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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페미니즘] 진보성향 정치인들의 성폭력 사건을 목도하며

페미니즘 교육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요청이 증대하고 있는 시대, 페미니즘 교육의 개념과 의제, 실천의 역사와 현재성을 탐색하고 발전적 방향을 모색한다. “이제는 페미니즘” 연재 필진은 젠더교육연구소 이제IGE 연구원들이다. 이제IGE는 페미니즘 교육에 관한 연구와 실천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여성학 연구자 집단이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여성에 대한 폭력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를 때마다 페미니즘은 개인의 의식 변화와 젠더 구조에 대한 성찰, 성평등 문화 확산과 같은 다양한 민주주의 실현 과제들을 제시해왔다. 특히 의식을 개선하기 위한 교육은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평등하고 민주적인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주요 대안 중 하나로 인식되었다.

 

학교와 모든 공공기관에서 매년 실시하는 4대폭력 예방교육(성희롱·성매매·가정폭력·성폭력 예방교육)의 법정 의무화, 일선 학교에서 7차 교육과정부터 추진되고 있는 양성평등 교육과 공무원 대상 성인지 교육 확대 등은 모두 페미니즘이 이뤄낸 중요한 제도적 성과이다.

 

하지만, 교육을 통해 개인의 의식 변화와 구조에 대한 성찰을 이끌어내겠다는 전략은 박원순 전 시장의 성추행 사건과 정의당 전 대표의 성추행 사건을 겪으며 ‘앎’이 필연적으로 민주주의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모순적 진실 앞에서 길을 잃었다.

 

현장의 교육자들은 민주시민 교육으로써 폭력 예방교육과 성평등 교육이 과연 그 역할을 다 하고 있었는지 의심과 혼란에 빠졌다. 장혜영 의원은 “그토록 그럴듯한 삶을 살아가는 수많은 남성들조차 왜 번번이 눈앞의 여성을 자신과 동등하게 존엄한 존재로 대하는 것에 이토록 처참히 실패하는가. 성폭력을 저지르는 남성들은 대체 어떻게 해야 여성들이 자신과 동등하게 존중받아야 마땅한 존재라는 점을 학습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통탄의 입장문을 발표하였다.

 

지난 20여 년간 평등과 민주주의를 목표로 젠더폭력 예방교육이 의무적으로 수행되어왔지만 왜, 여전히, ‘그럴듯한 삶을 살아가는 남성들조차’ 일련의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가 되고, 우리는 집단적 2차 피해가 조장되는 것을 목도해야 하는 것일까? ‘페미니즘 교육의 제도화’ 성과로 이야기되는 폭력 예방교육에 대한 분석과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젠더 위계’는 빼고 ‘폭력’만 강조하는 젠더폭력 예방교육

 

페미니즘은 젠더 위계화된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이 성에 있어서 같은 권리와 욕망을 가질 수 없음을 분석하고, 섹슈얼리티의 위계에 의해 발생하는 다양한 폭력을 ‘성폭력’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섹슈얼리티 그 자체에 대한 폭력뿐만 아니라, 젠더에 기반해서 발생하는 많은 폭력이 성폭력의 범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성폭력 개념은 법·제도화 과정을 거치면서 페미니즘의 지적 계보를 계승하기보다, 강간과 강제추행을 주 골자로 하는 범죄행위로 그 범위가 축소되어 사용되고 있다. 이렇게 성폭력을 섹슈얼리티 위계 구조에 의한 폭력이 아닌 법률적 의미로 축소하는 흐름은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다양한 교육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성희롱, 성폭력 예방교육은 정책용어로 ‘폭력 예방교육’으로 명명되고 있다. 여성에 대한 폭력이 발생했을 때 젠더, 섹슈얼리티의 권력 관계를 성찰하기보다 폭력에 방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 보니 교육 내용도 성평등 실현보다는 범죄 예방교육에 가깝다. 기관의 교육 담당자들도 강의 의뢰를 하면서 “사례를 중심으로, 얼마나 강하게 처벌되는지 콕 찍어 알려주세요”라고 폭력 예방교육 강사들에게 당부하는 것을 왕왕 볼 수 있다.

