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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페미니즘] 페미니즘 지식으로 친밀한 관계에 대한 교육을
<기획의 글> 페미니즘 교육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요청이 증대하고 있는 시대, 페미니즘 교육의 개념과 의제, 실천의 역사와 현재성을 탐색하고 발전적 방향을 모색한다. “이제는 페미니즘” 연재 필진은 젠더교육연구소 이제IGE 연구원들이다. 이제IGE는 페미니즘 교육에 관한 연구와 실천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여성학 연구자 집단이다.
연애와 사랑은 굳이 배울 필요가 없다?
연애와 사랑에 대한 한국 사회의 몇 가지 통념이 있다. 첫째, 연애나 사랑을 알기 위한 최고의 방법은 그것을 경험하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연애를 글로 배웠어요.’라는 말은 연애를 하지 못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거나, 연애에 서툰 사람을 놀리는 말로 사용되곤 한다. 이 말에는 연애나 사랑은 다른 어떤 분야보다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것이야말로 그것을 가장 잘 아는 것이라는 생각이 숨어있다.
둘째, 연애나 사랑에 대해서 웬만큼 경험했다면, 그것에 대해 금세 전문가가 된다는 통념이다. 연애에 대해 시도 때도 없이 ‘상담’을 마다않는 주위의 사람들을 비롯해, 남녀관계나 부부관계의 전문가를 자처하며 ‘참견’하는 전통적인 포맷의 예능 프로그램까지, 우리 주위에는 연애와 사랑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연애와 사랑을 굳이 배우지 않아도 안다고 생각하거나, 흥미롭지만 일상적인 소재라서 굳이 배울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연애와 사랑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의 젠더 관계의 역동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반대로 연애 관계를 맺는 주체들 간의 미시적인 실천을 통해 젠더 관계가 적극적으로 구성되는 장소라는 점에서, 페미니스트 분석과 지식이 적극적으로 접합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 KBS joy ‘연애의 참견 시즌3’ (1월 26일) 중에서. 출처: http://market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60117 |
페미니즘이 연애와 사랑에 대해 의미 있는 언어를 제공할 수 있다는 주장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왜냐면 한국 사회에서 꽤 오랫동안 연애와 페미니즘은 불화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1990년대 후반에 시작되어 2000년대 이후 널리 확장된, 의무화된 폭력예방교육은 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민감성을 제고하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로 인해 페미니즘이 친밀한 관계 내의 폭력만을 주로 다룬다는 대중의 심증이 굳어지고 있다.
더불어 2010년대 중반 이후, 여성혐오 살인사건, 데이트폭력 사건, 미투 운동, 온라인을 중심으로 한 여성착취 범죄처럼 페미니즘의 긴급한 개입이 필요한 성범죄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페미니즘이 과연 친밀한 관계의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 회의적인 시각이 드리워지게 되었다. 그래서 페미니즘과 사랑은 불화하는 것으로, 어쩌면 페미니즘은 (연애를 포함한) 친밀한 관계가 파탄 났을 때야 비로소 개입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더욱이 ‘비연애’, ‘탈연애’, ‘4B’와 같이 남성과의 친밀한 관계에 대한 전면적인 단절을 선언하는 젊은 여성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오늘날, 연애와 사랑을 다루는 페미니즘은 낡은 것일 뿐만 아니라 반동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아니, 그래서 오늘날 페미니즘은 연애와 사랑을 설명하는 데 적극적으로 접합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특히나 지식을 전달하고 건강한 시민을 길러내는 현장인 교육에서 더욱 그렇다. 왜냐면 연애는 타자와 사랑을 나누고 일상을 쌓아 올리는 등 결국은 누구와 함께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 즉 개인이 자신의 삶과 생애과정을 구체화하여 미래를 전망하고, 어떤 삶을 살지에 대해 고민하는 교육의 목적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페미니즘의 언어가 필요한 이유는 가장 ‘개인적인’ 친밀한 관계를 정치화하고자 했던 것도, 타자와의 윤리를 오랫동안 고민해왔던 것도 바로 페미니즘이라서 그렇다. 연애와 사랑을 지식으로 가르치기에도, 페미니즘 언어로 가르치기에도 곤란하게 되어 버린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 교육에서 친밀성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섹슈얼리티를 역동성이 아닌, 위험으로만 배울 때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연애와 사랑에 대해 교육이 개입하는 경우는 주로 섹슈얼리티를 위험으로 다룰 때이다. 이러한 경향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성교육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교육 담론에서 오랫동안 청소년은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져 왔다. 그래서 청소년의 섹슈얼리티는 침해당하거나 오염되기 쉽고, 한번 침해당하면 다시 복구할 수 없는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성교육이 오랫동안 ‘순결교육’이나 ‘청소년 임신’에 집중한 것은 섹슈얼리티를 위험으로 다루는 인식틀에 기반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육은 청소년의 연애를 지나치게 성애화하면서, 그릇된 성적 가치관을 학습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물론 이제는 청소년의 연애를 곧바로 탈선으로 연결시키는 것이 철 지난 틀이라는 데 대부분 공감할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청소년 대상 성교육은 청소년의 섹슈얼리티 실천을 터부시하며 성적 행동을 억제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연애와 사랑에 대한 교육도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스무 살이 넘은 성인에게는 청소년에 비해 연애를 상대적으로 훨씬 더 ‘권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관계 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섹슈얼리티의 위험을 강조한다는 점은 비슷하다.
