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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면 쉬기’ 누군가엔 허울뿐인 그 말

<코로나 시대 살아내기> 싱글맘과 초등생 아이가 겪은 2020년


코로나 시대를 ‘살아내고’ 있는 다양한 목소리를 담습니다. 지금 그리고 코로나 이후, 이들의 목소리가 묻히지 않는 사회를 함께 만들어가길 바라며 기획하였습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직장 가까이로 거처를 옮겨온 건 지난해 말이다. 안전하고 깨끗한 동네, 사람 살만한 집, 넓은 새 학교를 둘러본 우리는 속전속결 이사를 결심했다. 살던 동네와 아이가 다니던 학교에는 별 미련이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엄마와의 거리두기에는 결단이 필요했다.


“이사 가면 할머니 댁과 멀어져서 지금처럼 많이 돌봐주시지 못할 거야. 엄마가 아침저녁으로 더 챙겨주겠지만 이제 스스로 할 일이 많아질 거야. 혼자 있는 시간도 생길 거고. 괜찮겠어?”


아이는 한 번 해보겠다 했다. 혼자 컵라면 끓이기에 성공한 이래 자립심 비슷한 무언가를 의식하기 시작하던 아이였다.


그렇게 나와 아이는 제3자에 의존하지 않고도 성립하는 온전한 가정을 향해, 엄마는 손자녀 돌봄으로부터의 해방을 향해 큰 걸음을 내딛기로 했다. 아이가 열 살이 돼서야 비로소 뗄 수 있게 된 한 발짝이었다.


코로나라는 아비규환에 마비된 아이돌봄


우리는 단출한 2인 가정이다. 나는 여기서 생계부양자와 양육자의 역할을 겸한다. 언제나 시간 빈곤자로 살았고 대부분 경제적으로도 빈곤했으며 늘 돌봄공백에 시달렸다.


지난 10년간 일과 가정을 지켜내기 위해 많은 희생을 치렀다. 때로는 일을 줄여 시간을 얻었고, 때로는 시간을 사려 일을 늘렸다. 그렇게 일-가정 양립의 환경을 찾아 잦은 이사와 이직을 감행했는데 결국 망가진 커리어패스(직업경로)와 고용 불안정, 맘고리즘(Mom + Algorithm 합성어로, 여성의 생애주기에서 육아가 반복되어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을 표현)을 끊어내지 못한 채 엄마의 노동력을 갈취하는 불효녀 포지션만이 남아있었다.


‘이만하면 오래 버텼어. 이제 다 키웠잖아’라는 정신승리와 함께 삶에서 일에 대한 욕구가 차지하는 비중을 늘려갔다. 비록 매년 계약을 갱신하는 신분에 불과하지만, 일을 통해 성장하고 능력을 인정받고 커리어에 있어 더 큰 기회를 향해 전진하고 싶었다.


그런 우리를 코로나19보다 먼저 덮쳐온 건 아이의 겨울방학이다. 새 학교의 돌봄교실 입소 대상은 2학년까지였다. 아이가 자전거로 닿을 법한 반경 안에 유일하게 위치한 지역아동센터에 연락했다. 그러나 대기자가 많고 관할 행정구역도 달라 입소가 어렵다 했다. 한부모 가정이라는 사정도 먹히지 않았다. 중위소득 60%가 넘는 한부모 가정에는 별다른 입소 우선권조차 주어지지 않는 까닭이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점심밥. 수소문 끝에 매일 6시간 이상 지낼 수 있고 점심도 제공하며 셔틀버스도 있는 학원을 겨우 찾아냈다. 상당히 먼 거리였지만 차량에서 보내는 시간이 아이 혼자 있는 시간보단 나을 거라는 해괴한 논리로 나를 위안하며 방학과 동시에 아이를 보내기 시작했다.


부실하기 짝이 없는 학원 밥에 속이 문드러졌다. 누군가가 준비해주는 점심, 또래들과 함께 먹는 점심이 귀해질 날이 오리라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송지현


며칠 뒤 아연실색할 일이 벌어졌다. 우연히 보게 된 사진 속 식판에는 부실하기 짝이 없는 식단에 터무니없이 적은 양의 음식이 올라가 있었다. 하지만 고민 끝에 항의 대신 아침마다 김 몇 봉지를 들려 보내는 방법을 택했다. 그 학원 말곤 마땅한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어미 속을 문드러지게 하는 수준일지언정 누군가가 준비해주는 점심, 또래들과 함께 먹는 점심이 귀해질 날이 오리란 걸. 일과 가정을 지켜내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10년 과정은 2020년 코로나 팬데믹의 서막에 불과했다는 걸.


