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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 살아내기> 글로벌 여행에서 로컬화된 삶으로
2020년 2월 7일, 멕시코시티 국제공항
설 연휴 동안의 쿠바 여행과 2주 간의 멕시코 답사여행을 마치고 한달 만에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멕시코에서 전용 차량처럼 이용하던 우버 드라이버를 호출해 공항으로 향했다. 멕시코시티 국제공항은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공항으로 전 세계의 비행기와 사람들로 모이는 곳이다. 세계적인 공항은 늘 그랬듯이 활기차게 붐볐고, 한편으로 평온했다.
▲ 디즈니 애니메이션 영화 <코코>(Coco, 2018)의 배경이 된 멕시코 과나후아토 전경. 영화는 ‘죽은 자들의 날’ 축제를 주요한 모티브로 다루고 있다. (2020.1.30) ©허나윤 |
2020년 새해는 중국에서 시작되었다는 정체모를 바이러스에 대한 불안이 퍼져가던 때이긴 했다. 1월 23일 중국 정부는 우한시를 봉쇄했고, 1월 31일에는 세계보건기구WHO가 국제적 공중보건 비상사태(PHEIC Public Health Emergency of International Concern)을 선언했다. 그래도 한국을 떠날 때만 해도 국내 확진자 수는 한 자리에 불과했고, 쿠바에 머물 때는 아예 인터넷 접속이 어려웠기 때문에 불안 따윈 없었다. 멕시코에 돌아와 한국에서 마스크를 구하기 힘들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그냥 ‘별일이네’ 하고 넘겼다.
멕시코에 처음 입국했을 때와는 달리 마스크를 쓴 공항직원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얇은 위생마스크를 가느다란 실로 간신히 묶은, 허술하기 짝이 없는 마스크였지만 말이다. 인천행 비행기 안에는 엷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한국인은 한 명도 빠짐없이 황사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고 옆의 수녀님들은 비닐장갑까지 끼고 있었다.
별일 없이 비행기는 멕시코시티를 떠났고, 나는 도시의 빛나는 야경을 나른하게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다음 여행은 멕시코시티가 온통 보라빛으로 물든다는 봄(멕시코는 봄이 시작되는 3월과 4월에 거리에서 보라색 꽃 하카란다JACARANDA를 많이 볼 수 있다)이 좋을까, 아니면 디즈니 영화 <코코>Coco의 실사버전인 ‘죽은 자들의 날’(Día de Muertos, 죽은 이를 기리는 멕시코 전통 축제로 매년 10월 31일~11월 2일에 열린다) 축제가 열리는 늦가을이 좋을까. 아무튼 곧 다시 만나자 Hasta luego 멕시코…
팬데믹이 시작되기 전, 마지막 여행이었다.
2020년 봄, 세상에서 여행이 사라져버렸다
매년 겨울에는 ‘여행여락’(여자들의 여행 커뮤니티) 회원들과 함께 쿠바, 태국 치앙마이, 라오스 같이 따뜻한 나라로 여행을 떠났다. 공식 일정(인솔)이 끝나고 여행자들이 한국으로 돌아가고 나면, 혼자 시간을 보내다 2월경에 귀국하곤 했다.
어차피 겨울 동안에는 한국에 있어도 할 일이 별로 없었다. 여행업계 사람들에게 봄은 한 해의 시작이자 겨울 비수기를 끝내고 돈을 벌어야 하는 시즌이다. 1월과 2월에 걸쳐 있는 설 연휴 여행은 이전 해 가을에 판매된 상품이니, 연말부터 다음 해 봄까지 2-3개월은 수입 없이 견디어야 하는 보릿고개인 셈이다. 그래서 여행사의 새해는 엄밀히 말하면 1월이 아니라 봄이 시작되는 3월이라고 할 수 있다.
봄 여행을 준비하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오자 마자 상황은 급변했다. 2월 18일부터 대구∙경북 신천지 교회를 매개로 코로나 확진자가 급증했고, 3월 11일 세계보건기구WHO는 신종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세계적 대유행(팬데믹)을 선언했다. 약국마다 마스크를 사기 위한 줄이 길게 늘어섰고, 유럽과 미국은 앞다투어 입국 금지와 셧다운 조치를 내렸지만 코로나19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갔다.
