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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즘 새지평

내가 지킨 집, 우리를 지은 집

그 여자들의 물결 일다 2020. 9. 12. 20:04

내가 지킨 집, 우리를 지은 집

<주거의 재구성> 한부모가 되어 아이와 함께 만난 세상


편집자 주: 다양한 시각으로 ‘주거’의 문제를 조명하는 <주거의 재구성> 기획 연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보도됩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이제 어디에서 살까


처음엔 어디든 갈 수 있다고 여겼다. 아이는 일곱 살, 나는 서른일곱 살이었다. 이혼을 하고 나서 새로운 곳에 가서 산뜻한 기분으로 다시 살아보고 싶었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아이가 있으니 마땅한 학교부터 물색했다. 북한산 아래에 있는 유명한 초등학교에도 찾아가 보고, 경기도에 있는 좋다는 초등학교에도 가보았다. 교문을 지켜보다 하나하나 깨달았다. 교통편이 불편해 부모들이 자가용으로 등교를 시켜주거나 학교가 등산 길목에 있어 집을 구하려면 따로 품을 팔아야 했다. 나는 자동차가 없으니 외딴 학교까지 아이를 태워줄 수 없고, 집과 학교 사이가 멀면 아이의 등하굣길이 아무래도 신경 쓰일 터였다.


집과 학교가 가깝고, 아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어 적응할 수 있는 곳. 그건 바로 지금 살고 있는 동네였다. 결혼생활의 기억이 있는 곳을 떠나고 싶었지만, 눈에 익고 인사할 이웃이 있는 동네가 아이를 돌보며 살기에는 더 나은 조건이라는 걸 받아들였다.


▲ 이혼을 하고,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아이와 함께 살 곳을 물색했다. ©일러스트: studio 장춘


전셋집을 물색해 이사 준비를 할 때는 여러 가지를 꼼꼼히 따졌다. 방은 두 개가 있고, 초등학교가 가깝고, 조용한 주택가면 좋겠다고 여겼다. 임대아파트에 들어가 집 걱정을 잊고 싶었지만 워낙 경쟁률이 높아 번번이 청약 신청에서 떨어졌다. 공공임대주택에서 살 수 없다면 오롯이 내 힘으로 치솟는 전세금을 감당해야 했다. 동사무소에 가서 물어보았지만 수급자가 아니어서 한부모 지원 혜택을 받을 수 없다고 했다. 경제 수준으로 칼같이 나누는 서비스 지원에서 비켜나 어정쩡하게 한부모가 된 나는 비싼 집세를 감당하며 혼자 아이를 돌보아야 했다.


나는 한 빌라의 꼭대기 층을 부동산에서 소개받고 계약했다. 열세 평, 방 두 칸, 거실 하나. 이곳은 아이와 내가 한 가족으로 살아갈 자리였다. 계약금을 치를 때 여든이 넘은 집주인은 깐깐하게 굴었다. “남편은 뭐해요?” 남편이 지방에 있다고 둘러대자 집에 성인 남자가 없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집 주기 싫은데…” 한마디 하는 것이다. 그냥 웃어넘겼다.


이혼을 한 것을 처음엔 당당하게 주변에 말했지만, 그 말을 하고 나서 파장처럼 다가오는 침묵, 호기심, 무례함을 번번이 겪고는 말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이혼했다는 말을 하고 나면 경계를 넘어오는 사람들도 있다는 걸 경험하고 나서 나는 모든 상황에서 다 솔직할 필요는 없다고 마음먹었다. 어렵게 구한 새집에서 기운을 차리고 싶었고, 아이를 잘 지켜내고 싶었다. 미주알고주알 훈수를 두고 나의 생활을 의심쩍은 눈으로 훑어보는 사람들은 싫었다. 집을 통해 나를 지키고 아이의 안전한 양육을 지켜내고 싶었다.


친정엄마는 우리 집에 와서는 달력에서 오린 부부 그림을 곳곳에 붙여 놓았다. 결혼생활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엄마가 보기에 남편이 없는 건 결핍된 것, 이상한 것, 열등한 것이었다. 자식에게 부족한 것을 메꾸려고 달력 조각들을 부적처럼 붙여 놓았지만 엄마가 간 후 나는 그것들을 다 떼어내었다. 나는 이상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았다. 아이와 같이 사는 건 마음 편했다.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었고, 남들에게 ‘정상적’으로 보이려고 속으로 곪지 않아도 되었다. 식탁을 새로 샀고 아이와 마주 앉아 하루 일과를 얘기하며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 오래된 낮은 빌라들이 모여 있는 동네의 모습이다. 골목이 남아 있고 어쩐지 옛 정취가 느껴진다. (낭미)


집과 아이를 지킨다는 것


살던 곳에서 계속 사는 데에는 장점이 있었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닐 때부터 나들이로 오르내렸던 작은 산이 있었다. 익숙한 산길을 걸어 초등학교로 다닐 수도 있었다. 낯익은 동네이고 아는 사람들이 있어 아이가 친구들과 어울릴 때도 마음이 놓였다. 가족 구성원의 변동이 있었지만 아이의 환경은 바뀌지 않았고, 아이에게 인사를 해주는 어린이집 선생님이나 아이 친구의 엄마들이 있었다. 그 따뜻한 말마디도 아이의 어깨를 펴게 하고 키워내는 것이다. 이웃들과 간식을 싸들고 학교 운동장이며 산기슭 공터에서 얘기하며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다. 짬짬이 아이들을 저녁에 번갈아 봐주기도 했다.


