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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연 기자의 사심 있는 인터뷰] 이반지하/김소윤을 만나다
“감히 너희가 나를 기억하기보다는 너네는 그냥 나를 외워야 될거야. 모든 역사적 사건처럼.”
이반지하를 처음 ‘영접’했던 건 2013년, 홍대 앞에서 열렸던 서울퀴어문화축제의 퀴어퍼레이드 무대에서였다. 주옥 같은 이야기가 담긴 노래를 부르는 이반지하의 모습은 당시에도 꽤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그 땐 몰랐다. 이반지하가 전설이라는 걸.
▲ 팬으로부터 선물 받았다는 우주대스타 명패를 들고 있는 이반지하/김소윤 ©일다 |
최근, ‘인싸’(인사이더의 뜻하는 말로 외향적이며 적극적으로 타인과의 소통에 나서는 사람)들이 모이고 있다는 핫한 음성채팅 앱인 클럽하우스에서 이반지하가 활약을 이어가고 있다. 페미니즘과 퀴어성(Queerness)에 관해, 아슬아슬한 경계를 오가며 촌철살인 멘트를 날리는 이반지하는 참여자들을 쉴새 없이 웃게 만든다.
사실 이반지하의 다양한 활동에 견주어 본다면 비정기적으로 열리는 클럽하우스에서의 수다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2019년 연말엔 이반지하 <최초마지막단독인권콘서트>를 열었고, 작년부터 ‘셀럽 맷’이 진행하는 팟캐스트 <영혼의 노숙자>에서 한 달에 한번 청취자들의 고민과 고해성사를 들어주는 [월간 이반지하]를 함께하고 있다. 전자책 구독 서비스인 리디셀렉트에서 매주 화요일 <이반지하의 ‘오늘은 투데이’>라는 에세이를, 네이버에선 웹소설 <다시 한번 플라워>를 연재 중이다. 유튜브 채널에선 절기마다 팬들과 소통하며 ‘문화혜택비’를 수령하는 라이브도 열고 있다.
이제는 수만 명이 모이는 퀴어문화축제가 아직 자리를 잡아가던 시절, 무려 17년 전인 2004년 퀴어문화축제 공식파티에서 데뷔한 이반지하. 그는 여성의 몸을 훼손하는 사진으로 유명한 아라키 전시가 일민미술관에서 개최된 것을 비판하며, 젊은 페미니스트 작가들과 함께 <안티아라키전>(2003)을 여는 등(관련 기사: 모델을 착취한 사진, 정말 예술 맞아요? http://ildaro.com/8307) 다양한 작업을 해 온 미술작가이자 애니메이션 감독 김소윤이기도 하다. 전방위로 활동을 넓히고 있는 아티스트 이반지하/김소윤을 만났다.
-우리, 2018년에 김소윤 작가로 만났었죠. 그 땐 이반지하를 알고 있었음에도 김소윤 작가가 바로 이반지하라는 걸 생각도 못했어요. 이렇게 이반지하로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반지하가 어떻게 탄생했는지부터 듣고 싶어요. “비운의 비투비”, “나는 이반 그녀는 일반”, “우리가족 LGBT” 등의 노래를 제작한 이반지하는 어떻게 만들어진 건가요?
“대학에서 소위 민중가요를 부르는 노래패를 했어요. 근데 그 노래패가 다른 곳과 조금 달랐던 부분이 창작곡 만드는 걸 중시했다는 거죠. 전 음치라고 혼나기도 했지만(웃음), 가창을 담당하는 사람이었고, 그럼 기타를 칠 줄 알아야 했거든요. 지금도 기타를 잘 치진 못하지만 코드 따고 하는 것들을 그 때 배운 거예요. 하지만 노래패 활동은 내부에 성폭력 사건이 발생한 일로 그만뒀어요. 두 번 정도 그런 일이 생기니까 못하겠더라고요.
▲ 김소윤 작가가 졸업 작품으로 만든 <최후의 만찬> ©이반지하/김소윤 |
그 즈음에 졸업 작품을 만들어야 했어요. <최후의 만찬>이라고, 관객들이 참여해서 남성 성기와 그것이 사회적으로 의미하는 것들을 자르는 퍼포먼스를 하는 작품을 만들었죠. 그런데 졸업이 거부되었고, 제 창작물이 검열을 당했어요. 부당한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6개월 동안 다시 작품을 만들어야 했죠. 학교 작업실은 쓸 수 없어서 홍대 반지하 방을 빌려서 작업실로 쓰기 시작했어요. 다시 만든 작품은 레즈비언 관계에 관한 거였는데, 제 작품을 이해를 못한 건지 통과시켜 주더라고요.(웃음) 하여튼 그 반지하 방에서 뚱땅뚱땅 하다가 만든 첫 곡이 ‘비운의 비투비’에요.”
