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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배 하 전쟁범죄로 위안부 문제를 소추하려면

 

가장 어두운 시기를 뚫고 나온 것이 국제인권법과 국제인도법이라는 말은 보편적인 감동을 준다. 그러나 인권과 인도주의를 법으로 규정해야 할만큼 처참한 폭력과 지배를 행사한 제국들이 곧 국제법의 본고장이라는 사실을 잊을 수는 없다. 보편적인 감동은, 스스로를 ‘보편’으로 자처한 서구열강에 의해 저질러진 폭력의 귀결과 닿아 있다.

 

1948년 발표된 <세계인권선언>은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반성에서 나왔고, 1949년에 채택된 4개의 <제네바협약>도 제2차 세계대전을 반영한다. 인권, 인도, 평화를 말할 때조차 국제법은, 마치 달의 밝은 면만 보여주는 밤 같다. 달의 이면에서는 법은커녕 이름도 없는 그/녀/들이 차갑게 식어갔던 게 아닐까?

 

▲ 세계인권선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은 유엔 홈페이지에 500개의 언어로 번역되어 있다. 2018년에는 세계인권선언 70주년을 맞이하여 130개국의 80개 언어로 세계인권선언을 낭독하는 영상이 만들어졌다. https://un.org/en/udhr-video


국제법 안에 ‘위안부’ 생존자의 말을 새겨넣을 수 있을까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20주년을 목전에 둔 작년 가을, 국제법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던 분위기 속에서 <국제법X위안부> 세미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세미나에서는 국제법에 대한 기대만큼이나 거리감도 공존했다. 최근 미얀마 민주화 운동을 통해서도 다시 절감했지만, 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발생하고 있는 전쟁, 내전, 식민지배, 독재와 그 속의 젠더기반 폭력으로 고통받을 때, 국제법이나 유엔은 과연 얼마나 실질적인 힘이 될까 하는 의문 때문이다. 더구나 ‘위안부’로 끌려갔던 식민지 여성에게 국제법이란 과연 무엇일 수 있(었)을까?

 

올해 증언 30주년을 맞이하는 김학순은 이렇게 말한다. “어떻게 내 원통한 심정을 풀 수 있겠는가. 이젠 더 이상 내 기억을 파헤치고 싶지도 않다. 한국 정부나 일본 정부나 죽어버리면 그만일 나 같은 여자의 비참한 일생에 무슨 관심이 있으랴는 생각이 든다.”(김학순 구술, 이상화 정리,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한국정신대연구소 편, 「되풀이하기조차 싫은 기억들」, 『증언집1: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한울, 1993년, 44쪽)

 

▲ 김학순 구술, 이상화 정리,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한국정신대연구소 편, 「되풀이하기조차 싫은 기억들」, 『증언집1: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한울, 1993년, 44쪽


위안부의 증언이 각주로 붙어 있는 『한명』(현대문학, 2016)을 쓴 김숨은 위안부는 자신의 이름도 쓸 수 없는 경우가 많았고 따라서 누군가가 그/녀/들의 이야기를 듣고 전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중앙일보 X 인터파크도서 <작가의 요즘 이 책 _ 04 소설가 김숨>, 2018. 10. 18) 전방위적으로 젠더기반 폭력에 노출되고 있는 동시대 ‘여성’들에게도, (국제)법 안에 젠더를 기입한다는 이야기는 너무 멀고 더디기만 하다.

 

올해 4월 21일 서울중앙지방법원 제15민사부(재판장 민성철)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20인이 일본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를 ‘각하’한다.(관련 기사: 양현아, 「'위안부' 소송 각하... 인류 공동체에 대한 책임은?」, 『일다』, 2021.6.18. https://ildaro.com/9070) 각하란 소송이 성립할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고 판단하고 원고와 피고의 잘잘못을 다투는 심리 자체를 허가하지 않는다는 통보로, 실질적인 패소 판결이다.

