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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을 말하는 연극, 과정도 달라야 하지 않을까?

아픈 몸, 무대에 서다⑪ 아파도 미안하지 않은 세상을 ‘함께’



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를 기획·제작하며 마음에 세운 원칙이 있다. ‘목적과 과정이 분리되지 않는 작업이어야 한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말은 넘치지만 실제 삶이 그러한 경우는 드물다. 인권을 말하는 작품은 많지만 그 과정에서 인권이 지켜지지 않는 경우도 빈번하다. 완벽하게 올바른 것은 불가능하지만 최소한의 원칙을 정하고 지켜내고 싶었다. ‘장애인 접근권’과 무대 뒤 ‘스태프들의 노동권’을 지키는 환경을 만들며 연극을 제작하겠다고 다짐했다.


배우의 건강권과 농인 관객의 접근권이 충돌할 때


연극 공연 후 온라인 관람이 시작되자, 수어통역 화면의 화질이 매끄럽지 않다는 의견이 들려왔다. 대사를 수어로 전달받아야 하는 농인들에게는 연극 감상에 불편한 일이다. 예상한 일이었고, ‘선택’이었다. 공연 전날 무대 리허설을 하면서 조명의 조도를 맞출 때, 한 시민 배우가 너무 밝은 조명에 쇼크가 올 수 있다며 자신의 몸 상태를 설명했다. 조명감독은 무대 위 조도 자체를 전반적으로 낮게 했고, 조명을 켤 때도 서서히 밝아지는 방식으로 속도를 조절했다. 농인 관객의 시각 동선을 고려해 무대 바로 옆에 선 수어통역사의 조명도 일정 정도 무대 조명과 맞춰서 진행했다.


공연 전날 리허설에서 무대감독이 배우와 조명의 밝기가 적절한지 대화를 나누고 있다. (무대 위에 한 명의 배우가 앉아 있고 그 앞에 무대감독이 서 있다.)


그러다 보니 화면에 수어통역사의 표정이 섬세하게 담기지 않았다. 예산과 시간이 더 있었다면 좋은 화질을 구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명 조도를 맞추면서 우리는 처음으로 시민배우의 빛과 쇼크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됐고, 공연은 20시간이 채 남지 않은 상태였다. 연극 공연 무대 촬영용으로 2대의 카메라를 배치했고, 수어통역용 카메라는 영화도 촬영한다는 화질 좋은 휴대폰 카메라를 배치한 상태였다. 무대 촬영용 카메라와 달리 수어통역용 카메라는 적은 빛에 상대적으로 취약했다. 새로운 카메라를 구할 시간도 없었고, 이미 제작비가 천만 원 넘게 초과되어 빚으로 쌓여있는 상태에서 예산을 더 배치하기도 어려웠다.


선택을 해야 했다. 당연히 무대 위 배우의 안전과 건강을 우선으로 했다. 그다음에 수어통역 화면 화질이 연극 대사를 전달받는데 큰 방해가 될 정도인지 조언을 구했다. 화질이 아쉽지만 대사 전달에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라는 의견을 들었고, 그대로 진행했다.


사실 장애인 문화접근권, 특히 문자나 수어통역은 내겐 익숙한 분야라, 문제없이 잘 될 거라고 그리고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2005년에 “시민방송 RTV 시사다큐: 나는 장애인이다!” 연출자로 활동할 때도, 다큐 제작이 끝나면 항상 자막과 수어통역 작업을 했다. 15년 전인 당시는 한국에서 장애인 문화접근권 논의가 본격화되던 시기였고, 내가 속해 있던 ‘다큐인’은 가장 최전선에서 그 담론을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몇 년 동안 동료들과 여러 고민과 공부를 함께 했었다. 이후에도 장애인권 영상이나 장애인 미디어교육을 지속해왔던 터라, 이번 작업을 준비하면서도 연극 분야가 워낙 장애인 접근권이 떨어지는 영역인 만큼 더 잘 준비하려고 많은 공을 들였다.


연극은 수어통역 영역에서도 매우 고난이도의 통역에 해당한다. 따라서 경험 많은 수어통역사와 연극의 기획 의도부터 최근 수어통역 환경과 영상 구현까지 다양한 소통을 하며 진행했다. 대본이 나오자마자 수어통역사에게 전달하고, 연습실에서의 전체 리허설 장면도 동영상에 담아 미리 전달했다. 수어통역사들도 모든 내용을 사전에 전달받았음에도, 무대 리어설 때 직접 공연장에 방문해서 배우들의 대사를 객석에서 혼자 통역하며 열정과 책임감을 보였다. 드물게 진행되는 연극 무대 수어통역인 만큼 수어통역사들도 이번 연극에 대한 애정과 연대의 마음이 깊은 듯했다.


연극 온라인 관람 영상 중 문자통역과 수어통역이 포함된 버전 화면 갈무리. (연극 화면 오른쪽에 수어통역 화면이 보이고, 하단에는 문자통역 자막이 보인다.)


공연 내내 수어통역사들은 손뿐 아니라 표정과 온몸으로 배우들의 대사를 전달하고자 노력했다. 공연을 마친 후 배우들도 탈진 상태였지만, 수어통역사들도 단시간에 엄청난 에너지를 사용한 이후의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문학을 다른 언어로 번역한다는 게 재창작이듯, 수어통역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연극 영상을 편집하는 과정에서도 여러 논의 속에서 수어통역 화면 크기와 배치 위치를 결정했다.


이렇게 수어통역을 위해 몇 주 동안 여러 사람이 애썼는데, ‘화질’ 때문에 온라인으로 연극을 관람하는 농인 관객들에게 충분히 전달되지 않는 한계가 발생한 것이다! 아쉬움이나 허탈함이라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었다. 다양한 소수자의 특성을 존중하며 나아갈 때, 이번처럼 빛에 예민한 건강약자인 배우의 특성과 농인을 위한 수어통역 전달 조건이 ‘충돌’하기도 한다.  (기사 전체 보기: 인권을 말하는 연극, 과정도 달라야 하지 않을까?)  


-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온라인 토크 with 조한진희”

  9월 24일(목) 저녁 7시 (문자 및 수어통역 제공) 신청: https://url.kr/pGVPR7


- 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온라인 관람 예매 https://socialfunch.org/dontbesor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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