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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페미니즘] ‘이루다’ 사태…젠더 관점의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 필요해
<기획의 글> 페미니즘 교육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요청이 증대하고 있는 시대, 페미니즘 교육의 개념과 의제, 실천의 역사와 현재성을 탐색하고 발전적 방향을 모색한다. “이제는 페미니즘” 연재 필진은 젠더교육연구소 이제IGE 연구원들이다. 이제IGE는 페미니즘 교육에 관한 연구와 실천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여성학 연구자 집단이다.
디지털화된 세상, 젠더화된 세상
변화는 생각보다 빨리 온다. 몇 년 전 홍콩의 유명 배우 저우룬파(주윤발)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지하철 승객들 모두 스마트폰을 보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자신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데 불편함이 없다고 농담조로 이야기한 적 있다. 넷플릭스의 CEO 헤이스팅스는 “우리의 경쟁상대는 인간의 수면시간”이라고 말했다.
한편, 실리콘밸리에서 인공지능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기업 투자와 인수가 활발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만 해도 국제뉴스에서나 볼 법한 일인 줄 알았던 AI가, 어느 날 불쑥 우리에게 찾아왔다. 그것도 모니터 뒤에서 바둑을 두는 얼굴 없는 프로그램이 아닌, 스무 살 여대생의 모습으로 말이다. 인공지능 스타트업 스캐터랩은 지난해 크리스마스 즈음 인공지능 챗봇 ‘이루다’를 출시했다. 이루다는 곧바로 개인정보 유출 논란과 이용자들의 성희롱 문제가 불거졌고, 동성애자와 장애인 혐오발언 등 소수자 차별 문제까지 제기되면서 출시한 지 24일 만에 서비스를 중단했다.
▲ 인공지능(AI) 스타트업 스캐터랩에서 출시한 대화형 AI 이루다. 개인정보 유출 논란과 이용자들의 성희롱에 관한 논쟁이 불거지며, 현재 서비스를 중단한 상태다. (출처: ‘이루다’ 페이스북 페이지) |
최근에는 미국의 스타트업 알파익스플로레이션의 쌍방향 오디오 기반 소셜미디어(SNS) ‘클럽하우스’가 연일 기사에 오르내리고 있다. PC통신 시대 이후 우리는 오랫동안 텍스트에 기반한 소통을 두고 ‘채팅(chatting)’이라고 불러왔는데, 이제는 정말 문자 그대로 ‘수다(chatting)’가 가능한 플랫폼이 등장한 것이다. SNS에 올릴 사진을 위해 일상을 세공해 온 우리는 이제 앞으로 어떤 소통방식과 생활 감각을 익히게 될까?
우리를 둘러싼 세계가 전면적으로 디지털화되어 가고 우리가 사용하는 거의 모든 시간이 디지털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으나 그 속도와 방향, 변화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잘 가늠이 안 된다. 무엇보다 디지털 세상이 바꿔낸 젠더 질서의 핵심이 무엇인지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이렇게 변화한 세상은 사실 일부러 의식하지 않는 한, 일상생활에서 잘 인식되지 않고 새삼 환기될 필요도 없는 당연한 문화적 전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AI 챗봇 ‘이루다’ 사태가 던진 화두는?
그래서일까? 우리의 일상과 가치관, 체험들이 디지털 기술로 인해 급진적으로 재구조화되는 과정에서 젠더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그리고 그 작용을 이해하도록 돕는 교육은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통합적 논의의 장은 좀처럼 개설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신 개별 사안들에 대한 즉각적 해석과 비평, 논란이 그 자리를 채우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이루다’ 성희롱 사태(일부 서비스 이용자들이 이루다에게 성적 대화를 건넨 다음 이루다와의 대화를 ‘성노예’, ‘걸레’ 등의 표현으로 희화화 한 사건)가 대표적이다. 디지털 기술이 문화적 장 안에서 구현해낸 젠더화된 몸의 의미, 이러한 사회적 의미 생산에 디지털 기술이 결합할 때 제기될 수 있는 논점 등은 좀 더 구체적으로 질문되지 못했다. 대신 인공지능에 ‘의한’ 또는 인공지능에 ‘대한’ 혐오표현이나 성폭력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잠깐의 갑론을박으로 마무리되고 말았다.
▲ 우리를 둘러싼 세계가 빠른 속도로 디지털화되어 가고 있다. (출처: pixabay) |
우리 사회에서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이 국가경쟁력 제고를 위한 필수적 교육이자 4차 산업혁명을 위한 전략으로 강조되며 그 위용을 뽐내고 있는 상황이지만, 사실 그 개념과 의미가 선명하게 제시된 것은 아니다.
