화의 번역으로 『문학과 사회』 2016년 겨울호에 게재되었다)의 첫 문장이기도 하다. 단순한 의미를 가진 듯 보이는 이 간명한 문장은 사실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은 논의를 이끌어낸다.

 

재스비어 K. 푸어는 2000년대 들어 본격화된 미국 정부의 동화주의적 퀴어 시민권 인정 흐름과, 그로 인해 소비주체이자 입법주체로 부상한 퀴어시민이 미국을 특별한 곳으로 상정하는 ‘예외주의’에 복무하게 되는 상황을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또한 ‘무슬림 테러리스트’ 중엔 결코 퀴어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를 각인시킴으로써 ‘퀴어 워싱’을 통해 무슬림과 미국시민을 완전히 분리시키는 대테러 전략 등을 예리하게 짚으며, 애국주의적이고 인종주의적인 미국의 통치전략이 포섭하려 드는 ‘퀴어성’을 심문대에 올린다.

 

그는 그간 퀴어 진영이 당연하게 채택해왔던 퀴어 ‘정체성’이나 ‘교차성’ 모델이 퀴어신체를 식별 가능하고 관리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규율적인 국가장치에 공모하도록 한다고 본다. 그에게 ‘퀴어’란 본질이나 정체성이 아니라 “사방팔방에서 나타나 우리에게로 다가오”는 것이므로, “흩어져 있으나 서로 연루된 일련의 조직망”인(들뢰즈 식) “배치/아상블라주”로서 퀴어 담론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 <퀴어 애즈 포크>(Queer As Folks 영국 1999, 미국・캐나다 2000), <엘 워드>(The L Word 미국・캐나다 2009, 쇼타임 리부트 2018), <루 폴의 드랙 레이스>(Rue Paul’s Drag Race 미국 2009), <퀴어 아이 포 스트레잇 가이>(Queer Eye for the Straight Guys 미국 2003, 넷플릭스 리부트 2018) 등 영미권 대중문화 콘텐츠들은 한국의 퀴어들에게 거의 시차 없이 전송되고 있다. 온라인 시공간은 ‘지정학적 맥락’을 지워버리는 듯한 착시를 불러일으키지만, 실제 물리적 현실에서는 ‘국적’이라는 정체성을 초월할 수 없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물론 2000년대 초반 미국사회의 정치문화적 맥락과 2021년 한국의 그것 간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 누군가는 미국의 ‘선도적인’ 비판적 퀴어 담론을 그보다 ‘뒤떨어진’ 한국의 상황에 적용하는 것은 무리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시장의 논리가 거대한 범세계적 가치로 부상하는 흐름 속에서 본다면, 그 격차는 조금 다른 감각으로 지각된다. 더구나 전세계적으로 펼쳐진 온라인 시공간은 더 이상 ‘지정학적 맥락’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착시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2000년대 전후에 서구 영미권에서 제작되어 대중적으로 크게 인기를 끌었던 <퀴어 애즈 포크>(영국 1999, 미국・캐나다 2000), <퀴어 아이 포 스트레잇 가이>(미국 2003, 넷플릭스 리부트 2018), <엘 워드>(미국・캐나다 2009, 쇼타임 리부트 2018), <루 폴의 드랙 레이스>(미국 2009) 등의 ‘퀴어물’들은 인터넷 PtoP프로그램을 통해 한국의 퀴어들에게도 거의 시차 없이 전송되었다. (물론 근래에는 이 역할을 ott 서비스가 대신한다.) 실제로 많은 신생 퀴어 커뮤니티들이 레퍼런스로 삼고 있는 것은 한국 퀴어 커뮤니티의 역사가 아니라, 인터넷 팬덤 커뮤니티나 게임 커뮤니티, 그리고 앞서 언급한 영미권의 대중문화 콘텐츠다. 이제 특정 커뮤니티의 문화적 토양은 해당 지역에 축적된 특수한 역사의 퇴적물이라기보다는,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전지구적 양상을 실시간으로 반영하는 초시간적·초공간적·초국적적 산물로 이해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실제로 체감되는 물리적 현실에서는 각 개인에게 부과되는 ‘국적’이라는 정체성이 그저 ‘초월적’이기만 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것은 종종 인종적·계급적·경제적·정치적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탈조선’ 이후 퀴어여성의 자리, nowhere

