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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즘 새지평

부부강간…‘창살 없는 감옥’에서 벗어나

그 여자들의 물결 일다 2021. 9. 12. 09:24

<폭력 그 이후의 삶> 내 쉴 곳을 찾아서

 

-젠더폭력 생존자들이 기록하는 <폭력 그 이후의 삶>을 연재합니다. 젠더폭력을 단지 하나의 사건으로 바라보지 않고, 그 이후에도 계속되는 피해와 저항과 생존의 이야기에 주목하는 본 기획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보도됩니다.

 

남편의 폭력으로 화병까지 얻어 돌아가신 어머니처럼, 나도 화병으로 죽게되리라 하루 하루를 낙심했던 나. 그러나 나는 살아남아서 이 글을 쓰고 있다.

 

▲ 몸과 마음이 힘들 때면 글을 쓴다. 그런다고 편안해지는 건 아니다. 마음 한 켠에는 나중에 아이들을 만나게 될 때 내 마음을 전하거나, 유품으로라도 남기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다큐멘터리 영화 <애프터 미투>(#AfterMeToo: 강유가람, 박소현, 소람, 이솜이 감독, 2021)에 출연한 것도 기록을 남기고 싶다는 마음에서다.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

 

그러니까 서울에 이사 와서 두 달도 안 되어 남편이 또 상을 엎고 물건을 던졌을 때였다. 나는 둘째아이가 숙제하는 걸 봐주던 중에 아이의 눈에서 동공이 커지는 걸 보았고,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맨발로 집을 나왔다.

 

아무 계획도 없이 떠났지만, 한 달 후 결국 가정폭력 피해여성을 위한 쉼터로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는 내가 겪은 모든 폭력들이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알려주었다. 이 사회에 여성에 대한 폭력이 만연하다는 것을 배웠고, 상담과 치료의 기회를 주어 온전히 돌봄을 받았다.

 

나는 가부장제에 대해 배우고 성평등에 대한 책을 읽으며 ‘몰라서 당했구나’ 하고 유년 시절부터 집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결혼으로 창살 없는 감옥에 갇혀서 지낸 날들을 분노했다. 그리고 “무지는 죄를 낳는다”라는 새로운 좌우명을 갖고, 폭력예방교육도 받고, 식사도 거르며 시간을 쪼개 여성폭력에 관한 토론회에 참석하고, 여성인권영화제에서 영화를 보면서 다시는 당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 “모름은 죄를 낳는다.” 내 좌우명이 되었다. 쉼터에서 나와서 여성주의 심리학 관련한 책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에 참여했는데, 아픔을 토해내며 정말 많이 울었다. 트라우마에 관한 책을 읽었을 땐 과거의 고통이 떠올라 의식을 잃고 응급실에 실려가기도 했다. 모든 책이 나에게 살아갈 에너지를 주었고, 특히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를 읽으면서는 내 몸을 용서하고 자유를 주려고 노력하는 시간을 가졌다. 책들의 표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힘이 된다.  ©박정순


아이들을 버렸다는 죄책감에 잠 못 이루던 숱한 날들이 있었지만, 슬픔을 털어내고 새로워지기 위해 회복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몸이 기억하는 긴장과 분노에서 벗어나기 위해 교정치료도 하고, 춤도 추었다.

 

그렇게 열심히 독립을 준비했기에, 폭력에 맞설 수 있고 남은 삶을 씩씩하고 자유롭게 살아낼 줄 알았다. 그러나 혼자 꿀꺽꿀꺽 삼켜왔던 과거의 끔찍한 기억들은 아무 때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밤이나 낮이나 폭발하기 시작했다.

 

오래된 고통, 어디에나 있는 성폭력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 그러니까 사람을 제일 적게 만날 만한 작은 분식점에서 일을 시작했는데, 내 예상과 달리 하루에 100명 남짓한 인원이 밀어닥치는 곳이었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오토매틱처럼 화려한 애드립으로 사람들에게 밝은 모습만 보이며 살아온 기질을 발휘해, 고객 비위 맞추랴 사장님 비위 맞추랴 거의 기절 직전까지 갔다. 그런데 그 좁아터진 곳에서도 김밥 먹던 할아버지가 내 엉덩이를 만진다. 남자 사장은 볼 때마다 ‘살빠졌네’ ‘살쪘네’ 하며 추근댄다.

