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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할 일은 ‘낙태죄 부활’ 아닌 ‘재생산권 보장’

낙태죄의 역사, 재생산권의 역사 그리고 지금!


10월 7일, 정부는 낙태죄 조문에 대한 형법과 모자보건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정부가 발표한 형법 개정안은 이미 헌법재판소를 통해 헌법에 위배된다고 판단된 형법 제269조와 제270조를 그대로 유지한 채, 허용 요건을 규정하고 있는 형법 제270조 2를 추가한 것이다.


10월 7일 정부가 배포한 ‘낙태죄’ 관련 입법개선 절차 보도자료 중에서.


신설 조문은 임신 14주 이내의 임신중지는 허용하고, 24주 이내의 임신중지는 일정한 사유가 있을 경우에만 허용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법무부 양성평등정책위원회가 낙태죄를 전면 폐지하라고 권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임신 주수에 따라, 허용 사유에 따라 제한을 두고 일부 임신중지만을 허용한 것이다.


정부는 해당 개정안이 “태아의 생명권 보호와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실제적 조화”를 이루는 방향이라고 했다. 지난 몇 년간 낙태죄 폐지 운동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태아 대 여성’ 대립 구도를 넘어서서 ‘재생산권 보장’으로 나아가라고 외쳤다. 하지만 정부는 임신중지의 허용/처벌의 경계선 설정에만 관심을 두고, 해당 대립 구도를 여전히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임신중지 외의 성과 재생산 권리를 보장할 방안에 대해서는 정부도, 국회도 논의조차 시작하지 않았다.


‘성적 권리와 재생산 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에서는 지난 4월 6일 <성과 재생산 권리 보장을 위한 10대 정책 과제>를 제안한 바 있다. 또, 올해 초부터 준비한 「성·재생산권리 보장 기본법(안)」을 곧 발표할 계획이다. 변화에 역행하는 정부의 낙태죄 개정안에 저항하면서, 이제는 포괄적인 성과 재생산 권리의 보장을 위한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논의를 본격화할 때다.


※SHARE에서 제안한 ‘성과 재생산 권리 보장을 위한 10대 정책 과제’ http://srhr.kr/2020/1102


낙태죄의 역사


낙태죄에 관해 역사적으로 검토해 보는 것은, 재생산권이 무슨 문제의식으로 어떤 것에 저항하기 위해서 고안된 개념인지를 짚어볼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재생산권 보장 방안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에 앞서 좋은 참조점을 제공해준다.


-일제강점기, 임신중단이 범죄로 규율되기 시작


일제강점기는 한반도에서 여성이 스스로 임신중단하는 행위가 형법상의 범죄로 규율되기 시작한 때다. 임신중단 행위 자체는 조선 시대에도 민간요법을 이용해 행해졌지만,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된 적은 없었다.


조선 시대 형법은 타태죄(墮胎罪) 조문을 두어 임신한 여성을 구타하여 유산시키는 행위만을 처벌하고, 이마저도 태아의 형체가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라면 타태죄 대신 구타상해죄를 적용했다. 임신한 여성의 신체 일부를 손상한 것으로 취급한 것이다.(전효숙·서홍관, 2003) 구한말에 형법대전을 펴냈을 때에도, 다른 사람이 임신한 여성의 의사에 반하여 임신중단 시키는 행위만을 규제하였다.(이영아, 2013)


반면, 일본은 1880년 근대화된 형법전을 마련하면서 프랑스 형법 조문을 그대로 모방한 낙태죄 조문을 두었고, 1907년 개정을 거치면서 독일을 본 따 낙태죄를 한층 엄격하게 규정했다. 그 배경에는 “국가에 중요한 것은 전쟁에 쓸 병사의 숫자이며, 그 수를 줄이는 일은 허용될 수 없는 범죄”라는 군국주의 출생증강 사상이 자리하고 있었다.(후지메 유키, 2004)


추후 사회진화론의 영향으로 우생학적 색채도 덧입혀지면서, 인구의 숫자만큼이나 질도 중요하다면서 악질 유전병을 가진 자는 불임수술시키고, 그렇지 않은 경우 피임과 임신중단 등 인위적 방식의 사용을 금지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렇듯 당시 일본 사회의 다양한 열망들이 투영된 낙태죄 조문은 1912년 「조선형사령」에 의해 일본형법이 의용되면서 식민지 조선에도 시행됐다.


