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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는 여자가 이긴다] 신라대학교 청소노동자 손인자 씨 인터뷰

 

*'싸우는 여자들 이야기'를 기록한다. 지금 내가 선 자리를 지키는 일도, 정해진 장소를 떠나는 일도, 너와 내가 머물 공간을 넓히는 일도, 살아가는 일 자체가 투쟁인 세상에서 자신만의 싸움을 하는 여/성들을 만났다. 세상이 작다거나, 하찮다거나, 또는 ‘기특하다’고 취급하는 싸움이다. 세상이 존중할 줄 모르는 싸움에 존중의 마음을 담아, 각기 다른 영역에서 활동하고 공부하고 노동하는 11명의 필자가 인터뷰를 연재한다. [싸우는여자들기록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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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말에 집단 해고됐던 부산 신라대학교 청소노동자들이 농성을 시작한 지 114일만에 일터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전과 같은 용역업체 소속으로 복귀하는 게 아니다. 신라대학교 총장과 노동조합 측은 지난달 16일, 조합원들을 신규 채용하는 형태로 ‘직접 고용’하고 65세 ‘정년 보장’한다는 합의서에 서명했다.

 

아직도 많은 대학과 기업, 공공기관에서조차 많은 청소노동자가 ‘간접고용’ 형태로 일하며 고용안정 및 복리후생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때문에 신라대 청소노동자들의 ‘직접고용’ 소식은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무엇보다 이러한 결과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신라대 청소노동자들의 투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백 일 넘게 농성을 하고 현장에 복귀한, 청소노동자 손인자 씨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신라대 측과 ‘직접고용’, ‘정년보장’에 합의한 이후, 지난 6월 15일 신라대학교 청소노동자 농성장 마지막 집회 모습. *출처: 비주류사진관(정남준)


‘청소노동자 없는 학교’?

 

올해 초, 신라대학교는 선진화 작업이라며 곳곳의 쓰레기통을 없애기 시작했다. 쓰레기통이 없어지면서 청소 노동 역시 필요 없어졌다며 노동자들은 전원 해고했다. 학교 측은 출생률 저하로 신입생 수가 줄어 등록금이 줄어드니 운영자금이 부족해 어쩔 수 없이 청소노동자들을 해고해야 한다고 했다. “집단해고”가 벌어진 것이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청소노동자가 없는 학교’가 되어버렸다.

 

정현실 지회장은(민주노총 부산일반노조 신라대학교지회) 조합원들한테 새해 첫 소식으로 ‘해고되었다’는 것을 알려야 했다. 신라대학교 청소노동자들은 고민 끝에 싸우기로 결정했다. 해고를 앞둔 조합원들은 농성을 위해 여러 준비물을 하나둘 모았다. 형형색색의 이불, 전기장판, 냄비, 생수, 가스버너까지 준비를 하고 보니 열악하게나마 농성장이 만들어졌다. ‘집단해고 철회’, ‘직접고용 쟁취’로 요구를 명확하게 내걸었다. 생수병을 활용해서 선전전이나 문화제 때 두들기며 투쟁 도구로 사용했다.

 

투쟁을 알리는 첫 문화제가 2월 28일에 열렸다. 나 또한 그 자리에 있었다. 투쟁을 막 시작하는 청소노동자들의 눈에는 힘찬 기운이 가득했다. 문화제를 마치고, 주방에 삼삼오오 모여 연대 온 동지들의 저녁 식사를 뒷마무리하는 조합원들의 모습이 바빠 보였다. 뭐라도 돕고 싶은 마음에 가까이 다가가면 ‘연대 와주는 것도 이리 고마운데, 푹 쉬어요’라고 하는데도 발길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주위를 서성이는데 한 조합원이 말을 걸어 주었다. 손인자 씨였다. ‘젊은 사람이 이리 와주고 고맙네요’라는 말을 건네주면서 소소한 대화의 끈이 이어졌다.

 

부당함이 너무 많아서…노조가 얼마나 절실했는지 몰라

 

“사람들이 청소일 한다고 하면 조금 그런가 봐. 나는 처음부터 안 그랬어요. 청소일이 어때서. 노동해서 내가 먹고살 수 있는 돈 마련해서 사는 거잖아. 밑바닥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죄짓는 것도 아니고 떳떳하게 노동을 해서 돈 버는 거니까 당당하거든. 누가 창피하다고 하면 나는 그냥 말한다고 해요. 일해서 내 할 도리 하고 사는 거니까. 나는 일하는 내가 좋은 거 같아.”

 

신라대학교 청소노동자들이 114일간의 농성 끝에, 대학 측과 직접고용, 정년보장 합의서를 쓰고 일터로 복귀했다. 농성장에서 만난 손인자 씨의 모습. (사진: 김미르)

 

손인자 씨는 처음 청소 일을 할 때의 상황을 회상했다.

 

“부당함을 너무 많이 느꼈으니까. 폭발할 지경이었어요. 세상에 학교 건물들 청소하는 건 기본이고 나무 심으라고 해서 나무 심고, 풀 심으라고 하면 풀 심고 잔디 가꾸라고 하면 가꾸고. 그때 처음으로 잔디랑 풀이 다른 건지 알았어.”