 

위안부 피해자들이 오랜 시간을 침묵하다 겨우 용기를 내어 법의 문을 두드린 순간, 목전에서 법의 문이 ‘탕’하고 닫힌 것이다. 여전히 또한 근원적으로 ‘국제법’은 남성화된 식민자의 언어이자 시스템임을 다시 한번 증명해 버렸다.

 

사정이 이러하니, 국제법 안에 그/녀/들의 이야기를 새겨 넣을 수 있을까 라는 질문 이전에, 왜 저처럼 꿈쩍도 않는 (국제)법 안에 굳이 그/녀/들의 이야기를 새겨넣어야 하는가 라고 묻게 된다.

 

우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법X위안부> 세미나를 했던 이유는 “국제법은 곧 실천”이라는 자코토(세미나 튜터: 조시현) 선생님의 이야기 때문이었다. 이때 ‘실천’이란 말에는, 국제법의 권위나 과거 위안부 연구·활동의 시좌와는 ‘다른 곳’에서 시작함으로써, 더 많은 초보 위안부 연구자와 활동가가 함께하면 좋겠다는 바람도 담겨 있었다.

 

세미나의 튜터인 조시현 선생님이 스스로를 ‘무지한 스승 자코토’(조제프 자코토는 자크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에 등장하는 선생님이다. 선생인 자코토는 네덜란드어를 몰랐고 학생들은 프랑스어를 몰랐다. 서로 소통할 공통언어가 없는 상태에서 자코토는 두 언어가 모두 쓰여진 책을 기반으로 프랑스어를 가르친다. 이윽고 학생들은 선생의 가르침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힘으로 프랑스어 사용법을 획득한다)라고 칭했던 데에는, 권위에서 해방된 국제법에 대한 희구와 세미나 멤버에 대한 믿음이 담겨 있었다. 또한 이는 국제법을 통해서 위안부 생존자의 말과 삶을 만날 때마다 ‘우리’가 새겨야 할 태도이기도 했다.

 

▲ 자코토(조시현) 선생님.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에 남한 측 검사로 참여했다. (출처: KBS <시사직격- '위안부' 공개 증언 30년 김학순, 다시 우리 앞에 서다>, 2021년 8월 13일 방송 캡처)


국제법에 ‘젠더’를 기입한 맥두걸 보고서, 식민주의 문제는?

 

국제법은 식민성을 벗어날 수 있는가? 국제법에 ‘여성’의 자리는 있는가? 이 실천적 물음을 갖고 시작한 ‘우리’에게 <맥두걸 보고서>(McDougall  Report, UN Doc. E/CN.4/Sub.2/1998/13, 1998년 유엔인권소위원회에 제출된 게이 맥두걸 특별보고관의 최종보고서. 인용은 조시현 번역본에 따름)는 국제법에 젠더를 기입한 드문 예로 다가왔다.

 

게이 맥두걸(Gay McDougall)은 보고서 13항에서 “국제인도법, 인권법, 형사법을 비롯한 국제법의 발달은 남성의 삶, 특히 공적 영역에서의 남자의 삶이라는 패러다임에 기초”한다고 꼬집는다. 이어 19항에서는 성폭력에 대한 소추 사례가 적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라고 잘라 말한다. 선례가 부족한 것은 오히려 여성에게 행해지는 폭력 행위를 중대한 범죄로 여기지 않아 대응하지 못한 데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 말은 국제 인도법과 인권법의 ‘관습’적 기반이 얼마나 남성화되어 있는가를 폭로한다.

 

위안부 문제를 여성에 대한 성폭력 및 성노예 범죄로 자리매김한 <맥두걸 보고서>의 배경과 목적에 대해서는 장수희 님이 쓴 「법알못의 유레카!」(https://ildaro.com/8978) 및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노예범죄에 해당한다」(https://ildaro.com/8979) 기사가 알기 쉬운 길잡이가 된다. 두 글은 <맥두걸 보고서>의 1장(보고서의 목적과 맥락)과 2장(범죄의 정의)에 해당되는 내용으로 ‘성노예’라는 정의가 가진 의미를 가시화했다.