 

상기해보건대, 어떤 시민권은 유용하지만 어떤 시민권은 전혀 그렇지 않으므로, 2020년에 불어 닥친 팬데믹 위기 전까지 ‘탈조선’과 같은 자기조롱적 유행어는 청년세대의 열망을 반영하는 뜨거운 단어였다. 서구의 ‘선진국’들이 제공하는 “유연한 시민권”을 획득하고자 하는 인구는 점점 많아졌고, 특히 퀴어시민에게 그것은 자기 존재의 긍정을 위해 매우 긴급하고도 간절한 해결책으로 여겨졌다.

 

문화연구자 한우리의 글 「퀴어는 항상 급진적인가—퀴어리버럴리즘과 한국 퀴어시민의 위치성」(『말과활』 12, 일곱번째숲, 2016) 은 이런 상황에 대한 매우 설득력 있는 분석을 제공한다. 이 글에 따르면, 한국 퀴어인구의 대다수는 대한민국이 퀴어 친화적이라고 느끼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의 존재와 권리를 인정받기 위해 국경을 넘어 “서구 선진국”에 자리 잡는 방법을 택한다. 즉 ‘자기계발’과 ‘무한경쟁’이라는 신자유주의의 에토스를 체화한 한국의 젊은 퀴어들은 한국의 정치사회적 토양을 변화시키는 데 관심 갖기보다는, 차라리 자신의 ‘소수자 정체성’을 극복하고 ‘성공한’ 예외적 개인이 되고자 하는 발전주의적 자기서사에 몰입한다는 것이다. 

 

▲ 이정은, 양진아 작가의 협업으로 만들어진 전시 <빌롱잉 노웨어>(Belonging Nowhere) 중. 2021년 9월 24일~30일, SPAY 청년예술청. 사진: 김현석 (이정은 제공)

 

이정은과 양진아의 협업으로 만들어진 전시 <빌롱잉 노웨어(Belonging Nowhere)>(2021년 9월 24일~30일, SPAY 청년예술청)는 ‘탈조선’을 택한 후, 유럽에서 일하거나 공부 중인 또래의 퀴어여성들을 인터뷰한 ‘유사-다큐’를 포함하고 있다. 그들은 각각 서로 다른 인생의 목표를 언급하며 자신이 이주를 결심하게 된 과정을 설명하지만, 공통적으로는 ‘퀴어’로서 한국사회에서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는 점을 주된 이유로 꼽는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들이 서구사회에 진입함으로써 겪어야 했던 인종차별에 대한 새로운 감각이다. 자국에서 사회적 차별과 불안을 야기했던 ‘퀴어’라는 정체성은 유럽에서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또 다른 차별의 구도에 놓이게 된 그들은 결국 그 어디도 아닌 곳, ‘nowhere’에 계류된다. 이정은과 양진아는 동료들의 이주서사를 귀담아 듣고 공명하는 일, 그들의 상태와 감정을 미적 표현의 행위로 치환하여 수행시키는 과정을 제안해 퍼포먼스, 사진, 비디오 등 일련의 예술매체적 해결책들을 담아낸다. 비록 매우 느리고 모호한 움직임으로 번안될지라도, 그것은 희망을 긍정하는 옅은 신호를 송신한다.

