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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yday Feminism 설립자, 한국계 미국인 산드라 김 (상)
[하리타의 월경越境 만남] 독일에 거주하며 기록 활동을 하는 하리타님이 젠더와 섹슈얼리티, 출신 국가와 인종, 종교와 계층 등 사회의 경계를 넘고 해체하는 여성들과 만나 묻고 답한 인터뷰를 연재합니다.
몇 해 전, <Everyday Feminism>이라는 영문 매체를 알게 됐다. 미국에서 발행하는 온라인 독립 미디어다. 기사 헤드라인은 ‘OO하는 OO가지 방법'처럼 온라인 홍보의 불문율을 따르면서도, 내용은 최신 페미니즘 및 인종, 퀴어 담론을 생활에 밀착해 쉽게 풀어냈다.
볼 때마다 머릿속에 느낌표가 생겼다. ‘이 조합 참 신기하네’, ‘이런 주제를 이렇게 쉽고 명쾌하게 다룰 수 있구나!’ 무엇보다 소셜 네트워크 피드에 수없이 공유되는 점이 놀라웠다. 말하자면 <Everyday Feminism>은 넷상의 ‘초인싸’였던 것이다. 마음 속에 은근한 질투와 부러움도 생겼다. 이런 성공 뒤에 있는 얼굴을 상상하자 엘리트 백인 여성이 떠올라 좀 당혹스러운 마음도 들었다. 그런데 설립자 소개에는 ‘산드라 김’이라는 이름과 함께 숏컷의 한국계 여성이 시크하게 웃고 있었다. 그를 꼭 만나고 싶었다.
▲ 개인과 사회 해방을 위한 교육 플랫폼 <에브리데이 페미니즘> 설립자 산드라 김. 독립 미디어 Everyday Feminism은 전세계에서 수백만 명의 독자들이 찾는다. (출처: sandrakim.com) |
산드라 김(김수정)은 1983년 미국 워싱턴 D.C. 교외에서 태어난 한국계 이주민 2세대로, 그의 가족은 1970년대에 미국으로 왔다. 산드라는 다양한 비영리 부문과 사회적 기업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지난 2012년 ‘개인 및 사회 해방을 위한 교육 플랫폼’ <Everyday Feminism>을 설립했다. 그리고 이를 단기간에 150개국 이상에서 매달 450만명이 넘게 찾아오는 영향력 있는 디지털 미디어로 키워냈다.
‘특권’, ‘인종 정의’, ‘계급’, ‘종교’, ‘LGBTQI’, ‘섹스’ 등 12개 카테고리에 3천 개 이상의 기사가 올라갔다. 현재는 또 다른 교육 플랫폼 <Re-becoming Human>을 열어 온라인 세미나와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다. 특히 트럼트 정권 시기에 “내재화된 백인성을 치유하기”(Healing from your internalized whiteness)라는 강좌를 열어 인종주의에 반대하고, 자신의 정체성 때문에 혼란, 분노, 좌절, 죄책감, 내적 갈등을 겪는 백인 시민들을 만나는 독특한 행보를 걸어왔다.
Q. Everyday Feminism이 독립 매체로써 큰 성공을 거뒀어요. 성공요인이 뭐라고 보세요?
“시작한 지 이제 십 년 가까이 되는데요, 당시 미국에선 낙태 금지 법안을 둘러싸고 전쟁이 한창이었어요. 그걸 보면서 저는 상호교차성 페미니즘에 대해 얘기할 적절한 시기가 왔다고 생각했어요. 가부장제가 자본주의의 착취와 부패한 정부, 문화 식민지화와 맞물려 있는데 젠더, 인종, 계급, 성적 지향, 이주 경험, 언어 능력 등에 따라서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각기 달랐거든요.
미국사회가 법제도적으로 성차별이나 가부장제를 많이 극복한 것처럼 보여도 일상 영역에서는 전혀 아닙니다. 전국민이 아침마다 마주하는 시리얼 박스만 봐도, 거기 그려진 건 ‘호랑이 토니’나 ‘레프러칸 요정 럭키’처럼 남성 캐릭터들이에요. 그런데 <Feministing> 같은 더 오래된 페미니즘 미디어는 문화비평이나 사건사고에 대한 분석 기사를 주로 내놨고 필자들도 대개 젠더학, 여성학 전공자들이라서 이론적 접근이 많았어요. 그런 지식이 일상생활에 바로 적용되긴 어려웠죠.
