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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연 기자의 사심 있는 인터뷰] 연극 <물고기로 죽기> 김비 작가를 만나다
이은용 극작가, 김기홍 교사/활동가, 변희수 하사. 지난 한 달 사이 한국 사회는 차별과 혐오로 인해, 알려진 것만으로도 세 명의 트랜스젠더를 잃었다. 연이은 비보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났다. 괜찮을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괜찮냐’는 문자를 퀴어 커뮤니티의 친구들에게 보내며 서로의 안부를 확인했다. 사람들은 어찌나 잔인한지, 세상을 떠난 이를 향해서도 모진 말을 내뱉는 이들을 보니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아니, 이 따위 세상이라면 그냥 무너져 내려도 될 것 같았다.
▲ 서울 혜화동 아르코예술극장 외부에 걸려 있는 연극 <물고기로 죽기> 포스터와 김비 작가에게 건넨 꽃 ©일다 |
그런 와중에 연극 <물고기로 죽기>(김비 작, 정은영 구성·연출, 고주영 기획·제작, 서울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3월 4일~14일)를 봤다. 사실 공연 소식을 듣자마자 기다렸던 작품이었고, 예매가 시작된 후 몇 분 지나지 않아 매진될 만큼 많은 이들의 기대를 모은 연극이기도 했다.
<물고기로 죽기>는 김비 작가의 “내 이야기”에서 출발한 작품으로, 자신을 물고기에 비유하며 물고기로서 살아온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살아있음’, ‘생동감’이 느껴지는 공연이었다. 배우들이 숨쉬며 뱉어내는 대사들은 공연장 내 공기 사이사이를 채우는 것뿐만 아니라 관객들의 마음 속 깊은 곳까지 물고기처럼 유영하며 들어왔다. 이야기 속에서 물고기가 헤엄쳐 나아가고자 할 때마다 내 마음도 함께 출렁이며 잔잔하게 흐르다가도 거센 파도처럼 몰아치기도 했다. 어떤 이름들, 얼굴들이 떠올라 참을 수 없는 감정을 마주하기도 했다.
그렇게 ‘진짜의’ 감정 파도를 헤치고 나니, 비로소 ‘무너진 세상’이 아닌 앞으로도 헤엄치며 살아갈 수많은 물고기를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엔딩곡이 끝날 때까지 우느라 빨개진 눈으로 극장을 나선 후, 김비 작가와 인사할 기회를 얻었다. 사실 얼마 전 인터뷰 요청을 했다가 정중히 거절 당했던 터였다. 지금 같은 때에 트랜스젠더로서 어떤 이야기를 하기엔 마음이 버겁다는 작가의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고, 트랜스젠더가 죽었으니 사회가 뭘 ‘해주면’ 되는지 또 다른 트랜스젠더에게 질문하는 그런 낯부끄러운 인터뷰를 할 생각은 없었다. 적당한 때를 기다리겠다고 했었기에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공연에 대해 몇 마디 주고 받던 중, 김비 작가가 “연극에 대한 거라면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을 꺼내길래 얼른 날짜를 잡자고 했다. 그리고 이틀 뒤 작가를 다시 만났다.
▲ 극장 대기실에서 인터뷰 중인 김비 작가 ©일다 |
-최근에 작가님 에세이집 <슬플 땐 둘이서 양산을>(김비·박조건형 지음, 한겨레출판)과 <제주 사는 우리 엄마 복희씨>(김비 작, 박조건형 그림, 김영사)를 읽었어요. 한겨레에서 연재 중인 <김비의 달려라, 오십호(好)>도 너무 잘 읽고 있고요. 글을 쓰신지는 꽤 오래되었지만 극작가로 작업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이죠? 어떻게 극작가 데뷔를 하게 되었는지 궁금해요.
“다큐멘터리 영화 <두 개의 문>, <공동정범> 등을 만든 김일란 감독과 아는 사이인데요, 작년 초여름 즈음에 친구들과 함께 우리 집(경상남도 양산시)에 놀러오겠다고 하더라고요. 그 때 같이 온 친구가 고주영 피디(‘연극연습 프로젝트’ 등 다양하고 새로운 연극을 제작, 기획하는 공연예술 독립프로듀서)와 정은영 연출(1950~1960년대 전성기를 구가했던 여성국극 배우들의 삶을 조명하는 작업을 주로 해왔으며,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선정하는 ‘올해의 작가상’을 받은 미술작가)이에요.”
