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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 평화의 소녀상 세운 초국적 시민모임 ‘액션그룹 위안부’ (하)
[하리타의 월경越境 만남] 독일에 거주하며 기록 활동을 하는 하리타님이 젠더와 섹슈얼리티, 출신 국가와 인종, 종교와 계층 등 사회의 경계를 넘고 해체하는 여성들과 만나 묻고 답한 인터뷰를 연재합니다.
국가의 경계를 긋지 않는 베를린의 ‘위안부’ 교육‧정치 모임
‘액션그룹 위안부’(Aktionsgruppe “Trostfrauen”)는 시민단체 코리아협의회(Koreaverband e.V.) 산하 교육·정치 조직으로, 2008년부터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다. 영화 상영회와 컨퍼런스, 액션 주간, 철야 기도회, 평화상 순례, 온라인 캠페인 등 크고 작은 행사를 개최했다. 수년 째 열리고 있는 1~2주 간격의 수요 회의에는 10~20명이 꾸준히 참여한다.
모임 구성원은 한국, 일본, 독일 출신 여성들이 가장 많고 필리핀, 베트남, 콩고 등지에서 온 이주민들도 있다. 독일어를 공식언어로 쓰며, 대내외 소통 시 영어와 수화, 스페인어 등을 병행한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어서 때로 마찰이 생기기도 하지만, ‘국경을 초월해서 사고하고 가부장제의 억압이라는 공통분모를 찾아내는 경험’이 더 일상적이다.
정화: “액션그룹에는 20~80대가 두루 섞여 있고요, 출신 국가에 따라서 역할이 조금씩 다르기도 하죠. 한국 멤버들은 당장 내일이라도 할머니들이 돌아가실 수 있다는 생각에 항상 좀 다급해요. 반면 일본인 동료들은 일본 정부의 방해 논리를 잘 아니까 홍보 문구 하나라도 신중하게 보고요. 초기에는 잠시, 평화상이 한복을 입고 있으니까 한국 피해자만 상징하는 것 아니냐고 조금 불편해하기도 했죠. 차이가 아주 사소한 것들로 표출되기도 해요. 한번은 행사장에 의자가 부족해서 한쪽은 당장 사오자고 하고, 한쪽은 활동비 낭비라서 안 된다며 옥신각신했는데, 결국 독일 선교사 단체 목사님이 갑자기 지갑에서 50유로를 꺼내 기부하셔서 싱겁게 해결된다거나…”
▲ 코리아협의회 내에 정식 개관을 준비중인 ‘위안부’ 전시관을 둘러보며 인터뷰를 진행했다. 1990년대 초, ‘위안부’ 피해 증언을 공개 모집하던 시대상을 공중전화 부스로 재현한 곳에서 정화가 포즈를 취했다. 정화는 통역사로서 독일 곳곳에서 생존하는 피해 여성들의 말을 직접 전해왔다. ©촬영: 하리타 |
오는 4월 정식 개관을 앞두고 있는 ‘위안부’ 전시관에 14개국 피해 여성들을 대변하는 다양한 초상 일러스트와 세계 지도가 크게 자리하고 있을 만큼, 액션그룹은 국가를 초월한 연대를 강조해왔다. 베트남전, 르완다 내전, 나치 집권기, 유고슬라비아 내전, IS의 야지디족 탄압 등 세계 곳곳의 분쟁 성폭력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대응하는 활동도 꾸준히 해왔다. 독일의 이주여성 단체인 ‘야지디 여성위원회’(Ezidischer Frauenrat e.V.)나 쿠르드 여성 그룹인 ‘로자바 수호 여성들’(Women Defend Rojava)과 공동으로 캠페인을 벌이는 식이다.
지난해 8월에는 ‘수단 부흥을 위한 여성들’(Women of Sudan Uprising)과 액션그룹이 나란히 <여성살해와 성폭력에 대항하는 자기결정 주간>에 참여했다. ‘수단 부흥을 위한 여성들’은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용기 있는 행동에 감사한다”고 밝히며, 최근까지 10년간 독재 정권과 내전 속에서 자행된 여성학살과 성폭력에 대한 피해 규명 및 보상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한국 출신 활동가들은 ‘위안부’에 대한 한국사회의 민족주의 정서를 누구보다 민감하게 포착하고 경계한다.
서구 백인중심적, 가부장적 역사관을 바꾸기 위한 운동
영롱: “지금 제가 이 운동에 참여하는 이유는 ‘평화의 소녀상’ 그 자체를 위한 것이라기보다 베를린을 위한 거예요. 지금 여기서 이 캠페인을 잘 치러내는 게 제가 사는 도시를 더 나은 곳으로 바꾸리라고 생각하니까요. 이 사건(평화상 철거 명령)이 다른 곳에서 터졌다면 저는 이렇게까지 안 했을 거예요. 서로 다른 도시에 위치한 평화상은 그곳의 고유한 정치적 맥락을 보여준다고 봐요. 베를린에는 다양성과 평등을 구현하려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잠재력이 있는데, 평화상이 여기 보탬이 돼요. 다른 이주민 베를리너들과 얘기해봐도 그래요. ‘내가 사는 베를린을 어떤 공간으로 만들어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 끝에 정치 행동을 하더라고요.
