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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신지예 대표 인터뷰
‘누구에게나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진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원칙이지만, 우리 사회는 누군가에겐 뛰어넘기 힘든 유리천장과 장벽이 견고하다. 특히 정치권이 그렇다. 2030 여성이 국회의원, 시장, 도지사 등 정치인이 될 수 있다는 걸 상상 너머 현실로 확인할 수 있게 된 건 정말 최근의 일이다.
2018년 6.13 지방선거 당시 녹색당 소속으로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했던 신지예 씨는 그 상상 너머의 길을 여는 길목에 있는 사람이었다. 사실 길목에 서 있기만 한 게 아니었다. 2020년 3월 열린 21대 총선엔 무소속으로 서대문구 갑에 출마했고, 현재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를 설립해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늘 앞장서서 걷는 사람이다.
▲ 2020년 9월 28일, 서울시청 앞에서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신지예 대표가 ‘박원순 성폭력 사건 대응 관련 서울시 공개질의서 제출’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
전 녹색당 당직자에 의한 성폭력 사건을 겪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성폭력 피해자는 무력할 것이라는 ‘피해자다움’의 통념을 깨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앞으로 나아가길 멈추지 않았다. 그의 그런 모습은 많은 성폭력 피해생존자에게 용기를 주는 발걸음이 아닐 수 없다.
신지예 대표가 무작정 혼자 걸어나간 건 아니다. 페미니스트 시장이 되겠다고 공언했던 서울시장 후보 시절부터 여성과 사회적 소수자의 인권 사안이 있을 때면 연대의 목소리를 냈다. 지금도 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 위력 성폭력 사건 피해자와 연대하며, 이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관련된 이들이 자신의 잘못에 대해 책임지도록 다양한 활동을 펴고 있다.
그런 신지예 대표를 만나, 전 녹색당 당직자 성폭력 사건 1심 판결에 관한 이야기부터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가 만들어진 과정과 목표, 4월 열릴 재보궐선거에 대한 생각까지. 정치인 신지예의 비전을 들어보았다.
성폭력 피해자가 일을 못한다면, 대한민국은 굴러가지 않을 것
지난 1월 22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전 녹색당 당직자 성폭력 사건에 대한 판결이 나왔다. 검찰이 구형한 징역 7년엔 훨씬 못 미치는 3년 6개월형이었다. 준강간치상 혐의로 피소된 가해자는 “상해를 입히지 않았다”는 주장을 펼쳤고, 재판부는 치상이 있었다는 걸 인정했지만 ‘상해가 미비하며, 가해자가 반성하고 있다는 점’ 등을 이유로 구형보다 낮은 형량의 판결을 내렸다.
이번 판결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묻자, 신지예 대표는 단칼에 “(의미가) 없다”고 했다. 그는 “재판정에 있었던 사람들 말이, 판사가 ‘치상은 인정하지만 상해가 미비하고 가해자가 반성하고 있다. 그리고 피해자가 바로 일을 시작했다’는 점 등을 이야기했다고 하더라”며 “그게 작량감경(정상 참작할 만한 사유가 있는 때에는 작량하여 그 형을 감경할 수 있다는 의미) 사유인 것 같다”고 했다.
피해자가 바로 일을 시작했다는 점이 법정에서 언급되었다는 건, 성폭력 생존자가 사건 이후 ‘아무 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일을 하지 못할 것이다’ 등의 ‘피해자다움’의 통념이 작동했다는 의미다. 신지예 대표는 재판 과정에서 가해자 측 변호인 또한 그 점을 파고들었다고 했다.
“제가 (성폭력 사건 이후) 총선에 출마한 것, 이후 인터뷰 등에서 어떤 이야기를 했고 어떤 걸SNS를 올렸고…. 그런 걸 다 캡처해왔더라고요. 웃고 있는 사진을 포함해서요. 그러면서 성폭력을 당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냐고 물어봤어요.”
▲ 1월 22일 부산지방법원 앞에서 열린 ‘녹색당 전 당직자 준강간치상 1심 판결 기자회견’은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를 비롯해 반성폭력운동단체들이 함께 진행했다.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
신 대표는 성폭력 피해여성들에게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면서도, 그 여성들의 노동에 기대고 있는 사회를 꼬집었다.
“사실 먹고 살려면 어쩔 수가 없었어요. 일해야죠. 개인차가 물론 있겠지만, 성폭력 사건을 겪은 이후 여성들이 다 그것 때문에 일을 중단해야 한다면 대한민국이 굴러갈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매번 성폭력 사건 때마다 여성들이 쓰러지지 않고, 오히려 버티고 살아남았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이렇게 굴러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피해여성이 일을 지속한다는 의미를 ‘괜찮다’는 걸로 해석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성폭력 사건 이후에 일을 한다고 해서, 그 사건을 잊을 수 있다거나 뛰어넘을 수 있다는 건 아니”라는 거다.
“(피해여성들은) 다들 죽을 듯이 아팠고 힘들지만,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중일 거에요. 그러니까 (피해여성이) 일을 하거나 평소처럼 행동한다고 해서 피해가 별 거 아니거나, 미비하다고 치부해선 안된다고 생각해요.”