-다분히 계획된 방문이었네요.(웃음)
“그랬던 거죠. 그렇게 저희 집에 와서 밥 먹으면서 사는 이야기, 서로 일하는 이야기하고. 늙은(?) 사람들이니까 소소하게.(웃음) 그러다가 밤에 차 마실 때 이 연극 이야기를 꺼내더라고요. 같이 해 보면 어떻겠냐고 해서, 조금 생각하다가 그러겠다고 했어요. 제가 뭐 연극을 많이 알거나 지식이 많아서 하겠다고 한 건 아니고요. 김일란 감독이 소개해줬으니까 믿어도 되겠다 싶었고, 이야기를 나눠보니 두 사람이 좋은 사람 같았거든요.”
-정은영 연출과 고주영 피디가 그때 어떤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제안했나요?
“성소수자의 늙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고 하더라고요. 정은영 연출이 한겨레에서 연재되는 <김비의 달려라, 오십호(好)>를 봤다면서 그 시리즈 첫 화에서 “서랍 속 어딘가에 처박아두고 잊어버린, 용도를 알 수 없는 ‘휘어진 것’”이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다고 했어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구나 싶었죠.
사실 전 처음에 ‘픽션’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었어요. 근데 연출이랑 피디가 ‘내 이야기였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유서 형식이면 어떠냐고 했는데, 저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삶을 중반까지 살고 끝마치는 유서가 아니라, 70~80세까지 물고기처럼 충분히 헤엄치면서 자유롭게 살다가 다음 세상으로 떠나기 위해 내가 살았던 세상에 안녕을 고하는, 그런 충만한 유서요.
그렇다고 단순히 ‘이렇게 살아서 행복했어요~’가 아니라, 지나온 삶들을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으면서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답하고, 또 질문하고. 그런 방식으로 썼어요. 죽을 때도 정답이나 해답 그런 건 없지 않을까 싶거든요. 제가 70년, 80년을 산 건 아니지만 그 때도 정답은 없을 것 같거든요.”
▲ 연극연습3. 극작 연습 물고기로 죽기 중에서. 촬영: 원준혁 ©연극연습 프로젝트 |
-연극 속 이야기는 그야말로 김비 작가의 “내 이야기”죠. 내 이야기를 쓴다는 게 쉬워 보이긴 하지만, 막상 쓰려면 되게 힘들잖아요. 너무 절제했나 아니면 너무 과잉되었나 싶은 자기검열도 많아지고요. 이번 이야기를 쓰면서는 어땠는지, 힘들었던 부분이 있나요?
“전 흔히 ‘보통 사람’과 내가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글을 쓰는 것 같아요. 어떤 숙명 같은 게 되어버렸죠. 이 사회가 이전부터 저 같은 사람을 굉장히 특별하고 이상한 존재로 계속 낙인 찍고 그런 식으로 활용을 하기 때문에, 나도 ‘보통 사람’과 전혀 다르지 않다고 보여주는 글을 주로 써왔어요. 이젠 박한희 변호사 등 조금 더 다양한 트랜스젠더의 모습을 볼 수 있지만, 이전엔 ‘키 큰 아줌마로 사는 삶’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으니까요.
이번에도 그런 글을 쓰려고 했는데, 연출이 좀 더 부대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문학을 하면서 부대꼈던 부분이 들어갔죠. 덕분에 글이 좀 생기를 얻었다고 해야 할까, 깊이가 생긴 것 같아요. 그런 부대낌을 내보인다는 게 내심 부끄럽긴 한데, 그렇게 살아왔는데, 뭐.(웃음) 극본을 놓고 작가와 연출이 좋은 이야기만 할 순 없잖아요. 논쟁적이기도 하고 불편할 수도 있는데, 우리 두 사람의 작업은 충분히 서로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연출이 덧붙일 부분을 정확하게 제안해줬기 때문에 자칫 밋밋할 수 있는 글이 조금 더 몰입감 있게 완성된 것 같아요.”
-평소 소설이나 에세이 등을 쓸 땐 어떤가요? 글이 잘 안 풀려서 힘들 땐 어떻게 하시는지…
“글이 잘 안 풀리는 경우는 많지 않아요.”
-정말요??
“책상에 앉아서 글을 쓰는 게 아니라 평소에 글을 머리 속에 넣고 다니거든요. 휴대폰에 자주 메모하기도 하고요. 원고 작성을 할 땐 그걸 꺼내면 되니까요. 마감이 닥쳤을 때 글을 쓰는 타입도 아니에요. 미리 써두고 그걸 반복해서 보거든요. 글을 쓸 때 감정을 많이 싣는 편이라, 헛소리도 많이 하고.(웃음) 그래서 점검을 계속해야 해요. 연재하는 칼럼도 다음 다음 원고를 미리 써놔요.”
