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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또 해고야!” 시그네틱스 노동자들의 4번째 해고
지하철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며, 내 걱정거리는 얇은 양말이었다. 발 시리겠는데. 광화문역을 나와 희뿌연 풍경을 보았을 때도 여전히 신발 걱정. 신발에 눈 들어가면 안 되는데. 최근 들어 가장 많은 눈이 내린 날이었다.
나리는 눈발 사이로 사람들이 피켓을 들고 서로 멀찍이 거리를 두고 선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에서 시그네틱스 노동자들은 몇 해째 매주 수요일마다 선전전을 하고 있다. 다들 모자를 푹 눌러 쓰고 목도리를 칭칭 감고 있어 누가 누군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저 자리가 원래 어둑하긴 하다. 눈에 먼저 들어온 사람에게 다가갔다.
그쪽에서 나를 알아보고 ‘까아~’ 소리 내어 웃는다. 웃음소리로 보아 시그네틱스 노조(분회) 분회장이다. 평소 말끝에 웃음을 다는 사람인데(소리 나는 대로 적는다면 ‘킥킥’에 가깝다) 오늘은 어쩐지 ‘까아~’이다. “잘 왔어요! 올 줄 알았어.”
▲ 지난 1월 6일 수요일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 피켓을 든 시그네틱스 노동자의 모습. ©민주노총 금속노조 시그네틱스분회 |
환대에 양심이 찔렸다. 오랜만에 선전전을 하러 왔다. 주위를 둘러보는데 피켓 든 사람이 서넛밖에 보이지 않는다. 참석 인원이 줄어든 걸까. 그래서 한 사람이라도 더 온 것이 다행이라는 의미일까. 한파주의보가 떨어진 날이었다. 이런 날씨에 한 시간을 눈밭에 서 있어야 한다. 사람이 줄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제가 그동안 너무 못 왔지요.” 나의 주춤거림을 개의치 않고 분회장은 그 특유의 발랄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또 해고야.”
악! 이번에는 내 쪽에서 외마디 비명을 지른다. 4번째 해고다. 작년에도 분회장은 바로 저 자리에서 “우리 휴업 들어갔어요”라고 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회사가 해고 절차를 밟으려 한다고 예측했다. 휴업-구조조정-희망퇴직 신청-정리해고는 이들이 반복해 겪어온 해고 과정이었다.
“정리해고 예고 통보를 하더라고요. 이달 말까지라고.”
3번의 해고, 3번의 복직, 그리고 또!
저리 해맑게 웃어도 속은 그렇지 않을 텐데.
“두 번째 해고가 되니까 사람들이 나한테 와서 울더라고요.” 두 해 전 분회장은 인터뷰를 하며 이런 말을 했다. “울면서 못하겠다고 하더라고요.”
첫 번째 해고 싸움만 7년을 했다. 다시 복직해 3년째 되던 해, 정리해고 공고가 붙었다. 떠난 사람도, 울면서 남은 사람도 있었다. 이후로도 한 차례 더 해고가 있었고 그때도 사람들은 떠났다. 수백 명 조합원이 9명이 되기까지 세 차례 해고가 있었다.
해고가 되면 가만 있지 않고 싸웠다. 법정까지 가서 부당함을 가렸다. 번번이 노동조합이 승소했다. 부당해고 판정을 받아 회사로 돌아왔다. 하지만 돌아올 때마다 사람 수는 반이 되고 반의 반이 됐다. 승리라고 했지만 이들이 잃어버린 것을 세어볼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시그네틱스는 이번 해고로 또 몇 명이 떠나가길 바라는 걸까.
“회사가 돈이 많아서 그래요.”
매번 패소해 과태료를 물고도 자신들을 ‘끈질기게’ 잘라내려는 시그네틱스를 두고 조합원들이 한 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시그네틱스를 소유한 영풍그룹이 돈이 많다. 재계 30위 권에 드는 영풍그룹은 2000년 시그네틱스를 사들였다. 이전까지 시그네틱스는 필립스 한국 사업장이었다. 1990년대 말, 외국 투자 자본들은 더 값싼 노동력이 있는 곳으로 공장을 옮겼고, 그들이 버리고 간 설비와 사람을 반도체 산업에 뛰어들고 싶던 국내기업이 사들였다.
첫 번째 해고는 영풍그룹의 계열사가 된 시그네틱스가 규모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이뤄졌다. 해고란, 경영 위기 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체질 전환, 구조조정, 경쟁력 강화라는 여러 이름이 해고의 사유가 됐다.
2001년 영풍은 파주에 대규모 신설공장을 세우며, 기존의 서울 등촌동 공장을 매각한다. 그런데 기존 직원들은 파주에 갈 수 없다고 했다. 이들이 정규직이어서다. 심지어 노동조합까지 있는 정규직이다. 신설 공장에 정규직 자리는 없다고 했다. 외환위기를 빌미로 노동은 유연할수록 좋은 것이라 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지금껏 파주공장의 정규직 생산직 수는 0명이다.