가부장 정치가 못한 다원민주주의, 여성정치가 구현할 것
신지예 씨는 본인이 겪은 성폭력 사건 외에도, 연이어 고발되고 있는 정치계 성폭력 사안에 앞장서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작년 발족한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활동도 그 연장선에 있다.
“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 위력 성폭력 사건이 일어난 직후 만들어졌어요. 당시 저랑 활동을 같이 하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사람들과 긴급하게 회의를 열고 어떻게 대처해야 하냐 논의했죠.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이후 오거돈 전 부산시장, 박원순 전 서울시장까지. 이런 정치계 성폭력에 대응하고, 여성들이 정치를 바꾸기 위해 모이는 그릇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여성정치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네트워킹을 할 수 있는 그룹이요.”
▲ 1월 15일 서울시청 앞에서 열린 ‘박원순 전 서울시장 업무폰 명의변경 및 인계 사태 긴급 기자회견’에서 신지예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대표의 모습.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
그렇게 만들어진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이름에 ‘여성정치’와 ‘네트워크’가 들어간다는 점이 흥미롭다. 신 대표는 “그동안 민주주의가 만인의 평등을 위한다고 했지만 여성을 이등시민으로 취급해 왔다는 점에서, 여성정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여성이 남성과 같은 인간으로 취급되지 못했던 오랜 역사가 있고, 그건 정치에서도 마찬가지죠. 어쩌면 정치 영역에서 여성들이 권리를 보장받는 일이 가장 늦는 것 같아요. 성평등 정치를 말하지만 세계적으로 여남동수 의회가 만들어진 나라는 얼마 없죠. 성평등 지수가 높다고 하는 북유럽조차도요. 한국도 이번 국회가 여성 비율이 가장 높다(19%)지만 20%가 안 되잖아요? 그래서 더욱 여성정치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여성정치가 필요한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다. 남성정치/가부장정치의 한계가 명확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가부장정치는 ‘정상성’이 인정되는 정체성에 한정된 정치. 엘리트들, 남성들, 노동자 중에서도 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한 정치”라고 꼬집은 신 대표는 “여성정치는 가부장정치가 포섭하지 못하고 대변하지 못한 이들을 대변할 수 있는 정치”라고 설명했다.
“여성정치는 여성들이 권한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 것뿐만 아니라 이 시대에 대변되지 못하는 사람들과 아젠다를 알리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 신지예 대표는 ‘여성들이여 힘/권력을 가지자’는 말에 이어나오곤 하는, 일명 “파이론(내 파이/몫을 지키자는 주장)을 조심해야 할 필요성”을 언급했다.
“사실 이 파이론은 청년운동에서도 많이 보여졌던 거였어요. 예를 들어, 청년 주택과 관련해서 신혼부부의 10% 할당 중에 1인가구에 대한 할당율을 얼마 달라는 요청이 있었거든요. 파이 전체를 넓히는 게 아니라, 저들이 가지고 있는 파이 중 일부를 나에게 달라는 운동 방식은 그 때도 논란이 되었어요. 기득권이 제한해놓은 파이의 총량을 키우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 총량 중에 다른 정체성을 지닌 사람이 가지고 있는 걸 내가 얼마나 가져올 수 있을 것이냐 논하는 일이 우리 세대 운동의 한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전 오히려 지금 당장 나의 이득이 없어 보여도 나와 함께 하는 이들의 범위를 넓혀나가는 전략을 펴면서 전체 판을 바꾸는, 혁명을 일으키는 방법을 택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신 대표는 왜 ‘내 파이’를 외치게 되었는지, 지금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청년/여성들의 고충을 잘 알고 있다. “각자도생 사회로 넘어온 지 너무 오래되었고, 어렸을 때 IMF를 겪은 세대이기 때문에 지금 20대, 30대들은 너무 열심히 살아요. 어떻게 저렇게 살까 싶을 정도로 벼랑 끝을 계속 걸으면서, 그런 기분으로 살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의자 뺏기 싸움에서 지면 자신의 의자가 없어지니까, 지금 당장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내 파이를 뺏기지 않는 게 중요하게 여겨지는 거죠.”
하지만 만약 여성운동이 내 파이를 외치면서 다른 정체성을 가진 존재들을 배제하고 차별한다면 “‘이남자’(20대남성)들의 감각, ‘나도 지금 일자리 못구하고 데이트도 못하는데, 날 자꾸 가해자 취급한다’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게 된다”고 지적했다.
“교차하고 있는 정체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권력이 유동적으로 각자의 서 있는 위치마다 다르게 작동한다는 걸 인지하지 못한 채 자신의 피해만 호소하게 되면, 연대의 가능성은 무너지게 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건 연대의식과 이해의 감각이라고 생각해요.”
“우리의 적은 가부장”이라고 강조한 신지예 대표는 “가부장정치가 지금까지 민주주의를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다면, 여성정치는 다양성을 인정하며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재보궐선거를 ‘미투선거’로 만들자
지난 15일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가 공동주최한 <2021 미투선거 시국회의>는 신지예 대표가 언급한 ‘다양성’이 돋보이는 자리였다. 시국회의를 제안한 11명의 여성들은 각기 다른 분야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다.
