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베를린에서 온 기후 편지] 시민불복종 기후운동 ‘엔더 겔랜더’(하)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20541234
세계 최대 갈탄 생산국인 독일에서, 화석연료에 반대하며 왕성하게 활동을 펼치고 있는 시민불복종 운동 ‘엔더 겔랜더’(Ende Gelände, 여기가 마지노선이라는 뜻)에 대해 지난 기사에서 소개했는데요. 탄광에 진입해 생산을 중단시키거나 철도를 점거해 운송을 막는 등 위법 행위로 고소를 당할 수 있음에도, 엔데 겔랜더의 직접행동에는 6천명이 참여하는 등 대중적인 호응을 받고 있습니다.
이처럼 수천 명이 단일한 목표를 갖고,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더구나 거시적인 사회 명분을 위해, 위법 행위와 그에 따른 결과까지 감수하면서 말이죠. 네트워크 조직으로서 지속가능성과 활동 동력은 어떻게 유지할까요? 대규모 액션과 관련된 수많은 의사결정은 어떻게 내려질까요?
▲ 엔더 겔랜더의 대규모 액션의 목표와 내용을 결정하는 연례 총회가 열리는 모습. (출처: ende-gelaende.org) |
다양성 존중 원칙,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대규모 액션’
‘시민불복종’, ‘직접행동’과 같은 단어들에서 연상되는 이미지와는 달리, 엔더 겔랜더의 핵심 목표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대규모 액션(mass action)을 조직하는 것입니다. ‘대규모’를 지향하는 이유는 규모가 클수록 여론에 대한 호소력이 높아지고, 활동가들의 체포 가능성도 낮아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전체 참가자는 수천 명에 이르지만, 가장 작은 단위인 ‘어피니티’(affinity)에서부터 조직이 구성됩니다. 5~7명으로 구성되는 어피니티 그룹은 액션 도중 함께 움직이는 일종의 팀인데요, 활동 목표나 지역, 체포 가능 여부 등에 따라 자발적으로 구성합니다. 어피니티 구성원들은 스트레스 상황에서 서로를 정서적으로 지지해줄 수 있고, 다급한 결정이 필요할 때 소수 인원으로 빨리 합의합니다.
다음으로, 어피니티 수십 개가 모여 ‘핑거’(Finger)를 이뤄요. 탄광 진입, 철로 점거, 이동 경로 확보 등 구체적인 목표에 따라 묶이는데요, 각 핑거는 대표 색과 테마, 언어 등을 지정합니다. 예를 들어, 퀴어와 페미니스트들이 모여 만든 핑거는 돌봄 노동의 분배, 성중립적인 언어 사용에 특히 주의를 기울입니다. 아이를 동반한 활동가들이나 휄체어를 탄 사람들이 있는 핑거에서는 강도 높은 신체 활동을 하지 않고요. 핑거들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이 중요한 원칙이라고 합니다. 수십 개의 핑거들이 모인 것이 전체 단위인 ‘핸드’(Hand)입니다.
▲ 2020년 여름 이른 새벽, 퀼른역 지하 승강장에서 액션 중인 한 ‘핑거’의 모습. 출처: ende-gelaende.org |
단체의 얼굴, 대변인은 ‘여성과 퀴어’
엔데 겔랜더에서는 ‘활동가 모집(mobilization) 그룹’, ‘프레스 그룹’, ‘소셜 미디어 그룹’, 이렇게 크게 세 그룹이 외부와의 소통을 맡습니다. 준비 기간에 함께 모여 일관된 캠페인 내러티브와 메시지를 개발합니다. 독일 곳곳의 갈탄광을 폐쇄하라는 요구가 초기부터 이어진 핵심 메시지라면, ‘내러티브'란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 2017년에는 광산 인근에서 COP21(21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이 열렸기 때문에, 이와 관련해 기후위기의 불평등 문제에 초점을 맞춰서 남반구 저개발국가들의 반-식민주의에 연대하고자 했습니다. 지금의 기후위기는 그동안 대량생산-소비와 개발을 가속해온 북반구-1세계 국가들에게 훨씬 큰 책임이 있기 때문이죠.