 

‘독방’ 안으로 더 많은 이들을 초대하는 작가들

 

‘퀴어이기에’ 차별당한다는 것은 추상적이거나 상상적인 일이 아니라, 당사자들에게는 매우 강력하고 구체적인 가혹행위에 대한 피해경험으로서 실재한다. 더불어 작가들에게 ‘퀴어’라는 위치성은 다만 ‘취향’이나 ‘라이프스타일’ 같은 표현으로만 수렴될 수 없는 ‘정치적인 것’이기도 하다. 퀴어작가들이 종종 ‘정신적 외상’에 준하는 정치적 사건들을 미술언어에 기입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퀴어 자긍심을 담아낸 서체인 ‘길벗체’의 제작자 제람(강영훈)과 매우 급진적이고 논쟁적인 영화감독으로서 주목 받은 바 있는 김경묵이 각각 (미술)전시 <You come in We come out>(2021년 9월 16일~26일, SPAY 청년예술청), <QUARANTINE: 독방의 시간>(2021년 11월 5일~15일, 탈영역 우정국)을 열었다. 군 복무와 관련해 인간의 존엄이 극단적으로 무너지는 경험을 한 두 사람은, 이후 서구 영미권에 속한 미술학교에 진학한다. 서른 중반이 되어서야 ‘미술작가’라는 커리어를 시작한 이들은 자신들의 트라우마를 대면하며 작품을 제작했고, 마침내 공중 앞에 내놓았다.

 

한국 국적의 젊은 남성에게 ‘국민의 의무’로서 지워지는 병역과 군대에서 발생하는 폭력은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남성집단을 매우 기이한 허구적 동질성 안에 (부정적으로든, 긍정적으로든) 묶어두곤 한다. ‘남성 동성애’라는 성적 지향은 이 거대한 남성집단의 규범을 어기는 위협으로 간주되며, 따라서 체벌의 대상이 된다.

 

게이라는 이유로 부대 내 가혹행위의 타깃이 되고 독방에 갇혀야 했던 제람과,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언한 후 병역법 위반으로 수형생활을 시작하면서 동성애자임이 밝혀져 독방으로 보내진 김경묵. 둘은 모두 이 ‘독방’이라는 문제적 상징을 개인의 신체적 기억과 공적 기억을 오가며 조형한 특정 매체와 구조물로 구체화한다. 이들의 작업에서 ‘독방’은 더 이상 외부와의 접촉이 끊긴 고립된 공간이 아니다. 이들은 이 비통한 공간을 더 많은 이들의 목소리와 시선과 움직임들이 개입해 채워가는 곳으로 ‘번역’해낸다.

 

HIV 감염인 작가들의 커밍아웃 파티와 로맨틱 판타지

 

HIV 감염인이라는 조건을 작업의 출발점으로 삼는 최장원과 김재원의 개인전도 연달아 열렸다. 최장원은 자신의 전시에 <HIV 감염 7주년 축하 RSVP>(2021년 8월 14일~30일, 탈영역 우정국)라는 다소 엉뚱한 제목을 달았다. 그에게 HIV 감염인 당사자로서 커밍아웃하는 행위는 그것이 향하는 대상에게도 수행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기념식이나 축하파티의 관습을 차용한 전시장에는 작가와 관객 사이에 빚어지는 어떤 연극적인 표현들이, 마냥 행복하다고만은 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의 기류가 되어 긴장을 더한다. 전형적인 클리셰로서의 디바(diva) 게이가 조종하는 무대가 된 전시장은 왁자한 파티를 치른 후, 이내 고요해진다. 하릴없이 반짝거리는 파티용 소품들과 소란한 수다가 오갔을 테이블들 사이로 나뒹구는 반짝이 콘페티들이 그의 지난 7년의 시간 속에서 바스락거린다.

 

▲ 김재원 작가의 개인전 <로맨틱 판타지> 중. (2021년 9월 3일~19일, 공간 413) 사진: 생동스튜디오 (김재원 제공)

 

한편, 김재원의 개인전 <로맨틱 판타지>(2021년 9월 3일~19일, 공간 413)에서, HIV 감염인으로서 작가의 태도는 사랑의 열광과 회한의 멜랑콜리 사이의 어디쯤을 서성이고 있다. 남성 동성애자로서, 감염인으로서 사랑을 갈구하는 작가의 언어는 매우 섬세하고 조심스럽다. 시종일관 머뭇거리는 이미지들은 익숙한 듯하지만 돌연 낯설다.

