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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공백으로 남은 재일(在日)여성 서사를 찾아서

새로운 연결과 장소를 기다리는 재일조선인 여성의 말·글(3) 


※ 페미니스트 연구자들이 발굴한 여성의 역사. 이 연재는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아 진행됩니다. 신지영(한국근현대문학과 동아시아근현대문학·사상·역사 전공.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조교수)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정신대, 위안부, 매춘부…여성을 속박하고 단절시킨 ‘공동체’


공동체 없이 살 수 없지만 공동체가 자신을 죽일 수 있음을, 집 없이 살 수 없지만 집이 자신을 죽일 수 있음을, 더 나아가 그/녀들이 속한 공동체나 집이 그/녀들 사이를 얼마나 깊이 단절시키는지를, 재일조선인 여성의 말·글만큼 잘 보여주는 것이 있을까? 그러므로 그/녀들은 공동체와 집 깊숙한 곳에서, 그 어둠의 깊이만큼 간절하게 떠나기를 갈망한다. 그것은 떠남에 대한 갈망이자 또 다른 공동체에 대한 열망을 향해 열려 있다.


먼저, 떠나오고 싶은 ‘공동체’가 그/녀들에게 부여한 단절을 살펴보자. 나이가 들어 겨우 총련 혹은 민단의 야간학교에서 글을 배우고 자신의 경험을 증언하거나 구술하거나 쓰는 그/녀들의 말·글은, 떠나오고 싶었던 공동체의 규범과 권력의 경계를 따라 단절된다.


일본 가와사키에서 30년간 재일조선인 여성 및 재일외국인 권리를 위한 활동을 해온 야마다 다카오는 이렇게 말한다. “이분들이(재일여성이) 많이 하는 말이 있는데 ‘도둑질과 매춘 말고는 뭐든지 했다’고 한다.”(권숙인, 「일하고 일하고 또 일했어요.: 재일한인 1세 여성의 노동 경험과 그 의미」, 『재일 한인 1세들의 공간, 노동, 젠더: 일과 생활세계』, 김백영, 정진성, 권숙인 지음, 한울, 2020년, 179쪽) 뭐든지 했다고 할 때 떨어져 내리는 존재의 느낌이 ‘도둑질과 매춘 말고는’이라는 말로 가까스로 부상하지만, 그 순간 다시금 떨어져 내리는 ‘도둑년과 매춘부’가 있다.


근로정신대(조선여자근로정신대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동원된 태평양전쟁 지원 조직으로, 일제점령기 주로 군수공장에서 일한 여성들을 칭함)로 1944년 5월 아이치현 미쓰비시 중공업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로 강제동원되었다가 한국으로 돌아온 박해옥은, 격앙된 목소리와 몸짓으로 이렇게 말한다.(이 부분은 읽히기보다 들린다).


“우리 정신대원들은. 그러니까 위안부가 아니여요. (테이블을 두드리고 목소리가 커지며) 위안부들은 정신대를 붙일 수가 없어요. 종군위안부지, 우리는 근로정신대라는 것이 그것밖에 정신대가 없었어요. 그 당시에는. 근로정신대. 정신대 한문이 몸을 바치라는 것인데, 천황폐하에 몸을 바쳐서 일해라, 그 뜻이에요. 그러는데 그거를 엄한 데다 붙여가지고.”

(「우리 근로정신대는 그러니까 위안부가 아니여요」, 『조선여자근로정신대, 그 경험과 기억』,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2008년, 145쪽)


재일조선인 여성은 도둑년이나 ‘매춘부’와 구별되려고 하고, 근로정신대 여성은 ‘위안부’와 구별되려고 한다면, 그 반대는 없을까? 아니다. 이용수는 지난 5월에 있었던 제2차 기자회견에서 “공장에 갔다 온 할머니하고 위안부, 아주 더럽고 듣기 싫은 위안부하고는 많이 다릅니다”라고 말한다.(강재구 기자, 「[전문] 이용수 할머니 2차 기자회견문 “그동안 일궈온 투쟁 성과 훼손되면 안된다”」, 한겨레, 2020년 5월 25일자)


초기에 ‘위안부’라는 용어 대신 ‘근로정신대’가 사용되었기 때문에 생긴 혼동이지만, 두 용어 모두 식민주의 권력을 미화하는 외부에서 주어진 말이란 점에서 그/녀들의 경험을 표현할 수 없다.(박정애, 「전시성폭력피해자를 위한 언어는 없다」, 주간경향 1380호, 2020년 6월 8일자) 그런데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당사자가 스스로를 “아주 더럽고 듣기 싫은 위안부”라고 일컬음으로써, 즉 스스로를 하대함으로써만 정체화하는 것이 가능한 상태라는 점이다. 따라서 이용수의 기자회견은 위안부의 말·글을 듣고 표현할 ‘여성들의 말·글’에서 시작되는 공통장을 요청한다.


