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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미디어 제작현장에도 퀴어 노동자가 있다!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x 연분홍치마 <스탠바이 큐> 프로젝트


모 방송국에서 일할 때였다. 나는 ‘오픈리 퀴어’(주변 사람들 대부분에게 커밍아웃을 한 사람)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벽장’(퀴어임을 숨기는 상태)도 아니었다. 대담하게도(?) 무지개 굿즈를 가방에 달고 다니거나 책상 위에 두기도 했다. 혹시 누가 알아보고 물어보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는 마음과, 내심 누군가가 알아봐 주길 바라는 양가감정이 교차했다. 의심의 눈초리라도 좋으니 ‘어, 그거 성소수자 그런 의미 아냐?’라는 말을 걸어오면 ‘요즘 퀴어 이슈에 연대하는 게 힙한 건데 모르셨어요?’라고 쿨하게 대응하는 시나리오도 짜놨는데…. 말을 거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직접적인 편견이나 억압을 받을 일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차별이 없는 안전한 환경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농담이랍시고 나오는 성소수자 혐오발언은 대응할 새도 없이 분위기에 휩쓸려 갔고, 사적인 이야기는 되도록 하지 않는다는 나만의 원칙을 세웠지만 그건 개인의 노력일 뿐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에도 ‘없다’고 간주되는 현실은 마음 한구석 어딘가 늘 불안하게 했다. 결국 여기에 속할 수 없다는 한계가 보일 때마다 일에 대한 애정도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거기에 회사 내 성차별도 감지되기 시작하면서, 결국 절을 떠나는 중이 되는 걸 ‘선택’하고 말았다.


만약 안전한 노동 환경이 보장되었더라면 어땠을까? 좋아하던 일과 경력을 한번에 날려버리는 일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나는 종종 찝찝한 마음으로 이 질문을 되새겼다. 하지만, 이제는 혼자가 아니라 더 많은 사람과 함께 질문의 답을 고민하고 풀어나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 같다. 방송-미디어업계 퀴어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한 <스탠바이 큐> 프로젝트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스탠바이 큐> 홈페이지 https://hanbit.center


이 프로젝트는 방송업계의 노동 착취를 지적한 故 이한빛 피디의 죽음 이후 방송-미디어 노동자들의 권리 보장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있는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와, 퀴어 페미니스트의 시선으로 다양한 소수자 의제를 카메라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성적소수문화인권연대 연분홍치마가 공동으로 기획했다.


“방송-미디어 산업에 근무하는 퀴어 노동자들의 인권 및 노동 조건 향상”을 목표로 한 <스탠바이 큐>가 현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프로젝트 진행팀에 인터뷰를 요청했다. 온라인으로 진행된 인터뷰 자리엔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성상민 기획차장과 연분홍치마 김일란 감독, 빼갈 피디가 참여했다.


커밍아웃 할 수 없는 일터는 평등하지 않다


‘노동 이슈’를 다루는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와 ‘소수자/퀴어 이슈’를 다루는 연분홍치마가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의 의미부터 짚지 않을 수 없었다.


연분홍치마에서 제작하고 있는 <퀴서비스> 제작 현장에서의 빼갈 피디 ©연분홍치마


이들의 연결 고리는, 연분홍치마 활동가이자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이사로 활동 중인 빼갈 피디였다. 드라마 제작사에서 기획피디로 일하던 그는 故 이한빛 피디와 친구 사이였다. 이한빛 피디의 죽음 이후 진상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 활동을 하며 지금까지 한빛센터와 함께 하고 있는 빼갈 피디는 <스탠바이 큐> 프로젝트를 생각하게 된 계기를 들려줬다.


“<퀴서비스>(연분홍치마 유튜브 채널에서 제공되는 퀴어 예능 콘텐츠) 웹드라마 ‘애기레즈의 고백법’ 편을 찍고 난 뒤에, 제작에 참여했던 사람들로부터 감상 의견을 받았어요. 눈에 띄는 이야기가 ‘현장이 이렇게 윽박지르지 않아도 진행되는 곳인지 몰랐다’와 ‘성소수자가 현장에 존재할 수 있고 심지어 정체성과 상관없이 자유롭게 찍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좋았다’는 것이었어요. 제가 일했던 현장들을 돌아보게 되었죠. 저도 사실 커밍아웃을 해 볼 생각을 못했더라고요”