-오, 대단한데요!
“대단한 게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에요.(웃음) 나도 마감 날 착착착 쓸 수 있는 사람이면 그렇게 쓰겠죠. 감정이 많이 들어가 있다는 건 장점이기도 하고 단점이기도 한 것 같아요. 여튼 감정이 잦아들었을 때 냉정한 눈으로 글을 다시 보는 시간을 갖지 않으면 큰일나요.(웃음)”
-그렇게 감정이 많이 들어간 글, 특히 여성이나 소수자가 쓴 글을 ‘사적인’ 걸로 치부하고, ‘보통 사람’이 공감할 수 없는 타깃이 좁은 이야기라고 평가절하 하거나, 자꾸 어떤 틀에 가두려고 하는 경향이 있죠.
“(그런 글을 쓴) 내가 좁은 게 아니라, 이 세상의 시각이 좁은 게 아닐까요? 사실 성소수자 이슈를 성소수자만의 문제로 환원하게 되면 한없이 좁아지고 한없이 사소한 일이 되잖아요. 근데 그걸 인간의 문제로 확장시키게 되면 굉장히 많은 가능성이 열리거든요. 성별 이분법을 흔드는 이들에 대한 의심이나 의혹, 불안이나 혼란을 깨뜨릴 수 있는 영역으로 충분히 확장될 수 있죠.
하지만 지금 성별 이분법적인 세계가 너무 안정적이에요. 그 세계 밖의 누군가를 계속 타자화 시켜야 자신의 안정을 확인할 수 있고요. 그래서 성소수자 문제를 자꾸 타자화하려고 하고, 나와 상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내 주변에서 절대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전 인간의 발전, 사회의 발전은 결국 혼란 속에서 피어나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안주하는 상황에선 절대 발전이 이뤄지지 않죠. 이 사회가 믿고 있는 두 개의 성별이라는 세계가 워낙 견고하니까 그게 불변이라고 생각하고 안전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이미 존재하고 앞으로도 계속 있을 거에요. 그들을 타자화하고, 벼랑 끝으로 내몰면서 자기는 안전하다고 믿는 게 무슨 안전일까요? 성소수자 이슈를 성소수자만의 문제로 보는 위험하고 안타까운 일을 그만했으면 좋겠어요.”
▲ 연극 중 관객들에게 나눠주는 A4 종이엔 김비 작가가 쓴 글이 적혀있다. ©일다 |
-극 안에서 이야기되는 ‘문학과의 부대낌’도 흥미로웠어요. 문학이나 예술은 모두에게 열려 있다고들 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잖아요? 문단 내 성폭력이 일어나도 피해자가 발화하기 어려울 정도의 위계 구조가 있기도 하고, 누군가에겐 좀처럼 열리지 않는 세계이기도 하죠. 김비 작가에게 문학은 무엇인가요?
“내 안을 들여다 봤는데, 기존의 세상이 만들어놓은 그릇으론 다 담을 수 없더라고요. 무언가가 계속 흘러넘치는 거에요. 그래서 그걸 주워 담고, 그 흔적을 들여다 보고 하다 보니 그게 문학이 되었어요. 저도 (<플라스틱 여인>으로 여성동아 장편소설 부문 수상을 하기 전) 거의 10년을 여기저기 응모하고, 떨어지고, 포기하는 과정의 반복이었어요. 그럼에도 계속 쓸 수 밖에 없었던 건, 내 안에 흘러넘치는 걸 간과하고 사는 삶이 별로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에요. 다른 사람들은 어떤 삶에 의미를 두는지 모르겠지만, 전 예전부터 오롯이 혼자라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라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그냥 ‘일’을 하기도 했어요. 직장을 다니기도 했고요. 근데 한번 쓰러지고 나니까 너무 의미가 없는 거에요.”
-일을 너무 많이 해서 과로로 쓰러졌던 거에요?
“돈에 미쳤었거든요.(웃음) 상 받기 전엔 소설을 써도 누가 읽어주지도 않으니까 일을 엄청 했죠. 근데 과로로 쓰러지고 나니까 돈도 의미가 없더라고요. 물려줄 자식이나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내가 쓴 소설 한 권 남기는 게 큰 의미가 된 거에요.
