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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 평화의 소녀상 세운 초국적 시민모임 ‘액션그룹 위안부’ (상)

 

[하리타의 월경越境 만남] 독일에 거주하며 기록 활동을 하는 하리타님이 젠더와 섹슈얼리티, 출신 국가와 인종, 종교와 계층 등 사회의 경계를 넘고 해체하는 여성들과 만나 묻고 답한 인터뷰를 연재합니다.

 

 

≪일다≫ 베를린 ‘평화상’ 철거를 막은 건, 애국심 때문이 아니죠

[하리타의 월경越境 만남] 독일에 거주하며 기록 활동을 하는 하리타님이 젠더와 섹슈얼리티, 출신 국가와 인종, 종교와 계층 등 사회의 경계를 넘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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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청의 철거명령에 반발한, 베를린 ‘평화상’ 존치 캠페인

 

2020년 9월 28일, 베를린 미테구 모아빗 구역에 위치한 우니온스 광장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20여 만 명을 기리는 ‘평화의 소녀상’이 섰다. 그 날 제막식에는 200명 가량이 모였는데, 재독 한인들 외에도 다양한 출신과 소속의 시민들이 참석했다. 그런데 불과 일주일 여 만인 10월 7일에 ‘10월 14일까지 상을 철거하라’는 구청의 행정 명령이 떨어졌다. 평화상 설치를 주도한 시민 교육‧정치 모임인 ‘액션그룹 위안부’(Aktionsgruppe “Trostfrauen”, 코리아협의회 산하)를 중심으로 평화상 존치를 위한 캠페인이 벌어졌다.

 

국내 주류 언론들이 사건의 대략적인 개요나 경과를 앞다투어 보도했지만, 나는 뭔가 빠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슈뢰더 총리 부부를 비롯한 독일 유력 정치인들도 동참한다며 소녀상의 당위를 힘주어 말하는 한국 뉴스들에서 ‘어떤 것이 당연해서 더 이상 묻지 않는’ 관성이 느껴졌다.

 

한결같은 ‘일본의 외교적 압력’. 그럼 이번에 달랐던 것은 무엇인가? 누가, 어떤 마음으로 현장에 모였을까? 왜 독일 언론들은 ‘소녀상’이 아니라 ‘평화상’(Friedenstatue)이라고 보도할까? 홀로코스트 기념물이 전국에 깔린 곳, 잘못을 인정하고 보상하는 가해국의 표준인 독일에서 왜 철거 명령이 나왔을까? 그리고 그건 어쩌다 반전되었을까? 내겐 당연하지 않은 것들을 묻기 위해 베를린으로 갔다.

 

▲ 평화상 철거에 반대 목소리를 내기 위해 모인 베를린의 시민들의 모습. 이들은 제각각 어떤 마음으로 이 자리에 앉아 있었을까? 독일어로는 ‘평화의 소녀상’을 ‘평화상’(Friedenstatue)이라 줄여 부른다. 평화는 반전을 비롯해 인권, 생명의 존엄, 민주주의 등으로 연결되는 궁극적 가치이기 때문에 채택됐다고 인터뷰이 정화는 설명했다. (출처: Korea Verband ©SONG Got)


2000년대 후반 ‘위안부’ 연대 활동을 시작한 한정화와, 최근 몇 년 새 여기 합류한 손어진과 추영롱, 이렇게 세 사람을 따로 만나 나눈 이야기를 재구성했다.

 

정화는 10대 중반이던 1978년에 가족과 함께 독일로 이주했고, 대학에서 한국학과 젠더학을 전공한 뒤 통번역사로 활동해왔다. 2012년부터 코리아협의회 대표를 겸하고 있다. 정치학 연구자이자 시민활동가인 어진은 2015년부터 베를린에 살고 있다. 철학을 전공하면서 페미니즘 및 반인종차별 활동가 및 통번역가로 일하는 영롱은 2012년에 베를린을 적당한 삶터로 점 찍고 넘어왔다. 이들은 ‘액션그룹 위안부’에서 함께 활동한다. 독일사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학술행사, 영화제, 출판물, 집회 등 다양한 방식으로 공론화해 온 초국적 교육‧정치 조직이며 누구에게나 항상 열려있는 일종의 의제 모임이다.

 

‘보편적 인권’이 아니라 한일 간의 문제라고?