3월 22일부터 한국의 방역당국은 본격적인 ‘사회적 거리두기’ 제도를 시행하기 시작했다. 코로나19 방역대책의 핵심인 ‘사회적 거리두기’는 여행의 본질인, 사람들이 모이고 만나고 이동하는 일 자체를 금지하는 것이었다.
당장 4월부터 시작되는 봄 시즌 여행은 모두 취소해야 했다. 이미 참가자 모집이 마감되고 준비가 거의 끝난 국내여행 일정을 취소하고 전액환불 절차를 진행했다. 해외여행은 취소조차 쉽지 않았다. 외국 항공사와 글로벌 숙박 및 여행플랫폼은 쏟아지는 예약∙취소 환불 요청에 시스템이 마비될 지경이었고, 간신히 취소 요청을 접수해도 언제 환불을 받을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었다. 장기해외여행을 떠난 사람들은 귀국하는 항공편이 취소되어 세계 곳곳의 경유지에서 발이 묶였다. 영화에서나 보던 일들이 매일매일 일어났다.
▲ 여행이 사라진 도시의 봄 (해방촌, 2020.3.29) ©허나윤 |
그 와중에 나는 2019년부터 준비하던 ‘트래블리더’ 프로그램을 2020년 상반기에 시작할 예정에 있었다. 여행여락의 트래블리더는 자신의 취향을 반영한 여행을 스스로 기획하고 이를 공유하고 싶은 이들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 여행자이다. 2019년 하반기에 회원 대상으로 트래블리더 3인을 선발하여 몇 달 동안 여행을 기획하고 준비해왔다. 2020년에 예정되었던 트래블리더 프로그램은 뉴질랜드 밀포드 트래킹, 프랑스 프로방스 여행, 치앙마이 아트앤크레프트 여행이었다.
몇 달 전에는 이태원(해방촌) 인근에 작은 게스트하우스도 오픈해두었다. 2020년에는 여행여락이 좀더 높게 도약하기 위해 여러 가지 일을 준비하고 있던 차였다.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나마 1인 기업이니 허리띠를 졸라매고 몇 개월만 버티면 괜찮아질 것이라 믿고 싶었다. 나는 생애 처음 겪어보는 세기말적인 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이태원 클럽에서 집단감염이 발생한 5월, 휑하게 비어 있는 게스트하우스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봄이 화창해지수록 눈에 띄게 썰렁해진 이태원, 해방촌 거리를 지나 남산에 자주 올랐다. 맑고 푸른 하늘 아래 만발한 벚꽃들이 팝콘처럼 터져 흩어졌다. 봄은 어느 해보다 찬란하게 피어나고 있었고, 그렇게 여행은 나의 세상에서 사라져버렸다.
▲ 그림이 있는 저녁식사, 2020.4.25 (2020년에 유일하게 진행한 여행여락 행사다.) ©허나윤
좁아진 삶의 반경에 적응하며, 내가 사는 은평을 기록하다
여행을 멈춘 이후 내 삶의 반경은 드라마틱하게 좁아졌다. 페미니스트들의 공유오피스가 있는 ‘살림이빌딩’은 집에서 도보로 20분, 자전거로는 10분 정도의 거리에 있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 사무실로 출근하고 저녁이 되면 퇴근하는 일상을 살기 시작했다.
자주 사무실을 비울 일이 없어지니 건물 옥상텃밭에서 쌈 채소, 허브를 키우며 계절의 변화를 소소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게 되었고, 장거리 여행 때문에 직업병처럼 따라다니던 허리와 발바닥의 통증이 사라졌다. 집, 사무실, 혁신파크 사이를 오가는 일상의 ‘루틴’이 만들어졌다. 아주 오랜만에 ‘루틴’이 있는 삶을 사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1년 내내 코로나로 긴장과 위기가 반복되었지만, 좁아진 작은 내 세상에서 시간은 조용하고 평온하게 흘러갔다.
여행업계가 초토화되어가면서 걱정스럽게 나의 안부를 묻는 이들에게 어김없이 “잘 지낸다”고 답했다. 정말 잘 지내고 있어서였다. 늘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장소를 찾아다니는 일은 재미있지만 그만큼 피로도가 높은 일이다.