저는 우리 안에 내재된 억압 기제를 낱낱이 해부해보는 게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밖에서 너무 많이 보고 들은 탓에 내면에 박혀버린 통념들이 뭘까? 라는 질문을 던지고, 피해자를 탓하거나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는 마음에서 자유로워지자는 메시지를 남겼어요. <Everyday Feminism>은 독자들이 일상적 경험을 이해하게 돕고 ‘나 혼자’가 아님을 계속 일깨웠다고 봅니다. 그게 수백만 명으로까지 독자가 늘어났던 성공 요인 같아요.”
▲ 독립미디어 <에브리데이 페미니즘> 사이트. 여기 실린 기사들은 독자들이 페미니즘 지식을 일상생활에 적용할 수 있게 돕는다. (출처: everydayfeminism.com) |
Q. 예전 기사들도 소셜 미디어에서 계속 유통되며 널리 읽히고 있던데요. 말씀하신 대로 이슈나 사건 중심의 기사가 아니라 일상생활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어서겠지요. 기사 헤드라인도 굉장히 실용적이라 읽고 싶어지거든요. ‘상호교차성 페미니스트가 첫 데이트 때 물어야 할 10가지’, ‘아시아 여성들을 위험에 빠트리는 5가지 아시안 여성 페티쉬’, ‘말도 안되지만 엄청 흔한 백인 특권에 대한 10 가지 반어법적 대응’, ‘사회운동 언어가 연애에서 폭력이 될 수 있는 7가지 방법’ 같은 기사들은 도저히 클릭을 안 할 수가 없었어요. 제 생활에 밀접한 주제들이라 읽으면 바로 도움이 될 것 같았고요. 소셜미디어 유저들에게 라이프스타일 팁처럼 친근하고 익숙하게 어필하는데, 사실 내용은 굉장히 사회 비판적이고 체제 전복적이죠.
“맞아요, 접근성이 좋아야 한다는 게 저한테 굉장히 중요했어요. 비주얼과 내용 면에서 감성적 울림이 있어서 읽는 사람 마음에 가 닿고요. 유색인종과 퀴어 필자들이 대부분이었다는 점에서 미국 미디어 업계에서 드문 시도였는데요, 그런 필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화하듯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쓰게 했어요. 독자들이 더 많은 ‘아군’을 만나게 하자는 고민이 있었거든요.”
Q. 저예산 독립 미디어로서 운영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처음에 어떤 이들이 모여 어떻게 일했는지 궁금합니다. 산드라는 자신의 ‘아군’을 어떻게 찾을 수 있었나요?
“당시 제 반려인이 기술적인 차원에서 웹사이트 구축 및 운영을 맡았고, 저는 비전을 세워서 전체 구조를 디자인했어요. 초기 기사 작성과 소셜미디어 관리는 인턴들과 힘을 모았습니다. 후원금이 주된 자원이었어요.
우리는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공동체였어요. 그런 공동체를 만드는 게 제가 잘하는 일이에요. 구성원들이 스스로를 가치 있고, 지지와 보살핌을 받는 존재라고 느끼는 분위기요. 그게 동기를 부여해서 각자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요. 저희가 잘 된 건, 많은 부분 서로 주고받는 사랑과 돌봄에서 나왔고, 그게 결과물에도 드러났다고 봐요. 창간 1~2년 뒤에 편집자를 비롯해 스태프를 정식 고용할 만큼 재정이 늘어났어요.”