 

그 일을 하고 나면 온몸에 풀독이 오르고 진드기 때문에 간지러웠다고 한다.

 

“피부병이었어요. 사비로 병원을 다녔어. 그리고 늘 토요일은 일하는 날이었죠. 그것뿐이겠나. 교환교수들 이삿짐 옮기고 나르고 그 집 집안일을 다 했어. 그 수많은 일을 하고서도 최저시급도 안되는 월급을 받았는데, 그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어느 순간 이런 상황이 갑갑하게 느껴지더라고.”

 

갑갑한 상황을 두고볼 수는 없었다. 예전에 노동조합 홍보를 하러 온 민주노총 부산본부 일반노조 사람들이 생각났다. 노동조합으로 이 상황을 탈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동조합 만들어진다는 게 외부로 새면 안 되니까 전부 다 비밀로 조직하고 있었어요. 다들 이야기를 하면 호의적이다가도, 겁이 나니까 막상 도장을 못 찍더라고. 조합원 가입서 신청하는 종이 작성하고 망설이다 집에 들고 간 사람도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설명회라도 가 보자’고 막 그러기도 하고. 민주노총 사람들한테 가보자고 하고. 그러면서 일이 진행된 거지. 힘들게 노동조합을 만들었어요. 진짜 절실했으니까.”

 

기성세대들은 노동조합에 대한 거부감이 있을 거라는 부끄러운 나의 편견이 작동했다. 정작 그 자신은 노동조합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을까. 혹시 신라대에서 일하기 전, 노동조합 경험이 있었던 걸까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답이 시원스럽게 나왔다.

 

“내가 결혼 전에 마산 수출자유무역지구 소니(SONY) 하청업체를 다녔거든. 적극적으로 활동한 건 아니더라도 어쨌든 노동조합이 있었어요. 그래서 일이 힘들면 노동조합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계속하고 있었어요. 왜냐면 다른 업체랑 비교가 되는 거야. 예를 들자면, 다른 회사들은 관리자들 먹는 식당 따로 있고 그랬는데 내가 속한 업체는 사장들, 심지어 일본 사람들도 넘어와서 노동자랑 한 식당에서 먹었거든. 노동조합이 있으니까 그랬던 거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이런 부당한 대우에 대해서 진짜 노동조합이 얼마나 절실했는지 몰라.”

 

번번이 약속 어긴 대학, 진짜 해결은 ‘직접고용’뿐

 

2012년 6월 12일, 신라대학교 청소노동자들은 노동조합 선포식을 가졌다. 당시 학교 청소 이외의 업무를 수행했는 데도 추가 수당을 받지 못했다. 이런 부당함에 임금 등에 관해 단체협상을 체결하기 위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학교에 맞서 청소노동자들은 8박 9일 동안 파업을 하며 총장실 앞에서 농성을 진행한 것이다. 끝내 이들의 문제 제기는 인정을 받고 단체협약을 맺었다. 이후 일터로 돌아오니 노동자들 모두 숨통이 트였다고 했다.

 

“드디어 청소 일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근로감독관도 1년에 한 번씩 오거든. 부당한 대우가 있는지 조사하러 오는 거지. 이제 노동조합이 있으니까 당당하게 말했죠. 내가 느꼈던 것들을 다들 느꼈기 때문에 지금도 버티는 거라고 봐.”

 

손인자 조합원이 유난히 힘주어 말했던 부분이 있었다. ‘내가 불합리하다고 한 것에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것’에 주먹을 꽉 쥐듯 말했다.

 

2년 후인 2014년, 새로운 총장이 취임했다. 그리고는 ‘나는 모르겠다’ 하며 단체협약을 무효화시켰다. 그때도 청소노동자들은 물러서지 않고, 이에 맞서 투쟁했다.

 

79일이나 농성을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고 한다. 당시 부산 일반노조 위원장, 정현실 현재 지회장과 손인자 조합원을 포함하여 11명은 사범대학교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고공 단식농성까지 한 끝에, 용역업체 상관없이 ‘고용 승계’하겠다는 것과 ‘65세 정년’을 보장하겠다는 합의서를 받아냈다. 이후 조합원 중 일부가 별도로 노동조합을 조직해서 복수노조가 되는 과정에서 아픔을 겪기는 했어도, 2014년의 투쟁의 경험은 지금의 신라대학교 청소노동자들을 단단하게 만들어준 밑거름이 되었다.

 

다만, 이때의 승리는 민주당 을지로위원회(세상의 ‘을’을 위해 연대하고 구제한다는 명목으로 생긴 민주당 내 위원회)가 중간자로 나서서 도장을 찍은 합의서였다.