코로나19가 우리 지역을 덮친 이래 학원에 나오는 아이들이 눈에 띄게 줄었다. 다들 집에만 있는데, 마스크를 쓴 채로 종일 다른 사람들과 섞여 지내야 하는 현실을 아이는 받아들이기 힘들어 했다. 설상가상 바로 옆 단지에 확진자가 나왔고 종국엔 그 밥 주는 학원도, 이어서 가던 체육관도 문을 닫았다. 진작부터 정부의 시간제 아이돌봄서비스도 신청해봤지만 매칭된 날은 하루도 없었다.


곧 사상 초유의 개학 연기 사태가 빚어졌으나 학교 긴급돌봄은 여전히 2학년까지만 유효하다 했다. 교육청, 교육지원청, 장학사, 학교까지 가능한 모든 곳에다 사정을 설명하고 읍소도 해봤지만 코로나라는 아비규환 앞에 어찌할 바 모르는 것은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공사 불문 모든 돌봄이 마비됐고, 사람들 모두 집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내 아이도 집콕을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나만은 예외였다.


멈춰버린 학교, 멈추지 않는 직장


코로나19가 기승일수록 이를 막기 위해 더 안간힘을 써야 하는 누군가가 있다. 나 역시 그 중 하나였다. 업무강도는 감염 확산과 비례하여 세졌는데 이따금 확산이 주춤해져도 일은 거의 줄지 않았다. 야간‧주말 할 것 없이 비상근무조 여럿이 동시에 돌았고, 공식근무가 아니더라도 자나 깨나 노트북과 한 몸으로 지냈다.


많은 사람이 손님을 잃고, 또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잃고, 또 많은 사람이 이들의 생존을 위한 타개책을 마련하기 바쁜데, 세상과 정반대의 호흡으로 돌아가는 이곳 노동자의 생존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거론되는 몇몇 돌봄 대안들은 하나같이 우리 가정을 비껴갔다. 올 초 신설됐다는 가족돌봄휴가 제도는 나의 일터에 아예 적용조차 되지 않았고, 만일 적용된다 한들 막중한 업무를 외면한 채 나만 살겠다고 일터에서 피신할 수도 없었다.


많은 기업에서 전면 재택근무를 시행하던 시기에도 상황은 비슷했다. 코로나 이후 재택근무한 날은 열 며칠에 불과한데, 그나마도 임신부를 제외하곤 가장 많이 쓴 수준이다. 동료들의 배려와 두꺼운 낯짝이 아니었다면 이조차도 주어지지 않았을 테다.


가장 실질적 대안인 긴급돌봄은 어린이집과 유치원, 그리고 대부분 초등학교의 2학년까지만 실재했다. 아이의 학교도 두어 달은 전 학년 대상으로 돌봄을 운영했지만, 이내 1-2학년 대상으로 원복한다며 일방적으로 방침을 바꾸는 바람에 우리는 별안간 퇴소당하고 말았다.


3학년 이상 중 돌봄에 꾸준히 나오던, 즉 별다른 대안이 없어 보이던 아이들은 열 명 남짓이었다. 단 한 명 최후의 아동을 위해서 존재해야 하는 것이 공적 돌봄 아니던가. 불과 열 명을 더 수용할 대책을 마련할 의지가 보이지 않는 학교가 몹시 야속했으나 자리가 한정돼있다는 현재 상황으로선 저학년에게 양보하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 나 역시 아이의 입학 무렵, 돌봄교실 추첨에 희비가 교차하는 순간을 경험해본 까닭이었다.


“동생들에게 돌봄 양보하는 거 괜찮겠어? 혼자 있는 건 좀 더 연습해볼까? 엄마가 도와줄게.” 아이는 이번에도 괜찮다 말했지만 실상은 조금도 괜찮지 않았다.