▲ 미국 동부에 있는 산드라 김(왼쪽)과 온라인으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한국어에 유창하지는 않지만 대가족 안에서 ‘맏언니’로 자라며 한국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김수정이라는 한국 이름을 기사에 소개해달라고 했다. ©하리타 |
Q. 사랑과 돌봄의 공동체를 가꾸는 자질은 타고난 부분도 있겠지만, 살면서 체득한 것이기도 할 텐데요. 무엇이 산드라에게 그런 자질을 갖추게 했을까요?
“저는 스스로를 ‘급진적인 유학자’(a radical confucian person)라고 생각해요. (한국에서) 유학이라는 전통 철학이 종교화되고 국교가 되면서 폐해가 컸지만, 그 사상의 핵심을 들여다보면 결국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돌볼 것인가에 대한 합의라고 저는 보거든요. 서로를 지탱해주는 공동체를 어떻게 확립할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죠. 하지만 유교는 나이를 비롯한 특정 기준을 바탕에 두고 위에서 아래로 사상을 실현하려고 했죠. 저는 이 부분을 진보적으로 바꿔 수평적 합의(consensus)를 기준으로 합니다. ‘자, 우리는 다 다른 사람이야. 너는 어떨 때 지지를 받는다고 느끼니? 네가 필요한 건 뭐야?’ 저는 이렇게 묻는 거예요.
미국 사회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서로를 어떻게 돌보는지 잘 몰라요. 함께 사는 가족보다 낯선 사람에게 더 친절한 경우가 많아요.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은 아무에게도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역설이 있죠. 주변에서 돌봄 역량을 갖춘 사람들을 보면 대개 이민자 가정 출신이에요. 1970년대에 미국으로 처음 건너온 우리 가족은 한국식으로, 가족끼리 서로 도우면서 살아남았어요. 저도 그런 문화를 이어받았죠.”
Q. 뜻밖의 얘기네요. 한국의 페미니즘에서 유교는 주로 맞서 싸울 대상이거든요. 가족 중심의 공동체 문화도, 그 사회 안에서 사는 사람 입장에서는 숨막혀요. 여자들에게 대개 불리하게 작동하고요. 그러나 재미 교포 2세로서 가족의 뿌리인 한국 문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모습은 인상 깊네요. 산드라의 삶에선 유교 철학과 페미니즘이 서로 충돌한 적이 없나요?
“저에게는 사실 그런 경험이 없었어요. 유교는 가부장적이란 것을 알지만, 저는 그 철학 안의 본질은 ‘상호돌봄’이라고 이해했으니까요. 그리고 우리 가족 안에서 중요한 일은 여자들이 다 맡았어요. 남자들이 밖에 나가서 돈을 벌어오지만, 그 돈을 관리하고 가정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건 여자들. 우리 집 남자들은 항상 조용했어요. 그래서 별다른 갈등이 없었죠. 이것도 제가 미국 백인 가정의 가부장제와 다르다고 느낀 점이에요. 미국에선 보통 남편이 돈을 벌면 모든 권력을 쥐고 있거든요.”
Q. 페미니스트로서 창업가, 언론인 뿐 아니라 활동가로도 일하셨죠. 성폭력과 인신매매 피해자를 위한 심리상담을 비롯해서 여러 비영리기관에서 활동했는데, 그러한 일을 하게 된 동기나 계기가 있나요?
“중고등학교 때부터 제가 희망한 진로는 ‘남을 돕는 일’이었어요. 활동가가 된 것도 사회 정의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사회 복지에 기여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이민 2세들은 어릴 때부터 사회복지사 같은 역할을 하게 돼요. 영어가 유창하니까 이민 1세 어른들이 언어장벽 때문에 하기 어려운 행정, 사무 일을 도맡으면서 미국의 사회제도를 일찍 파악하죠. 법정 드라마에서 배운 내용을 가지고 주변에 법률 상담을 해주거나, 서비스 센터에 전화 거는 일, 식당에서 주문하는 것도 늘 제 일이었던 기억이 나요.
저는 일찌감치 깨달았어요. 이 나라의 시스템은 우리 가족을 지켜주게끔 만들어져 있지 않다는 걸. 그래서 제도 바깥에서 스스로 해내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는 걸 알았죠. 그런데 우리는 그게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잘못이라고만 배우거든요. ‘열심히 일을 안 하니까 그렇지’, ‘최선을 다해보지 않았잖아’, ‘이주민들은 게을러. 그래서 가난한 거야.’ 하지만 전 그런 말들을 한번도 믿은 적이 없어요. 이주민들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성취하기 힘들다는 게 보였고, 그건 시스템이 잘못된 거라고 생각했어요.”
