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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 시대의 정치! 독일 녹색당 이야기]③

 

※ 기후변화와 후쿠시마 원전사고,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며 ‘기후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정당’으로 떠오른 독일 녹색당에 관한 정보를, 독일에서 지속가능한 삶과 녹색정치를 연구하고 있는 연구 중인 김인건, 박상준, 손어진 세 필자가 들려준다. [편집자 주] ildaro.com

 

40년 전 서독, ‘정당에 반대하는 정당’이 탄생하다

 

1981년 10월 10일, 서독 공영방송의 저녁 뉴스 프로그램인 타게스샤우(Tagesschau)는 다음과 같은 멘트로 시작한다. “안녕하십니까, 시청자 여러분! 서독 역사에서 가장 큰 대규모 시위가 평화롭게 끝났습니다. 평화와 군비 축소를 외치기 위해 독일연방 수도에 30만 명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타게스샤우는 이날의 시위를 상세히 보도했다.

 

“우리는 모든 핵폭탄과 원자로를 거부합니다. 전 세계 도처에 있는 수많은 핵발전소 덕에 우리에게는 핵전쟁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증가하는 핵발전소와 핵전쟁의 위협을 반어적으로 표현한 녹색당의 아이콘 페트라 켈리(Petra Kelly) 목소리 또한 보도되었다. 그는 독일 평화운동의 상징적 인물이다.

 

▲ 1981년 10월 10일 핵무기에 반대하기 위해 수도 본에 모인 독일 시민들, 출처: Rob Bogaerts https://bit.ly/3Cg57Uj


이날의 시위는 나토(NATO 북대서양 조약기구)의 핵무기가 독일에 배치되는 것을 반대하는 시위였다. 1979년 나토와 나토의 유럽 회원국은 ‘이중 결정'이라 불리는 협상에 합의한다. 한편으로 소련과 핵무기 감축을 위한 협상을 진행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협상의 성과가 없을 경우 중유럽에도 중거리 핵미사일을 배치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소련이 동유럽 국가에 배치한 중거리 핵무기에 공격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독일 총리였던 사민당의 헬무트 슈미트는 나토의 이러한 전략을 적극 지지한다. 하지만 미국은 평화 협상을 제대로 진행하지 않았고, 핵무기 배치는 가시화되었다. 분단으로 인해 동독과 대치 상황에 있던 서독 시민들에게 유럽의 핵전쟁은 현실적인 위협이었다.

 

독일 녹색당의 역사를 소개할 때, 1981년의 시위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 중 하나이다. 평화와 비폭력은 생태, 사회, 기초 민주주의와 함께 녹색당의 창당 강령에 새겨진 근본 가치였다. 저항의 정당(Protestpartei), 정당에 반대하는 정당(Anti-Parteien-Partei)이라 불렸던 초기 녹색당에게 핵발전소와 핵무기 배치를 반대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정치적 동력이었다.

 

핵발전과 핵무기에 반대하는 시민들, 정치조직 결성

 

1970년대 반핵 운동은 독일 시민사회 운동의 중심이었다. 1974년 독일 경제부는 1985년까지 50개의 새로운 핵발전소 건설을 계획했다. 핵발전소에 대한 반대 여론이 커졌지만, 연방의회에 있던 3개의 정당 중 그 누구도 핵발전소를 반대하지 않았다. 핵발전과 냉전은 공포를 자극하는 단어였고 환경운동과 평화운동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반응했다. 곳곳에서 핵발전소에 반대하는 시민조직이 만들어졌다.

 

1977년, 니더작센주의 핵발전소 건설 예정지역에는 선거를 위한 연합인 ‘환경보호 녹색 명단 GLU)’이 만들어졌다. 반핵운동이 정치조직을 결성하기에 이른 것이다.  GLU는 주 의회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3.7%라는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두었다. 곧이어 다른 지역에서도 유사한 선거 연합들이 만들어졌다.