이후 아이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뺑뺑이로 맡겨졌다. 심지어 몇 년 동안 본적도 없고 아이와는 일면식도 없는 비혼 선배에게 아이를 부탁한 날도 있었다. 휴무일이 평일인 유일한 지인이었다. 그 모든 돌봄 대안을 섭외하고 스케줄을 조율하고 답례하는 역할은 내게 주어진 또 다른 그림자 노동이었다.


그러나 온갖 수를 동원해도 돌봄공백을 메울 수 없었다. 아이는 홀로 생존하는 법을 익혀야만 했다. 아이와 보내는 자투리 시간 대부분은 혼자 끼니 챙겨먹는 법, 비상 시 대피‧대처하는 법, 온라인 학습하는 법 등을 익히도록 하는 데 쓰였다. 급할 때 혼자 병원이든 식당이든 갈 수 있게 자전거로 새 동네 지리를 꿰도록 하는 것도 큰 숙제였다. 아이 혼자 택시를 타게 하는 일도 올해 처음 있었다.


코로나 이후 받은 가장 감사한 선물은 식탁 위에 놓고 쓰는 소형 전기 인덕션이다. 아이가 혼자 가스불 켤 일 없게 해주는 도구가 얼마나 값진가는 아이 또래 형제가 화마에 휩싸인 뒤에야 비로소 실감했다.

혼자 끼니를 때워야 하는 아이의 단골 메뉴는 컵밥과 라면이었다 ©송지현


그날 밤, 나는 아이에게 눈물을 숨기지 못했다. 나는 재난을 막아내기 위해 아이를 온종일 홀로 두면서까지 일터에 머무는데, 정작 우리가 그 재난을 온몸으로 겪어내는 신세임이 문득 서글퍼졌다. 나는 그저 버텨내면 그만인데 아이에게까지 연대책임을 지우는 것 같아 죄스런 맘이었다. “미안해. 매일 혼자 둬서 미안해. 컵밥하고 라면만 먹게 해서 미안해.”


학습 공백이니 학력 격차니 하는 말들이 들려왔다. 몇 달째 이어지는 악전고투 속에서 그런 걱정은 사치였다. 그런데 그저 안전하고 건강하게 견디자는 바람조차 우리에겐 허용되지 않는단 걸 깨달은 건 지난여름이었다.


완충장치 없이 재난의 충격을 고스란히 받은 몸과 마음


오래도록 차근차근 준비해 온 일과 드디어 연이 닿았다. 새로운 분야, 더 큰 책임이 따르는 자리로 옮겨오게 된 것이다. 달뜬 맘으로 새 업무를 시작한 지 채 보름도 되지 않던 날, 날벼락이 떨어졌다. 입원 준비해서 이틀 뒤 다시 오라는 대학병원 교수의 엄포였다. 다른 이유로 몇몇 검사를 받던 중 상상해본 적도, 가까이 접해본 적도 없는 큰 병이 찾아왔음을 알게 됐다. 지난해 말 검사 때만 해도 전혀 문제가 없었는데.


돌이켜 보면 멀쩡할 리 없을 만큼 몸을 혹사시킨 몇 달이었다. 신천지 발 코로나19 대유행 이래, 끼니 대부분은 온갖 간편식으로 때우거나 거르거나 몰아서 먹기 일쑤였다. 원래도 잠을 쪼개가며 산 데다 안팎 상황이 악화일로만 걸으니 제때 편히 잠자는 건 생각지도 못했다. 먹고 잘 시간, 아이와 집안 돌볼 시간도 없는데 몸 관리는 언감생심 아니던가.


이로써 내 몸 돌보기라는 새로운 노동이 추가됐다. 잘 먹기, 잘 자기, 잘 움직이기, 스트레스 줄이기, 몸의 신호를 예민하게 관찰하기, 병원가기… 이들을 관리하는 데에만도 큰 시간과 비용과 노력이 투입됐다. 입원은 당연히 포기했고, 퇴근 후 아이를 위해 비축해 둔 적디 적은 시간과 에너지는 또 쪼개져야 했다.


직장과 가정, 경제노동과 돌봄노동, 일과 아이로 나의 모든 걸 이분해왔던 그간의 관념이 몽땅 무너졌다. 직업으로 나를 증명하고 성취로 나를 평가받고자 했던 접근이 어찌나 납작했는가를 건강을 잃고서야 깨우치다니, 참 멍청하게도 살았다.