 

지난해 10월 초 어느 날, 잡지 <코리아 포럼>(Korea Foum)의 편집자인 영롱은 편집회의를 하러 코리아협의회 사무실에 왔다. 그런데 정화가 회의에 전혀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이 의아했다. 알고 보니 정화는 엊그제 ‘평화상을 일주일 안에 철거하라’는 행정 명령이 담긴 구청의 서한을 받고 충격과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정화: “미테(Mitte;중심구) 구청장에 대한 실망이 컸어요. 좀 깨어있는 사람으로 봤거든요. 탈식민주의 정책의 일환으로 도로명 바꾸는 사업을 했고, 저희가 구청 앞에서 학생들이 참여하는 ‘나의 작은 소녀상’ 퍼포먼스를 할 때 연사를 하기로 했는데 코로나 긴급회의 때문에 못하게 되니까 비서관을 대신 보내 사과하기도 했죠.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 때는 구청 문화환경국장이 참석하기로 해서 일정을 맞추기도 했어요.

 

그런데 철거 명령을 담은 편지에서는 오래된 독일 시민단체인 우리를 정체불명의 이주민 집단으로 간주하면서, 한-일 간에 해결 안 된 문제를 베를린으로 끌고 들어와서 자기들을 난처하게 한다고 비난하는 거예요. 저희는 평화상 설치 신청서 마지막에 일본의 외교적 압력이 있을 것이라고 언질까지 줬어요. 그런데 이제 와서 우리가 속였다는 식으로, 독일 행정당국을 ‘도구화’했다는 거예요. 그 단어는 우리가 ‘위안부’ 제도를 비판할 때 ‘여성의 몸을 도구화했다’고 비판하며 쓰던 단어인데 얼마나 황당해요.” 

 

▲ 2008년부터 수요 회의를 해온 ‘액션그룹 위안부’의 웹사이트. 한국, 일본, 베트남, 필리핀, 독일, 콩고 등 여러 나라에서 온 20~80대 이민자들이 함께 활동한다. 평소 주요 공용어는 독일어다. (출처: trostfrauen.de)


‘액션그룹 위안부’는 활동한 햇수가 벌써 13년인데다, 그 동안 베트남전, 르완다 내전, 나치 집권기, 유고슬라비아 내전, IS의 야지디족 탄압 등에서 벌어진 성폭력 문제도 다루면서 초국적 연대와 책임을 촉구해왔다. 그리고 세계 곳곳의 전시 성폭력과 제도적 성착취를 고발하고 피해자, 생존자를 기억하겠다는 의미를 담은 공공 조형물로써 평화상 설치를 준비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구청 측은 단 한차례의 간담회도 없이 철거 명령을 내렸다.

 

액션그룹을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위안부 문제가 나의 우선순위는 아니’라고 선 긋고 다른 이민자 페미니스트 연대 활동에 주력하던 영롱에게, 이 편지는 순식간에 각성의 계기가 됐다.

 

영롱: “그 편지를 직접 보고 나도 여기 뛰어 들어야겠다는 결심이 섰어요. 너무 기가 찼어요. 흔한 국가폭력의 한 형태였어요. 편지에 당신들 국가만의 역사 인식을 담은 조형물이 공공 공간을 폭력적으로 점유했다고 쓰여 있었죠. ‘보편적인 여성을 위한’이라는 평화상의 당위가 거짓이고, 우리가 베를린이라는 모두의 공간을 침해했다는 거예요. 보편성? 누구의 보편성인가? 어처구니 없고 빈약한 논거죠.

 

그들이 생각하는 베를린의 평화는 이미 짜여 있는 거예요. 역사를 기억하는 태도의 기본은 사실 구체성이거든요. 구체성이 없는 폭력이 어디 있어요. 가령, 홀로코스트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를 명확히 규명하고 분명한 시공간과 구체적인 맥락을 밝히는 노동을 통해 전세계가 함께 기리는 사건이 됐지요. 그런 과정을 통해 생명의 존엄성, 평등, 인종주의 반대와 같은 보편적 가치를 도출할 수 있었고요. 그런데 구청의 편지는, ‘우리가 원하는 평화는 이런 건데 당신들이 지금 그걸 침해하고 있다’고 한 거예요. 그들이 그리는 평화로운 커뮤니티라는 이미지, 그건 대체 누가 만들어서 누구에게 강요하는 것인지? 웃긴 궤변이죠.

 

독일 외무부가 일본 외무성과 통화한 직후의 결정이었다는 게 확증이에요. 아, 이건 강대국의 이해관계가 휴머니즘의 탈을 쓰고 나타난 국가폭력이다. 번지르르하고 추상적인 말을 내세웠지만. 그 순간부터 제가 소녀상의 미학적 재현 방식을 동의 하네 안 하네 하는 건 부차적인 문제가 됐어요.”