제 소설이 막 행복한 이야기를 담고 있진 않아요. 행복하고 기운 북돋는 소설을 쓰고 싶지만, 흘러넘치는 게 냄새나는 거라 어떻게 해,(웃음) 그걸 걷어내고 쓸 수도 있겠지만, 자기 마음이 담긴 글이 아니고 어떤 외부적인 지시 혹은 외부적인 영향으로 만들어진 글이 나한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래서 자꾸 내 안의 더러운 것, 흉한 것들을 끄집어 내는 것 같아요.
얼마 전부터 동아대 젠더·어펙트연구소에서 연재하고 있는 <강철과 이슬의 집>(여성에게 과연 집이 있는가? 라는 질문에서 시작된 이야기로 자신의 집/몸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을 다룬다)을 마무리하고 나면 더 이상 우울한 이야기는 안 쓰려고요. 이젠 나도 좀 행복한 이야기를 쓰고 싶어요.(웃음) 청소년 소설도 하나 쓰긴 했는데 출판사를 찾는 중이고요.
요즘엔 일부러 트랜스젠더 당사자가 주인공인 이야기를 쓰고 있어요. 이전에는 의식적으로 안 쓰려고 했었거든요. 트랜스젠더를 써도 ‘나’라기 보단 타자화된 다른 트랜스젠더를 썼었죠. 근데 이젠 제 안을 파헤쳐서 기록하는 일을 해야 되지 않나 싶어요.”
-기록은 정말 중요하죠. 이제 조금씩 트랜스젠더 서사나 퀴어 서사도 나오고 있는데, 그걸 또 퀴어문학이 어떤 유행인 것처럼 얘기되는 건 좀 걸리더라고요.
“저도 몇 편 읽어봤는데, 이 사회가 원하는 퀴어의 모습이 어떤 건지 들여다 볼 수 있었어요. ‘예뻤으면 좋겠다, 불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에 부합한달까. 물론 그런 것도 있어야죠. 그렇지만 그 외의 것은 의도적으로 배제하면서 ‘퀴어문학을 읽었다’고 하는 건 좀…”
-맞아요, 더 다양한 이야기가 나와야죠.
“퀴어 서사뿐만 아니라 페미니즘 서사도 정말 다양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 페미니즘 서사는 너무 착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제 그것에 의문을 제기할 때가 온 것 같아요. 가령 왜 여성은 이렇게 ‘올바른’ 캐릭터여야 하는지.
“도덕적으로 올바르다는 거 중요하죠. 근데 그 ‘도덕성’이라는 건 어떤 기준일까요? 그 기준에 대해서 한번 공부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단지 도덕적이어야 한다기보다 우리의 도덕이 과연 어디에서 만들어진 도덕인가? 혹시 우리가 그토록 ‘잘라버리고 싶은’(웃음) 거기서부터 시작된 도덕은 아닌가? 돌아보는 시선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런 시선을 가지기 위해 필요한 건 자신과 다른 타인를 바라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다른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을 바라봐야죠.”
▲ 연극연습3. 극작 연습 <물고기로 죽기 중에서> 촬영: 원준혁 ©연극연습 프로젝트 |
-극 중에 성별적합수술 이후에 전국 여행을 한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전 그 장면부터 거의 오열했거든요. 그 여행에서 느낀 자유, 자유라는 게 왜 누군가에겐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싶고. 제 경험도 생각났어요. 이제 50세가 된 김비가 생각하는 자유는 무엇인지, 그 때와 다른 게 뭔가 있을까요?
“철학적인 질문이네요.(웃음) 그 때의 자유는 비로소 성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고, 보호자 동의 없이 어디든 혼자 갈 수 있는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의 자유와 닮아있었던 것 같아요. 난 그런 자유를 수술하고 서른 살 넘어서 얻게 된 거죠. 그 자유는 굉장히 선명한 것이었고 절 행복하게 했다면, 지금은 좀 물끄러미 기다릴 수 있는 자유가 생긴 것 같아요. 기다리고 바라볼 수 있는 자유.
여유일 수도 있고, 어떤 게으름일 수도 있는데. 좀 꼰대 같은 이야기지만, 나이가 주는 선물이 분명히 있는 것 같아요. 지금까지 스스로 제 자리를 꾸역꾸역 찾으며 살아보니까 이제는 좀 편하게 살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그래서 게으른 자유. 게을러지고 싶어요. 성소수자에게도 제발 게으름을 허하라!(웃음) 24시간 짓눌리며 살게 하지 말고, 제발 성소수자들도 편안하고 게으르게 살 수 있는 시대가 오면 좋겠네요.”