 

그럴 때면 지금까지 무수히 많이 당해왔던 성추행이 겹쳐진다. 20대 시절, 아침 일찍 우산을 쓰고 콧노래를 부르며 시장 골목을 지나 출근하던 길에 어떤 남자의 손이 나의 성기를 잡고 다른 한 손은 나의 목에 칼을 들이댔던 사건 때문일까. 지금도 나는 집 밖을 나서면 미간을 찌푸리고 눈을 번뜩이며 주먹을 꼭 쥐고 욕을 하면서 걸을 때가 있다.

 

성폭력은 내가 겪은 가장 오래된 고통이자, 지금도 나를 힘겹게 하고 때로 미치게 만드는 경험들이다.

 

나는 오남사녀 중에 막내였다. 조각난 유년 시절의 기억을 모아보았을 때, 아버지란 인간은 항상 술에 취해 냄새나는 주둥이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고 바위 같은 손으로 얼굴이든 어디든 되는대로 후려쳐댔다. 내가 8살이던 해, 어머니는 복수가 가득한 흉한 몰골을 하고 우리에게 험한 말을 퍼부으면서 돌아가셨다. 형제자매들은 살기 위해 외지로 떠나고, 나와 아버지만 남겨졌다. 먹을 거라곤 어머니가 생전에 담가둔 구더기 가득한 젓갈뿐이었다. 아버지는 술만 먹었고, 나는 많이 굶었다.

 

그러다 소를 키우겠다며 9살 많은 오빠가 집으로 내려왔을 때, 난 더이상 배고프지 않을 거란 생각에 너무 기뻤다. 오빠가 날 돌봐줄 줄 알았다. 그러나 어느 날 밤, 내 가슴을 누르는 커다란 바위 같은 무게에 잠이 깼다. 숨이 막혔고 통증이 느껴졌다. 내가 아프다고 하니, 아버지라는 작자도 잠에서 깼는지 일어나 내 머리맡을 지나 토방으로 나가 앉았다. 아들을 제지할 생각도 하지 않고 앉아있는 아버지를 나는 일어나서 물끄러미 바라봤던 기억이 있다.

 

쇠죽 쓰느라 아궁이에 장작이 넘치던 겨울, 작디작은 나는 말없이 시뻘건 피가 묻은 속옷을 장작 속으로 던졌다. 다행히 키우던 소들이 다 죽어서, 가해자는 다시 도시로 떠났다. 사실 나는 내게 일어난 일들이 무엇인지 인지하고 평가할 수 없는 나이였다. 그저 실어증 걸린 아이처럼 지내며 학교도 가는 둥 마는 둥, 정신이 나간 것처럼 먼 산만 바라볼 때가 많았다. 읍내에서 자취하는 언니를 기다려봤지만, 토요일 막차가 들어오는 신작로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아도 내가 중학생이 될 때까지 언니는 거의 오지 않았다.

 

▲ “8살의 나”(박정순, 2021) 아빠의 방임 속에서 굶주리고 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했던 유년의 나를 나조차도 스스로 버렸기 때문에, 그 시절을 표현도 하지 못하다가 겨우 용기 내어 그린 그림이다. 무거운 눈꺼풀, 갇혀버린 심장, 메마른 눈동자, 얼어붙은 영혼이 보인다.


우울이 심해졌던 고등학교 시절, 말이나 해보고 죽자 싶어서 넷째 오빠에게 전화를 했다. ‘내가 피 묻은 팬티를 태웠었어’ 했더니, ‘니가 잘못 알고 있는 거야. 내가 치질이 있었던 거야’ 한다. 당시 스물두 살이었던 언니에게도 성폭행을 당했었다고 얘기했더니, 내게 입 다물라 했다. 모두가 침묵했고 자기들 살아내기 급급했다.