물론 관계를 잇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내가 생각 못 한 것이 있었다. 나는 이웃들이 새롭게 하는 초등학생을 위한 품앗이 방과후 활동이나, 부모들이 만들어 꾸리는 돌봄 공간에 참여할 여력이 되지 않았다. 한부모로서 일과 육아의 몫을 감당하려니 늘 시간과 경제적인 면이 빠듯했다. 품앗이를 함께하자거나, 돌봄 공간을 같이 만들어보자는 제안들을 여건상 거절하게 되자, 이웃 관계도 전처럼 이어지지 않았다. 내가 마음이 없어서 같이 하지 않는 게 아니라 나의 상황이 이전과 바뀌었다는 것을 이웃들에게 설명하기 어려웠다. 만나면 그런대로 인사는 하지만 내가 전화를 하면 받지 않거나 그쪽에서 연락을 끊은 경우가 생겨났다.


어떨 때는 이 마을에 계속 살면서 집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버거웠다. 집의 벽이 모두 젖혀지고 바람이 횡횡한 길에 나앉아 있는 것 같았다. 아이의 끼니, 옷, 편한 잠자리, 모두 나의 손발에 달려 있었다. 아이를 돌본다는 것은 내 몸에 보이지 않는 실이 아이와 연결되어 있는 것과 같았다. 아이의 기분, 욕구, 필요가 나에게 전달되어 끊임없이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각자 방에 있을 때도 그 끈은 연결되어 진동했고 나에게 엄마 노릇을 하게 했다. 긴장하면서 규칙적이고 일관되게 생활하지 않으면 실은 금세 헝클어져 버리고 관계는 기우뚱댔다.


밤에 초인종을 일없이 누르고 가는 이상한 남자들도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면 아예 인터폰을 꺼두었다. 어떤 날에는 아이와 내가 똑같이 도둑이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전남편이 불쑥 원망하는 문자를 보낸 날이면 잠을 설쳤다. ‘여긴 안전한 거야. 현관에 보안키가 있고 층층이 사람들이 있고, 무슨 일이 있으면 전화할 수 있는 이웃이 그래도 하나쯤 있다.’


또 집세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이번에 집세가 천만 원이 올랐는데, 다음번엔 주인이 얼마나 올릴까? 은행 대출을 받을 수 없는데, 이 집에서 못 살면 이 마을에서도 못 사는 건가?’ 하고. 무턱대고 일을 많이 한 것도 집세에 대한 압박 때문이었다. 프리랜서로 일했는데 저녁에 아이를 데리고 가서 옆에 앉혀 놓고 강의를 할 때도 있었다. 시일이 촉박하다 싶은 일이 들어와도 밤잠을 줄여가며 그 일을 해치웠다. 일감이 떨어지면 공공근로를 신청해 임시로 사무직 일을 했다. 예술인을 지원하는 기관의 지원사업에도 참여했다. 번 돈은 다음 집세를 내기 위해 저축했다.


하루 시간표는 꽉 채워져 있었다. 아침 식사 준비, 집필이나 근무 일정, 집 청소와 장보기, 세탁하기, 저녁 식사 준비와 치우기, 밤에 다시 독서나 집필, 이런 식으로 빠듯하게 시간이 맞물려 돌아갔다. 일터를 구할 때도 오가는 데 걸리는 시간을 줄일 수 있게 집과 가까운 곳을 찾았다. 아이가 갑자기 아프거나 방학 때가 되면 집에만 있기 때문에 그런 아이를 돌볼 수 있게 시간을 틈틈이 낼 수 있는 일을 해야 했다.


작은방에서 정신없이 글을 쓰고 있는데 밖에서 울음소리가 들려 문을 열어보면 아이가 엄마가 집에 없다고 거실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때 나는 얼어붙었다. 엄마가 여기 있는데. 너를 지켜주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려주려고 내가 얼마나 애를 쓰며 네 옆에 있는데. 나는 아이 이름을 부르며 달려가 와락 끌어안았다. 나는 모든 걸 걸고 이곳을 지켜내고 있었다. 나에게 집을 지킨다는 건 아이를 지킨다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 (기사 전체 보기: 내가 지킨 집, 우리를 지은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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