 

성폭력 예방교육에서 페미니즘의 지식과 관점이 희석되고 성폭력을 한 개인의 일탈적 범죄행위로 좁혀가다 보면, 피해자/가해자 대립 구도에 기반한 범죄예방 교육으로 수렴될 수밖에 없다. 지금의 폭력 예방교육은 성별, 권력, 연령 등의 차이를 가진 존재들이 어떻게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성찰하게 할 것인가를 논의하기보다 피해자가 되지 않는 법, 가해자가 되지 않는 법을 가르치며 잠재적 피해자/잠재적 가해자라는 불안하고 불쾌한 이분법적 구도를 양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이는 결국 ‘펜스 룰’(fence-rule, 성폭력 가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여성과 대면하지 않겠다는 것)이 부상하게 되는 토대이기도 하다. 

 

▲ 2019년 여성가족부,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제작 “일상 속의 성희롱 예방 O, X”(고위직·중간관리자 용) 중에서


때로는 페미니스트 교육자들조차도 성적 욕망을 가진 주체들이 어떤 위계와 권력 구조 속에서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이야기하기보다 ‘노 민스 노(no, means no), 예스 민스 예스(yes, means yes)’, ‘직장 내에서 나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과는 그 어떤 성적 친밀감도 나누지 말라’는 등의 몇 가지 ‘모범답안’을 기계적으로 외울 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권력’에 내재된 속성은 명백히 ‘no’를 말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no’를 말할 수 없게 만드는 힘이 아니었던가. 또한 성적 욕망을 ‘yes’로 표현하는 여성들을 우리 사회가 어떻게 낙인찍는지도 잘 보아오지 않았는가. 한편으로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의 영역이 아닌 권리의 영역으로 이해한다면, 여성 역시 누군가와 성적 친밀감을 나눌 수 있는 주체라는 것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질문은 폭력 예방교육이 성과 폭력을 동일선상에 놓고 ‘모범답안’을 정해놓은 계몽적 교육에서 벗어나야 함을 시사한다. 페미니즘 교육은 위계적인 젠더, 섹슈얼리티의 권력 구조에 대한 성찰을 가능케 하는 교육으로 변모해야 한다.

 

‘노동환경’은 빠지고 ‘행위’만 남는 성희롱 예방교육

 

성폭력 행위가 직장 혹은 학교에서 발생했을 때,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를 넘어서 피해자의 고용조건이나 교육환경에 악영향을 미쳐 노동권, 학습권 등이 침해될 수 있기 때문에 직장 내에서 발생한 성폭력에 대해 ‘직장 내 성희롱’이라는 별도의 법·제도를 두고 있다. 직장과 학교 등에서 특정한 성적 언동을 통해 근로자의 근무환경을 불편하게 만들고, 업무 성과에 영향을 미치는 적대적 환경을 조성하는 성차별적 행위들을 성희롱으로 규제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직장에서 해마다 시행되는 성희롱 예방교육에서 성희롱은 ‘노동권을 침해하는 적대적 환경 조성’으로 이해되기보다 성적 불쾌감, 굴욕감을 느끼게 하는 섹슈얼리티 그 자체에 기반한 말과 행동(성적 언동)들로 구체적으로 분리하여 설명된다.

 

특히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지원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 제2조, 별표에서 성적인 언동의 예시가 무엇인지 아래와 같이 제시하고 있는데, 성희롱 예방교육이 의무화된 지난 20여 년 동안 이 구체적인 성적 언동들을 삽화까지 넣어서 성희롱 사례로 소개하고 있었다. 사실 이 예시는 성희롱 사건이 발생했을 때 법적 잣대로 엄격하게 판단해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 예를 들어 기관의 성희롱 고충처리위원회에서 참조하면 되는 것들이다.

 

▲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지원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 제2조, 별표. 성적인 언동의 예시가 무엇인지 제시하고 있다.