2010년 중반 이후 데이트폭력 사건이 대대적으로 사회문제로 떠오르게 되면서, 최근 몇 년 동안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데이트폭력 예방교육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었다. 데이트폭력 예방교육은 대부분 섹슈얼리티를 실천하는 상황에서 ‘무엇이 데이트폭력인가’를 판별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교육 전략을 택하게 된 이유는, 친밀한 관계 내 폭력의 특성 중 하나가 오랫동안 폭력을 당하면서도 자신이 피해자임을 깨닫지 못한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 폭력이 무엇인지 예민하게 식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실제로 필자가 진행했던 대학생 대상 데이트폭력 예방교육 이후에 자신의 경험을 폭력으로 언어화할 수 있었고, 이것이 피해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피드백을 이메일로 받은 적도 있다. 이와 같은 교육 전략이 잘 사용된다면 피해자의 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섹슈얼리티를 위험으로 다루는 견해는 페미니즘 운동과 이론에 빚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미국을 중심으로 발전했던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이론가들은 여성이 남성에 의해 억압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섹슈얼리티에서 찾았다. 이들은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남성의 지배가 가부장제의 핵심이기 때문에, 여성이 해방되는 길은 친밀한 관계를 급진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여겼다.
가장 사적이고 개인적인 관계가 가장 첨예한 정치적 장소가 될 수 있다는 통찰은 이전까지 가려져 있던 성폭력, 가정폭력, 데이트강간 등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고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친밀한 관계 내의 젠더 위계와 폭력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고할 수 있게 된 것은 당시 급진주의 페미니즘 이론의 덕이 크다.
▲ 섹슈얼리티, 연애 등의 경험을 통해 누군가는 성장하기도 하고, 친밀한 관계를 맺는 즐거움과 관계의 역동성을 알게되기도 한다. |
교육이 친밀한 관계 내의 폭력의 가능성을 알려주는 것은 중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섹슈얼리티를 위험으로서만 강조할 필요는 없다. 대학에서 친밀성에 대한 수업을 진행하며 느낀 것은 학생들이 애정 관계 내에서 폭력적인 경험도 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성장하는 경험도 하며, 어떤 삶을 살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전망하는 계기로 삼는다는 점이다. 연애와 사랑은 섹슈얼리티의 위험을 포함하지만 그것을 초월하는 일이다.
친밀한 관계를 다각도로 성찰할만한 교육이 풍부하게 마련돼 있지 않은 환경에서 폭력적 상황을 강조하는 교육이 대중적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을 때 우려스러운 것은 첫째, 성적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적절히 통제하고 협상할 줄 아는 성적 주체를 성장시키기 어렵다는 점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타자와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의 즐거움을 다루지 못한다는 것이다. 즐거움은 사적으로 ‘알아서 하는 것’이고 문제나 위험만을 교육에서 다루는 것이야말로 교육과 삶의 괴리를 심화시키는 방식이다.
친밀한 관계는 즐거움과 위험이 언제나 공존하는 복잡한 인간관계다. 친밀성을 다루는 교육에서는 ‘무엇이 폭력인지’ 판별할 수 있는 것을 넘어, 인간관계의 역동성을 사유하도록 도와야 한다는 과제가 있다.
‘남녀는 애초에 다르니까’…성차 과학의 한계와 문제점
연애와 사랑에 대한 교육의 또 다른 방향은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강조하는 것이다. 연애와 사랑을 ‘흥미롭게’ 다루고자 하는 대중강좌나 대학 내 사랑이나 결혼에 대한 교양강의에서 많이 보이는 방식이다.
이러한 교육은 여성과 남성의 성차를 강조하는 과학 담론에 기대고 있다. 성차 과학 담론이란 쉽게 말해 ‘구애에 있어 남성은 적극적이고 여성은 소극적이다’, ‘남성은 여성의 외모에, 여성은 남성의 경제력에 끌린다’와 같은 ‘검증된 가설’이 사랑에 있어 여성과 남성의 서로 다른 반응이나 심리를 설명해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대중매체에서 수없이 반복되어 사랑과 연애에 대한 상식이 된 지 오래다.
▲ "연애의 과학"은 연애와 관련된 심리학 연구를 소개하는 웹사이트이다. 모바일 어플리케이션으로도 볼 수 있다. 출처: 연애의 과학 홈페이지(scienceoflove.co.kr) |
문제는 인간의 행동이나 심리를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에서 증명하고자 한 가설이 대부분 여성과 남성의 ‘차이’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인간의 재생산을 다루면서, 짝짓기와 번식이라는 생물학적 이벤트에 집중한 결과다. 생물학적으로 인간이 번식되기 위해서는 이성애가 의심할 바 없는 당연한 전제이다 보니, 인간 행동이나 심리 기저의 과학적 원인을 탐색하는 학문에서 여성과 남성을 반대의 항에 두고 이들의 차이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발전될 수밖에 없었다.