재독 한인들 중에 여전히 나서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 잘 알고 있어요. 특히 젊은 여성들이요. 평화상을 지지하는 것이 과도한 민족주의 행동 같아서 거부감을 느끼거나, 자기 아이덴티티를 ‘한국인’이라는 국민국가 레이블에만 가두기 싫은 마음을 이해해요. 저는 언젠가 액션그룹 전체에게 이메일을 보냈어요. ‘나는 이 운동을 한국인이라서 하는 게 아니다. 현재도 지속되는 분쟁 지역 성폭력에 대한 반대하기 때문이고, 그런 사건들에 대한 이곳의 서구 백인 중심적, 가부장적 역사관을 바꾸고 싶어서 한다’고 썼어요.”
▲ 영롱과 폭설이 내린 베를린 시내를 걸으며 이야기 나누었다. 철학 연구자인 영롱은 교내에서는 아직도 백인 남성 중심적인 서양 철학 커리큘럼을 비판하고, 학교 밖에서는 어느덧 유창해진 독일어로 이주난민 여성들의 입과 귀가 되어준다. ‘베를리너’라는 정체성으로 도시의 변화상을 틈틈이 따라가보는 영롱의 등 뒤로, 1699년에 처음 문을 연 샬로텐부르크 성이 보인다. ©촬영: 하리타 |
어진: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는 열을 올리면서 미투(#Metoo) 고발을 한 피해자한테는 ‘진짜 당한 거 맞아? 그러게 거길 왜 갔어’라며 의심하는 사람들, 저는 받아들이기 힘들어요. 그런 사람들에게 ‘위안부’는 여성 인권 문제가 아닌 건가? 두 가지는 서로 통해 있는 건데. 김학순 할머니의 고발이 최초의 미투라는 얘기도 있잖아요. 제 마음 속에서도 한 때는 반일 감정이 주축이었지만, 이제는 프레임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위안부’ 문제에 대해 공부를 하면 할수록 더 이상 국가에 의지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위안부’ 문제 해결도 일본 정부의 사과와 법적 배상이라는 프레임을 버리고 새로 봐야 되는지도 몰라요. 필리핀은 정부가 나서서 소녀상을 못 세우게 했죠. 일본 눈치 보느라. 중국에는 정부로부터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하고 아직까지 걸인이나 마찬가지로 사는 피해 여성들이 있다고 해요. 우리나라도 처음부터 국가가 피해자 편에 서 준 게 아니고, 지금도 정권 바뀔 때마다 조금씩 말이 달라지죠. 물론 성폭력 방지와 피해자 지원, 가해자 처벌 등 국가가 해야 할 역할이 있지만 그와 별개로 우리 개인들이 할 수 있는 일, 행동과 토론의 중요성을 베를린에서 활동하며 계속 깨우쳐요.”
▲ 록다운이 한창인 1월 중순, 인터뷰 중에 어진이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증언과 기록이 담긴 독일어 책자를 보여주었다. 어진은 베를린에 온 이래, 14개국에 걸친 피해 여성들의 이야기를 찬찬히 마음에 담았다. ‘나에게 위안부 운동은 어떤 의미인가’를 자주 되새기며, 오늘 삶에서 만나는 여성들과 가까이 연대하려고 한다. ©촬영: 하리타 |
남자들끼리 악수하는 한일 '위안부’ 협상, 말이 되나요?
2008년 길원옥 할머니를 초청해 유럽 캠페인을 주도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독일 내 ‘위안부’ 운동을 시작한 정화는, 이번에도 정의기억연대와 긴밀하게 협조해 평화상 설치를 이끌었다. 그런데 그도 사실 비슷한 인식의 변화를 겪었다.
한국학 연구자로 미군 기지촌 성매매 연구를 하던 1990년 초반, 한국에서 한창 들끓던 ‘위안부’ 문제에 깊이 관심을 가졌지만, ‘기지촌 문학’에서 남성 작가들이 쓰는 ‘양공주=더럽혀진 몸=침범된 조국’이라는 도식이 ‘위안부’ 피해 여성들에게도 덧씌워지는 걸 보며 좌절했고, 공감할 수 없었다. 독일 남성들의 태국 성매매 관광 사실에 신문에 보도되고, 거리에선 행인들이 정화의 검은색 긴 머리를 ‘예쁘다’며 함부로 만지던 시절이었다.