 

1979년에는 유럽의회 선거를 위해 독일 각 지역의 반핵운동 조직이 연합한 ‘또 다른 정치적 연합/녹색당’(SPV, Sonstige Politische Vereinigung/Die Grünen)이 만들어졌다. 비록 이들은 의석 획득을 위한 최소 기준인 5%를 달성하지 못했지만, 3.2%를 득표하며 약 450만 마르크의 선거 지원금을 정부로부터 받을 수 있었다. 이 돈이 녹색당 창당을 위한 자금이 되었다. 녹색당에는 독일 정부의 돈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정당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저항의 정치’ 1980년 독일 녹색당의 창당 풍경

 

독일 녹색당의 역사는 1980년 1월 12일과 13일 칼스루에(Karlsruhe)에서 열린 창당대회와 함께 시작되었다. 이날 모임에는 각 지역에서 모인 1,004명의 대표가 참석했다. 이들은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다양한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1968년 사회 곳곳의 권위주의 시스템에 저항하며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반정부 인사들, 환경운동가, 반핵 활동가, 평화운동가, 보수주의자, 동물권 운동가, 페미니스트, 공산주의자 등.

 

녹색당은 1980년 연방의회 선거에서 1.5%의 지지율로 의회 진출에 실패한다. 하지만 같은 해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의회에 선거에서는 5.3%의 지지율로 주 의회 진입에 성공한다.

 



▲ 1983 의회에 입성하기 위해 걷고 있는 최초의 녹색당 연방의원들. 게르트 바스티안(왼쪽부터), 페트라 켈리, 오토 실리, 마리루이제 벡, ©Archiv Grünes Gedächtnis https://gruene.de

 

녹색당이 처음으로 연방의회에 진출한 것은 창당 3년만인 1983년이다. 녹색당은 5.6%의 득표율로 연방의회에서 27석의 자리를 차지했다. 이로써 1961년부터 유지되던 기민당/기사당 연합, 사민당, 자민당의 연방의회의 3당 체제는 끝이 났다. 집권당이었던 사민당은 많은 의석을 잃었고, 녹색당이 사민당이 잃어버린 표 중 상당수를 흡수한다. 나토의 ‘이중 결정’과 중거리 핵무기 배치 가시화는 집권당이었던 사민당의 지지율 하락의 주요 원인 중 하나다. 당시 핵무기 배치에 대한 반대서명에 500만 명의 독일인이 참여했다.

 

페트라 켈리, 현실주의 정치인 마리루이제 벡(Marieluise Beck), 과격 시위대 출신 요슈카 피셔((Joschka Fischer), 전직 군 장성 출신이자 평화운동가인 게르트 바스티안(Gert Bastian), 좌파 테러조직인 적군파의 변호를 맡았던 오토 실리(Otto Schily) 등이 최초의 녹색당 연방 의원이 되었다.

 

이들은 기존 의원들과 달랐다. 넥타이를 매지도 않았고, 수염을 기른 의원들도 있었으며, 본 회의장에 꽃을 들고 오거나, 회의 중에 뜨개질을 하기도 했다. 정부 정책에 대한 항의의 뜻으로 총리 취임 행사에서 자리를 뜨기도 했으며, 기존 의원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발언도 서슴없이 했다. 90% 이상이 남성이었던 독일 의회에서 발트라우트 숍페(Waltraud Schoppe)는 성차별을 뜻하는 섹시스무스(Sexismus)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입에 올렸을 때, 보수당의 남성 의원들은 대놓고 이를 비웃었다. 초창기 의원들의 이런 모습은 반항적이고 전위적인 녹색당의 이미지를 더욱 강화했다.