직장에서 굳이 퀴어임을 드러내야 하는가? 일만 잘 하면 되지 않나? 라고 반문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빼갈 피디는 “나를 어디까지 드러낼 수 있는지, 늘 긴장했다”고 말했다. “내가 퀴어여서 일이 끊기면 어떻게 하지? 혹은 다른 사람들이 ‘넌 퀴어니까 이성애 로맨스는 잘 다룰 줄 모른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하지? 그런 생각을 했었죠. 수많은 편견들이 차별을 타고 흐르니까요. 늘 숨기고 조심해야 했어요. 그런 긴장을 갖게 되는 상황은 평등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빼갈 피디는 방송 현장에서 퀴어 노동자들의 노동 환경을 고민하며 바로 한빛센터를 떠올렸다. “방송 미디어업계의 노동 문제라면 한빛센터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고, 지금까지 잘해온 일이니까요.”


성상민 한빛센터 기획차장은 <스탠바이 큐> 프로젝트에 협업하기로 한 배경에 대해 설명했다.


“한빛센터가 장시간 노동 문제나 임금 체불 문제 등만 다루는 건 아니에요. 문화적 구조와 연결된 문제들이 있어요. 예를 들어 현장에서 일상적으로 겪는 반말이나 욕설이 그렇죠. 이게 단순히 관리자, 피디나 감독들이 다른 스텝한테 하는 것만은 아니거든요. 나이가 많은 사람이 적은 사람한테, 혹은 남성이 여성에게 하는 경우도 있죠. 직군에 따른 권력 차가 발생하기도 하고요. 작년부터 아동·청소년 비정규직 예술인, 즉 아역 배우들의 노동 환경과 처우 문제나 대전MBC 아나운서 성차별 채용 대응 등의 활동도 하고 있는데, 이렇게 활동 범위를 넓히고 있던 차에 <스탠바이 큐> 프로젝트 협업 제안을 받게 된 거죠.”


연분홍치마에서 운영하는 “퀴서비스” 제작 현장에서 김일란 감독. ©연분홍치마


‘퀴어 서사’뿐 아니라 퀴어친화적 제작 환경에 관심을


연분홍치마의 김일란 감독도 빼갈 피디의 제안을 받고 “이런 활동을 상상할 수 있게 된 걸 의미 있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퀴어 스텝들의 제작 환경에 대해 막연한 상상을 해본 적은 있어도, 그들을 어떻게 모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뭘 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빼갈 피디의 제안 덕분에 구체화될 수 있었죠. 빼갈 피디가 연분홍 활동가로 합류하게 되고 한빛센터와 연결고리가 되어 준 걸 생각하면 <스탠바이 큐>는 ‘연결될수록 강하다’ 혹은 ‘사람이 만나면 사건이 된다’는 걸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해요.(웃음)”


그렇게 연결이 연결로 이어져 탄생된 ‘스탠바이 큐’. 이들은 실태조사, 가이드라인 마련 등 다양한 활동 기획 중에서도 더 많은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기 위한 <퀴어 프렌들리한 미디어 제작 환경을 위한 토크쇼>를 첫 사업으로 선택했다.


25일(금) 토크쇼 참가자. ©연분홍치마  *스탠바이 큐 텀블벅 펀딩(16일까지). https://tumblbug.com/standbyq


김일란 감독은 ‘스탠바이 큐’가 시작되었다는 걸 알리고 “더 많은 상상이 연결될 수 있도록.” 커밍아웃한 연예인, 페미니스트 가수와 평론가, 감독이 한 자리이 모여 “퀴어 이슈도 미디어 업계 노동자들의 처우 문제”라는 점을 알리는 한편, “퀴어 서사가 담긴 퀴어 재현 콘텐츠 제작과 퀴어 미디어 노동자와의 상관 관계”에 대한 논의도 다룰 예정이라고 밝혔다.


특히 김일란 감독은 이제 퀴어 서사에 대한 요구나 제작이 늘어나고 있긴 하지만, 그 제작환경이 퀴어친화적인가에 대한 이야기로 아직 연결되지 않고 있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한빛센터에서 늘 강조하는 ‘카메라 뒤에 사람이 있다’는 말과도 연결되는 부분이다. 화면에 보여지는, 잘 만들어진 퀴어 서사뿐만 아니라 그 화면, 카메라 뒤의 제작 환경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다는 것.  (기사 전체 보기: 방송 미디어 제작현장에도 퀴어 노동자가 있다!)

 


트라우마, 가족, 중독 그리고 몸에 관한 기록 『남은 인생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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