물론 정신대 여성과 ‘위안부’를 섬세하게 구별하는 것은, 제국주의 전쟁에서 식민화된 성노예 제도 및 현재까지 지속되는 전시 성폭력의 책임을 명확히 밝히기 위해 중요하다. 그러나 이 용어들은 내재적이라기보다 외재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뿌리 깊은 가부장제는 ‘위안부’의 경험을 수치심으로 만들고, 국민국가는 ‘위안부’를 한국의 피해로 포섭하며, 그/녀들 사이를 갈라놓는다. 재일조선인 여성은 도둑년이나 ‘매춘부’가 아니(어야 하)며, 근로정신대는 ‘위안부’가 아니(어야 하)며, ‘위안부’는 미군 기지촌 여성이 아니(어야 할) 때, 이 각각의 여성들은 만날 수 없다.


국가주의, 자본주의, 식민주의, 가부장제, 제국주의 속에서 ‘여성’이 살기 위해 속해야 했던 공동체가, ‘여성들’을 속박하고 단절시키고 있음을, 그/녀들의 말·글을 통해 아프게 깨닫는다.


불가능한 ‘해방’과 ‘전후’: 여성노동의 ‘반복된 겹쳐짐’


그러나 이 단절은 적어도 ‘여성’들의 현실과 다르다. 여성의 노동이나 삶의 상태는 단절적이지 않다. 구술 증언집을 보면, 정신대로 갔다가 위안부가 되거나, 위안부로 있으면서 정신대가 하는 노동을 하며, ‘해방 후/전후’에는 파출부, 매춘, 막노동 등이 이어진다. 특히 재일조선여성의 말·글은 이런 반복된 겹쳐짐을 국가와 ‘불화’하는 형태로 마주하게 한다.


1975년 영주권 신청 과정에서 위안부였음을 드러내야 했던 오키나와의 배봉기는, ‘우리’에게 김학순보다 먼저 증언한 ‘위안부’로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오세종에 따르면 배봉기는 먼저 ‘정신대’로 갔다가 다시 위안부로 강제동원되었다.(오세종 지음, 손지연 옮김, 『오키나와와 조선의 틈새에서』, 소명출판, 2019년, 266쪽)


또한 1910~1920년경 일본의 조선요리집으로 집안 빚에 팔려오거나 속아서 온 조선여성은 잡일뿐 아니라 매춘을 해야 했고, 조선요리집은 ‘조선유곽’, ‘반카페’, ‘조선빠’, ‘삐야’ 등의 이름으로 불렸다.(<조선 요리점·산업 ‘위안부’와 조선의 여성들-묻힌 기억에 빛을>, 고려박물관 2017년 기획전 2017년 8월 30일~12월 28일, 2쪽) 1942년 이후 탄광으로 강제동원된 조선인을 상대로 하는 산업위안소가 탄광 주변에 생기자, 조선요리집의 그/녀들은 산업위안부가 되거나(관련 기사: 신지영, 「강제동원 역사에서 ‘보이지 않았던 여성’들을 찾아서」, 일다, 2019년 9월 4일자 http://ildaro.com/8541) 정신대가 되었다.(가와다 후미코 지음, 오근영 옮김, 『빨간 기와집』, 꿈교출판사, 2014년, 65쪽)


그/녀들이 처했던 여러 상태의 겹쳐짐과 반복을 볼 때, 한 여성의 경험은 하나의 명명으로 대표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한국에서 출판된 구술·증언집이 ‘위안부’ 혹은 ‘근로정신대’ 등의 제목을 달고 있는 것은, 시대적 요청이었으나 한계도 지닌다. 반면 재일조선인 여성의 구술·증언집은 식민지 시기 및 태평양 전쟁기를 관통해 온 다양한 ‘여성’의 상태를 한데 묶는다. 또한 ‘재일조선인’이라는 아이덴티티가 형성된 ‘전후’의 삶에 초점이 찍혀 있어, 보다 적극적으로 생애 전체를 포괄한다.


재일여성 1세의 구술·증언집은 여러 형태가 있지만, 2014년에 일본에서 출판되고 2016년인 비교적 이른 시기에 한국에 번역된 『몇 번을 지더라도 나는 녹슬지 않아(식민지 전쟁 시대를 살아낸 할머니들의 노래)(가와다 후미코 저, 안해룡 외 1명 역, 바다출판사, 2016년)를 살펴보자.