 

세 번째 연재글인 이은진 님의 「‘위안부’ 문제는 무슨 죄목으로 어디에 소장을 내야 할까?」(https://ildaro.com/9035)는 3장(성노예와 강간을 포함한 성폭력을 소추하기 위한 국제법적 틀)과 관련한 내용으로, 위안부 문제가 국제법상 어떤 범죄에 해당되는가를 조목조목 보여준다. 특히 이 글은 맥두걸이 국제법에 젠더를 기입했지만, 식민주의에 대한 인식은 결여되어 있었다는 날카로운 지적을 한다.

 

지금까지 연재된 글을 읽어 보면, ‘법알못’에서 시작된 <국제법X위안부> 세미나가 ‘국제법에서 젠더와 식민주의의 문제를 다룰 수 있을 것인가’라는 굵직한 문제의식을 형성하게 된 과정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 미얀마의 소수인종인 로힝야족의 언어로 번역된 <세계인권선언>. 그러나 유엔 안보리를 비롯한 국제사회는 올해 군부 쿠데타에 맞선 미안먀의 민주화 운동을 지지하고 보호하는 일에서도, 그 이전부터 지속되어 온 로힝야족에 대한 제노사이드를 막는 일에서도 무능력했다. 이런 상황에서, 로힝야족에 대한 제노사이드나 미얀마 민주화 운동 속 젠더기반 폭력은 더욱 비가시화되고 있다.


젠더기반 폭력 금지: 국제관습법에 기반한 ‘강행규범’

 

이번 글에서는 3장의 ‘전쟁범죄’에서 시작해 4장(개인 책임의 추궁)과 5장(전쟁범죄자를 수사하고 소추할 의무)까지 연결해 보려고 한다. ‘전쟁범죄’는 위안부 행위에 대한 다섯 가지 죄목 중 마지막에 나온다. 위안부에게 저질러진 성폭력과 성노예 범죄는 주로 전쟁과 연결된다. 그러나 이 전쟁이 식민지배 하에서 진행되었다는 점을 보지 않는다면, 위안부의 자리도 그 이름 아래 뒤엉켜 버린 여성들 사이의 관계도 보이지 않는다.

 

이은진 님도 지적했듯이, <맥두걸 보고서>는 ‘무력충돌’을 전제로 한 전쟁 속 젠더 기반 폭력을 논의하기 때문에, 식민지배의 영향을 반영하지 못한다. 맥두걸은 “강간을 포함한 성폭력 행위가 국제분쟁이 진행되는 동안 적군이나 점령군에 의해 자행되었을 때 제네바협약의 중대한 위반을 구성할 수 있”다고 쓴다.(58항)

 

이때 언급된 <제네바협약> 제4조는 그 적용대상을 “충돌 당사국 또는 점령국의 국민이 아닌 자”로 한정하고 있어서 위안부의 자리가 없다. 당시 위안부들은 일본 제국에 의해 식민화된 조선과 대만의 여성이나, 점령지였던 동남아시아의 여성이거나, 일본인 여성이었다. 조선(에 호적을 둔) 위안부에 한정해서 말하자면, 국적으로는 “충돌 당사국 또는 점령국”인 일본국민이었기 때문에, <제네바협약>의 인도적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일본 정부는 바로 이 점을 악용하여 위안부 문제에 국제법을 적용할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맥두걸 보고서> 부록인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설치된 ‘위안소’에 대한 일본정부의 법적 책임 분석> 중 5장(일본 정부의 반론)의 “D.조선의 지위” 부분을 보자. 맥두걸은 일본이 “노예화와 강간을 금지하는 국제관습법 규범들이 점령지역에서의 민간인만을 보호하고 그 본국에 있는 민간인은 보호하지 않는 전쟁법”에 기반하는데, 당시 일본에 강제병합되어 있던 조선여성들은 “본국 민간인”이었으므로 국제인도법을 적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고 비판한다.(부록 29항)