또한, 대규모 액션의 목표와 내용을 몇 달 전에 공개 발표하는 것도 특징입니다. 이렇게 하면 최신 이슈에 발 빠르게 대응할 수는 없지만 참가자를 오랫동안 모집할 수 있죠. 또 각종 미디어에 액션의 메시지를 더 오랫동안 반복적으로 노출할 수 있습니다. 일반 시민들과 가까이 소통하기 위해서 텔레그램 채널을 비롯한 소셜미디어를 활발하게 운영합니다.
단체의 공식 대변인은 FLTI*(여성,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인터섹스) 우선 원칙에 따라 여성과 퀴어만 맡을 수 있어요. 기성 언론과 대중에게 익숙한 ‘백인 남성 리더’ 모델을 재현하지 않는 의미입니다. 대변인은 강도 높은 미디어 트레이닝을 받습니다.
과정을 중시하는 직접행동…다수결이 아닌 ‘합의제’ 채택
매년 여름에 며칠 간 열리는 대규모 액션을 준비하는 동안, 수많은 의사결정이 있겠죠. 예를 들어 ‘석탄발전소에 진입해 연좌농성으로 12시간 동안 생산 설비를 중단시킨다’는 목표를 설정하는 것뿐 아니라, 그에 파생되는 세부 목표와 전략이 필요합니다. ‘어느 탄광의 어떤 진입로를 어떻게 점거할 것인가?’ ‘어떤 랜드마크를 타겟으로 해야 캠페인의 내러티브가 효과적으로 드러날 것인가?’ ‘활동가들을 임파워링할 수 있는 목표는 무엇인가?’ ‘참가 인원이나 언론 보도는 어느 정도로 목표치를 잡아야 하는가?’와 같은 것들이죠.
단체의 의사결정 구조에는 매사 토론과 기록을 중시하는 독일 문화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다양한 의견과 정보를 최대한으로 공유하기 위해서 많은 회의를 엽니다. 특히 수백 명이 모여 야영을 하며 굵직한 방향성을 결정하는 전체 총회에는 많은 시간이 소모될 수 밖에 없는데요, “논쟁 가능한 모든 논점을 청취하는 것”이 총회의 목적입니다. “다양한 제안으로 인해 최초의 안건에서 멀어지는 것처럼 느껴질 때,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생겨날 공간이 확보된다"고 가이드북(An Activist’s Guide to Ende Gelände, 2020)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 엔데 겔랜더에서 지난해, 전세계 활동가들과 시민불복종 행동의 노하우를 나누고자 발간한 가이드 책자(An Activist’s Guide to Ende Gelände)의 표지. 대규모 액션에서 착용하는 일종의 유니폼인 흰색 비닐옷과 마스크는 유독성 물질을 차단하고 참가자 신원을 보호하며, 과거 유럽 곳곳에서 열린 시민불복종 운동을 계승하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미지 출처: ende-gelaende.org) |
듣기엔 이상적이지만, 개개인에게 큰 인내심을 요구하고 때로 명확한 의사 결정을 못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다양한 테크닉을 활용합니다. 수신호로 커뮤니케이션을 단순화시키고, 그룹 토론방(브레이크 룸)이나 외국인을 위한 ‘위스퍼링 통역’(속삭이듯 옆에서 작게 통역하는 것)도 운영하고요. FLTI*과 BIPOC*(흑인, 토착원주민, 유색인종), 그리고 장애인에게 우선 발언권을 줍니다.