 

부부강간

 

나는 성폭행을 당하고도, 달리 갈 곳이 없었기 때문에 커서도 넷째 오빠와 새언니를 졸졸 따라다니며 그들이 시키는 대로 했다. 따뜻한 집밥이 그리워서 언니 오빠들을 찾았지만 그들은 나에게 일을 시키고 조카들을 돌보게 할 뿐, 나를 돌봐주는 이는 없었다. 그 누구도 나를 불러주지 않는데, 치킨집을 하던 넷째 오빠만이 나를 자꾸 불러서 먹이려 했다. 나는 그 치킨을 먹을 때마다 탈이 났다.

 

전남편은 바로 그 넷째 오빠가 소개한 사람이었다. 그는 폭력적일 뿐 아니라 경제적 능력도 없었다. 나는 이십 대 때 정말 아끼고 아껴서 벌어 모은 돈으로 결혼 자금을 대고, 남편의 협박에 못 이겨 비자금까지 내놓았지만, 그는 사업한다며 빚만 늘렸다.

 

이미 결혼 전에 그가 별 이유도 없이 자신의 차 유리창을 대형 망치로 박살 내는 걸 목격했을 때, 그것이 데이트 폭력이며 그가 얼마나 폭력적인 사람인지 직감하고 벗어났어야 했지만, 나는 매번 그런 상황에서 모든 것을 파악하기가 너무나 힘이 들었다. 그는 내 뺨을 때리고, 협박하고, 물건을 불태우고, 유년의 궁핍으로 인해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음식들을 벽에 패대기쳤다. 첫째 아이가 두 돌쯤 되었을 때, 남편이 소리 지르며 나를 때리는 것을 보고 아이가 어쩔 줄 몰라 울던 장면이 떠오른다.

 

무엇보다 성적인 폭력이 나를 가장 괴롭혔다. 만삭 때까지 빈번한 섹스를 해줘야 하는 그 끔찍함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내 몸은 딱딱하게 굳어졌고, 그의 성기가 뱃속 아기의 머리를 찌르는 상상을 했다. 남편이 하던 일을 접고 다른 지역으로 건설 일을 하러 다녔을 때, 그가 옆에 없는 시간이 너무나 편안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한 달 일하고 두 달 쉬고… 그가 집에 있는 날이 많아지면서, 나는 죽어가고 있었다.

 

어느 날, 곳곳에 멍이 퍼렇게 든 내 몸을 본 지인이 남편에게 맞은 거 아니냐며 지역에 있는 상담소에 전화해보라고 했다. 나는 당장 연락을 했다. 그런데 그 상담원은 남편이 가끔 때리는 건 가정폭력이 아니라고 했다. 분위기가 안 좋을 때는 피하거나 더 잘 해주란다. 내 마지막 말은 “아, 그래요. 제가 더 잘 해줘야겠네요”였다. 신은 나를 버린 것이 확실했다.

 

▲ “살려고 엄청나게 애쓰는 나”(박정순, 2020) 사람에 대한 공포 속에서 불면에 시달리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 하루하루 이겨내는 나. 내일은 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한 두려움이 가득한 내 모습을 그렸다.


속죄, 나의 아이들

 

결혼과 동시에 임신이 되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던 순간부터, 원치 않는 섹스와 피임 실패로 셋째 아이를 낳을 때까지 나에게는 ‘사랑한다’는 감정을 갖는 일도 쉽지 않았다.

 

첫아이를 낳고 추운 겨울에 혼자 방에서 산후우울증과 싸워야 했던 시기, 백일이 지나도록 ‘엄마야, 아가야’라고 불러준 적이 없다.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중고, 새 책 해서 4만 권이나 벽지 대신 허술한 벽을 채워주었을 때, 그런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지만 아이들에게 한 번도 ‘어떤 책이 재밌냐’ 묻지 않았다. 그저 아이들에게 이로울 것이라 생각하고, 아이들이 책을 읽고 있는 걸 보며 흐뭇해했을 뿐이다.

 

내가 아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한 부분은 음식과 교육이었다. 외식할 돈을 아끼려고 치킨이나 피자, 쿠키 등을 직접 만들고 생일 파티 준비도 거하게 했다. 그러나 뒷정리를 하다 지치면 결국 애들한테 짜증을 냈다. 실컷 재밌게 공원에서 놀고 들어와서, 저녁 준비를 하다가 힘들어지면 화를 냈다. 나는 항상 불면에 시달렸는데, 아이들에게는 늦게까지 안 잔다고 나무랐다.