등촌동 공장에서 일한 사람들은 노후한 설비와 함께 안산으로 보내졌다. 그곳에 작은 사업장이 있었다. 이들에게 보이지 않는 미래가 보이는 순간이었다. 당시에는 그네들도 몰랐을, 이십 년이나 지속될 시그네틱스 싸움은 그렇게 시작됐다.
안산공장 이전에 반대하여 파업에 참가한 이들을 회사가 징계해고한 것이 시작이었다. 이때부터 ‘가자! 파주로’가 이들의 구호가 됐다.
▲ 비 오는 날에도 멈추지 않는 시그네틱스 수요 선전전. ©민주노총 금속노조 시그네틱스분회 |
해고무효 판결이 나도, 밀어내고 또 밀어내는 회사
가만 생각해보면 납득이 안 된다. 그 자신들도 이해가 되지 않는지, 초면이었을 당시 나를 붙들고 물었다.
“세 번이나 해고를 시키는 회사가 있어요?”
이제는 네 번이나 해고시키는 회사다. 하지만 내가 납득할 수 없던 것은 세 차례 해고 통보를 하는 회사가 아니었다. 그런 회사를 내버려두는 이 사회였다.
증거가 너무 뚜렷해 부당해고 판결을 내릴 수밖에 없던 판사마저도 법정에서 이들에게 물었다.
“여러분이 파주로 가면 시그네틱스가 곤란해지지 않겠습니까?”
기업의 곤란을 묻는 세상이다. 재계 30위권 기업과 그 계열사의 어려움을 묻는다. 조합원들은 영풍이 돈을 믿고 자신들을 거듭 해고한다고 했지만, 어쩌면 영풍이 믿는 것은 자신들에게 관대한 세상일 것이다.
남의 돈 몇 푼을 훔치는 일도 반복되면 가중처벌을 받는데, 타인의 생계와 자부심을 부당하게 빼앗는 일은 몇 번을 반복해도 처벌조차 받지 않는다. 기업의 책임은 오로지 ‘복직’에 그친다. 그마저 제대로 이행하지 않아도 제재를 받지 않는 사회다.
시그네틱스 노동자들은 세 번째 복직 이후 1년가량 휴업 상태로 머물렀다. 회사는 패소해 이들을 복직시키긴 했으나 출근시키지 않았다. 휴업이라며 집에 머물라 했다. 이번에도 법정 다툼 끝에 겨우 회사에 갔더니 빈 책상 하나 주고 대기발령이다. 이런 행위에 제재가 없다. 법 위반을 가리려면 지방노동위원회, 중앙노동위원회를 거쳐 행정소송까지 지루한 공방을 다시 해야 한다.
그럼에도 이 도돌임표 같은 일을 20년간 반복할 수 있던 이유는, 노동조합 소속으로 뭉쳐 있었기 때문이다. 회사 역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노조 조합원들을 향한 해고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안산공장에서 일하던 이 중 노조에 가입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모두 떠났다. 사내하청(소사장제)으로 옮길 것을 요구받아 옮겼지만, 이후에는 그 하청업체마저 사라졌다. 시그네틱스를 통틀어 정규직 생산직은 노조 조합원 9명뿐이다.
이들은 회사가 그토록 싫어하는 것을 지켜냈다.
“영풍 너희, 정규직 싫어하고 노동조합 싫어하지. 그런데 우리는 너희가 들어오기 전부터 정규직이었고, 노동조합이 있었어.”
언제나 이렇게 굳센 것은 아니다. 20년을 뭉쳐 싸운 사람도 문득 돌아서면 이런 말을 했다.
“세 번이나 해고된 것 어떻게 보면 한심해.”
한심해지는 기분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이겨본 경험으로 버틴다. 이들은 세 차례나 복직에 ‘승리’한 사람들이다. 물론 승리해도 기다리는 것은 빈 책상뿐이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지켜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내모는 대로 내몰리지 않는 자기 자신. 그것은 자신의 존엄이었다.
언론의 카메라가 비껴가는 자리에 선 중장년 여성노동자들
네 번째 해고를 앞둔 이들은 겉으로 보기엔 덤덤하다. 하던 일을 계속한다. 어김없이 수요일이면 선전전을 나온다. 이것은 이들의 고집이다. 이 고집을 지키기 위해 무수하게 했을 다짐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면서도 선전전에 간간이 얼굴을 비춘다. 고작 그거라도 하는 이유는, 연대 의식이나 동시대인의 책임감 같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그저 얄미워서다. 한 쪽이 빛을 독차지하고 있는 모습이 그리 얄미울 수가 없다.