 

관객은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만 작가의 감각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모호한 감각들에 드리운 아주 옅은 매혹을 눈치 챈 이들이라면, 그 정동을 넘겨짚거나 이야기에 상상력을 덧대는 식으로, 혹은 잊혀지고 분산되었던 오랜 감각을 그러모아 일깨우고, 조심성을 동원해 작가가 구술하는 세계로 입장해야만 한다. 거기에 아주 여리고 여린 미명(微明)으로만 존재하는 로맨스의 미래가 언뜻 스친다.

 

불화하는 혹은 욕망하는 '퀴어신체’

 

어떤 이들이 희미하고 희미해서 거의 보이지 않을지라도 보다 나은 미래를 애써 낙관할 때, 문상훈은 아예 <No Future>(2021년 9월 26일~10월 10일, 공간:일리)라는 비관적 전시명을 내걸었다. 지정성별 ‘여성’이라는 호명과 부단히 갈등해온 작가에게, 끝내 “미래는 없다”라는 선언만이 가장 명징했던 것일까. 2년 전만 해도 작가는 “Future Queer Is Here(미래의 퀴어가 여기에 있다)”라는 자긍심을 담아낸 네온사인 조각을 전시장의 전면에 걸고 관객을 환대했다. 레즈비언 실천에서 길어 올린 쾌락과 유희로 가득한 미래를 상상하던 그의 고민은 불과 몇 년 사이에 꽤 달라져 있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수염을 갖고 싶어 성형외과를 전전하고, 문신으로 뒤덮인 몸을 기대하며 문신사의 침대에 눕는다. 수염과 문신이 있는 신체 이미지들, 그것이 내포하는 어떤 사회적 기호만이 오직 그가 미래를 가늠할 수 있는 최소한의 단서다. ‘여성’이라는 성별정체성과 ‘동성애’ 라는 성적 지향으로부터 안정적인 자기서사를 구축하던 그에게 이제 ‘여성’은 불화와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퀴어’라는 단어의 의미는 작가의 거듭되는 질문 속에서 자꾸만 자리를 옮겨 다닌다. 그는 다시 ‘퀴어미래’를 상상할 수 있을까?

 

▲ 문상훈 작가의 전시 중. (2021년 9월 26일~10월 10일, 공간:일리) 사진: 양승욱 (문상훈 제공)

 

반면, 남성 동성애자로서 경험하는 성적 쾌락의 여정을 과감히 전시하는 허니듀(듀 킴)의 작업은 모든 면에서 문상훈이 보여준 불화와 위화감으로서의 신체, 그 반대편에 자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자신의 신체가 노정할 수 있는 쾌락화된 감각의 극단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다만 그가 머뭇거리는 유일한 순간이 있다면, 그건 성적 흥분으로 요동하는 신체와 그 흥분을 거절할 수 없는 쾌락으로 밀어 넣는 깊은 어둠, 즉 공포와 위반의 위험을 받아들이는 순간이다.

 

이전에 ‘전시’라는 형식을 통해 보여주었던 ‘피학적 페티시’의 현현인 오브제와 조각물들이 이번에는 ‘극장’으로 자리를 옮겨 관객을 만났다. <정물화 서곡>(2021년 10월 3일~9일, 신촌극장)은 한 회당 오직 네 명의 관객만 입장시켜 BDSM(Bondage-discipline, Dominance-submission, Sadism, Masochism) 행위를 둘러싼 작가의 은밀한 체험담을 공유하게 한다. 그 ‘체험담’은 픽션과 논픽션 사이를 유영하고, 공포와 쾌락 사이에서 진동하며, 금기와 신성함 사이에서 절정에 다다른다. 그 욕망이 실천되든 그렇지 않든, 그의 작업이 발현하는 명징함은 강력한 설득력을 가진다.