-이반지하의 첫 곡이 “비운의 비투비”였군요. 강렬한 가사가 담긴 곡이죠. 레즈비언 문화를 재미있게 표현했고요.
“뭔가 대단한 걸 쓰려고 했던 건 아니에요. 전 10대 때 퀴어로 정체화했던 것도 아니고, 제 자신을 이성애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거든요. 그러다가 2003년, 2004년 즈음에 제 안에서 성정체성으로 인한 파도가 일었어요. 관련 문화에 빠져들기도 했고요. 그러면서 노래도 만들게 된 거에요. 만들고 보니 저도 재미있고 주변 친구들도 좋아하더라고요. 그래서 ‘우리가족 LGBT’도 만들고, 계속 이어지게 되었죠.”
-그럼, 이반지하의 곡들이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만들어진 건 아니네요?
“이반지하라는 이름도 반지하에서 작업했기 때문에 만든 거고, 정말 막 지은 이름이에요. 오래 쓸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어요. 공연도 조금 장난스럽게 했고, 부치처럼 보이고 싶어서 선글라스 쓰고 그랬어요. 재미있게 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고, 누굴 좀 유혹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죠.(웃음)
처음엔 그랬는데 이후 이반지하 퍼포먼스에 변화가 생겼어요. 몇 번 공연을 하고 나서 깨달았거든요. 이반지하는 그냥 가수가 아니라는 걸요. 진지한 공연이 아니라, 일반가수가 했다면 망신스러울 것 같은 퍼포먼스를 하는 게 이반지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싱어송라이터에서 퍼포머로, 조금 더 현대미술적으로 변화해 온 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 변화가 가능했던 건, 2013년 CD 발매의 영향이죠. 그 앨범이 대중적으로 유통된 건 아니지만, 앨범 작업을 하면서 저한테 MR(가수의 목소리 없이 노래 반주만 있는 음악)이 생겼고, 그래서 기타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죠. 몸으로 더 많은 표현을 하고 싶은데 기타 때문에 못한 부분이 있었거든요. 2017년 리드마이립스(READ MY LIPS) 전시에서의 퍼포먼스가 좋았어요. 그 때부터 노출을 많이 하기 시작했고, (남성 혹은 여성의 성기를 연상시키는) 모자 등의 소품도 썼죠. 좀 더 내 몸에 맞는 방식을 찾은 느낌이 들어서 너무 좋더라고요.”
▲ 2017년 갤러리 합정지구에게 열린 리드마이립스展에서 퍼포먼스 중인 이반지하 ©이반지하/김소윤 |
-이반지하 활동 연혁을 보면, 공백이 있어요. 쭉 계속 활동해온 줄 알았는데 말이죠.
“더 이상 공연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주변에서 종종 ‘신곡 언제 나와?’ 라고 묻는 것도 좀 화가 나더라고요. 퍼포먼스는 매번 새롭게 해야 하는데, 누가 비용을 제공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저를 섭외하는 퀴어 커뮤니티나 단체의 재정이 힘들었으니까 적정한 공연비를 지급하지 않는 분위기였고, 제 공연을 누가 돈 주고 와서 본다는 걸 상상하지도 못했고요. 그렇다고 그냥 대충 하는 건 너무 싫었고요. 공연하고 나서 성취감이 느껴지는 게 아니라, ‘저기까지 갈 수 있는데 못 가는’ 기분이 싫었거든요.
한편으론 예술가로서 성장 중이기도 했던 것 같아요. 사람들의 평가나 이야기가 두려웠고, 그걸 정돈해서 들을 수 있는 역량이 안 되었고요. 또 이반지하 자체가 커밍아웃이기도 하잖아요. 그것도 준비가 안 되어 있었고요. 전업 작가나 예술가로 성공하려면 소위 ‘떠야’ 하는데, 이반지하가 알려지고 관련 활동이 노출되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폭력적인 상황을 마주하게 되진 않을까 고민했죠. 그래서 김소윤과 이반지하를 섞지 말라고 주변에 화를 내던 때도 있었어요. 둘을 분리하고자 한거죠. 퀴어로 살면서 이런 이중 정체성은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는 생각도 들어요.