-광복 이후, ‘인구정책적 관점’으로 낙태죄 존치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1953년 형법전에도 낙태죄가 존치되고, 그 과정에서 인구정책적 관점이 근거로 꼽혔다는 사실이다. 당시 국회에서는 낙태죄를 존치하자는 법안과 낙태죄를 전면 삭제하자는 법안이 모두 제출되어 토론이 이루어진 바 있는데, 토론의 양방이 모두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주된 근거로 인구정책적 효용성을 제시했던 것이다.(신동운, 1991) 오히려 태아의 생명은 부차적인 근거에 불과했고, 여성의 자기결정권 측면은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다.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소원 사건 결정을 앞두고, ‘모두를 위한 낙태죄폐지 공동행동’이 주최한 <카운트다운 “우리가 만드는 낙태죄 폐지 이후의 세계”> 피켓들. (출처: 모낙폐)


-독재 정권의 가족계획사업 시기, 이중적 법제 채택


1960년대부터 이루어진 박정희 정권의 가족계획사업은 낙태죄의 역사에 또렷한 하나의 지층을 더했다. 박정희 정권은 경제개발계획에 가족계획사업을 포함시키고, 목표하는 인구증가율을 달성하기 위해 저돌적인 하향식 가족계획사업을 전개했다. 처음에는 피임을 통해서 인구억제를 시도했지만, 피임이 완벽하게 임신을 막지 못하기 때문에 점차 임신중단도 공공연하게 허용하고 권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임신 초기 임신중단은 ‘월경조절술’이라는 명칭으로 대한가족계획협회의 목표치에 포함되기도 했다.(지승경, 2019)


그리고 종교계조차 반대 의견의 표명이 불가능했던 유신 시기, 비상국무회의에서 모자보건법을 통과시킴으로써 법적 근거까지 마련한다. 당시 정권은 규범적인 비난과 예산 마련의 부담을 회피하고 싶었고, 따라서 ‘임신중단 합법화’보다는 형법상 낙태죄를 둔 채 모자보건법으로 ‘제한적 허용’을 하는 이중적 법제를 채택했다. 또, 그러한 법제와 유리된 방식으로 정책을 밀어붙이면서도(임신중단은 모자보건법이 허용하는 합법적 테두리보다 훨씬 넓은 범위에서 행해졌다), 문제가 생겼을 시 책임소재는 정부가 아닌 여성에게 둠으로써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통제의 끈을 놓지 않았다.


정부의 낙태죄 개정입법예고안 방향이 언론에 보도되자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은 9월 28일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낙태죄' 완전 폐지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저출생 대책의 시기, 임신중지 통제 강화


1996년이 되면 인구억제정책이 종결되고, 2000년대 들어서면서 반대로 저출생이 사회 문제로 대두된다. 이때, 이른바 ‘낙태 예방 사업’이 언급되기도 했다. 2009년에는 ‘프로라이프 의사회’가 등장하여 불법 인공임신중절 병원을 고발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이에 발맞추어 이명박 정권은 인구조절 목적을 한층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2009년 11월 25일 ‘제1차 저출산 대응전략회의’에서 낙태 줄이기 캠페인을 검토하고, 2010년 3월 2일에는 ‘불법 인공임신중절예방 종합계획’을 발표했다. 2009년 성윤환 의원이 대표 발의한 모자보건법 개정안은 합법적 인공임신중절수술의 절차를 매우 복잡하게 만듦으로써 사실상 금지의 폭을 넓히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2010년 ‘임신·출산 결정권을 위한 네트워크’가 출범하고 반대 목소리를 표출함으로써 해당 개정안은 저지했지만, 2016년 비슷한 시도가 또다시 이루어졌다. 보건복지부가 의료인의 ‘비도덕적 진료행위’에 인공임신중절수술을 포함시키고, 위반 시 의사 자격정지를 기존 1개월에서 12개월로 대폭 상향 조정하는 「의료관계 행정처분규칙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예고한 것이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해당 개정안이 추진될 경우 ‘낙태 파업’으로 대응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검은 시위’와 그 이후 3년여에 걸쳐 지속된 낙태죄 폐지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 기사는 일부 요약문입니다. 기사 전체보기: 국가가 할 일은 ‘낙태죄 부활’ 아닌 ‘재생산권 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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