그 멍청함의 대가인 건 알겠다만 이건 너무 가혹하다. 그저 아등바등 열심히 살았던 것뿐인데. 내게 주어진 몫을 책임지려 노력했을 뿐인데.


아이가 국어 숙제에서 제안 주제로 삼은 건 “돌봄(교실)을 늘리자”였다. 이유는 ‘집에 있는 시간이 줄어들고 친구가 생길 수 있고 집에서 혼자 있지 않아서’란다 ©송지현


건강을 잃은 건 나만이 아녔다. 아이 변화가 감지된 게 늦봄부터니 나보다 아이가 먼저 앓았다. 아이는 시들어갔다. 웃음을 잃고 눈물이 늘었다. 원망은 자신을 향했다가 나를 향하기를 반복했다. 더없이 무기력했고 자주 외로움을 호소했다.


긴긴 외로움의 시간을 다 메울 순 없지만, 잠시라도 누군가와 대면할 기회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사회복지사 선생님과 정기 상담도 마련했고, 난생처음 과외교사니 방문미술이니 하는 것도 붙여 봤고, 끝내 어린 남동생에게 방 한 칸을 내주며 아예 집에 불러들였다. 주말이면 인맥을 털어 한두 사람을 집에 초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접촉을 피해야 하는 시국에 내가 동원할 수 있는 이는 모두 어른들뿐이었다.


코로나가 조금 주춤해진 어느 휴일, 옛 동네를 향해 자전거로 세 시간 가까이 달렸다. 마침 아는 얼굴의 아이들 몇을 마주쳐 해질녘까지 뛰어놀던 아이가 말했다. “문제는 코로나가 아니라 친구가 없는 거라고.”


단출한 2인 가정의 자녀, 형제도 사촌도 없는 외동아, 오자마자 방학‧개학연기‧원격학습이 도미노처럼 이어진 전학생에게 절실한 건 또래와의 교류였다. 어쩌면 코로나 이후 취약 아동의 정의가 다시 쓰이게 될지 모른다. 사람의 온기가 충분하지 않은 아이, 친구 관계가 단절된 아이, 집안에 홀로 고립된 아이, 외로운 아이…


아이의 홀로서기 연습은 너무도 부자연스럽게 시작해 속성으로 진행됐다. 혼자가 무서워 한겨울에도 현관문 열어놓고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 해가 지면 공용현관 지나기가 무서워 건물 앞에서 울고 있는 아이가 나이 한 살 더 먹었다고, 코로나가 시작됐다고 돌연 혼자여도 괜찮고 어둠이 무섭지 않은 아이로 바뀐다는 건 애초에 말이 안 됐다.


결국 학교 사회복지실, 지역사회 아동정신건강센터에 이어 두 달 대기 끝에 소아정신과에서 진료를 보게 됐다. 나름 의연하고 침착하게 그간의 사정을 설명해나가던 내게 의사가 물었다. “어머니 마음은 요즘 어떠신가요?”


내 마음까지 돌볼 여력이 없다는 말보다 눈물이 앞서 터져 나왔다. 가장 후순위에 둔 나의 마음을 앞세우는 순간 이 균형 아닌 균형조차도 여지없이 무너져버리게 될 걸 알기에.


재난의 충격을 온 몸과 마음으로 흡수하고 있는 가운데, 매일같이 보이던 ‘아프면 쉬기’라는 구호가 우습게만 읽힌다. 우리는 정말 아프면 쉴 수 있는 삶을 사는가. 적어도 나와 아이가 속한 세상은 그렇지 않다.


[필자 소개] 송지현. 사회생활과 잉태를 거의 동시에 시작한 ‘11년차 워킹맘’이자 그동안 여러 번 이직(당)한 ‘프로 경력단절러’. 한부모 가정의 가장으로서 2인분의 몫을 해야 하는 ‘시간 빈곤자’이나 실상은 1인분, 아니 0.5인분조차도 할까 말까 하기에 스스로를 반쪽짜리 ‘파트타임 엄마’라 칭한다. 신문방송학 전공 후 온갖 종류의 대필을 업으로 삼아오다 최근 자신의 이름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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