게다가 이 사회가 이반지하를 제대로 소비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기록을 남기는 데에 있어서도 굉장히 부정적이었어요. 그래서 공연 사진 촬영이나 녹음 같은 것도 절대 못하게 했거든요. 그렇게 하다 보니까 제 활동이 기록되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졌죠.”
-2019년부터는 엄청난 활동들을 해오고 있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크게 세 가지로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첫 번째는 이반지하와 김소윤이 통합되었다는 거에요. 한동안 공연을 안 했던 기간이 있는데, 그 때 사실 이반지하를 포기했었어요. 2013년 앨범을 내는 과정이 너무 힘들기도 했고, 난 이제 할 거 다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누군가 지원을 해 주는 것도 아니고 혼자 이걸 계속한다는 게 너무 버거워서 그냥 미술가 해야겠다 싶었어요. 그 땐 그걸 선택할 수 있을 줄 알았죠.(웃음) 그러다가 2018년 즈음에 세상에 대한 짜증이 폭발해버렸어요. 내가 지레 내 세상을 한정하는 게 싫어지더라고요. 그리곤 ‘아, XX 몰라. 나 그냥 막 살거야. 맘대로 해석해. 나 김소윤인데 어떻게 해, 나 이반지하인데 어쩌라고. 내 맘대로 할래’ 하면서 이반지하와 김소윤 정체성이 싸우던 걸 정리했어요.
두 번째는 이반지하가 잊혀지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든 거에요. ‘내 업적인데 잊혀지면 어떻게 하지’라는 의미가 아니라, 이반지하의 활동이 기록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거죠. 처음 페미니즘을 접했을 때, 페미니스트 미술가들과 그들의 업적을 찾는 게 힘들었거든요. 자료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찾기 어려웠어요. 가부장제 사회가 소수자를 기록하지 않기 때문이죠. 아마추어적이라는 것부터 이유야 여러 가지에요. 퀴어예술도 그렇더라고요. 제 다음 세대들이 퀴어미술, 퀴어아트가 없다고 말하는 걸 보고 좀 충격을 받았어요. 기록이 없으니까 또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구나 싶어서 ‘이러면 안 되겠다, 내가 이반지하를 다시 한번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렇지만, 그걸 하는 게 쉬운 건 아니잖아요. 그 즈음 기막힌 우연으로 리타라는 친구를 알게 되었어요. 제가 아는 사람 중에 이반지하라는 존재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었죠. 콘서트 기획과 음원 관련 각종 서류작업 등 실질적인 업무 진행에 있어서, 믿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존재였어요. 전 리타 같은 사람을 2004년 데뷔할 때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아요.
이렇게 세 가지가 맞물려 2019년 디지털 음원 발매와 콘서트로 이어진 거에요. 내 팬들을 위해서, 좀 더 거창하게 이야기하자면 한국의 퀴어예술에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책임이 있었죠. 2019년 콘서트 티저 영상을 보면 ‘위대한 책임이 온다’는 말이 나와요. 그 책임이라는 게 그런 의미에요. 내가 이반지하를 만들었고, 그가 사랑 받은 것에 대한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죠. 디지털 음원을 내고 콘서트를 하자. 그리고 모든 활동을 종료하자고. 저는 항상 끝내는 걸 생각해요.(웃음)”
-콘서트를 끝으로, 정말 활동을 중단하려고 했던 거에요?
“이반지하 활동이라는 게 그래요. 항상 최후라고 생각하고 하는 수밖에 없어요. 뭐가 담보되어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2019년 콘서트가 중요했어요. 이 일이 누군가한테는 ‘어느 인디뮤지션이 콘서트 했다’는 정도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저에겐 완전히 다른 맥락이에요. 콘서트를 준비하면서 제가 중시했던 게, (퀴어에게 의미 있는 공간인) 홍대 공연장에서 하는 것, 공연장 밖에 포스터가 붙어있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여기 뭐하는 거에요?’ 라고 물었을 때 ‘이반지하 콘서트 기다리는 거’라고 말할 수 있게 줄 서서 기다리게 하는 거였어요. 퀴어아티스트 이반지하 팬들에게 그 경험을 하게 해주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일부러 줄을 세웠고, 레드카펫 퍼포먼스도 했죠.”