▲ 1월 15일 온라인으로 열린 “2021 미투선거 시국회의” 모습. 시국회의를 제안한 사람들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여성들을 한 화면에서 보는 게 감동적이었다”고 한 신지예 대표는 “재보궐선거가 코 앞이라 시간이 없지만, 뭔가 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모였다”고 했다.
더불어민주당은 당헌(민주당 소속 공직자의 중대한 잘못으로 재재보궐 선거가 치러질 경우 후보를 추천하지 않는다)까지 개정하며 부산시, 서울시에서 모두 후보를 낼 계획이고, 국민의힘은 야당 단일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렇게 또 “양당정치가 강해지고 제3지대가 사라지는 것”에 우려를 표하며 신 대표는 “시국회의 때 시민연합후보를 내는 방안이 거론되었다”고 했다.
“페미니스트들이 깃발을 올리고 (지금 제3지대에 있는 사람들) 다 들어오라고 한 후, 시민연합후보를 내는거죠. 그리고 한 명의 후보자만 출마하는 게 아니라, 연정 시스템을 꾸려서 ‘시장-부시장’으로 두는 러닝메이트 제도를 해보자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 인터뷰 이후 열린 2월 10일 <미투선거 시국회의: 전략편>에선, 현재 한국정치가 허용하지 않더라도 기존의 틀에 갇히지 않는 새로운 정치 참여 방식이 논의되었다. ‘팀서울’이라는 러닝메이트 출마도 그 중 하나다.)
시간이 얼마 없다고 말하면서도 신 대표는 재보궐선거에서 페미니스트 깃발을 올려야 한다고 계속 이야기했다. 그건 “지금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지만 이들이 10년, 20년 뒤에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 지금부터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그의 말과 연결되어 있었다.
“지금 권력을 가진 386세대들은 대학 시절에 나라를 다시 세우자 이런 이야기를 했다 그러는데, 지금 대한민국 여성들이 그 일을 못해 낼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요. 헌법에 여성주의를 명시하고 여남동수 국회를 이끌어 내는 것, 못할 건 아니잖아요? 그런 가치를 지닌 권력을 창출하기 위해 지금 각자 무슨 역할을 할 것인지가 중요한 때인 것 같아요.”
그렇다면 그 과정에서 신지예 대표의 역할은 무엇일까? 재보궐선거 출마 생각이 있는지 묻자 그는 “의미가 있다면”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페미니스트의 이름으로 시민연합후보를 낼 수 있다면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확신할 수 없다고 하면서도 “성폭력 사건으로 이렇게 재보궐선거 할 줄 누가 알았겠어요? 한국정치는 내일을 모르는 것 같다”며 가능성을 열어놨다.
▲ 2월 10일 온라인으로 열린 “미투선거 시국회의: 전략편”에서, 신지예 대표는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서울시장 예비후보와 미래당 오태양 대표가 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을 언급하며 정치 행보를 펴는 것에 대해 비판했다. |
더 많은 청년여성들의 정치 참여를 위해 판을 깔 것
앞으로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그리고 신지예가 계획하는 미래는 무엇일까? 신 대표는 일단 “4월 재보궐선거에 어떤 방식으로든 개입하는 것”을 꼽았다. 그 이후엔 “다음 시방선거와 총선 때 더 많은 여성들의 출마시키고 정치세력화를 위해서 판을 만들 것”이라고 비전을 제시했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 건에 대해서도 빼놓지 않았다. “사건이 이렇게 끝나면 안 되거든요. 사람들이 ‘이 정도면 된 거 아니야?’라고 생각하지 못하도록, 아직 파헤치지 않은 일에 대해 목소리를 낼 거에요. 또한 이 사건에 대해 알고도 묵인했던 사람들이 그에 상응하는 징계를 받고 자신이 했던 잘못을 책임지게 해야죠.”
신지예 개인의 목표도 뚜렷했다. “먼저 (성폭력 사건 가해자가 항소했음) 항소에서 이겨야죠. 3년 6개월보다 형량을 더 받게 해야죠.”
“그리고 공부를 좀 더 많이 해야겠다고 생각해요. 이번에 재보궐선거에 출마하든지 다음에 등장하든지, 중요한 건 정책으로 승부를 봐야 한다는 거고, 새로운 관점으로 지금 한국 사회를 해석하고 해답을 찾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게 도전자의 어려움이기도 하고요. 페미니스트라고 밝힌 후보라고 여성인권만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페미니즘 관점으로 이 사회 전체의 문제를 재해석하고 해결하기 위한 방책을 내놔야 하니까요.”
정치인 신지예는 멈출 생각이 없고, 그를 멈추게 할 수 있는 것도 없어 보였다. 그가 도전자의 어려움을 어떻게 이겨낼지, 그리고 더 많은 청년 여성들과 한국의 여성정치를 위해 자신이 서 있는 길목을 얼마나 더 넓혀갈지 기대된다. (박주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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