물론 ‘여행기획자’라는 본업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는 특수한 상황에 기인하지만 새로운 사람을 만나려 하지 않아도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새로운 것보다는 익숙한 것들과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 페미니스트들의 공유오피스가 있는 살림이빌딩 옥상텃밭 (2020.9.5) ©허나윤 |
나는 20여년 전부터 은평구에서 살고 있다. 오랫동안 살다 보니 익숙하고 그만큼 친근하기는 하지만, 은평이 ‘로컬’로 다가온 적은 별로 없었다. 나에게 ‘로컬’이란 한 곳에서 정주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투영시키는 장소였기에, 로컬화된 삶을 살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강제로 로컬화된 삶을 살게 된 김에 본격적으로 나의 ‘로컬’에 관심을 가져보기로 했다.
<여기은평 2020>은 순전히 나의 호기심에서 시작된 로컬 아카이빙 프로젝트이다. 은평의 여성들과 함께 은평의 일상을 기록하면서 새롭게 은평을 알아가고 싶었다. 생활형 페미니스트들이 넓게 흩어져서 살고 있는 은평구는 지리적, 사회적으로 서울의 주변부에 위치하고 있는 지역이다.
‘거주중심성’과 ‘주변성’은 은평의 특성이며, 그 특성은 공동체적인 돌봄과 연대의 역사와 맞닿아 있다. 아카이빙 과정에서 흥미로운 은평의 역사에 대해 알게 되었고, 예상보다 훨씬 다양한 여성주체들이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여곡절과 아쉬움이 있었지만 10월에 프로젝트가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여행 말고 다른 무엇이라도 해야겠다는 절박함이 한 몫을 했지만,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일을 도모해보는 경험은 처음이라 신선했다. 은평 아카이빙 프로젝트를 시작하자 신기하게도 기록작업이 연달아 이어졌다. 코로나와 함께 한 지난 1년 동안, 기록은 여행 대신 나에게 밥이 되고 관계가 되어주었다.
▲ 은평구에 위치한 서울혁신파크 중정에서. (2020.7.31) ©허나윤 |
2021년, 여자들의 ‘기억 속’ 여행을 기록하기
“언제쯤이면 다시 예전처럼 여행을 떠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확실하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직 없는 듯하다. 다시 국경을 넘어 여행 떠나는 날이 오겠지만,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여행은 아마도 우리에게 익숙했던 그 ‘여행’은 아닐 것 같다.
40일 가까이 비가 내린 2020년의 여름, 코로나 2차 유행이 다시 시작되던 때였다. 마지막까지 남겨두고 싶었던 12월의 치앙마이 숙소 예약을 취소하며 생각했다. 이제는 여행이 모든 사람들의 욕망이 되고, 어디든 자유롭게 여행을 떠날 수 있다고 믿었던 시대와 작별을 해야겠다고… 어쩌면 젊은 시절 배낭을 메고 낯선 곳을 헤맬 수 있었고, 글로벌 관광시스템 덕분에 다양한 선택의 자유를 누렸지만, 여행의 본질에 대한 환상을 포기하지 않았던 ‘여행의 시대’는 저물지 않았을까…
2021년 새해가 시작되었지만 팬데믹은 여전히 우리 곁에 머물러 있다. 올해도 역시 멀리 여행을 떠날 수 없겠지만 여행에 대한 여자들의 기록을 남겨보려고 한다. 각자의 기억 속에 특별하게 남아 있는 여행들이 투영하고 있는 시대적인 기억을 기록해보고 싶다. 여행의 시대를 떠나보내는 여자들의 기록은 우리에게 어떤 시대적인 순간을 보여줄 수 있을지 기대된다.
*필자 소개: 허나윤. 페미니스트 여행기획자 & 로컬아키비스트. 2017년 여자들의 여행커뮤니티 ‘여행여락’을 만들어서 여자들과 함께 여행을 다니고 있다. 2018년부터 ‘페미니스트 아카이빙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도시 안의 성착취 공간인 성매매 집결지의 역사를 기록하는 작업도 해오고 있다. 코로나 펜데믹 이후에는 아카이빙 작업으로 먹고 살고 있으며, 여행과 아카이빙을 적극적으로 결합시킬 방도를 모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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