 

정화는 33년, 영롱은 9년 째 베를린에 살면서 이곳 풀뿌리 정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온 ‘베를리너’였다. 그런데 ‘외국인들은 나가서 너희들끼리 싸워라’라고 말하는 듯한 백인 행정관료들의 메시지에 이들은 정체성을 무시당한 기분이 들었다. “이러면서 어떻게 베를린이 물티쿨티(multi-kulti) 메트로폴리탄이라고, 새로운 세계 속의 도시를 만들어 나간다고  할 수 있어?”

 

“안되겠다, 뭘 당장 해야겠다.” 정화의 말에 모두 공감했고, 액션그룹의 비상 체제가 시작됐다.

 

‘베를린, 용기를 내!’ 행진, 200개 의자 퍼포먼스, #WeSitWithYou…

 

액션그룹은 기존 멤버들은 물론 함께할 이주‧여성 단체들과 지역 미디어, 진보 성향 정당들에게도 발빠르게 연대를 요청했다. 철거 이행일 전날인 10월 13일에는 평화상 앞에서 집회를 열고 행진을 했다. ‘베를린, 용기를 내! 평화상은 머물러야 합니다’라는 슬로건과 함께 마스크를 쓴 참가자들이 평화상처럼 각기 의자에 앉았다. 온라인 해시태그 캠페인 #WeSitWithYou도 전개했다.

 

▲ 평화상 존치 캠페인 참가자들이 지난해 11월 25일에 열린 ‘우리가 평화상이다’ 집회 포스터를 들고 있다. (출처: Korea Verband ©Hyemi Jo)

 

11월 25일 세계 여성폭력 추방의 날에는 200개 의자를 놓고 퍼포먼스를 벌였다. 200개는 ‘위안부’ 피해자 수로 알려진 20만명과 연결되는 숫자였다. 당시 코로나 거리두기 지침을 따르면서 동시에 왼쪽 의자가 비어있는 평화상의 모습을 재현하는 모습으로, 참가자들이 촛불을 들고 의자에 앉았다.

 

문화예술 프로그램도 진행했다. 그 중에서 영롱은 평화상과 관련해 날아온 공문서 내용과 유엔에서 독일 외무부가 주도하는 전시 성폭력 안건을 바탕으로 짤막한 풍자극 대본을 썼다. 개량한복을 입은 베를리너 예술가 피아(Pia)는 평화상 활동가 역할을 맡았고, 한국 출신 베를리너 예술가 기현(Ki Hyun Park)는 미테 구청장인 폰 다셀과 독일 외무장관 하이코 마스로 분했다. 이 극에서는 평화상 사태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 베를린시의 자가당착을 구청장 역을 통해 비판했다. 국제정치 무대 뒤편에서 여전히 분쟁지역으로 무기를 수출하고, 그로 인해 난민이 되어 독일까지 온 사람들을 강제 송환하는 독일 정부의 반인도적 행태를 외무장관 역으로  대변했다.

 

또한, ‘우리가 평화상이다’(Wir sind die Friedenstatue)라는 이날 슬로건은 평화상 캠페인이 ‘위안부’ 생존자들에게 공감할 뿐 아니라 더 넓은 여성 연대로까지 확장했다는 것을 보여줬다. 최근에도 끊임없이 생겨나는 분쟁 지역의 성범죄 피해자들, 그리고 일상적인 성폭력에 매일 맞서 살아남는 모든 여성들을 함께 기억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확장성은 또 다른 활동가 어진에게 특히 의미가 컸다. 2017년 아시아 ‘위안부’ 피해 여성들에 대한 다큐멘터리 상영회가 열렸을 때 액션그룹에 처음 참여한 어진은 피해 여성들이 14개국에 걸쳐 있다는 사실을 그 전에는 몰랐다. 한국에선 ‘조선의 순결한 소녀들이 일제의 성노리개로 짓밟혔다’는 주류 레토릭에 어딘가 불편함을 느꼈고, 일본 대사관 앞 ‘소녀상 지키기’에 나선 10대들을 보며 애국심으로 뜨거웠던 과거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던 어진에게 베를린 액션그룹은 새로웠다. 도청이나 신변 위협을 당하면서도 흔들림 없이 모국을 비판하는 일본 여성들, 필리핀과 베트남 출신 유학생들, 독일 연구자들과 토론하면서 ‘위안부’에 대해 새로 배웠다.