 

특히 남편이 안 보이면 아이들을 더 닥달했다. 숙제 끝내고 놀아라, 정리해라 등등. 남편이 들어와서 애들이 나태해져 있다며 엄동설한에 내쫓기도 하고, 나를 괴롭힐 목적으로 애들을 괴롭혔기 때문에 나는 내 손으로 애들 버릇을 잡으려 했고 모진 말을 하며 달달 볶았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니, 애들도 아빠가 나가면 쉬고 싶었던 거였다. 남편이 외지로 일 나갈 때는 아이들에게 자유를 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왜 나조차 아이들을 불안하게 만들었을까. 아이들 마음을 몰라준 게 너무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계속 미안할 것이다.

 

▲ 다큐멘터리 <애프터 미투>(#AfterMeToo, 2021) 이솜이 감독 편에 출연한 내 모습.


집, 영혼이 있는

 

지나온 시간을 통해, 억압된 공간에서는 그 어떤 것도 약이 되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살아온 집들은 텐트 같은 곳이었다. 영혼이 없는 공간에서 자라면서 나는 집의 소중함을 몰랐다. 20대 때는 끼니도 거르며 돈을 모으면서, 어리석게도 낡은 자취방에서 살며 일하고 들어가 겨우 잠만 자고 나오곤 했다. 결혼해 살았던 집은 시댁 밭에다가 철제 기둥을 박고 샌드위치 판넬로 연결한 가건물이었고, 그곳에 장판만 깔고 세간살이를 들였다. 쉼터에 와서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지만, 내게 집이란 곳은 여전히 텐트 같은 장소다.

 

혼자 살게 되면 위층 아래층 옆집 앞집 등 주변으로부터 침입자가 있을 거란 두려움에 셰어하우스에서만 지내다, 올해 단독으로 살게 되었다. 혼자 자유롭게 지낼 수 있다는 기쁨도 잠시, 문득문득 그동안 살아온 집들에서 겪은 악몽이 떠올라 통증이 나를 잠식하곤 한다. 태어난 집도, 형제자매의 집도, 결혼생활을 했던 집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공간이었다. 이 세상 어디에도 내가 쉴 곳은 없었다.

 

나는 미래에 대한 꿈을 꿔보지 않았고 도무지 모르겠지만, 온기가 있는 집에서 살고 싶다는 희망을 가져본다. 햇빛이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고 빨래가 잘 마르는, 외부 시설과 내부 시설이 튼튼한, 난방이 잘 되는 집. 교회와 시장이 가깝고, 일터가 가까운 곳. 방음이 잘 되어 피아노를 쳐도, 노래를 해도, 춤을 춰도,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그곳. 좋은 이웃들이 주변에 살아서 서로를 지켜주는, 그런 공간에서 살고 싶다

 

지금 나는 중학생 시절부터 시달렸던 수면장애와 의식이 없어짐, 가슴통증, 과호흡 등 양극성 정동장애, 정서불안, 조울등 진단을 받고 치료 중이다. 병원에 입원했을 때 거의 매일 주치의 선생님이 면담을 해주고, 응원도 해주시고, 나아갈 방향의 예시도 알려주려 애쓰셨다. 항상 사람 앞에서 긴장하기 때문에 의사와 만나는 것도 꺼렸는데, 다행히 좋은 선생님들을 만나 좋은 치료를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몸을 가누기 힘든 통증들이 찾아오면 더 버티지 않고 입원할 생각이다.

 

치유는 내 마음처럼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긴 여정이라는 것을 이제는 받아들인다.

 

▶ 애정결핍과 공동의존의 회복 『남은 인생은요?』

 

남은 인생은요?

미국에서 출판된 한국계 미국 이민자인 저자 성sung의 첫 책을 한국어로 번역한 책이다. 아동기에 한국을 떠난 저자는 현재 대학원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하고 있는 밀레니얼 세대이다. 이민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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