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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 시대의 정치! 독일 녹색당 이야기]⑤

 

※ 기후변화와 후쿠시마 원전사고,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며 ‘기후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정당’으로 떠오른 독일 녹색당에 관한 정보를, 독일에서 지속가능한 삶과 녹색정치를 연구하고 있는 연구 중인 김인건, 박상준, 손어진 세 필자가 들려준다. [편집자 주]

 

‘낙태죄 폐지’…70년대 급부상한 여성운동의 선택지, 녹색

 

녹색당이 연방의회에 진출하기 전까지 독일 의회는 남성이 지배했다. 녹색당의 등장은 의회에서 여성의 비중을 높이는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여성운동의 목소리를 의회로 가져오는 역할을 했다. 페트라 켈리(Petra Kelly)와 발트라우트 숍페(Waltraud Schoppe) 같은 최초 녹색당의 여성 의원들은 의회에서 성평등 이슈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했다.

 

1980년 창당한 녹색당은 환경 문제가 가장 중요한 의제이긴 했지만, 1970년대 기존 제도권과 정치에 반발하는 서독 사회의 다양한 대안적 목소리가 모였다. 여성운동과 페미니즘 또한 주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 1968년에 남성 중심의 사회주의학생연맹을 강하게 비판했던 하이켄 잔더의 최근(2019년) 모습. 사진 작가: Harald Krichel

 

1968년 9월 13일 사회주의학생연맹(SDS) 대의원 대회에서, 여성해방 행동위원회의 대변인 하이케 잔더(Heike Sander)는 성평등 이슈를 무시하는 남성 중심의 조직을 강하게 비판하며 ‘차별을 다루지 않은 사회비판은 불충분하다’고 외쳤다. 하지만 남성들은 이날 대의원 대회에서 여성 문제를 다루려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항의로 지그리트 뤼거(Sigrid Rüger)는 남성 대표부를 향해 토마토를 던졌는데, 서독의 여성운동의 역사적 장면이다.

 

1970년대에 들어서며 서독의 여성운동은 부흥기를 맞이한다. 1971년 6월 6일, 주간지 슈테른(Stern)지 표지에 “우리는 낙태를 했다!”(Wir haben abgetreiben)라는 타이틀과 함께 여성들의 사진이 실린다. 저널리스트인 알리스 슈바르처(Alice Schwarzer)을 주축으로 374명의 여성이 당시 불법이었던 임신중단 경험을 공개한 것이다. 임신중단을 처벌하는 형법 218조에 항의하는 과감한 액션이었다.

 

형법 218조는 현대 독일의 형법이 만들어진 1871년부터 존속해온 규정이었다. 이 사건 이후, 형법 218조를 없애기 위한 행동 그룹이 전국 각지에서 만들어졌다. 또한 이들 그룹의 연대를 위한 행동 협의회도 구성됐다. 협의회에서는 법무부 장관에게 다음 네 가지 요구를 전달한다. 첫째, 형법 218조를 삭제할 것. 둘째, 임신중단 의료 행위를 허용할 것. 셋째, 임신중단 의료와 피임약에 대해 의료보험을 적용할 것. 넷째, 여성의 필요에 부합하는 성교육을 실시할 것.

 

1974년 사민당과 자민당 정부는 연방의회에서 형법 218조 개혁안을 통과시켰고, 그에 따라 임신 초기 3달 내 임신중단은 처벌받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새 법안은 오래가지 못했다. 가톨릭교회와 보수층이 반대했고, 기민당과 기사당 의원 193명을 주축으로 헌법소원을 청구한다. 헌법이 보장하는 ‘생명의 권리에 위배된다’는 이유였다. 결국 1975년 2월, 헌법재판소는 새로운 218조 개혁안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린다.