 

퀴어미술의 형식적 도전

 

‘남성 동성애자’라는 성별정체성과 성적지향은 그 밖의 다양한 퀴어실천을 수행하는 이들에 비해 그 욕망의 내용이 비교적 분명하고, 그와 관련된 역사적 전범(典範)들을 드물지 않게 찾아낼 수 있다. ‘전범’의 존재는 해당 대상을 또 다른 미술언어로 새롭게 구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하기에, 미술적 형식과 방법론을 연구하고 비평의 언어들을 정교화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

 

기획 단계에서부터 이른바 ‘게이 미감’을 중심에 두고 미술의 형식을 고민한 전시 <Bony>(2021년 10월 1일~11월 20일, 뮤지엄헤드)의 개최는 미술계에서 널리 회자되었다. 이 전시는 회화와 조각으로 매체의 범주를 설정하고, 참여작가를 남성 동성애자로 한정했다. 참여작가이기도 한 최하늘의 기획 하에 아홉 명(조이솝, 전나환, 임창곤, 윤정의, 이우성, 박그림, 김경렴, 이동현)에 이르는 20~30대 젊은 작가들의 작업으로 구성된 이 전시는 비교적 긴 전시기간 동안 대중의 관심을 꾸준히 유지했고, 미술계의 비평적 응답도 획득했다.

 

물론 기존 지배질서의 구도에서 비판적으로 바라본다면, 이런 성취를 퀴어 커뮤니티(혹은 미술계) 내의 남성권력/남성중심주의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조금만 관점을 이동해 생각해보면, 한국적 규범사회, 특히 국내 미술대학이나 미술계의 지지를 거의 받은 적 없던 퀴어미술가들이 주류 미술의 문법을 차용하면서도 동시에 비트는 수려하고 영리한 전시를 자신들의 기획과 자신들의 작업만으로 꾸릴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은 확실히 의미가 있다. 더구나 이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모두 ‘게이’ 작가라는 표식이 요구하는 어떤 전형에 머무르지 않고, 미술적 방법론과 정체성의 제약을 교차시키는 개별 작가 고유의 형식적 독자성을 실험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주류 미술전시의 관습에서 과히 멀어지지 않으면서도 (다소 안전한 방식이긴 하지만) 새로운 미술사적 동향을 제안한다.

 

▲ 최하늘 작가의 기획 하에 9명의 20~30대 남성 동성애자 작가들의 회화, 조각 작품으로 구성한 전시 중. (2021년 10월 1일~11월 20일, 뮤지엄헤드) 사진: 조준용 (최하늘 제공)

 

미술실천에 있어 재료/매체의 실험과 형식적 도전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간혹 그 형식이 ‘내용’을 견인하지 못할 때, 형식주의의 취약함이 드러나기도 한다. 반대로 내용의 강점을 형식이 제대로 담아내지 못할 때, 미술은 공허한 프로파간다의 도구로 쉬이 전락한다. 올해 인디포럼 개막작으로 선정된 홍민키 작가의 <들랑날랑 혼삿길>(2021년 9월 30일~10월 4일, 인디포럼)은 근래 등장한 퀴어미술 실천들 중에서도 매우 탁월하고 정교하게 내용과 형식의 밀도 높은 구조를 건축해낸다.

 

‘포스트인터넷 아트’라는 비평적 용어로써 이 작품의 성격을 성급하게 규정할 필요는 없지만, 그럼에도 ‘인터넷 이후’ 세대가 데이터적 사고체계를 전유하는 형식은 단연 눈길을 끈다. 게다가 가상과 현실을 부단히 연결하고 자극하는 퀴어권리에 대한 프로파간다는 물론, 새로운 ‘가족구성권’에 대한 포기 없는 염원이 놀랍도록 재치 있게 펼쳐진다.

