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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한 커뮤니티’가 돌아올 때까지 좀더 힘내요
[코로나 시대 살아내기] 트랜스젠더 지인들의 연락을 받다
트랜스젠더를 상징하는 깃발(Pride Flag)이 걸려 있는 모습.
콜센터, 물류 노동, 유흥업… 많은 트랜스젠더들이 코로나 시대에 더욱 취약한 근무 환경을 가진 곳에서 일한다. 모두 코로나 사태로 인해 직격탄을 맞았거나, 집단 감염 등에서 위험에 노출된 곳이다. 내 주변에는 실직하고 재취업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인들의 소식도 왕왕 들려왔다.
뿐만 아니라 정체성 문제로 가족과의 갈등을 겪고 집을 나온 사람들의 상당수는 고시원에서 산다. 안전을 위한 ‘외출 자제’니 ‘자가격리’는 고시원과 같은 밀집된 주거공간에서는 통하지 않는 말이다. 개중에 상당수는 내 이야기이기도 하다.
감염병에 취약한 근무 환경과 주거 환경
코로나 첫 유행 당시 나는 콜센터에서 근무했다. 그 회사는 집단 감염 예방을 이유로 직원들의 출근 여부에 대해 전례 없이 엄격한 기준을 적용했다. 문제는 그 모든 것이 ‘혹시 모르니 몇 주간 일을 쉬라’는 식의 무급 휴직을 지시하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이었지만.
대구에서 한창 코로나가 유행하던 때, 대구에 다녀온 지인 A와 접촉했다는 이유로 회사에서는 나에게 무급 휴직을 지시했다. A는 코로나 확진자와 밀접 접촉을 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정부가 정한 기준의 자가격리 대상자도 아니었다. 월급은 반토막이 났지만, 회사에서나 나라에서나 그 어떤 지원도 받을 수 없었다.
우리 회사에 면접을 보러 온 사람 중 코로나 확진자가 나왔다는 소식이 들렸다. 여전히 나는 밀접 접촉자는 아니었기에 자가격리 대상은 아니었다. 그래도 걱정이 들었다. 확진자와 함께 엘레베이터에 탔던 것 같기도 하고, 왠지 어제부터 열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정작 회사는 근무할 인원이 너무 적어지면 또 곤란했는지 이번에는 체온이 37.5도 이상이어도 바로 퇴근시키지 않고 그 이하의 체온이 나올 때까지 몇 번이고 체온을 다시 재고 근무를 시키곤 했다.)
인권단체에서 주는 월급만으로는 생계를 해결할 수 없는 대부분의 활동가들이 그렇듯, 나 또한 낮에는 회사로 출근하고, 퇴근하면 몸담고 있는 인권단체의 사무실로 다시 출근을 한다. 내가 일하는 사무실은 여러 성소수자 인권단체들이 쉐어 오피스 형태로 사무실을 함께 사용하고 있는데, 그곳으로 출근을 하려니 덜컥 걱정이 되었다. 만에 하나라도 내가 코로나에 감염되었거나 나중에라도 자가격리 대상자로 지정받는다면, 그래서 이 사무실 전체가 폐쇄된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혹시 모르니 단체 사무실로는 당분간 출근을 자제하기로 했다. 퇴근하면 살던 고시원에 콕 틀어박혀 방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자가격리 아닌 자가격리를 하고 있자니 새삼 저녁마다 출근하던 인권단체 사무실의 소중함이 느껴졌다. 회사-고시원을 오가는 길이, 하루하루가 유달리 답답했다. 그제서야 느꼈다. 나는 그 사무실에서 인권단체 일만 하던 것이 아니었음을. 내가 그곳에서 얻고 있던 건 안정감과 편안함이었다.
가족과 친척들 사이에서의 나는 누군가의 둘째 딸이었고, 콜센터로 전화를 거는 중년 남성 고객에게는 ‘아가씨’라고 불렸지만, 성소수자 인권단체들이 모인 그 사무실 안에서의 나는 ‘조각보의 활동가 리나'였다. 그곳에서 나는 트랜스젠더 인권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일 뿐, 이제 ○○씨도 결혼할 나이가 되지 않았냐느니, 남자친구는 있냐느니, 부모님은 뭐 하시냐느니 하는 질문은 들을 수 없었다. 화장실에는 ‘모두가 함께 쓸 수 있는 성중립 화장실’ 안내문구가 붙어 있고 각자의 자리마다 무지개 굿즈가 놓여 있는 그곳에서 나는 안전했다.