 

뒷걸음친 결정에 대한 여성단체들의 분노는 높았으며, 좌파 과격 단체 소속 여성 그룹은 법원에 폭탄 테러를 시도하기도 했다. 결국 1976년, 사민당과 자민당은 218조에 대한 새로운 개혁안을 통과시킨다. 이 개혁안은 의사가 의학적, 윤리적, 사회적 근거로 임신중단 허용 여부를 판단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당시 가톨릭 배경의 많은 병원과 의사들이 임신중단을 허용하는 판단을 내리기를 거부했다.

 

▲ 1971년 6월 “우리는 낙태를 했다!”라는 타이틀의 슈테른지 표지. 출처: EMMA

  

‘낙태죄’에 대한 저항 외에도 1970년대에는 페미니즘의 영향으로 독일 각지에서 독서 모임을 비롯한 다양한 여성 조직이 생겨났다. 1972년, 40여 개 도시의 400여명의 여성이 프랑크푸르트에 모여 제1회 전국여성대회를 개최했다. 대회에 모인 사람들은 “여성은 자신들의 근원적 문제를 이해하고 배우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스스로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후 전국 각지에서 여성 조직과 여성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인 여성센터(Frauenzentrum)가 생겨났고, 여성들을 위한 미디어도 활발하게 만들어졌다. 1977년에 나온 페미니즘 잡지 엠마(EMMA)가 대표적이다. “우리는 낙태를 했다!” 선언을 주도했던 알리스 슈바르처에 의해 창간된 매체다.

 

1970년대 말이 되면서, 여성운동은 정치 조직이나 제도권으로 나아가는 길을 모색한다. 그 과정에서 ‘녹색’은 페미니스트들에게 새로운 선택지가 된다. 그 즈음 독일의 각지(도시를 중심으로)에서 이후에 창당하게 될 녹색당과 유사한 성격을 가진 다양한 선거 그룹이 만들어졌다. 1978년 서베를린에서도 “민주주의와 환경보호를 위한 대안 선거명단”(AL, Alternative Liste für Demokratie und Umweltschutz)이라는 조직이 생겼다. 베를린 AL의 여성회의는 AL의 후보 중 53%를 여성으로 채울 것을 요구한다. 서베를린 인구 중 여성의 비율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런 요구는 매우 급진적인 것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베를린 AL은 녹색당 창당 이후에도 AL이라는 이름을 유지하면서 녹색당의 지역당 역할을 하다가, 통일 이후 녹색당에 완전히 통합되었다.

 

의회로 간 페미니즘 이슈들

 

1983년 5월 5일, 녹색당의 최초 연방의원 중 한 명인 발트라우트 숍페는 첫 의회 연설을 다음 문장으로 시작했다. “형법 218조에 대한 논의가 새롭게 시작되었습니다.” 전날 연방 총리 헬무트 콜이 의회에서 형법 218조 논란을 언급하며 태아 생명의 보호를 강조한 것을 겨냥한 연설이었다. 헬무트 콜과 기민당은 전통적 가정과 여성의 역할을 강화하는 정책을 펴고 있었다.

 

숍페는 남성 중심의 섹스가 이루어지지만, 정작 남성은 피임에 신경 쓰지 않는 현실을 언급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기민당과 기사당의 의원들이 큰 소리로 항의하기 시작했지만 그는 굽히지 않고 임신, 출산, 육아의 책임이 여성에게 전가되는 현실을 비판했다.

 

“여성은 남성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남성들은 법을 만들고 판단합니다. 칼스루에의 대법원에는 7명의 남성과 1명의 여성이 앉아 있습니다. 이들이 여성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인 임신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발트라우트 숍페는 이날 연설을 통해 ‘낙태죄’ 폐지를 강력히 요구했을 뿐 아니라, 부부 간에 일어나는 성폭력을 처벌할 수 있는 형법이 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성에게는 신체에 대한 자기 결정권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이날 숍페는 독일 의회에서 처음으로 성차별을 뜻하는 “섹시스무스”(Sexismus)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대부분의 남성 의원들은 이 말을 ‘섹스’로 알아들었고 웃으며 소란을 부렸다.