 

한 차례의 투쟁이 끝나도, 최저입찰제를 통해 용역회사를 선정하는 ‘간접고용’ 방식은 여전했다. 청소노동자들은 여전히 용역업체와 계약해야 했다. 투쟁으로 고용 승계는 이루어졌지만 이를 계속 안정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부당한 일을 겪어도 원청인 대학 측과 용역업체 간에 책임이 모호했다. 간접고용의 최대의 약점들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렇게 7년의 세월이 흘렀다. 새로 온 신라대 총장은 또다시 ‘내가 맺은 계약이 아니다’하면서 청소노동자들과의 합의를 파기했다. 그리고 학교 선진화 작업과 재정 등을 운운하면서 해고장을 날렸다. 치열했던 투쟁이 세월 속에 녹아들어갈 무렵, 학교는 또 이들을 공격한 것이다.

 

손인자 씨는 대학에 직접 고용되지 않고 용역업체 소속으로 일하면, 아무리 합의서를 써도 언제든 고용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걸 알게되었다고 말한다. (사진: 김미르)

 

청소노동자를 집단 해고할 정도로 재정이 어렵다면서, 투쟁 중에 알게된 사실은 그 사이 학교 임원들의 임금은 인상했다는 것이었다. ‘기타 업무 추진비’라고 해서 수당의 범위를 늘리고 액수도 높였다.

 

“학교 임원들 임금 올랐다는 소식에 화가 많이 나셨겠어요.”

“당연히 화나죠. 우리가 이런 걸 어떻게 알았겠어요. 노동조합을 하니까 알았지. 노동조합에서 교육을 받고 하면서 학교 실정이 진짜 어떤 것인지 알게되었어요.”

 

대학의 경영이 어렵다는 게 사실인지 의심스러웠다. 항상 최저입찰제로 용역업체를 선정하는데도 불구하고 학교는 운영에 적자를 봤다고 했다. 그 적자를 온전히 청소노동자가 책임지도록 했다.

 

“을지로위원회에서 했던 합의서? 그거 종이조각에 불과했던 거에요. 우리가 진짜 해결을 하려면, 학교가 우리를 ‘직접고용’해야 하는 거죠. 총장 바뀔 때마다 불안하니까. 용역업체를 끼고 최저입찰제 하고. 이런 거 다 하지 말고 직접고용을 해야 한다는 거지.”

 

우리의 일은 꼭 필요한 노동

 

“그래도 노동조합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손인자 조합원은 자연스럽고 덤덤하게 이어 말했다.

 

“노동조합이 나는 필수라고 생각해요. 조합원들도 다 알걸요? 2014년에 싸워서 이긴 경험이 있고, 2014년도 이후에 입사한 조합원들도 이야기를 전해 들었으니 싸움을 시작하면 ‘버티면 이긴다, 질기면 이긴다’ 이게 진짜라. 주변에서 일하다가 힘든 거 있다고 말하면 노동조합 만들라고 툭툭 이야기하죠. 그게 다같이 해야 하는 일인 것도 알고, 잘릴까 봐 걱정되고 무섭고, 같이 하기로 했던 사람들끼리 신뢰 쌓는 것도 엄청 힘들고 하는 거 알죠. 어려운 거 알면서도, 뭉쳐서 싸우고 노동조합으로 모이는 거밖에 없어요. 그게 답이야.”

 

그는 인터뷰 중에 “내가 투쟁하는 것이 다음 세대한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고 말하면서 손가락으로 선전전할 때 쓰던 피켓을 가리켰다.

 

“저기 보이죠? ‘노동자가 세상을 바꾼다?’ 그 말이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거지. 이 세상에 일이 없는 곳이 어딨나. 이 세상 구석구석 노동 없는 데가 어딨나. 저 문구를 어디서 연대 오는 사람들이 붙여줬는데 이렇게 와닿네요. 고맙지.”

 

청소노동자들을 집단 해고했던 신라대는 교직원들이 청소를 했다.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니 주말마다 방역을 핑계로 외부 사람들을 학교로 들여와 대체인력을 썼다고 한다. 청소 대체인력을 몰래 들이다가 청소노동자들한테 들켰다. 방역을 핑계 대기 위해서 방역복을 입고 있었지만, 학교 이름이 붙은 빗자루와 걸레 등 청소도구들을 들고 구석구석 쓸고 닦았고 화장실에 들어가서 물청소를 했던 것. 오히려 이 일로 인해 청소노동자들은 학교 내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해고는 노동조합을 탄압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조합원들은 절실히 느꼈다. 청소노동자의 손은 꼭 필요한 노동인 것이다.

 

신라대 청소노동자들의 투쟁은 총장이 바뀔 때마다, 용역업체가 바뀔 때마다 벌어졌다. 진짜 해결은 ‘직접고용’이라는 사실을 알게된 노동자들은 물러섬 없이 싸웠다. 100일이 지나도 식을 줄 모르는 열기로, 이들은 결국 직접고용과 정년 65세 보장을 쟁취해냈다. 2014년의 합의서에서 한 단계 나아가 매듭지었다. 동료들은 내 옆의 소중한 동지가 되었다. 또한 신라대 청소노동자들의 투쟁은 다른 간접고용 노동자들에게 희망이 되었다.

 

[필자 소개: 김미르. 좋아하는 숫자 중 하나인 ‘30’만큼 살았음. 또록팀을 통해 투쟁을 기록하는 것이 중요한지 깨달은 사람.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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