-그래서 <물고기로 죽기>처럼 ‘나이 들어가는 성소수자가 사회와 관계 맺으며 살아가는 이야기’가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젊은 성소수자들이 자신의 앞날을 비춰볼 사람이 없으니까, 마음이 조급하고 힘든 것 같거든요.
“의지할 곳을 만들어 두는 건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그걸 내 삶의 큰 버팀목으로 삼을 수 있다면, 외부에서 누가 까불어도 그게 정말 의미 없는 게 되거든요. 그걸 의미 없는 걸로 만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 사람이 자아에 굉장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거고요.
많은 젊은 성소수자들이 예민한 더듬이를 가지고 있어서 관계맺기가 좀 어려운 거 아닌가 싶어요.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으니까 물론 처음엔 좀 부대끼고 친해지는데 시간이 걸리겠죠. 하지만 일단 가까워지면 절대로 놓치기 힘든, 서로의 예민한 감각까지 의지하는 관계가 되죠. 혼자 내몰렸다고 생각하지 말고 누군가를 찾아 나서 봤으면 좋겠어요.
비성소수자 사회에서 자식이 있으면 대단히 안 외로울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다들 현실을 알잖아요?(웃음) 비성소수자 사회에서 그들이 쉽게 친구를 얻을 수 있는 이유는, 이미 관계망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발만 들이면 다 비슷한 사람들이야. 비슷한 이야기하고.(웃음) 게다가 예민하지 않은 사람이면 얼마나 쉽게 동화돼요.(웃음) 그래서 그들이 더 편해 보이는 것뿐이지 성소수자라고 해서 관계맺기에 부족함이 있는 건 아닌 거 같아요.”
▲ 연극연습3. 극작 연습 <물고기로 죽기> 중에서. 촬영: 원준혁 ©연극연습 프로젝트 |
-“나는 사람입니다”라는 대사가 나오잖아요. 너무 당연한 말인데, 여전히 굉장히 임팩트 있는 말인 것 같아요. 그만큼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존재들이 많기 때문이겠죠. 불필요한 증명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퀴어(魚)들이 어떻게 하면 늙어갈 때까지 힘차게 헤엄칠 수 있을까요?
“실망을 깊이 안 했으면 좋겠어요. 전 억지로라도 주변 사람을 믿는 편이에요. 곁에 있는 사람을 믿고 친절히 대하는 편이죠. 내가 당신에게 호의적인 사람이라는 걸 굉장히 적극적으로 알리거든요. 왜냐면 믿을 구석이 없기 때문에 가까운 사람에게 호감 표시를 하는 거죠. 한 사람의 선의는 끝내 어떤 사람에게 가닿는다고 생각해요. 어떤 자리에서 바로 다가갈 순 없더라도요. 물론 대책 없이 호의적일 필요는 없고 어떤 선을 긋는 건 중요해요. 그리고 확실한 자기 편을 만드는 것도 정말 중요해요.
고립되었다고 느낄 수 있어요. 그에 따른 불안과 공포가 있죠. 하지만 그 불안과 공포는 실제보다 훨씬 크게 다가오거든요. 그걸 품고 있으면 더 커지고요. 전 그래서 불안이나 공포는 최소한으로 느끼려고 하고 사람에 대한 믿음을 최대한으로 가지려고 해요.”
리허설을 진행하고 있는 배우들의 목소리, 뮤지션 키라라가 만든 음악의 진동이 느껴지는 대기실에서 김비 작가와 이야기를 나눈 시간은 금세 지나갔다. 어느새 리허설도 끝나 북적이기 시작한 대기실에서, 마지막으로 작가에게 “내 이야기”가 연극으로 무대에 올라간 모습을 보는 기분이 어떤지 물었다.
“눈이 번쩍 뜨이는 경험을 했다”는 작가는 “글이 이렇게 새로운 꽃을 피울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신난 표정으로 작품에 대한 감탄부터 모든 스텝과 배우들, 수어통역사까지. 그들을 향한 애정과 칭찬도 마구 쏟아냈다. “이 작업은 ‘하나의 공연’으로 보이지만 각자 다른 사람들, 모든 성정체성이 함께 어우러진 작업이었어요. 서로에게 애정을 가지고 대하면 이런 멋진 일이 이뤄지는 것 같아요.”
“살다 보면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연결될지 모른다. 사람들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건 진리인 것 같다”는 김비 작가의 말이 마음에 남았다. 헤엄치는 퀴어(魚)들이 연결된 삶 속에서 부디 살아남기를 바라는 바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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