또 디지털 리터러시가 도구적인 기술 활용 능력에서부터 새로운 디지털 공동체에 적합한 민주적 가치관을 함양하는 역량까지 포함하다 보니, 교육의 범위 역시 매우 넓다. 코딩 교육에서부터 디지털 미디어에서 생산되는 정보의 진실성 판단 능력 키우기, 디지털 시민성 교육에 이르기까지…. 이 틈바구니에서 젠더 관점의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이 제시해야 할 비전과 내용, 방향성에 대한 논의는 이제 막 시작 단계에 서 있다.
한국 사회가 보다 성평등하고 민주적인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에 동의한다면,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 또한 성평등한 사회를 지향하기 위해 필요한 내용들로 채워져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페미니즘 지식이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의 유용하고도 핵심적인 자원으로 설계되어야 하는 시점인 것이다.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은 어디서, 어떻게 이뤄지고 있나
‘리터러시’란 문해력, 문식력 등으로 번역된다. 기본적으로 ‘리터러시’란 서구 근대국가의 시민이 갖춰야 할 자질 중 하나였다(이병민, 2005). 근대 교육 제도가 탄생하면서 대중들은 일정 수준의 리터러시, 즉 문자화된 텍스트를 읽고 지식과 정보를 얻을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개인이 몸 담고 있는 영역에서 기능적 역할을 수행하도록 요구받았다. 리터러시를 갖춰야 자신의 이름도 쓰고 투표를 통해 참정권도 행사하고 경제활동도 할 수 있었다.
20세기 들어 라디오나 영화, TV와 같은 전자 미디어가 혁명적으로 발전하면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 이르러서 전자매체 발전의 다양한 형태가 더이상 ‘미디어’로만 분류하기 어려워지자 많은 학자들은 컴퓨터 리터러시, 디지털 리터러시, 인터넷 리터러시, 정보 리터러시, ICT리터러시, 데이터 리터러시 등의 개념들을 제시해왔다. 디지털 리터러시는 지금껏 다양하게 파생된 리터러시 개념들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는 동시에, 디지털화된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갖춰야 할 새로운 시민성의 개념까지도 자연스럽게 포함하게 되었다.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이 강조되는 것에 반해, 교육 주체와 규모, 내용과 수준은 불분명한 상황이다. (출처: pixabay) |
현재 우리 사회에서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을 수행하고 있는 교육 주체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나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옛 정보화진흥원)과 같은 정부 관련 기관과 일선 학교, 시민사회운동단체 및 민간단체 등을 꼽을 수 있다.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목소리는 날로 높아지는 것과 달리, 교육의 구심점이 되는 단위가 어디인지, 혹은 기관 간 협력 체계는 어떠한지 명확하지 않다. 다양한 기관과 정부 주무부처가 예산을 편성하고 관련 정책을 생산하다 보니, 현재 진행되고 있는 교육의 규모와 수준, 교육의 효과를 파악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각 교육시행 주체가 가진 교육의 비전과 역량, 관점, 교육 경험이 고르지 않아 똑같이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을 수행하더라도 교육을 주관하는 곳의 성격에 따라 매우 다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유튜브로 콘텐츠를 제작하는 방법이나 개인정보를 보호하는 법을 배울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온-오프라인 생활의 균형을 잡는 것의 중요성을 배울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디지털 정보화 접근성이 계층과 집단마다 상이하고 디지털 리터러시 개념이 광범위하다는 것을 감안할 때, 각 대상에 맞춰 세심하게 편성된 교육안을 적용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이 다소 산발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페미니즘 비평은 디지털 매체의 ‘재현’에만 국한되지 않아
디지털 리터러시에 대한 관심은 높아지고 있지만, 막상 교육 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는 커리큘럼은 한정적이다. 게다가 과거의 교육안에 기댈 수밖에 없다 보니, 현재 디지털 리터러시라는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는 교육의 많은 부분은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과 크게 구분되지 않는다.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의 패러다임은 젠더 관점에서의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 또는 페미니즘 교육의 일부로 진행되는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에서도 나타나는 점이다.