정화는 독-한 통역사로서 ‘위안부’ 할머니들과 직접 관계 맺는 기회들을 통해 비로소 자기만의 운동 방향과 의미를 찾기 시작했다.
정화: “2010년에 2년만에 길원옥 할머니를 다시 만나 뵈었는데 완전히 달라져 계신 거 있죠. 전에는 사람들 앞에서 발언하는데 부담을 많이 느끼고 눈물도 많이 흘리셨어요. 그런데 그 때는 하늘색 한복을 입고 날아갈 것 같이, 너무나 뛰어난 연설가가 되어 계셨어요. 제가 여기서 전문 통역사로 일하면서 대통령들을 비롯해 정치인들을 많이 만났는데, 우리 할머니가 더 말씀을 잘하시는 거예요. 80살이 넘어도 사람이 변할 수 있다는 점에 감동해서 저도 사명감이 커졌어요.
2011~2015년에는 독일 미래기억책임재단의 지원을 받아서 일 년에 몇 차례씩 독일 곳곳으로 할머니들과 순회 강연을 다녔어요. 한번은 작은 시골학교 강당에 300명 가량 빽빽하게 모여 있었는데, 행사 끝나고 한 여학생이 울면서 다가왔어요. 사실은 자기가 집에서 성폭력을 당하고 있는데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고. 자기 마음 속에는 증오가 이글거리는데 할머니들은 어떻게 이렇게 하시냐고, 그 용기가 너무 고맙다고 얘기하더라고요. 그 때 확 실감했어요. 단 한 명의 여성에게라도 힘을 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일은 가치 있다고.
중국에서 오래 사셨고 남편이 공산당 활동가라서 그런지, 이수산 할머니는 남다른 포스가 있어서 제가 통역하기도 전에 사람들이 기립박수를 칠 정도였고요, 이옥선 할머니는 독일 음식도 잘 드시고 유머러스했어요. 항상 즉흥 강연을 하시는데, 일본 군인한테 칼로 찔렸던 대목이 나오면 오른발로 왼쪽 양말을 벗으셨어요. 그 다음에 꼭 연단에 발을 올렸어요. 키가 작아서 잘 안 되는데도 절대 포기 않고 기어이, 팔다리에 남은 칼자국을 보여줘야 된다고. 그럴 땐 저도 청중들도 웃어야 할 지 울어야 할 지 몰랐죠.
김동원 감독이 연출한 다큐멘터리 <끝나지 않은 전쟁>(2008)은 독일 순회하면서 100번은 봤을 거예요. 볼 때마다 슬퍼서, 게다가 주제가 워낙 무거우니까 항상 엄숙한 모습으로 통역만 했는데요, 언젠가 처음으로 강연의 주어가 “나”로 바뀌고 제 이야기를 조금 풀어놓으니까 사람들이 박수로 격려해줬던 게 기억에 남아요. 그 즈음에야 ‘위안부’ 운동이 내 이야기가 된 거예요.
초기에 협력할 때,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가 민족주의 색채가 짙은 것 같아서 저도 거부감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 단체도 30년 전 그대로가 아니에요. 나름대로 트랜스포메이션 해왔죠. 초국적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위안부’ 운동의 가치와 의미를 재조명하고 앞으로 길을 모색해야죠. 독일에도 많은 전시 성폭력 피해 여성들이 있는데, 전범국가 시민으로서 수치심 때문에 아직도 입을 다물고 있어요. 폴란드 성노예 피해자들은 가해국가 남성에게 봉사했다는 이유로 배신자 취급을 당했어요. 거기선 피해자 운동이 크게 일어나지 못했죠. 한국에서는 반일 감정이 구심점이 되어줬어요. 그러나 시대는 달라졌어요. 남자들끼리 악수하는 한-일 '위안부’ 협상 사진들 보세요, 말이 되나요?”
▲ 2020년 10월 13일, 코리아협의회 사무실에서 ‘위안부’ 관련 기자회견이 진행중인 모습. 가운데 인물이 정화다. 이 사무실 한 쪽에 ‘위안부’ 문제를 초국적 페미니즘 연대 관점에서 다루는 전시실이 곧 완성될 예정이다. ©Korea Verband e.V. |
“평화상 존치 움직임은 시작에 불과해요”
37개 여성단체가 모여 정대협(현 정의기억연대)을 결성한 1990년에 걸음마하는 아기였던 나에게 ‘위안부’ 문제는 늘 거기 있었고, 이미 제도화된 운동이었다. 서술형보다 객관식 문제가 쉬운 것처럼, ‘수요집회’, ‘소녀상 지키기’, ‘일본의 사과와 법적 배상’, ‘피해자 할머니들’ 이렇게 4개의 키워드로 요약된다고 단순하게 생각한 적도 있다. 작년에 이용수 님이 할말이 있다고 나섰을 때는 잠시 거기에 주의를 쏟았지만, 곧 ‘다른 사회운동들처럼 세대교체의 기로에 서 있나 보다’ 하고 말았다.