이 책은 가와다 후미코가 2012년 6월부터 잡지 『세카이』에 연재한 ‘할머니의 노래’를 묶은 것이다. 가와다 후미코는 배봉기와 송신도와의 만남을 통해 “일본군 성폭력 문제”를 필생의 작업으로 삼게 되었으며, 나아가 “다른 재일 여성들이 어떤 인생을 걸어왔는지 알고 싶어졌다”고 집필 동기를 적고 있다.(가와다/11쪽)


“음식을 제공받는 정도이거나, 임금이 지급된다 해도 극히 낮은 임금 조건에서 어린 나이부터 노동을 시작했기에, 재일 할머니들은 전쟁 전부터 여성 노동자의 선구자였다. 할머니들은 언제나 일을 하고 있었다. -중략- 새처럼 불안정한 상태에서 일을 해왔으며 때론 자영을 하기도 했다.”(가와다/14~16쪽)

 

‘재일 할머니’라는 호명, 구술과 증언에 가해진 편집 등을 볼 때, 이 책은 비판적인 분석을 요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책은 근로정신대, 위안부, 재일조선인의 아내, 한센병 여성, 빈곤여성 등 다양한 상태의 재일여성의 노동과 삶이 “새처럼” 불안정한 상태로 겹쳐지고 반복되는 양상을 생애 전반에 걸쳐 증언한다.


가와다 후미코, <몇 번을 지더라도 나는 녹슬지 않아> 한국어판(2016), 일본판(2014)


재일여성인 송신도의 구술을 바탕으로 한 「전쟁도 쓰나미도 삶을 빼앗지는 못해」를 보자. 송신도는 열여섯 살인 1938년에 끌려가 중국의 여러 위안소를 전전하며 성적 착취 이외에 노동력을 착취당한다. 군대 전체가 작전 수행을 하러 가면 “철모 쓰고 여자 둘이 한 조가 되어 보초”를 서거나, “피로 얼룩진 전투복을 빨 물”을 찾아 세탁을 했다.(가와다-송신도/245~246쪽)


성폭력과 강간, 재생산 노동, 군속 역할에 더해, 송신도는 5번의 임신 경험을 갖고 있다. 몇 번은 낙태를 했고, 태어난 아이는 기를 수 없어 주변 마을의 조선 여성에게 맡기기도 한다.(가와다-송신도/242~243) 위안부로서의 시간은 성노예 경험으로만 수렴될 수 없는 한 존재의 몸과 마음 전체를 ‘전유’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제이슨 S. 무어 저, 김효진 옮김, 『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 갈무리, 2020년, 100~101쪽) 삶 전체를 ‘전유’당한 여성 신체 위에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전쟁과 자본주의는 작동했다.


‘해방/전후’라고 해서 다를 리 없다. 성착취와 노동착취가 겹겹이 삶을 저당잡고 있는 상황은 여전하여, 식민지기인지 해방 후인지 일본인지 한국인지 헷갈린다. 그녀들의 불가능한 ‘해방/전후’를 잠시 엿보자. 해방 직후 송신도는 일본군인 이다 킨사쿠의 꾐으로 ‘혼인임시증명서’를 받아 일본 본토로 오지만, 도착한 즉시 버려진다.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그녀를 재일조선인이 많은 오사카 쓰루하시에 버리며 이다가 한 말, “진주한 미군의 매춘부라도 해”는 해방되지도 전쟁 이후의 삶을 맞지도 못하는 그/녀들의 상태를 역설한다.(가와다-송신도/246~247쪽)


송신도는 장화공장에서 번 돈으로 이다를 찾아가지만, 다시 강간당하고 짐은 도둑맞아, 절망 끝에 자살을 시도한다. 겨우 목숨을 건진 송신도는 조선인 하재은의 함바에서 밥하며 함께 살지만, 그 삶은 다시 온갖 노동으로 채워진다. 돌 깨는 막노동, 땔나무, 막걸리 제조, 통조림 공장일, 바지락과 미역 채집, 텃밭 채소 장사 등이다.(가와다-송신도/248쪽)


해방과 전쟁 이후를 맞이할 수 없었다는 점은, 위안부나 정신대의 직접적인 경험이 없는 재일여성 1세의 삶과도 비슷하다. 재일조선인 여성 1세 43명의 노동을 연구한 권숙인은 그 특징을 이렇게 정리한다.(「일하고 일하고 또 일했어요」) 가사노동 외에 가족부양 노동을 한다. 남편이 재일조선인 단체 일로 바쁘거나, 병에 걸리거나, 술·노름·여자에 빠진 경우다. 7-8살 때 아이 돌보기 등으로 시작해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평생 이어진다. 분류 불가능한 온갖 종류의 노동을 한다. 남의집살이, 막걸리 소주 엿 만들어 팔기, 가축사육, 넝마주이, 고물상, 함바 일, 행상, 술집, 식당, 사금 채취, 새끼줄 장사, 분뇨처리, 재봉과 수선, 김치가게, 신발 제조, 양복일, 한복 만들기, 하숙, 고철, 파친코, 공장노동, 탄광일….


특히 『몇 번을 지더라도 나는 녹슬지 않아』에 수록된 재일조선 여성의 노동은, 조선인에게 높은 발병율을 보인 한센병과 히로시마 피폭 경험이, 한일 양쪽에서 겪은 민족차별과 섞여 있어, 그/녀들의 고통을 ‘한국’의 피해로 환원할 수 없게 한다. (계속됩니다[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한국계 미국 이주민 '성'의 트라우마, 가족, 중독 그리고 몸에 관한 기록 『남은 인생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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