▲ 일찌감치 사회적 돌봄을 실현하는 일을 진로로 정하고, 다양한 비영리 기관에서 활동해온 산드라의 모습. ©산드라 김 |
Q. 미국은 다양한 민족, 인종, 문화를 가지고 온 이주민들로 구성된, 세계 어느 곳보다 다양성이 큰 나라인데도, 소위 ‘기득권’은 특정 집단이 독점하고 있죠. 그 때문에 백인 주류 사회이고요.
“저는 백인우월주의와 백인에 의한 식민지배가 오늘날 미국사회의 돌봄 문화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봐요. 쉽게 말해 사회적 돌봄까지도 돈 주고 구매해야 되는 것으로 변질되었다고 할까요. 성공하려면 대학에 가야 되니까 학자금 대출 빚을 지고. 좋은 차를 뽑아야 되니까 빚을 지고, 큰 집을 장만해야 성공한 인생이니 또 주택담보 빚을 지고. 성공한 인생, 아니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인생을 위해 달리다 보면 빚더미 위에 서 있게 되는 사회예요. ‘소비 만능주의’와 ‘부의 사재기’(hoarding the money)라고도 정리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부를 축적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고 배워요. 괜찮게 살려면 돈을 벌어야 하고, 거기에는 희생이 따른다는 게 지배적인 생각이 되어버렸어요. 돈을 버는 과정에서 나머지는 다 잃는 거예요. 시간과 에너지는 물론이고, 너무 지쳐서 공동체에 참여할 능력도 상실하게 돼요. 자기 삶은 자기 혼자서 책임져야 한다는 게 상식이 되고, 그러지 못하면 약하고 무능력한 사람인 거예요.
한국말 ‘인정’(人情)을 번역할 개념 자체가 없어요. 저는 한인 공동체에서 자라면서 늘 ‘언니’나 ‘누나’로서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며 서로 도와주는 게 당연했는데, 공동체 바깥 사회는 그렇지 않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어요. 제가 아무리 베풀어도 절 도와주는 사람은 없더라고요. 제가 아는 공동체주의는 쌍방이 서로 도와야 성립이 되는 건데 말이죠. 그런 시기를 거치면서 ‘내가 이 세상에서 할 일은 이런 시스템에 대항에서 돌봄 문화를 만드는 것’이라고 정리했어요.
50대에 미국으로 이민 오신 할머니가 우리집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노인 공동주거 주택에 살고 계세요. 거기 입주민 30% 가량이 한국계에요. 할머니는 영어가 유창하지 않지만 거기서 사람들이랑 음식, 돈, 옷가지를 나누고 이것저것 가르쳐주며 지내서 삶이 풍족해요. 어느 날 저보고 ‘네가 그렇게 퍼주고 다녀도 널 챙겨주는 사람은 없지? 얼마나 슬프냐.’라고 하셨어요.”
Q. 그렇게 돌봄의 철학을 갖고 살아가는 것을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이나요? 백인 공동체의 돌봄 문화가 더 빈약하다고 얘기했는데, 백인 지인들의 반응은 어떤지 특히 궁금합니다.
“저의 가까운 친구들은 대부분 유색인종이에요. 사회의식이 투철하고 영성 수련을 하는 사람들이죠. <내재화된 백인성 치유하기> 온라인 세미나를 운영하면서 백인들과 많이 만났는데요. 자신이 ‘백인성’이나 ‘인종주의’를 어떻게 내면화했는지 알고 싶어하고, 미국에서 백인으로 살면서 놓친 게 무엇인지 돌아보려고 찾아온 분들이에요. 미국에서 백인들은 백인으로 태어난다기보다 ‘되는 것’이거든요. 예를 들어, 미국에는 예전부터 법이 규정한 인종과 민족의 정의와 범주가 있는데, 대부분 노동자 계층이었던 이탈리아나 아일랜드계 이주민들은 백인에 포함되지 않았어요. 나중에 범주가 확대되면서 그들도 백인사회에 편입됐지만, 그 과정에서 고유한 문화나 관습은 많이 잃었죠.
제 세미나 참가자들은 자기 내면에 백인우월주의나 인종차별 의식을 깨달으면서 고통스러워해요. 자기 몸과 신념, 말과 행동에 내재되어 있던 걸 그제서야 하나하나 알아채면서 ‘그럼 내가 앞으로 뭘 할 수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해요.”