베를린에 있는 동료들이 줄줄이 메일을 보내올 때서야 오랜만에 마음이 뜨거워졌다. ‘위안부’ 운동 30년, 이를 대하는 한국사회의 관성에 같이 젖어있던 나에게 베를린의 활동가들이 자극이 된 것이다. 하지만 베를린에서 900여 킬로미터 떨어진 남쪽 소도시에 살고 있어서 대책회의나 집회에는 한번도 참석하지 못했다. 아쉬움과 부채감에 당시 동료들에게 직접 찍은 사진으로 웹자보를 만들어 보내기도 했다. “이거 베를린을 위해서 하는 거예요”라는 말, “문득 소녀상이 나 같이 느껴졌다”는 인터뷰이들의 말에 나는 이제 고개가 끄덕여지는데, 한국에 살고 있는 다른 여성들은 어떻게 느낄지 궁금하다.
어진: “저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누구나 자기만의 관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공인된 역사학자만 발언하거나, 그 발언을 맹목적으로 확신하는 것은 안 돼요. 전 사실 동상 자체를 싫어해요. 동상은 남성적인 것 같아요. 이순신 동상을 비롯해서 독일에도 수많은 전쟁용사들의 동상이 있어요. 독재자들의 동상도 많잖아요. 피해 여성을 상징하는 것이 왜 동상이어야 하나, 거부감은 여전히 있어요. 앞으로 다른 표현 방식으로도 운동이 전개됐으면 좋겠어요. 액션그룹이 앞으로 어떻게 진화할지도 궁금해요. 멤버들의 인식이 확장되고 있으니까.”
영롱: “작년에 평화상 유지 캠페인을 하면서 ‘나는 누구를 위해 싸우는가?’하는 물음이 들 때마다 수년간 저와 함께 활동하고 있는 여성∙퀴어 활동가들의 얼굴을 떠올렸어요. 전쟁이나 준전시 상황, 사실상 독재국가, 지독한 마초 문화적 사회 또는 가정폭력으로부터 탈출해 베를린에 정착한 제 동료들…. 제 기준에서 코리아협의회는 그나마 영향력이 있는 독일 시민단체인데도 이런 상황이면, 제가 주로 연대하는 아프가니스탄 출신 난민 여성들이나 그 외 분쟁 지역 출신으로 서류가 없는 ‘상파피에’(Sans Papier, 미등록체류자) 사람들이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땐 정말 씨알도 안 먹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실제로 그런 경험도 많이 했고요. 그러니까 여기서 막히면 안 된다고.
이번에는 이미 설치된 평화상을 존치하기 위해서 움직였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해요. 평화상 말고도 다양한 폭력으로부터 생존한 여성들을 대변하는 예술 작품들이 이곳에 더 많아져서 베를린을 바꿔가길 바랍니다. 더 많은 구체성, 더 많은 목소리들이요.”
▲ 지난 2월19일, 베를린의 또다른 시민모임 ‘극우에 반대하는 할머니들’(Omas gegen Rechts)이 평화상 앞에서 ‘하나우 총격사건’ 1주년을 맞아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집회를 열었다. 하나우 사건은 이민자 혐오 성향의 극우주의자가 벌인 테러로, 사상자 십 수명이 모두 이민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평화상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을 넘어 반인종주의와 인권‧평화를 나누는 장소로 공유되고 있다. (이미지 출처: AG “Trostfrauen” 페이스북) |
베를린에는 올해 폭설이 여러 차례 내렸다. 록다운으로 조용한 도시, 침묵 속에 혼자 있을 때가 많을 평화상에도 눈이 수북이 내려앉았다. 액션그룹 멤버들이 번갈아 청소 당번을 맡아 평화상을 돌보고 있다. 내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는 그 주먹 쥔 소녀와, 소녀 어깨의 작은 새와, 텅 빈 의자에게서 분명 이런 말을 들었다.
“지금, 여기서 당신에게 ‘위안부’는 무엇인가. 당신은 그녀들을 계속 기억할 것인가? 그렇다면 왜,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필자 소개: 하리타 (정세연). 독일과 한국, 그 밖에 매일 여러 경계들을 넘나들며 사는 경계인 페미니스트 작가. 이렇게 다른 경계인 여성들과 만나 대화하면서 느끼는 희열과 쾌감이 크다. 세계 곳곳에 멋진 여자들을 오래, 많이 만날 수 있었으면. 독자들의 감상과 인터뷰이 추천도 늘 기다린다. haritamoonride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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