 

"녹색당에게 의회는 의회 밖 운동을 위한 수단"이라는 페트라 켈리의 발언은 당시 녹색당원들이 의회를 바라보는 시각 중 하나였다. 근엄한 의회와 달리, 급진적인 탈핵운동이나 반핵운동 무대가 새로운 정치적 활력을 만들어내던 시대였다. 반핵을 외치는 시민들이 모여 만든 자치공동체인 ‘자유 벤트란드 공화국’(Republik Freies Wendland) 사건은 당시 운동의 급진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핵발전소를 밀어내다

 

1980년 니더작센주 벤트란드 지역 고를레벤(Gorleben) 마을에 위치한 핵폐기물처리장 예정지에 ‘자유 벤트란드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33일 동안 반핵을 외치는 수천 명의 사람이 각 지역에서 몰려들었고, 약 120채의 나무로 된 집이 만들어졌다. 주거 공간뿐 아니라 명상의 집, 여성의 집 등과 같이 사회적 역할을 하는 공간도 만들어졌다. 그들은 짧은 시간 동안 사회간접자본을 만들어냈다. 유기농 식료품을 섭취했고, 태양과 바람으로부터 전기를 얻어냈다. 이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들만의 여권이 발부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공화국은 경찰과 불도저에 의해 사라졌다.

 



▲ 1980년, 핵폐기물처리장 예정지인 벤트란드 지역에 수천 명이 모여들어 ‘자유 벤트란드 공화국’을 선포한 사건은 반핵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출처: https://anarchismus.at


핵발전소에 대한 반대는 40년 녹색당의 역사 속에서 계속 중요한 정치 프로그램으로 유지되었다. 독일의 핵발전 중단은 녹색당이 현실 정당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에서 거둔 가장 중요한 성과이다.

 

녹색당은 1998년부터 2005년까지 사민당의 소연정 파트너로 독일 정부에 참여한다. 그리고 2000년 6월 정부와 원전 운영사들 간에 원전 폐쇄에 대한 “원자력 합의”가 이루어졌고, 2002년에는 원자력법의 개정을 통해 원전 폐쇄 결정이 구속력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2010년 원전 폐쇄 정책은 철회된다. 이는 다시 전국적인 반핵 시위를 촉발했다. 녹색당은 여론조사에서 창당 이후 최초로 20% 이상 지지율을 기록했다. 그리고 2011년 3월 11일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터지면서 여론은 녹색당 쪽으로 기울었다.

 

2011년 2월부터 9월까지 7개 주에서 연달아 지방선거가 치러졌다. 녹색당은 모든 선거에서 과거보다 많은 표를 얻었다. 특히 후쿠시마 사고 직후 바덴뷔르템베르크주 선거에서는 11.7%에서 24.2%로 과거보다 두 배를 넘는 표를 얻었다. 바덴뷔르템베르크주에서 녹색당은 사민당과 연정을 통해 집권당이 된다. 그리고 녹색당 역사상 최초로 주지사를 배출한다.

 

결국 기민당(CDU)은 자신들의 텃밭인 바덴뷔르템베르크주에서 패배를 겪은 후, 같은 해 5월 탈핵으로의 복귀를 선언한다. 메르켈 총리가 이끄는 독일 정부는 일부 원전을 즉각 폐쇄하고, 2022년까지 모든 원전을 폐쇄하기로 결정한다.

 

평화/비폭력의 정당에서 ‘현실 정당’이 된 녹색당

 

하지만 녹색당의 현실 정당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평화주의와 비폭력은 당의 핵심 내용에서 사라지게 된다.

 

1998년 사민당-녹색당 연방정부가 탄생하며 요슈카 피셔가 외무부 장관 겸 부총리가 되었다. 하지만 연방정부에 참여하면서 녹색당은 분열에 직면한다. 1999년, 외무부 장관 피셔는 독일이 나토의 일원으로 코소보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승인했다. 독일의 전쟁 참여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녹색당 내 반전 평화주의자들의 반발이 거셌다.

 

1999년 5월 13일, 코소보 문제를 위한 녹색당의 특별 전당대회가 열렸다. 피셔는 이 자리에서 신유고연방에 의해 알바니아인들에 대한 ‘인종청소’가 자행되는 코소보의 상황을 아우슈비츠와 비교하며, 군사적 개입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이날 단상에 앉아있던 피셔는 오른쪽 귀에 붉은색 물감이 든 봉투를 맞는다. 오른쪽 귀를 손으로 감싸고 있는 그의 찡그린 표정과 붉게 얼룩진 양복은 녹색당 역사에 한 장면을 장식하게 된다. 결국, 투표를 통해 독일군의 코소보 전쟁 참여는 당의 지지를 받는다. 이날 피셔의 오른쪽 고막은 찢어졌다.