그동안 페미니스트 문화연구의 지적 전통 속에서 ‘미디어와 젠더’의 관계는 매우 중요한 문제로 다뤄져 왔다. 1970년대 이후 페미니스트 문화연구는 기념비적인 연구 성과를 축적해오면서, 미디어야말로 불평등한 젠더 권력을 강화하는 핵심적 기제임을 사회적으로 강하게 환기시켰다. 따라서 현재 부분적으로나마 수행되고 있는 젠더 관점에서의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에서는 미디어에서 성별고정관념을 강화하거나 여성을 문제적으로 재현하는 것을 비판해 온 페미니스트 미디어 비평의 자장 안에 걸쳐져 있다.
예를 들어 과거에는 드라마나 광고, 언론 보도 등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현재는 웹툰이나 유튜브, 게임 또는 AI로 매체를 옮겨와 여기에 드러나는 성차별적 표상과 ‘나쁜 재현’의 문제, 디지털 기술이 생산하는 성차별적 정보 등을 다루는 경우이다.
이러한 교육의 중요성과 효과가 과거보다 줄어들었다는 것은 아니다.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드러나는 재현의 문제를 비판하고 급진적으로 해석하는 작업은 당연히 필요하고 지속되어야 할 과제다. 하지만 사회구성원의 삶과 경험이 디지털 기술을 통해 예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조직되고 배열되고 젠더화되는 상황을 고려하기 위해서는 훨씬 정교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요청된다.
오늘날 젠더 문제의 핵심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디지털 매체가 제공하는 텍스트나 정보 양식의 안쪽을 살펴보는 작업뿐만 아니라, 텍스트 안과 밖을 통합적으로 사유하는 역량까지도 필요로 한다.
잠자리에서 스마트폰을 쥐고 이곳 저곳을 둘러보다가 잠결에 스마트폰을 얼굴에 떨어뜨린 경험은 누구나 한번쯤 있을 것이다. 젠더 관점의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은 우리가 수면시간마저 빼앗겨가며 꽁꽁 매여 있는 이 디지털 공동체를, 기술의 구조와 영향력 속에서 성찰하도록 도와야 하지 않을까. 또한 이 디지털 기술이 일상적 흐름 속에 젠더 질서를 드러내는 방식과 그 의미를 토론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하지 않을까? 이를 위해서 어떤 교육의 언어를 개발해야 할지 지혜를 모으는 작업이 필요하다.
‘디지털 시민성’ 논의에서 공백으로 남은 젠더
사실 가장 시급히 지적되어야 할 부분은 디지털 시민성의 개발과 새로운 시민 교육이라는 중요한 사회적 화두 안에 ‘젠더가 매우 체계적으로 탈각되어 있다’는 점이다.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은 주로 청소년 대상의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을 활발히 수행하면서 교재와 교육안 등을 꾸준히 개발해 오고 있는 기관이다. 정기적으로 『디지털시민총서』 시리즈를 발간하면서 디지털화된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함양해야 할 시민적 역량을 구성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한편 방송통신위와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해 8월 발표한 ‘디지털 미디어 소통역량 강화 종합계획’에는 디지털 시민성 확산이 4대 전략과제로 들어가 있다. 한국교육학술정보원도 “지금 왜 디지털 시민성인가”라는 제목의 포럼을 2018년에 열기도 하였다.
이처럼 주요 교육주체들이 강조하고 있는 교육 내용으로서 디지털 시민성은 매우 유의미하게 논의되어야 할 개념이자 방향이다. 현재 수행되고 있는 디지털 시민성 교육에는 모든 교육 대상들이 알아야 할 필수적인 학습 요소로서 정보통신윤리, 소셜미디어의 구조와 역사, 디지털 리터러시 개념 등이 담겨 있다. 하지만 다수의 교육안들이 디지털 시민성에 대한 페미니즘적 함의를 거의 담지 못하고 있다.
일부 교안에서 젠더와 성평등 개념이 다소 형식적으로나마 들어가 있는데, 예를 들면 군가산점 논란과 같은 디지털 공간 내 ‘양성 간의 대립’은 상대방의 반론을 경청하고 재반박하는 소통능력을 기르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표현되는 식이다. 또 남녀가 불평등하게 재현된 뉴스를 찾아본 뒤, 미래에 갖춰야 할 바람직한 성역할로서 양성적 인간이 가지는 장점을 찾아보고 성평등을 넘어서 인간평등으로 나아가기 위한 활동 사례를 발굴해보는 교육 사례도 있다. 젠더 문제는 공평하게 경청해야 할 다양한 의견 정도로만 다뤄지고 있다.