트랜스젠더 인권단체 조각보에서 당사자와 지지자의 응원의 말을 모아 제작한 ‘조각보’
“너무 힘들어…” 유달리 지인들의 연락이 늘었다
코로나 시대가 시작된 후, 트랜스젠더 지인들에게서 갑자기 연락이 늘어났다. 몇 달간 안부를 거의 물어보지 못했던 사람들에게도 연락이 왔다.
이태원 클럽, 구로 콜센터발 집단 감염 등 서울에서 코로나19가 한창 기승을 부리고 있을 때였다. 내가 아는 트랜스젠더 당사자 중에는 서울 밖의 지역에 살면서 호르몬 치료를 위해 서울의 성소수자 친화적인 병원으로 내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당시 연락이 닿은 지인 B와 C도 그중 하나였다.
“나 그냥 호르몬 치료는 포기하려고. 이 시국에 매번 서울 왔다 갔다 하는 것도 부담이고. 우리 회사는 서울 다녀오면 어디 다녀왔는지 행선지까지 다 보고하게 하거든.”(지인 B)
“부모님이 서울에 다녀오는 걸 가지고 걱정을 많이 하세요. 트랜지션(출생 시 지정 받은 성별을 자신의 성별정체성에 맞춰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함) 시작하는 걸로도 많이 싸우고 했는데, 더는 그러기도 싫고… 그렇다고 근처 병원 알아볼 자신은 없고. 이 정도면 목소리도 많이 바뀐 것 같으니 당분간 호르몬은 그만하려고요.”(지인 C)
의료적 트랜지션, 특히 호르몬 치료를 중단한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이유는 다양했다. 수도권에 갈 경우 어딜 다녀왔는지 회사에서 행선지를 보고하게 하는데 거짓으로 꾸며 쓰는 것도 부담되고 사실대로 쓰자니 아웃팅(타인에 의해 성정체성이 노출되는 것)이 부담된다는 경우, 수도권의 병원으로 정기적으로 다니는 것을 동거인이 부담스러워하는 경우 등등.
갑작스레 호르몬을 중단하는 경우, ‘무드 스윙’(감정 기복이 심하게 찾아오는 것)이 오고 트랜스남성의 경우 중단되었던 월경이 다시 시작되는 등 여러 신체적 변화도 생긴다. 그렇지만 성소수자 친화적인 병원은 수도권에만 집중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근처 병원에 가서 정체성을 이야기하고 호르몬 치료를 요청하는 것도 작은 지역 사회에 거주하는 이에게는 크나큰 부담이다.
코로나 시대에 일자리를 잃고 무급 휴직을 강요받는 등의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것은 트랜스젠더도 마찬가지다. 생활고에 시달리느라 너무 힘들다는 연락도 많았다. 정체성으로 가족들과 갈등을 겪다가 집을 나왔는데, 겨우 취직한 회사에서 코로나로 인해 인원 감축을 실시한 것이다. 취직 후에 호르몬 치료를 시작해서 이미 목소리 변화 등이 많이 일어났던 그 지인은 어떻게 재취업을 해야 할지 막막해했다.
극단적인 내용의 연락도 많았다.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연락을 받고 새벽 한 시에 한강 다리로 뛰어간 적도 있었다. SNS에 남긴 자살 암시 글을 보고 경찰을 부른 것도 여러 번이다. 주된 사연은 생활고였지만 다른 사연도 많았다. 코로나로 인한 생활고, 갈등을 빚었던 가족들과 어쩔 수 없이 같이 살거나 돌봄을 제공하는 상황들, 그로 인해 다시 되살아나는 정체성으로 인한 갈등…. 코로나 여파로 2030 여성들의 자살률이 늘어나고 있다는 기사가 생각났다. 사회적인 위기 상황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은 언제나 그 사회의 약자들이다.
안전한 커뮤니티가 없다는 것
나 또한 상황이 좋지 않은 가운데 힘든 연락을 계속 받고 있는 것도 지치는 노릇이었다. 왜 유달리 트랜스젠더 지인들에게서 이러한 연락이 늘어난 것일까? 코로나 시대로 이래저래 힘든 것은 모두가 마찬가지일 텐데. 그러다가 지인 D과의 전화 통화에서 많은 것을 느꼈다.
“너 말고는 아는 트랜스젠더도 없고, 이런 이야기를 편하게 할 사람이 없어. 이 시국에 인터넷에서 사람 만나고 친구 찾는 것도 부담되고. 요즈음은 트랜스젠더 단체들에서 뭐 행사를 하는 것도 없잖아. 그런 곳에 나가서 사람 만나고 하는 것도 낙이었는데.”
그렇구나. 우리에게 필요했던 건 안전한 커뮤니티였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내가 일하고 있는 조각보가 유일한 트랜스젠더 인권운동 단체였지만, 최근 2~3년 사이에 트랜스젠더 인권단체들이 많이 생겼다. 그리고 코로나 사태가 터지기 전만 하더라도 각 단체마다 저마다의 회원 모임이나, 트랜스젠더 당사자들이 정보를 얻고 교류할 수 있는 행사를 많이 주최했다.