더 큰 문제는 사회생물학, 진화심리학, 그리고 비교적 최근에 발전한 신경과학 등에서 주장하는 남녀의 성차가 의심할 바 없이 ‘진실’로 여겨지기 때문에, 이에 대해 비판적으로 질문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 결과, 교육 현장에서도 여성과 남성의 생물학적이고 자연적인 차이에 대한 지식을 큰 성찰 없이 그대로 활용하는 실정이다. 심지어 대학에서 진행되는 성 심리학이나 사랑과 결혼에 대한 수업에서 성차를 다룰 때, 성별에 따른 뇌의 차이를 표로 만들어 제시하는 경우도 있다. 남성은 우뇌가 여성보다 크기 때문에 언어능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하고, 여성은 전두엽이 남성보다 크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감정이입 능력이 더 뛰어나다는 식이다. 연애와 사랑을 다루면서, 여성과 남성의 생물학적인 차이를 구분해서 가르치는 것이 어떤 효과를 발휘할까?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강조하고 과장하는 과학 담론이 친밀성을 다루는 교육에서 사용될 때 우려스러운 것은, 젠더 관계가 필연적으로 갈등적인 것으로 재현되는 동시에 그 갈등에 대한 해석이 ‘남녀는 애초에 다르니까 어쩔 수 없다’거나 ‘남녀의 다름을 이해하자’는 식으로 손쉽고 편리하게 뭉개져 버린다는 것이다. 두 전략은 표면적으로 달라 보이지만, 결국 여성과 남성 간의 친밀한 관계의 첨예한 갈등을 제대로 해석하지도 못하고, 해결하는 역량을 키우지도 못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같다. 과학적 지식을 활용해 성차를 강조하는 전략은 겉으로는 최신의 지식을 배울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친밀한 관계 내 민주적인 소통을 막는다는 점에서 퇴행적인 가치관을 학습시킨다.
성적 차이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여성과 남성의 특징을 각각 반대의 항에 두고 상대편 젠더의 특징을 학습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차이가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어떻게 구성되며 변화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나의 삶과 나에게 중요한 타자의 삶, 그리고 우리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살피면서 가능해진다.
페미니즘은 ‘성차’를 주어지거나 증명된 지식으로 인정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 대한 사유와 통찰을 통해 끊임없이 갱신되는 지식으로 여긴다. 친밀성을 다루는 교육이 궁극적으로 민주적이고 평등한 성적 소통을 위한 것이라면, 관계를 통해 성차를 성찰할 수 있는 페미니즘의 지식이 적극적으로 접합될 필요가 있다.
페미니즘 지식으로 연애와 사랑, 그리고 관계맺기를
현재 한국 사회에서 연애와 사랑에 대한 교육은 친밀한 삶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위험에 대처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친밀성을 다루는 교육에서 섹슈얼리티를 주로 위험으로 다루는 것과, 과학 담론을 활용하여 성차를 강조하는 지식이 유독 활용되는 이유는 ‘젠더 전쟁’으로까지 불릴 정도로 현재 한국 사회에서 젠더 관계가 매우 갈등적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반대로 이러한 교육이 오히려 성적 주체로서 욕망을 탐색하게 하는 것을 방해하고, 친밀한 관계의 즐거움을 이야기할 수 없게 하며, 친밀한 관계가 가진 저마다의 복잡성을 젠더 이분법의 틀에 가두게 하면서 갈등적인 젠더 관계를 다시금 강화하는 데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질문해볼 필요가 있다.
친밀한 관계 내 폭력뿐 아니라, 친밀한 관계의 여러 가지 확장된 가능성에 대해서도 이야기될 필요가 있다. 타자를 만나는 즐거움과 환희, 누군가와 관계를 맺으면서 촉발되는 윤리적 질문과 책임성, 그리고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수행하는 고단한 노동을 해석할 수 있는 자원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페미니즘은 일찍이, 그리고 계속해서 그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언어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것이 바로 연애와 사랑에 대한 교육이 다양한 페미니즘 지식과 접합해야 하는 이유다.
페미니즘 지식은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를 민주적으로 조직해나가는 데 유용한 자원이다. 때문에 친밀한 관계를 다루는 교육에서는 좀 더 성실히 페미니즘이 발전시킨 이론적 언어를 교육의 언어로 번역해 낼 필요가 있다. 앞으로 친밀성을 교육하는 현장에서 페미니즘 지식을 접합하는 낯선 시도들이 이어지길 바란다.
[필자 소개: 임국희. 젠더교육연구소 이제IGE의 연구원이자 경희대학교 여성학 강사이다. 한국 사회 친밀성의 변화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 중이다. 주요 논문으로 “‘비연애’ 담론이 드러내는 여성 개인 되기의 열망과 불안: <계간홀로>를 중심으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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