 

그리고 ‘성폭력과 성노예 금지’는 전시와 평시나 한국의 지위 여하를 막론하고 적용될 수 있는 “국제관습법 위반범죄”이자 “인도에 반한 죄”라고 반박한다. 맥두걸은 우선 전쟁법을 기반으로 한 국제인도법이 아니라, 관습법에 기반한 국제인권법을 통해서 위안부에 대한 법적 처벌의 근거를 마련한 셈이다. 이 견해를 확장하여 조시현은 인도법과 인권법은 서로 근원이 다른 법이지만 다양한 무력충돌에서 인간을 보호하기 위하여 상호 관련되고 있다는 점에서, 두 법 모두가 “모두에 대한”(erga omnes)이라는 의미를 지닌 “강행규범”(jus congens, 국제법상의 절대적 규범으로 어떤 국가도 일탈이 허용되지 않는다)이라고 말한다.

 

위안부 문제를 ‘식민지배 하 전쟁범죄’로 소추하기 위하여

 

더 나아가 맥두걸은 ‘무력충돌’의 의미를 확장시켜, 국제인도법의 맥락에서 전시 성폭력 문제를 다룰 가능성을 연다. 즉 제네바협약 공통 3조를 근거로 ‘무력충돌’을 국제적인 것에서 ‘국내적(비국제적)인 것’으로 확장시켜(67항), 구 유고 슬라비아 내전에서처럼 젠더기반 폭력을 당하고 있는 (난민)여성의 피해를 줄일 수 있는 구제 장치를 마련한 것이다. 이때 예로 드는 것이 아이티 군사쿠데타 이후의 성폭행, 페루의 정부군과 반란군 사이의 충돌 가운데 벌어진 성폭행, 알제리와 미얀마 우간다 남수단 등의 교전에서 지속된 성폭행이다.

 

그러나, 무력충돌의 의미를 국내적 형태까지 확장한다고 해도, 무력충돌의 성격 자체를 재규정하지 않는다면, 식민지배 하 전쟁에서 발생한 위안부 문제를 다루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이 점에서 조시현이 제네바협약 추가 의정서에 대해 “식민지 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민족해방전쟁’(wars of national liberation)과 베트남전에서와 같은 게릴라전에 대응하기 위한 국제인도법의 발전”이라고 했던 것은 중요하다. 최근 대만과 한국의 연구자들은 식민지기 민족해방전쟁의 의미를 폭넓게 파악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이러한 연구성과도 참고하면서 민족해방전쟁을 무력충돌의 하나로 해석할 수 있다면, 위안부 문제에 국제인도법을 적용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왜 위안부 문제를 국제인권법뿐 아니라 국제인도법의 맥락에서 다루는 게 중요할까? 조시현은 한 나라의 통치권자가 국민의 생존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비상사태를 선포할 경우 인권법은 제한될 수 있으며, 이때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인도법이라고 말한다. 식민지배는 비상사태가 일상화된 상태이며, 따라서 피식민자에게는 인권이 없다. 굳이 인도법이 아닐지라도, 인권법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국제법이 있어야 위안부 범죄에 대한 처벌과 배상이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의문이 생긴다. <맥두걸 보고서>는 국제법에 젠더를 기입하고 위안부 문제를 국내적 무력충돌로 해석하여 전쟁법의 틀을 확장했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에 다섯 가지 범죄행위의 틀(인도에 반한 범죄, 노예행위, 집단학살, 고문, 전쟁범죄)을 적용할 때, 왜 ‘식민지배’라는 항목은 넣지 않았을까? 국제법을 만든 주체가 바로 식민주의를 통해 강대국이 된 제국들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국제범죄의 영역이 있는 것은 아닐까?