 

무엇보다 어느 순간 평화상의 소녀가 ‘나 같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거리에서 ‘니하오 캣콜링’(Catcalling, 길거리에서 동아시아인 여성에게 ‘니하오’ 등의 말을 걸며 추파를 보내는 행위)을 겪고 집에 돌아갈 때면, 광장에서 평화상에 쏟아지는 시선들이 생각났다.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은 ‘조선의 소녀’와 지금 자기 삶 사이, 어떤 연결고리가 감지되기 시작한 것.

 

어진: “전쟁 성노예 피해자일 뿐 아니라, 오늘도 전쟁 같은 현실에서 차별 받고 폭력에 노출된 저 같은 여성들의 모습이 다 담겨있다고 느껴졌어요. 백인 유럽인은 평화상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평소 아시아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무지한 이들, 아시아 여성에 대해 말도 안 되는 판타지를 가지고 성차별, 인종차별을 일삼는 사람들이 이 상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만감이 교차하는 거예요. 사람들이 소녀를 보면 왠지 나를 쳐다보는 느낌이 들면서 평화상과 내가 동일시되기도 했어요.” 

 

▲ 지난해 11월 25일 ‘우리가 평화상이다’(Wir sind die Friedenstatue) 집회에서 상연한 풍자극의 한 장면. 영롱이 대본을 쓰고, 베를리너 예술가 기현과 피아가 연기를 맡았다. (출처: Korea Verband e.V.)


어진은 집회 신고부터 포스터 배포, 현장 통역 등 액션그룹 활동으로 매일 뛰어다니다가, 문득 번아웃(Burnout, 소진)이 올 것 같아, 어느 날 멤버들에게 물었다. ‘여러분들은 지금 왜 이 활동을 하느냐’고. 어진에게 평화상 유지는 자신과 동료들이 베를린에서 하루하루 안전하게 살아가는 것과 분리할 수 없는 이슈였다. 그 날 사람들이 모처럼 속마음을 나누자, 그동안 ‘전투 태세’로 긴장했던 마음들이 녹으면서 회의는 잠시 눈물바다가 됐다.

 

평화의 소녀상에서 ‘침묵을 깬 여성들’의 모습을 보라

 

한국 언론은 12월 1일 구의회에서 독일 녹색당, 사민당, 좌파당이 영구 존치안에 찬성했다는 뉴스를 앞다퉈 보도하며 ‘베를린의 소녀상’에 대한 플래시 세례를 멈추었다. 일견 통쾌한 일단락으로 보이는 그 사실 전후 앞뒤로는 훨씬 미묘하고 복잡한 갈등과 논쟁이 있었으며, 이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올해 여름까지 구의회 및 구청, 시민단체, 정당들이 모여 세부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는 실질적 과제도 있다.

 

정화: “구청장 측과 평화상 비문 내용을 협의하기 위해 변호사를 동반해 만났어요. ‘성노예’라는 단어가 검증이 안된 줄 알고 있더라고요. 그 때까지도. 저는 화를 내면서 지적했죠.  2007년에 유럽의회가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거기에 성노예라는 단어가 4번이나 나오거든요. 구청장이 결국 자기 무지를 인정했어요. 나중에 사과 편지도 받았어요. 그런데 아직도 정확하게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는 것 같아요.

 

제가 그 날 협상에서 강조했던 건, 평화상의 주체가 소녀라는 거예요. 전쟁 가해자가 아니죠. 독일은 가해국이라서 범죄 행위자에 초점 맞추는 경향이 있어요. 이번에도 평화상이 일본의 가해 사실을 강조한다고 받아들이고 있고요. 하지만 평화상은 ‘침묵을 깬 소녀’의 용기를 기리는 의미에요. 저희는 평화상 제막식을 원래 8월 14일로 하려고 했어요. 한국에서 김학순 할머니가 ‘위안부’ 피해 사실을 증언하고 처음으로 크게 이슈화된, 국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일이요. 동상이 한복을 입은 것도 사실 중요치 않아요. 제가 그 분들한테 여성 영웅을 보는 시각으로 다시 보라고 했어요. 비스마르크 같은 영웅이 아니라 민중들 속에서 나온, 복수의 ‘여성 영웅들’이죠.” <2부에서 이어집니다>

 

[필자 소개: 하리타 (정세연). 독일과 한국, 그 밖에 매일 여러 경계들을 넘나들며 사는 경계인 페미니스트 작가. 이렇게 다른 경계인 여성들과 만나 대화하면서 느끼는 희열과 쾌감이 크다. 세계 곳곳에 멋진 여자들을 오래, 많이 만날 수 있었으면. 독자들의 감상과 인터뷰이 추천도 늘 기다린다. haritamoonride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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