▲ 고등학생용 교육 교재 “너랑 나랑 우리가 통하는 사이버 인성” 중의 일부. |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에서 젠더가 삭제된 자리를 빈약하게나마 채우는 것은 다름 아닌 성폭력 의제이다. 많은 교육들이 디지털 공간 내 폭력 문제를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데, 주로 사이버불링이나 집단 괴롭힘 등의 문제를 언급하면서 여기에 디지털 성폭력을 기계적으로 첨가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젠더 이슈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나, 처음부터 젠더 관점을 상실한 채 설계된 교육 프로그램이 유일하게 젠더를 다룰 수 있는 영역으로 성폭력만 남은 셈이다.
이 부분도 기존의 제도화된 폭력예방교육의 양식에 의존하고 있고, 이마저도 내용상 부적절한 부분이 많고 전문성이 결여돼 매우 우려스럽다. 예를 들어 워터파크 샤워장에 디지털 카메라를 설치한 사례와 같이 명백한 성폭력을 두고 ‘음란물 유포’나 ‘표현의 자유와 한계’라는 주제로 다루는 것이 대표적이다.
디지털 성폭력을 예방하는 방법으로 학부모가 음란물과 폭력물을 필터링하는 소프트웨어를 설치하는 것(사이버폭력 예방 - 인터넷가치 사전 만들기 교사 지도서)이 꼽히거나, 스마트폰 음란물 차단 서비스를 적극 이용하도록 가르치는 것, 여학생들로 하여금 중성적인 아이디를 사용하고, 개인정보는 최소한의 것만 기입하거나, 비밀번호는 어려운 것으로 만들며 주기적으로 변경할 것, 원하지 않는 메일이나 메시지를 받았다면 답장을 보내지 말 것처럼 매우 형식적인 대안만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을 따르다 보면 ‘디지털 시민성’의 덕목으로 디지털 공간 안에서 의사소통을 할 때 지켜야 하는 특정한 에티켓, 이용방법, 개인의 권리 신장 등이 강조되는 결과를 낳는다. 교육공화국으로 불릴 만큼 각종 교육이 넘쳐나지만, 한국 사회가 민주적 사회로 이행하는 데 교육이 실질적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에서, 젠더 관점이 소실된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 또한 얼마만큼의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 우려스럽다.
▲ 중고등학생용 디지털 시민교육 교재 “사이버성폭력, 그 환경을 뒤집다” 중 일부. |
페미니즘 지식으로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을 시작하자
한 사회가 실천하고 있는 교육은 그 사회가 어떤 공동체적 가치에 합의하고 있으며, 어떤 시민을 길러낼 것인가 하는 질문과 직결된다. 디지털 사회라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환경이 요구하는 가치와 철학, 윤리가 무엇인지 성찰하는 과제 안에는 성평등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교육이 갖춰야 할 구성 요소를 탐색해야 하는 과제가 동시에 깃들어 있다.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의 출발점에 선 지금, 디지털 환경의 변화와 젠더 관계의 역동을 해석할 수 있는 페미니즘 이론과 자원을 교육의 언어로 바꿔내고 현장에 적용시키기 위한 다각도의 논의가 요청되고 있다.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수많은 사람들이 대국을 지켜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알파고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이는 드물다. 검은 수트를 입고 이세돌 9단 앞에 앉아 인공지능의 ‘손’ 역할을 하며 알파고를 재현한 사람은 아마추어 6단이자 알파고의 개발자인 아자황(Aja Huang)이었다. 그렇지만 ‘고양이와 뒹굴거리기’가 취미라던 루다의 구체적인 표정을 우리가 잊을 리 없다. 알파고는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게 설계된 반면, 이루다는 대단히 구체성을 띤 몸으로 우리를 찾아왔다. AI의 성별을 사유하면서 제기되는 질문들은 계속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렇다면 만약 ‘이루다’ 사례를 통해 젠더 관점의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을 할 때, 인공지능에 대한 ‘성희롱’이나 개인정보 유출 외에 새로운 주제를 제시할 수 있는 상상력은 어디서 어떻게 나올 수 있을까? 내 앞의 유명 배우를 몰라볼 정도로, 수면시간을 줄이면서까지 모두가 열정적으로 몰입하고 있는 이 디지털 세계는 어떤 행위양식과 사고양식을 주조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젠더는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우리는 그에 관한 풍요로운 토론의 장을 열 수 있을까?
필자 소개: 윤보라. 젠더교육연구소 이제IGE 연구원이며, 서울대 여성학협동과정 박사과정에 재학중이다. 논문으로 “디지털 거주지(digital dwelling)와 성폭력-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 성희롱 사건을 다시보기”를 썼고, 공저로 <그럼에도 페미니즘> <여성혐오가 어쨌다고?>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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