▲ 2019년 12월 6일 벨로주 홍대에서 열린 이반지하 <최초마지막단독인권콘서트>를 알리는 플래카드 걸기. ©이반지하/김소윤 |
-이반지하와 김소윤의 정체성을 분리했던 경험을 얘기했는데, 누군가는 이반지하를 김소윤의 ‘부캐’(부캐릭터)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같아요. 이반지하 정체성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부캐 이야기를 종종 듣곤 했는데, 전 그 말을 싫어해요. 누군가는 이반지하에 대해서 ‘캐릭터 참 잘 잡았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건 캐릭터가 아니에요. 이반지하는 제 자신이면서 제 작품이거든요. 전 김소윤이거나 이반지하이기만 할 수 없었어요. 이게 퀴어로서의 삶의 단면을 보여 주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이건 계획된 프로젝트가 아니에요. ‘그냥 누군가는 이런 삶을 살고 있다’는 거에요.
좀 거칠게 말하자면, ‘부캐’ 이야기하는 시스젠더 이성애자들은 복에 겨웠다고 생각해요. 얼마나 (정체성)분열이 없으면 부캐를 만들고.(웃음) 근데 왜 그게(부캐를 만드는 것) 유행하는지는 이해해요. 우리가 사는 사회는 한 캐릭터로 살길 요구 받는 사회니까요. 직업도 하나여야 하고, 뭐도 하나여야 하고…. 하지만 저에겐 삶이라는 거에요. 그래서 이제 웬만하면 이름을 병기하기로 마음 먹었어요. 이제 뭐 어쩔래죠.(웃음)”
-캐릭터가 아니라 삶이라는 말에 공감이 가요. 그렇다면 이반지하에게 퀴어란 무엇일까요?
“전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다 퀴어라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스스로 믿고 싶진 않겠지만 시스젠더 이성애자들도 이상한(퀴어한) 사람들 중 하나고. 그럼에도 전략적인 이유나 여러 이유로 퀴어라는 말이 필요하긴 하죠. 다만 외국어이고, 그래서 입에 잘 안 붙는 것 같기도 해요. 대안적인 언어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지금 제 정체성을 굳이 세상의 언어로 말하자면, 젠더퀴어인 것 같은데요. 근데 그 말을 쓰는 건 좀 답답하달까. 그래서 그냥 퀴어라고 하죠. 근데 요즘의 태도는 사실 ‘그냥 맞춰봐’에요. 당신들 마음대로 이름 붙여봐, 근데 이름 붙이자마자 난 그게 아니게 될거야.”
-<이반지하의 ‘오늘은 투데이’> 에세이에서 이야기 한 ‘젠더쫓김이’라는 말이 참 좋더라고요.
“전 정말 그렇게 느끼거든요.”
▲ 리디셀렉트에서 연재 중인 <이반지하의 ‘오늘은 투데이’>의 일부 |
-이반지하의 매력은 여러 가지지만 그 중 하나를 꼽자면 탁월한 유머 감각인 것 같아요. 저 같은 노잼인간(재미없는 사람)에겐 그게 특히 부럽더라고요.
“전 노잼인간을 사랑합니다. 우리 서로 역할을 지키도록 해요. 노잼인간이 노력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제발, 우리 일을 끊지마요. 그냥 웃어줘요.(웃음) 유잼들은 노잼 없이 살아갈 수 없어요.
제가 지금 이렇게 된 건, 욕을 많이 먹었기 때문이에요.(웃음) 대학에서 처음 페미니즘 접했을 때, 다들 그러는 것처럼 저도 새로운 세상을 만났죠. 그 땐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강박도 엄청났고요. 근데 전 (페미니즘 관련한) 학문적인 글은 못 쓰겠더라고요. 그래서 좌절하기도 했어요. 그 땐 내 글(언어)이 따로 있다는 생각을 못하고, 그냥 내 길이 아닌가 보다 했죠.