 

‘달리 갈 곳이 없어서’ 도망가지 못한 식민지 여성들

 

특히, 식민지배가 범죄행위의 하나로 언급되어야 비로소 젠더 기반 폭력의 고통이 조명될 수 있다. 66항에는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법원에 성폭행 및 노예범죄로 기소된 군인 9명에 대한 처벌사례가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성폭행과 노예화를 겪은 이 여성들은 구금된 가정집을 자유롭게 드나들었고 심지어 집 열쇠까지 가지고 있었음에도 도망갈 수 없었다. 그녀들은 “‘군인과 민간인 모두 세르비아 사람들에 둘러싸여 달리 갈 곳이 없었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도 도망갈 수 없었”던 것이다. 맥두걸은 이 예를 4장(개인 책임의 추궁)에서 다루고 있지만, 이는 식민지배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고 여겨진다.

 

▲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nternational Criminal Tribunal for the former Yugoslavia, ICTY). 1991년 이후 구 유고슬라비아에서 일어난 국제인도법 위반을 소추하기 위한 국제사법기관이다. 유엔 안보리 이사회 결의로 1993년 5월에 네덜란드 헤이그에 설치되었고, 2017년 12월 31일부로 1심 재판을 마치고 해산했다. (출처: UN)


위안부 증언을 보면, 그/녀/들은 끊임없이 도망만 생각했으나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고 한다. 이 도망갈 수 없는 상태는, 전기가 흐르는 철조망, 잡혔을 때의 보복 등에 대한 두려움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녀/들은 일본어도 지리도 몰랐고, 돈도 연고도 없었고, 천운으로 고향에 돌아간다 해도 식민지배 하에서 다시 끌려올 수밖에 없었고, 위안소 밖에서도 젠더기반 폭력에 끊임없이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전쟁터 밖은 또 하나의 전쟁터였고, 위안소 밖은 또 하나의 위안소였다. 이처럼 폭력과 지배의 ‘외부’를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이야말로 점령과 식민지배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한편으로 맥두걸은 국제법 형성 기반(조사와 자료 기반, 사용 용어 등)의 한계를 지적함으로써, 식민지배를 사유할 수 있는 지점을 담고 있기도 하다. <맥두걸 보고서> 부록 1항에서 맥두걸은 “위안소”(comfort stations)라는 말은 “불쾌할 정도로 완곡한 말”이라고 비판하면서 “강간 수용소”(rape centres)라고 표현한다. 또한 일본 정부를 처벌하기 위한 판단 근거가 “일본 정부의 자체 조사를 통해 확립된 사실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한계를 밝힌다.

 

자코토 선생님은 이 점을 지적하며, 왜 한국에서는 위안부 범죄에 대한 실태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는가 라고 통탄하기도 했다. ‘위안부’ 문제를 국제법 안에 자리 잡게 하려면, ‘제국’의 아카이브에 박제되어 있는 위안부 자료를 아카이빙할 수 있는 조사지원과 자료공개가 필요하다. 따라서 최근 이뤄지는 위안부 소송의 과정은, 이러한 아카이빙의 결정적 장소이기도 하다.

 

▲ <맥두걸 보고서>는 부록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설치된 ‘위안소’에 대한 일본정부의 법적 책임 분석>을 포함한다. 이 부록은 ‘위안소’를 '강간 수용소'라고 정의하고 그 성격과 범위를 명확히 함으로써 국제관습법으로서 노예제와 노예무역, 전쟁범죄로서의 강간, 인도에 반한 범죄에 해당됨을 밝힌다. 또한 일본 정부의 반론을 하나하나 반박하면서 ‘강간수용소’를 둘러싼 광범위한 범죄행위(강간, 성노예, 감금, 강제노역, 유기 등)에 대하여 실체법의 적용과 구제 방안을 검토한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https://archive814.or.kr/Archives/Type/view/13681


위안부 피해자가 법정을 선택할 수 있을까?

 

이처럼 <맥두걸 보고서>에도 다소 한계가 있지만, 국제법 안에서 젠더 기반 폭력에 대한 인식을 ‘정체성’, ‘장소’, ‘시간’의 측면에서 확장했다는 사실은 명확하다. 이 점은 5장(전쟁범죄자를 수사하고 소추할 의무) 부분에서 더 선명하다.