▲ 눈발이 휘날리는 강추위에도 광화문 거리에서 선전전을 벌이고 있는 시그네틱스 노동자의 모습. ©민주노총 금속노조 시그네틱스분회 |
이날 해고 소식을 전한 분회장은 내가 오는 바람에 다섯 명을 넘겼다며 피켓을 들고 건널목 저편으로 사라졌다. 코로나19 시기라 다들 멀찍이 거리를 두고 섰다. 눈발까지 날리니 저 멀리는 사람 선 흔적만 보였다. 원래 이곳 선전전 장소가 어둑하다. 그늘졌다고 해야 할까. 맞은편 광고판은 크고도 밝고, 뒤편 면세점 빌딩은 말할 것도 없다. 네온사인 불빛이 밝다 못해 주변 빛을 빨아들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여기만 이토록 그늘질 수가.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빠르게 점화하는 빛을 봤다. 한 해를 통틀어 가장 눈이 많이 내린 날이었다. 이곳은 언론사들이 밀집된 광화문 거리. 카메라 불빛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터졌다. 언론사 기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카메라를 들고 거리에 나와 서성였다. 눈길을 걷는 행인들을 찍기 위해서였다. 한 꼬마가 소리 내어 웃으면서 하얀 눈을 밟으며 뛰어가자 카메라를 든 기자들이 분주해진다. 다른 카메라는 추위에 어깨를 맞대고 종종거리는 젊은 여성들을 찍었다. 흰 눈과 함께 언론사 카메라에 담길 수 있는 건, 어린아이와 젊은 여성의 모습 뿐이었다.
우리는 카메라로부터 열 발자국 떨어져 있었다. 이쪽에는 스무 해 싸움에 어느덧 중장년 나이가 된 여성들이 서 있었다. 카메라 렌즈는 한 차례도 우리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날 우리는 있었으나 없었다. “이 작업복의 비밀을 알아요? 이 옷을 입으면 우리는 투명인간이 돼요.” 영화 <빵과 장미>(켄 로치, 2000)의 유명한 대사. 피켓을 든다는 것은 그런 시선에 익숙해지는 일이다. 카메라 후레시와 전광판 불빛, 면세점의 네온사인 등 광화문의 모든 불빛이 여기 이곳에 선 사람들을 비껴갔다.
끝나지 않은, 4번째 복직을 위한 싸움
빛이 없어 더 춥다. 하지만 이날 내겐 분회장이 매준 목도리가 있었다. 괜찮다고 거절했지만 기어코 목에 둘러주고 갔다. 선전전을 가면 사람들에게서 장갑이나 목도리를 넘겨받는 일이 종종 있다. 핫팩이라도 준다. 미안한 마음에 춥지 않다고 호기롭게 말해보지만, 한 자리에서 바람을 맞는 일은 거리를 행보할 때와 체감 온도가 다르다.
한두 시간, 또는 하루 이틀, 아니 몇 날 며칠을 내가 오기 전부터 거리에 섰던 이들이 있다. 자신이 춥기에 나의 추위를 염려한다. 안 받는다고 손사래를 치던 나도 십 분이 지나면 그들이 건넨 방한물품 덕분에 나머지 50분을 버틸 수 있음을 안다. 이곳에는 빛은 없으나 온기가 있다.
선전전은 한 시간을 채우지 못했다. 끝나려면 10분이 남은 시간, 저쪽에서 선전전을 하던 조합원들이 왔다. 참가 인원이 유달리 적었던 것이 아니다. 간격 유지를 위해 멀리 자리를 옮긴 것뿐이었다.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사람들이 말했다.
“그만해. 그만해.”
“시간 다 됐어요?”
“오늘 같은 날엔 10분 정도 일찍 끝내야지.”
“분회장은 지금도 하고 있지?”
“독하다. 관리자보다 더 독해.”
사람들이 웃는다. 선전전을 시작하기 전, 연락도 없이 간만에 나타난 나를 보고 분회장은 물었다.
“오늘같은 한파에 선전전 취소됐으면 어쩌려고 연락도 없이 왔어요?”
나는 멈칫했는데, 분회장은 왜 당황하는지 알겠다는 듯 말했다.
“우리 안 할 거로 생각해 본 적 없죠?”
그랬다. 이들이 네 번째 해고를 당하더라도 싸우는 일을 멈출 것이라 생각해 본 적 없다. 묘하고 지독한 고집. 그들을 지탱시키는 이겨본 사람의 자부심. 동시에 싸우며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부채감.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할 이유로 또 한 번 복직을 노릴 것이다. 왜냐하면 끝이 나지 않았으니까.
한 이가 그랬다.
“언제가 끝이냐고? 내가 끝이 나야 끝인 거지.”
끝이 나지 않았기에 거리에 서야 하는 날이 남았다. 그들이 건네준 온기로 인해 내가 거리에서 몇십 분을 견딜 수 있던 것처럼, 나 또한 그들의 남은 시간을 버틸만한 것으로 만들어줄 온기를 건네고 싶다. 하지만 내가 가진 것 중 따스함이라고는 글쓰는 노동밖에 없다. 이것은 이들의 네 번째 해고(2021년 2월 1일)를 알리는 글이자, 내가 건네는 아주 작은 온기다.
<희정. 기록노동자. 싸우고 견뎌내고 살아가는 일을 기록한다. 『노동자 쓰러지다』, 『퀴어는 당신 옆에서 일하고 있다』 등을 썼고 올해 [회사가 사라졌다』(공저)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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