구체적 범죄행위 사례를 제시하는 이러한 교육은 다시 성희롱 가해자/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한 세세한 행동지침을 필연적으로 수반할 수밖에 없다. 미투 운동이 확산되자, 한 유력 일간지에서는 일상에서 벌어질 수 있는 성폭력 논란을 정리해준다면서 “대화 중 특정 신체 부위를 수 초간 쳐다본다(성폭력 ○), 대화 중 특정 신체 부위를 스치듯 봤다(성폭력 ×), 회식 때 근처 이성 직원에게도 술 따르게 한다(성폭력 ×), 회식 때 이성 직원만 골라 술을 따르게 한다(성폭력 ○)” 이러한 웃지 못할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기도 했다.(男 "성범죄 기준 마련해달라"… 女 "펜스룰은 부당". 조선일보 2018.03.14. 기사)

 

성희롱 예방교육이 끝나고 나면, 직장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런 것도 성희롱이야?”라는 조롱과 불쾌를 드러내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성희롱이 어떤 위계질서 속에서, 어떤 노동자의 근무환경을, 어떻게 적대적으로 만들고 있는지에 대해 들여다보지 못하는 것이다. 여성을 함께 일하는 동료이자 시민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성적대상’ 그 자체로만 환원하는 것은 성희롱이 발생하는 원인이자, 지금의 성희롱 예방교육 내용과도 무관하지 않다.

 

박원순 전 시장 피해자 측 대리인이 기자회견에서 ‘피해 사실을 4년간 20여 명의 관계자에게 호소했지만 모두 회피했다’라고 밝혔을 때,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어떤 노동자에게는 직장이 성적 괴롭힘에 노출될 수 있는 적대적인 노동환경일 수 있었겠구나,’ ‘어떤 노동환경에서는 성희롱 피해를 호소하는 것이 거대한 권력 앞에서 무기력해질 수 있었겠구나’ 등 조직의 성차별적 요소가 무엇인지 점검하는 데에서 논의를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현실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범죄를 당했는지를 전 국민 앞에서 실토하라’거나, ‘우리도 무엇이 성추행이고 어떤 행위가 성희롱에 해당되는지 안 되는지는 배울 만큼 배워서 안다’는 식으로 피해자를 비방하는 외침만 가득했다. 그 이유도 지금의 성희롱 예방교육 내용과 깊은 연관이 있다.

 

정의당 전 대표의 성추행 사건이 공론화됐을 때, 피해 사실을 구체적으로 밝히라는 당 안팎의 목소리가 제기된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성희롱 예방교육이 법제화된 지난 20여 년 동안, 우리 사회는 시민의 권리와 책무를 배우기보다 시민 모두를 관전자, 판결자로 훈련시키는 교육을 받아온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결국 우리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성희롱·성폭력이 발생하는 조직의 성차별적 구조를 점검하는 과제를 반복적으로 실패하고 있다. 피해자에게 어떤 피해를 당했는지 실토하라고 종용하고, 각자 자기만의 잣대로 피해의 경중을 따져서 ‘그런 것도 성희롱이야? 겨우 그 정도로 한 가정의 가장을 무너뜨린 거야?’와 같은 비난을 하거나, 혹은 가해자에 대한 엄벌을 요구하는 목소리만이 조직 안팎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할 뿐이다.

 

성희롱·성폭력 예방교육을 통해 배워야 할 것은 단순히 어떤 성적 언행들이 성희롱 요건에 해당하는지를 판별할 능력이 아니라, 조직의 젠더 위계적 구조와 실천을 함께 돌아보고, 동료 시민의 권리를 존중하면서 나의 인권이 침해되지 않도록 조직 내에서 우리는 어떤 시민적 태도를 취할 것인가이어야 한다.

 

성희롱이 ‘지위 권력’만의 문제인가?

 

이처럼 폭력 예방교육에 사법적 개념과 판단이 지배하면서, 교육을 통해 젠더 규범과 젠더 권력 관계에 대한 성찰을 돕고자 한 페미니즘 교육의 취지는 무색해지고 있다.