]조각보에서 당사자 자조모임인 ‘트랜스젠더 지지모임 TGG’를 진행할 때 참가자들을 위해 사용하는 가이드라인
당장 내가 일하고 있는 조각보에서는 코로나가 터지기 전만 해도 ‘트랜스젠더 당사자들이 모여 안전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을 만들자’는 목표로 매달 비정기적으로 트랜스젠더 지지모임 TGG라는 모임을 열었다.
다른 성소수자 인권단체들이 함께 모여 있는 조각보 사무실에 있을 때 나는 내가 안전하다는 것을 느꼈었다. 비록 쉐어 오피스일 뿐이지만 이곳에 앉아 있는 나는 퀴어와 트랜스젠더, 앨라이(지지자)들이 모인 안전한 공간에 ‘소속’되어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트랜스젠더들은 안전하게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이 별로 없는 것 같아.”
지인 E는 이렇게 말했다. 무례한 질문을 받거나, 아웃팅을 걱정해야 하는 교류는 그 누구도 원치 않는다. 트랜스젠더 당사자들이 모인 곳이라 하더라도 서로가 살아온 삶과 경험이 모두 다르다.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고 존중받을 수 있는 규칙이 있고, 그 규칙 안에서 적극적으로 교류하고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코로나 시대에는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힘든 상황에서 나와 같은 당사자들이 살아가고 있음을 확인하고,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받을 공간이 사라져가는 것이다.
코로나 시대를 버텨내고, 다시 만날 그날까지
거리는 멀어져도 마음은 가까이. 사실 너무나도 어려운 구호가 아닌가 싶다. 나 또한 서로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언제나 연결되어 있음을 기억하자고 말하며 이 글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싶지만, 떨어져 있어서 힘든 것을 어찌 할 수가 없는 것을.
코로나 시대가 트랜스젠더 당사자의 삶에 있어 고비로 찾아온 것은 맞지만, 그 이전이라고 해서 트랜스젠더의 삶이 굴곡 없이 평탄했던 것은 아니다. 코로나 시대가 끝난다 하더라도 아마 우리는 여전히 어느 화장실을 가야 할지 갈팡질팡하며, 의료적 트랜지션을 진행하기 위한 비용을 모으느라 고생하리라. 성소수자 친화적인 병원 정보를 찾느라 애쓰고, 취업 전선에서는 트랜지션 기간의 공백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행여나 아웃팅이 되지는 않을지 걱정하며, 법적 성별을 정정하기 위해 지난한 과정을 거치느라 진이 빠질 것이다.
하지만 코로나가 끝나면 트랜스젠더의 삶도 약간은, 어쩌면 조금 더 나아질 것이다. 다른 이들과 만날 수 있으니까. 만나서 이 코로나 시대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토로하며, 코로나 때문에 호르몬 끊어본 적 있냐느니 하면서 트랜스젠더가 아니면 공감할 수 없는 밀린 이야기들을 잔뜩 풀어놓을 수 있을 테니까. 힘들어도, 이래서 힘들고 저래서 힘들다고 내 이야기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털어놓을 수 있을 테니까.
2019년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TDOR)을 기념하며 조각보에서 주최한 촛불문화제 모습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을 버티기가 너무나도 힘든 이들이 있다면,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11월 20일은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TDOR; Transgender Day of Remembrance)이었다. TDOR은 먼저 세상을 떠나간 트랜스젠더 당사자들을 기리는 날이지만, 이 날은 마냥 슬픔에 잠겨 있는 날만은 아니다. 앞으로를 어떻게 살아갈 지 서로 연대하고 힘을 얻는 날이기도 하다.
트위터에서 #TDOR2020 해시태그를 쓰면 트랜스젠더 깃발이 함께 뜬다. 이 해시태그를 검색하면 온 세상의 트랜스젠더 당사자들이, 또 앨라이들이 남긴 글을 읽어볼 수 있다. 우리가 연결되어 있음을 돌이켜 볼 수 있는 끈들은 지금도 수없이 이어져 있다. 이 코로나 시대는 언젠가는 끝날 것이기에, 우리는 지금을 함께 버텨내야 한다. 다시 함께 만날 그때를 나 혼자서만 볼 수 없다면 너무 아깝지 않겠는가!
[필자 소개] 리나. 트랜스젠더로서 또 활동가로서 지속가능한 삶이란 어떤 것일지 늘 고민하고 있다. 트랜스젠더 인권단체 조각보에서 활동한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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