 

1983년 연방의회에 등장한 ‘여성의 권리에 대한 목소리’는 이후에도 독일 녹색당과 여성 정치의 핵심 의제가 된다. 1997년에 와서야 부부간 성폭력에 대한 처벌 규정이 의회를 통과했다. 이 때도 보수 정당들의 의원 상당수가 반대표를 행사했다. 임신중단을 처벌하는 형법 218조는 1990년 통일 이후 변화를 겪지만, 여전히 미완의 문제로 남아있다.

 



▲ 1990년 통일을 목전에 둔 베를린 시민들이 임신중단을 처벌하는 형법 218조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출처: Bundesarchiv

 

형법 218조 폐지, 완전한 임신중단 권리를 향하여

 

통일 이전 동독에서는 임신 12주차까지 여성의 자유로운 결정에 의한 임신중단이 허용되었다. 통일이 임박해오자 서독 여성들은 형법 218조를 통일 독일까지 가져갈 수 없다며, “내 배는 나의 것이다”(Mein Bauch gehört mir) 구호를 외치며 철폐 시위를 했다. 대규모 시위와 서명 운동이 여론의 이목을 끌었고, 결국 통일 협정서에는 임신중단에 대한 새로운 규정을 1992년 말까지 마련해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가게 된다.

 

동독의 규정을 통일 독일로 가져오기를 원했던 여성들의 기대와 달리, 상황은 복잡하게 흘러간다. 1992년 연방의회는 전문 상담을 전제로 임신 12주 내 임신중단을 허용하는 법안을 찬성 355, 반대 283, 기권 16표로 통과시킨다. 하지만 가장 보수적인 기사당이 새 법안에 대해 헌재에 위헌 청구를 했고, 헌재는 다시 한번 특정 기간 내에 모든 임신중단을 허용하는 것은 헌법에 위배된다는 판결을 내린다.

 

결국 1995년, 지금까지 적용되고 있는 새로운 법안이 마련되었다. 법안에 따르면 임신중단 자체는 기존처럼 법에 위배되지만, 범죄에 의한 임신이나 의료적 근거, 사회적, 윤리적 이유가 있는 경우 상담 이후 3일간의 숙려 기간을 거쳐 12주 이내에 임신중단을 할 경우 처벌 받지 않는다. 이 법안에 의해 현재는 원하는 사람 누구나 상담을 통해 임신중단을 할 수 있다. 임신중단이 불가피한 ‘사회적 이유’가 폭넓게 인정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범죄에 의한 임신이나 의료적 근거가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임신중단은 보험 적용을 받을 수 없다. 또한 상담 의무가 존재하기 때문에 여성의 자기 결정권은 여전히 형법 218조의 제약을 받고 있다. 녹색당은 2020년 만들어진 새로운 강령과 올해 9월 연방선거 공약을 통해, 임신중단에 대한 여성의 완전한 자기 결정권을 보장할 것과 형법 218조의 폐지를 요구하고 있다.

 

[필자 소개] 손어진. 정치학을 전공했고, 베를린에서 독일/유럽연합의 R&D 정책분석을 하고 독일 녹색당 싱크탱크인 하인리히 뵐 재단 자료도 번역한다. 독일 녹색당의 정치적 역동을 경험하고 싶어 독일에 왔다. 움벨트(Umwelt) 모임 소속으로, 베를린의 녹색정치와 환경, 여성, 이민자 영역에서 다양한 만남을 통해 존재의 확장을 경험 중이다.

 

[필자 소개] 김인건. 대안학교에서 철학 교사를 하다가 독일로 유학,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정치적 평등을 주제로 석사를 마치고 여행가이드를 하며 통번역, 독일 소식을 한국 언론에 소개하는 일을 해왔다. 환경과 지속가능한 삶에 관심을 둔 사람들과 움벨트(Umwelt)라는 연구모임을 만들어 번역을 하고 글을 쓴다. 역사 속 사회의 변화 과정과 이를 해석하는 이론에 관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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