“다수결 제도는 소수 의견을 배제시키고 창조성이 떨어지므로 지양”하고 합의제(consensus)를 채택했는데요, 6가지 의사표현을 통해 합의에 도달하도록 디자인했습니다. 6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결정안에 찬성하지만 사소한 우려가 있음(minor concerns)
2) 중대한 우려가 해소된다면 찬성함(major concerns)
3) 결정안이 통과될 수 있도록 지지하지만, 실행 과정에는 관여하지 않을 것임(stand aside)
4) 해당 안이 조직의 근본 목표와 모순되므로 논의를 거부함(veto)
5) 결정안에 대한 동의(agreement)
6) 기권(abstention)
모든 의사 표현이 회의록에 기록되는데요, 동의 외에 다른 의사표현이 많다면 결정안은 다시 논의를 거칩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거부권을 행사하면 논의 자체가 중단되죠.
방향과 목표에 대한 의사결정 과정에서는 최대한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 게 바람직한 반면, 실무적인 논의와 결정에 있어서는 워킹 그룹(로지스틱스, 캠프, 재정, 국제교류, NGO커뮤니케이션, 웹사이트, 응급구조, 경찰 대응 등)들에 자율권이 많이 주어집니다. 각 그룹은 비대면으로 정기적인 회의와 모임을 통해 대규모 액션을 계획하고 준비하며, 그 외에 크고 작은 캠페인들을 진행합니다.
이 기후운동 단체를 깊이 들여다 볼수록, 밖으로 표출되는 기민하고 폭발적인 직접행동과는 사뭇 다른 조용한 ‘일상의 혁명’이 드러납니다. 직접 민주주의에 가까운 합의제를 운영하는 것과 소수자의 참여를 보장하는 평등 지향 문화, 그리고 ‘자기성찰'이라는 이름의 반-인종차별 교육 아카이브(ende-gelaende.org)까지. 자신들 공동체 안에서만큼은 ‘우리가 바라는 미래에 지금 살겠다’는 의지가 엿보입니다.
이러한 대안문화를 구현하려는 노력이 시민불복종 행동의 유형 중 세 번째 “개입: 경제 사회적 대안 기구 건설”이라면, 그 자체로 직접행동인 셈입니다.
[필자 소개] 손어진: 정치학을 전공했고, 베를린에서 독일/유럽연합의 R&D 정책 분석 일을 하고 있다. 움벨트(Umwelt) 모임 소속으로 독일 녹색당 싱크탱크인 하인리히 뵐 재단 자료도 번역한다. 독일 녹색당의 정치적 역동을 경험하고 싶어 독일에 왔으며, 베를린의 녹색정치, 환경, 여성, 이민자 영역에서 다양한 만남을 통해 존재의 확장을 경험 중이다
하리타: ‘에코워리어’들이 많이 사는 환경 도시 프라이부르크에서 환경 거버넌스학 석사과정을 밟았다. 탈서울 녹색전환을 위해 독일에 왔다. 다양한 종(種)과 성(性)이 공존하는 대안 공동체, 자연과 더불어 소박하고 소신 있게 사는 것이 일관된 관심사. 관련 저서 <뜨거운 지구 열차를 멈추기 위해 - 모두를 위한 세계환경교육 현장을 가다>(공저, 2020)가 있다.
* 일다 기사를 네이버뉴스 메인화면에서 구독하세요! https://media.naver.com/press/007
'저널리즘 새지평 > 기후변화와 에너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완전한 임신중단권 보장’ 독일은 미완의 과제 풀까? (0) | 2021.08.22 |
---|---|
의회에 페미니즘을…유리천장을 깨라 (0) | 2021.08.20 |
핵과 전쟁에 반대하며 태동한 ‘저항의 정당’은 지금 (0) | 2021.08.04 |
탄광 점거한 獨 시민들 ‘화석연료는 이제 그만!’ (0) | 2021.07.29 |
‘기후위기’에 응답하는 공약 내세운 독일 녹색당의 선전 (0) | 2021.07.27 |
그레타 세대는 새로운 정치를 원한다 (0) | 2021.07.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