 

물론 폭력 예방교육에서 권력구조를 전혀 다루지 않는 것은 아니다. 특히 성희롱이 조직 내 ‘권력(power)’ 문제라는 것을 명확히 짚고 있다. 문제는 젠더 폭력의 한 형태인 성희롱을 ‘젠더 권력’의 문제가 아닌 ‘지위 권력’의 문제로만 한정짓고 있다는 데 있다. 여성가족부 표준강의안에서 성희롱을 성별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아닌 업무, 고용, 지위 관계를 이용한 ‘권력’의 문제라고 설명하는 것이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이다.

 

▲ 여성가족부 2013년도 성희롱예방교육 표준강의안 「직장 내 성희롱 예방교육」 중에서


성희롱을 지위 권력의 문제로 한정짓다 보면, 지위 권력이 낮은 사람에 의한 젠더 폭력, 예를 들어 여교사에 대한 남중생의 집단 자위행위는 성희롱도 성폭력도 아닌 ‘교권 실추’의 문제로 해석되어 버린다. 조직의 젠더 구조와 권력을 보지 못하면, 소위 ‘대한민국 최고의 권력자’인 국회의원마저도 성폭력의 피해자가 되는 현실을 설명하기 힘들어진다.

 

50대, 60대 이상의 남성들에게 권력이 집중되어있는 정치권의 젠더 권력과, 시민적 주체들을 여성과 남성으로 끊임없이 분리하고 위계화하는 젠더 시스템이 국회에서 어떻게 수행되고 있는지를 분석하지 못하면 ‘국회의원마저도’라는 탄식과 ‘그럴듯한 삶을 살아가는 남성조차도’라는 실망에서 멈추게 될 것이다.

 

젠더는 계급, 인종 등 다른 사회 위계와 상호교차하며 구조적 불평등을 낳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 곳곳에 만연한 성차별과 젠더 폭력을 예방하는 교육을 하면서 젠더 위계가 간과되는 것은, 현재 폭력 예방교육이 얼마나 큰 한계를 내재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페미니즘 지식과 관점에 기반한 폭력 예방교육은…

 

안타깝게도 폭력 예방교육은 점점 특정 성에 대한 편견을 버리라는 개인적 차원의 인식 개선이나 피해자 되지 않기, 가해자 되지 않기, 주변인의 역할 등 개인적 차원의 실천을 강조하며 신자유주의적 주체들을 양성하는데 일조하기 시작했다. 이는 성적 차이를 통해 차별과 불평등이 만들어진 역사와 구조를 보지 못하게 만들고 젠더가 탈각된, 성별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로운 ‘나’가 가능하다고 상상하게 한다. ‘가해자 되지 않기, 피해자 되지 않기’를 가르침과 동시에, 가해와 피해의 책임을 오롯이 개인이 질 수 있는 적극적인 주체가 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관련 기사: 성평등은 찬성하는데 페미니즘은 반대한다? 참조)

 

하지만 페미니즘이 추구하는 민주주의 사회는 젠더가 탈각된, 자유롭고 책임 있는 개인이 아니라 젠더, 계급, 계층, 나이 등 다양한 차이를 가진 개인들이 서로 협력하고 상호 돌보는 공적 시민성에 기대 작동하는 것이다.

 

페미니즘 지식과 관점에 기반한 폭력 예방교육은 젠더 위계 구조를 바탕으로 구성된 여성성과 남성성의 차이가 공사 영역에서 어떤 차별과 폭력을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있는지를 성찰하도록 도와야 한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길거리에서, 친밀한 관계에서도 시민적 주체로서 개인들이 누려야 할 권리와 자유가 침해당하지 않으면서, 차이를 가진 존재들이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며 어떻게 민주적 관계를 함께 만들어나갈 것인가를 상상할 수 있도록 돕는 것. 이것이 평등하고 민주적인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페미니즘이 제안한 폭력 예방교육의 상(像)이다.

 

필자 소개: 최기자. 젠더교육연구소 이제IGE 부소장이며, 전 서울대학교 인권센터 인권교육부 전문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폭력 예방교육 전문강사, 다수의 공동체 내 성희롱·성폭력 사건 조사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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