 

‘퀴어’의 존재론과 ‘현대미술’의 존재론

 

‘자기들만의 리그’로 의심받기 일쑤인데다가, 종종 ‘난해함’이라는 편견의 벽에 가로막히는 ‘현대미술’이라는 용어에서 ‘현대’란 의외로, Modern이 아니라 Contemporary의 번역어이다. ‘동시대’ 정도로 다시 번역될 수 있는 이 용어는 그래서 현대미술이 ‘시간/시대 tempo’와 ‘함께 con’하고자 하는 의지, 나아가 시간과 시간을 연결하고자 하는 의지를 포함한다. 퀴어미술가들이 이 시대를 감지하고 그와 동행하는 방식이 넓고도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이루며, ‘고정된 것’이 아니라 오직 ‘생성 중’에 있다는 것을 앞선 사례들을 통해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의 목적은 퀴어전시의 양적 팽창 자체를 의미화하는 데에 있지는 않다. 퀴어전시의 양적 팽창은 미술전시의 양적 팽창 및 각종 지원 사업의 수량적이고 성과주의적인 정책적 전략과 궤를 같이 하는 변화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양적인 변화는 예술정책을 설계하는 정부의 관료적 상상력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가진다.

 

다만, 나는 퀴어작가들이 현대미술의 현장에 기거하는 방식, 각자의 정체성을 통과해 작업실천의 방법론을 구축하고 해체하며 다시 구축하는 방식, 주류 미술제도와 관료적 인프라에 개입하고 협상하는 방식, 나아가 성적 권리로만 축소될 위기에 처한 ‘퀴어성’을 정치화하고 논쟁에 부침으로써 ‘미술’이라는 규범적 미학의 토양을 더 복잡하고 급진적으로 확장하는 방식을 옹호하고 싶었다.(더구나 이 글에서 언급한 전시들은 최근 3개월 내 서울 및 수도권에서 열린 전시들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돌이켜보면, 소위 낙인의 언어이자 배제의 언어인 ‘퀴어’라는 단어가 특정 집단의 ‘자긍심’을 드러내는 용어로 채택됐을 때, 그것은 자연히 권리에의 요청과 타협의 언어로 사용되었다. ‘퀴어’라는 멸칭의 개념적 변신과 갱신을 이끄는 방법으로만 그 용어의 효용성을 증명할 수 있었다. ‘수행’함으로써만 ‘퀴어’할 수 있다.-나는 이것이 현대미술의 존재론과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한국 현대미술의 현장에 퀴어성을 기입하는 실천은 계속되고 있다. 3년마다 열리는 베르겐 어셈블리(Bergen Assembly)의 한국판 전시이자, 젠더, 장애, 질병 등에 드리운 ‘죽음정치’를 전면적으로 새로 쓰는 <사실, 망자는 죽지 않았다>(2021년 11월 1일~30일, 토탈미술관 안성요기)가 새롭게 열렸다. 연약한 퀴어 아카이브를 뒤져 초시간적인 퀴어 친족성을 발굴하고 이를 통해 주류 역사의 문법에 도전하는 이강승 작가의 개인전 <잠시 찬란한>(2021년 11월 18일~12월 31일, 갤러리현대)도 순항 중이다. 이강승이 전시제목으로 빌려온, 퀴어작가 오션 브엉(Ocean Vuong)이 쓴 자전적 소설의 제목이 지금, 여기, 우리의 기이하지만(queer) 동시에 미적인 실천을 축복하는 듯하다.

 

“지상에서 우리는 잠시 매혹적이다. On Earth We’re Briefly Gorgeous.”

 

[필자 소개] 정은영. 미술작가. 주로 비디오, 퍼포먼스 등의 형식을 통해 페미니스트-퀴어 미학, 정치학, 방법론을 타진한다. 성별 규범에 불응하는 존재들을 작업 안으로 불러 모으는 일에 관심이 있다. 대표작으로 <동두천 프로젝트>(2007~2009), <여성국극 프로젝트>(2009~현재) 등이 있다.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했으며, 2019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전시에 참여했다.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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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삶을 따뜻하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여성 열두 명이 밀도 있게 들려주는 주거생애사이자, 물려받은 자산 없이는 나다움을 지키면서 살아갈 곳을 찾기 어려워 고개를 떨구는 독자들에게 조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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