▲ 산드라가 만든 10주 온라인 세미나 강좌 <내재화된 백인성 치유하기>.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백인들을 위한 프로그램이다. 수업료는 소득에 따라 20~50만원 선이고 장학금 제도도 운영한다. 백인을 계몽하는 역할까지 비백인이 떠맡아야 하냐는 시각도 있다. 산드라도 그에 동의하고, 다만 본인은 감당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하고 있다고 했다. 출처: https://sandrakim.com |
Q. 특권을 누리고 있는 사람은 그걸 모르죠. 특권이 작동하는 사회 구조도 알아채지 못해요. 몰라도 안전하고 불편 없이 살 수 있는 것, 그게 바로 특권이니까요. 저도 이 점을 뼈저리게 느낀 적이 있어요. <나는 왜 더 이상 백인들과 인종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가>(Why I’m No Longer Talking to White People About Race, 2017)라는 책을 주제로 한 모임에서요. 영국의 흑인 여성 저널리스트 레니 에도 로지(Reni Eddo-Lodge)가 쓴 문화비평 에세이죠. 그날 모임의 참가자들이 저와 사회자를 제외하고 모두 백인 유럽.영미권 출신이었다는 게 책 제목을 생각하면 아이러니였죠. 더 큰 아이러니는 그 사람들의 반응이에요. 이 책을 읽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인종차별 문제를 실감했다는 열띤 ‘회개’와 ‘고백’이 쏟아졌거든요. 런던에서 나고 자랐다는 한 40대 남자분은 최근에 지하철에서 10대 청소년들이 소동을 피워서 경찰이 출동하는 과정을 목격했는데, 경찰이 현장에 오자마자 흑인 아이 한 명만 지목해서 잡아가려고 했대요. 그게 인종차별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어서 경찰관에게 ‘저기 같이 움직인 다른 애들도 있다’고 증언을 했대요. 이 책을 읽기 전에는 한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고백이었어요. 충격적이지 않나요? 식민지배와 차별구조가 아직까지 공고한 영국 사회에서 다인종과 섞여 살아온 사람이 일상에서 그 정도로 무감각했다는 것이? 영국에 인종문제에 대한 담론이나 문화콘텐츠가 없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가까운 백인 지인들과 대화할 때도 비슷한 현상을 종종 봤어요. 이들은 인종차별에 반대하지만 관념적 차원이죠. 막상 제가 인종차별로 느끼는 상황에 같이 있을 땐 둔감하거나, 가해-피해가 아닌 가벼운 오해나 실수로 인식하더라고요. ‘그럴 수도 있지’,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마’라는 건데, ‘그런 일’을 계속 겪는 사람에게는 그게 ‘날씨’가 아닌 ‘기후’가 되잖아요. 인종적, 문화적 차이를 식별하는 감각이 나날이 발달해서 내가 혹시 그 차이 때문에 차별을 당하는 건 아닌지 매사에 의심하게 되요. 저는 앞서 말한 책의 저자가 인종문제에 관해 공감하지 못하는 백인 사회에 지쳐 ‘이제 소통하려는 노력을 그만하겠다’고 선언한 마음이 십분 이해가 가요. 한편으로 산드라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특권 계층을 만나면서 지식과 감수성을 전수하는 일도 누군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유색인종 시민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계속 병행하고 있어요. 삶의 여정이 각기 다르지만 이 식민지 국가에서 우리는 다 ‘자리를 빼앗긴’(displaced) 사람들이거든요. 아메리칸 원주민도, 이민자도, 노예 무역으로 이주를 당한 사람들도 미국이란 나라에서 다 있을 자리를 빼앗겼습니다.” (2부에서 이어집니다)
필자 소개: 하리타 (정세연). 독일과 한국, 그 밖에 매일 여러 경계들을 넘나들며 사는 경계인 페미니스트 작가. 이렇게 다른 경계인 여성들과 만나 대화하면서 느끼는 희열과 쾌감이 크다. 세계 곳곳에 멋진 여자들을 오래, 많이 만날 수 있었으면. 독자들의 감상과 인터뷰이 추천도 늘 기다린다. haritamoonride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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