 

첫째, 보호집단의 정체성을 규정할 때 젠더적 관점을 넣었을 뿐 아니라, 보호집단의 정체성이 공식적·명시적이지 않아도 국제규범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40항) 둘째, 강행규범 위반의 경우는 ‘보편적 관할권’을 가진다. 따라서 세계 어느 재판소에서도(제네바협약 당사국이 아닐 경우에도) 재판을 받을 수 있다.(36-37항) 특히 ‘보편적 관할권’은 공해(公海)에서 활동한 노예상들을 한 국가의 주권에 근거해 처벌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이 개념을 전유하여, 위안부 생존자들이 자신이 원하는 장소에서 재판받을 권리라고 해석할 수 있다.

 

셋째, “국제법상 중대한 범죄의 소추”나 “중대한 침해행위로 인한 배상 청구”에는 “아무런 시효(statute of limitations)가 없”음을 명시한다.(87항) 젠더기반 폭력은 문화적 낙인, 보복의 두려움, 침해행위로 인한 자율적 의지와 능력이 없는 상태가 된 경우 등이 재판에 영향을 줄 수 있으며, 이 피해의 증언을 사회가 들을 수 있을 만큼 성숙해질 때까지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94항)

 

이처럼 1998년에 발표된 <맥두걸 보고서>에 비춰보면, 2021년 4월 위안부 소송에 대한 ‘각하’ 결정은 한국 법원의 ‘지속되는 식민성’과 ‘젠더 감수성 결여’를 그대로 노출시킨 명백한 퇴보다. 판결문은 젠더 기반 폭력이 논의의 핵심이 되어야 함에도, ‘국가면제’(국내 법원이 타국에 대해서 재판권을 행사하지 못한다)의 관습법적 기반만을 문제 삼았다. 때문에 위안부 문제가 성폭력과 성노예 금지라는 강행규범 위반에 해당되고, 세계 어느 법정에서든 재판받을 수 있음에도 소송 ‘각하’ 결정을 내렸다. 이는 정신적, 신체적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피해자들이 안심하고 증언하고 재판받을 수 있는 법원을 선택할 권리를 박탈한 것이기도 하다.

 

위안부 피해자들은 지금도 일상 속에서 생생하게 떠오르는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이처럼 트라우마 속에 “시효없이” 정박된 피해를 증언하려면, 가장 익숙한 언어로 가장 편안한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국제법이 그녀들을 기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들에 의해 국제법이 변형되는 것, 법정이 소송 가능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위안부 생존자들이 스스로의 법정을 만들고 선택하는 것, 그것이 가능해지는 ‘만물공법’(萬物公法/萬物共法)을 상상해 본다. (2편에 이어집니다.)

 

[참고 자료]
-프랑수아 드스메 글, 이희정 옮김, 『세계인권선언의 탄생』, 푸른지식, 2018년, 19쪽
-김학순 구술, 이상화 정리,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한국정신대연구소 편, 「되풀이하기조차 싫은 기억들」, 『증언집1: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한울, 1993년
-조시현, 「Ⅵ. 발제강연(1)] 국제인도법과 인권법의 관계, 『인도법논총』 20, 대한적십자사 인도법연구소, 2000년 4월

 

[필자 소개] 신지영.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부교수. 1945년 전후 동아시아 유민의 이동과 코뮌을 ‘기록문학’에 초점을 맞춰 연구하고 있다. 난민·장애·동물 활동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이를 역사 속 동아시아 마이너리티의 경험과 연결시키는 연구 및 글쓰기를 시도하고 있다. 저서로는 『不부/在재의 시대』(소명, 2012), 『마이너리티 코뮌』(갈무리, 2016), 『동아시아 속 전후일본(東アジアの中の戦後日本)』(臨川書店, 2018, 공저), 『난민, 난민화되는 삶』(갈무리, 2020, 공저), Pandemic Solidarity(Pluto Press, 2020, 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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