전 제가 활동가 스타일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훨씬 더 예술가적인 사람이었던 거에요. ‘각자 역할이 있다’ 이런 얘기를 했는데, 전 제 역할이 있는 거에요. 시위 제일 앞에 설 수도 있지만, 제가 집에서 뚱땅뚱땅 하며 음악을 만드는 게 많은 사람에게 더 좋은 일이었던 거죠. 일련의 과정 속에서 그런 식으로 정리할 수 있었어요. 저도 이 사회에서 여성으로 키워졌기 때문에 ‘나대지 마라, 나서지 말라’는 말을 듣고 자랐잖아요. 그래서 나를 드러내는 것에 대한 수치심이 아직 있어요. 그러니까 박수 많이 치고 신나게 웃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이반지하의 유머는 언피씨함(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음)과 미러링, 씨니컬함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면서, 아슬아슬하고 독특해요. 누군가에겐 이상하고 이해가 안 되는 유머일 수도 있겠죠. 그래서 전 이반지하의 유머 자체가 퀴어하다고 느껴졌어요.
“그런 말을 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감사해요. 예전에 어떤 사람들은 와서 화를 낸 적도 있었거든요. 욕도 먹었지만, 제 이야기를 이해해 주는 사람들을 만났고, 또 같이 놀게 되면서 생기는 아드레날린이 있어요. 생각해 보면 어렸을 때도 많이 혼났거든요. 어른들한테 ‘짧고 굵게 사세요’ 이런 말 하고.(웃음) 하지만 저도 예민한 사람이라 누군가한테 상처가 되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사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건 에너지가 드는 일이죠. 근데 제가 워낙 자극을 좇는 사람이라.(웃음)”
▲ 셀럽 맷이 진행하는 팟캐스트 <영혼의 노숙자>에서 한 달에 한번 청취자들의 고민과 고해성사를 들어주는 [월간 이반지하]가 3월 13일 온라인 공개방송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
-근데 또 신기한 게, 그렇게 자극적이고 신랄한 것 같은 이야기 속에 따뜻함이 있다는 거에요. 팟캐스트에서 고민 사연 보낸 사람들에게 건네는 말도 그렇고, 이반지하의 말에서는 늘 따뜻함이 감지되었어요.
“따뜻함은 정말 예상치 못한 건데.(웃음) 전 말할 때 자기계발적이거나 ‘괜찮아’ 같은 전형성을 안 띄려고 노력하는 편이거든요. 제가 하는 말이 조금 다르게 들렸으면 좋겠다는 희망이 있어요. 팟캐스트 <영혼의 노숙자> 청취자의 경우, 여성들이 많고 성소수자들이 많거든요. 기존 사회의 위로와는 걸맞지 않는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인거죠. 그게 어떤 위로여야 하는지 많이 고민해요.
특히 퀴어에겐 정말 죽음이 가까이 있어서요. 우리가 보는 죽음도 있지만, 안 보이는 죽음이 훨씬 더 많죠. 자기가 퀴어라는 걸 드러내지 않고 죽는 경우도 많고, 부모가 장례 과정 등에서 자식의 퀴어 정체성을 묵살하는 경우도 많고, 살아있어도 죽음처럼 사는 경우도 있고요.
전 기본적으로 세상은 너무 힘든 곳이라 생각하거든요. 원한 적이 없는데 태어난 거라, 우린 다 억울해요. 근데 또 잘 살아야 한다고 까지 하잖아요. 그냥 사는 것도 힘든데! 전 그냥 다 존중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 각자 사정이 있고 이야기가 있을 거고요. 팟캐스트 사연도 웃고 떠들면서 읽지만 그 이야기에 집중하려고 노력하죠. 자기 이야기를 나눠 주는 거잖아요? 당연히 그래야죠.”
-이반지하가 미래에 넷플릭스 시리즈 <도시인처럼>(레즈비언 작가 프랜 리보위츠가 예술, 돈, 건강, 도시 등에 대해 신랄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을 찍으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해봤어요. 앞으로 하고 싶은 거나, 할 예정인 활동이 있나요?
“3월 말에, 제가 작가로 참여한 시트콤이 공개될 거에요. 성적소수문화인권연대 연분홍치마와 함께 작업했고, 퀴어가족에 관한 이야기에요. 저도 시트콤 작가는 처음이라 작품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요. 반응이 좋아서 넷플릭스에서 연락 왔으면 좋겠네요.(웃음) 그리고 에세이집이 상반기 중에 나올 것 같아요. 집필은 다 끝낸 상황이고요. 책이 나올 즈음 새로운 디지털 음원을 하나 낼까 생각 중이기도 해요. 책이 나와서 북콘서트 등의 행사를 하게 되면, 노래도 부르고 하면 좋을 것 같아서요.”
-이반지하가 “기존 사회의 위로와는 걸맞지 않는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그저 생존하라. 그렇게 말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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