 

1999년은 창당 시기부터 녹색당이 가지고 있던 반전 평화주의 기조가 완전히 포기된 해로 기억될 것이다. 녹색당의 근본주의를 대표했던 유타 디트푸르트(Jutta Ditfurth)는 녹색당 연방의원들이 독일의 코소보 전쟁 참여를 지지하는 과정을 평가하며 “녹색당은 1980년부터 유지하던 반 나토 비무장 등의 기조를 완전히 포기했으며, 인권을 군사화시키고 전쟁을 위한 수단이자 근거로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디트푸르트(1991년 탈당)를 포함해 녹색당의 근본주의를 대표하던 많은 정치인이 이미 1990년대 초반 탈당했다. 1990년 통일 이후 녹색당은 현실주의로의 전환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99년은 녹색당의 정치적 현실주의가 어떤 모습인지를 분명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2002년 만들어진 새로운 강령에서는 ‘비폭력’이 근본 기조에서 사라지게 된다.

 

▲ 녹색당의 총리 후보이자 현 당 공동대표인 아날레나 베르보크. 2019년 5월 24일 '미래를 위한 금요일' 시위에 참석했을 때 지지자와 함께 사진을 찍는 모습이다. (출처: Annalena Baerbock 페이스북 페이지)


2021년 녹색당은 집권당이 되는 것을 목표로 9월 26일에 있을 연방의회 선거를 준비하고 있다. 녹색당이 처음으로 독일 연방총리를 배출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높아지면서, 국방과 안보에 대한 물음이 녹색당에 중요해졌다. 유럽과 독일로 세계의 각 지역에서 내전으로 고향을 잃은 난민들이 대거 유입되어온 상황은 독일이 제3세계에서 군사 활동을 하는 새로운 근거가 되었다. 트럼프 시대에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나토 체계가 의문시되면서, 유럽의 독자적 방위력을 구축하는 것 또한 국방 안보 분야에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녹색당 총리 후보이자 현 당대표인 아날레나 베르보크(Annalena Baerbock)나 전 당대표 카트린 괴링-에카르트(Katrin Göring-Eckardt)는 국방비 증액이나, 녹색당의 해외 파병에 대해 긍정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 대다수 독일 여론은 녹색당의 이런 변화에 대해 긍정적이다. 하지만, 당 내부에서는 이런 변화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가 존재한다. 이를 의식한 듯 녹색당 지도부는 국방 안보 문제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대응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다. 올해 초 녹색당의 씽크탱크 역할을 하는 하인리히 뵐 재단의 대표가 적극적으로 나토 체제와 핵무기를 통한 독일의 방어를 옹호하는 글을 써서 논란이 되자, 당 지도부의 주요 인사들이 강한 비판을 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현재 녹색당이 국방 안보 문제에 있어서 보수 정당과 매우 가까워졌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녹색당은 더 이상 의회 밖 운동이 목적인 저항의 정당이 아니다. 목표는 집권이다.

 

[필자 소개] 김인건. 대안학교에서 철학 교사를 하다가 독일로 유학을 왔다.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정치적 평등을 주제로 철학 석사 학위를 마치고 여행가이드를 하면서 번역과 통역, 독일 소식을 한국 언론에 소개하는 일 등을 해왔다. 현재는 환경과 지속 가능한 삶에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들과 "움벨트"라는 연구 모임을 만들어 관련 주제에 대한 번역과 글을 쓰고 있다. 역사 속 사회의 변화 과정과 이를 해석하는 이론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고 있다.  ildaro.com

 

 

남은 인생은요?

미국에서 출판된 한국계 미국 이민자인 저자 성sung의 첫 책을 한국어로 번역한 책이다. 아동기에 한국을 떠난 저자는 현재 대학원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하고 있는 밀레니얼 세대이다. 이민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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