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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경에 빠진 처녀’, 소설을 쓰다

<청년 페미니스트 예술인의 서사> 작가 아밀


※ 2020년 ‘따로 또 함께’ 창작을 통해 사회와 소통하는 청년 페미니스트 예술가들의 다양한 서사를 기록합니다. 이 연재는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아 진행됩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곤경에 빠진 처녀(a damsel in distress)라는 오래된 문학적 테마가 있다. 젊은 여자(으레 미녀)가 악당이나 괴물, 마녀에게 붙들려 고통을 당하고, 영웅이 그 여자를 구하러 간다는 내용이다. 누구에게나 익숙한 이야기일 것이다. 백설 공주, 라푼젤, 잠자는 숲속의 공주…. 우리에게 가장 낯익은 동화들이 이 유형에 속한다.


나는 곤경에 빠진 처녀 테마에 오랫동안 천착했다. 아니, 뭔가에 ‘천착’한다는 표현은 지나치게 문학적인 것 같다. 달리 말하자면 나는 이 테마에 ‘꽂혀’ 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닌데, 돌이켜 보니 내가 쓴 단편소설들의 여자 주인공 태반이 어딘가 심란한 곳에 갇힌 신세였다. 그리고 그 여자들의 앞에는 어김없이 남자가 나타났다.


작가들은 평생 똑같은 이야기만 한다는 말이 있다. 뭔가 한두 가지의 주제에 징하게 꽂혀서, 그 주제를 여러 작품에 걸쳐 되풀이하는 데에 평생을 쓴다는 뜻이다. 좋게 말하면 작품세계고, 나쁘게 말하면 강박이겠지. 나는 곧 출간할 첫 소설집의 원고들을 정리하면서 나만의 강박이 무엇인지 깨닫고 새삼 놀랐다. 그리고 이 강박이 어디서부터, 어쩌다가 시작되었을지 생각하게 되었다.


책들은 모험을 떠나라 했지만, 여자아이의 현실은 달랐다


사실 어렸을 때부터 내가 슬프고 외로운 공주님들의 이야기를 유난히 좋아한 건 아니었다. 독서 취향은 잡식성이었지만 굳이 따지자면 오히려 모험소설을 좋아했다. <80일간의 세계일주>의 팬이었다. 점잖고 철두철미한 영국 신사가 온갖 역경과 불운을 돌파하며 지구를 한 바퀴 도는 과정과, 마지막 장면에서 모두의 예상을 깨고 정확히 약속한 시간에 클럽에 등장해 그 유명한 날짜 변경선의 비밀을 밝혔던 순간 내게 안겨준 짜릿한 쾌감은 지금도 기억난다. 너무 멋져 보였다. 나도 필리어스 포그처럼 살아보고 싶었다. 위험천만한 내기에 대담하게 나서고, 돈을 사방팔방 흩뿌리고 다니고, 코끼리를 타고 오지를 가로지르고, 무시무시한 원주민들과 짐승들의 위협에 맞서 싸우고, 미녀를 화형대에서 구출해 아내로 삼기도 하고. (코끼리와 원주민과 짐승과 미녀의 입장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 아밀(김지현)의 산문집 <생강빵과 진저브레드>(비채, 2020)는 유년 시절 읽었던 모험 소설을 비롯한 다양한 명작 동화의 추억이 담겨 있다.


아무튼 모험과 여행의 환상은 내 유년을 지배했다. <로빈슨 크루소>의 처절한 무인도 생존기, 고아들이 사악한 선장과 맞서 싸우는 <피터팬>의 네버랜드, 내가 모르는 한국의 구석구석을 누비고 DMZ에 펼쳐진 낙원에까지 날아가는 <아기참새 찌꾸>, 알래스카 원주민 소녀가 드넓은 툰드라 빙원을 건너 샌프란시스코의 펜팔 친구를 찾아가는 <줄리와 늑대>… 이런 취향은 당연하게도 <반지의 제왕>, <로도스도 전기>, <세월의 돌>과 같은 판타지 소설에 대한 열광으로 이어졌다. 낯선 풍경과 이국의 문물과 신비로운 종족들과의 만남은 아무리 상상해도 질리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를 읽다 보면 내 앞에 무한히 넓은 세상이 펼쳐져 있고, 앞으로 내가 보고 듣고 경험할 경이로운 일들이 넘쳐나리라는 생각에 가슴이 설렜다.


행복만 있으리라 생각한 건 물론 아니었다. 죽음의 위기, 명예를 건 싸움, 가슴 저미는 사랑의 고통, 군주에게 버림받은 자의 비탄, 동료들을 지키지 못한 자의 회한, 경쟁과 배신과 분노와 공포…. 책 속의 주인공들이 그 모든 역경을 맞닥뜨리는 까닭은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어떤 고결한 이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게 조국이든, 사랑이든, 정의든, 신앙이든, 친구든 무엇이 되었든 말이다. 그것을 지키는 데에 승리한 자가 누리는 달콤한 영광도, 끝내 패배한 자가 겪는 쓰디쓴 절망도 나는 겪어보고 싶었다. 그런 것이 인생이라면 내게도 그것을 누릴 권리가 있지 않은가? 그 단맛과 쓴맛을 모두 느끼고 현명한 어른이 되어 마침내 내 이야기를 다음 세대에 전할 의무가 있지 않은가? 적어도 책들은 내게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세상이 내게 해주는 말은 책과는 좀 달랐다. 어느 순간부터, 그러니까 아마도 초경을 하고 너도 이제 여자라는 말을 듣기 시작했을 즈음부터, 나는 내가 그런 인생을 누릴 권리가 없다는 메시지를 곳곳에서 들었다. 요컨대 세상이 너무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밤은 위험하니 해 지기 전까지는 집에 들어가야 했다. 어떤 장소들은 너무나, 너무나 위험해서 낮에도 발을 들여서는 안 됐다. 또 절대로 어울리지 말아야 할, 지극히 위험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남자친구와 단 둘이 어딘가 오붓한 공간에 있는 것은 위험천만한 짓이었다. 하물며 혼자서 어딘가로 여행을 간다? 네버랜드가 아니라 월미도라도 안 될 말이었다.


나는 어른들이 한편에서는 내게 용사가 되라고 권하는 책을 읽히면서, 또 한편에서는 집에만 가만히 있으라고 가르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세상이 위험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고, 어른들이 아이들의 무모한 행동을 통제하는 것도 책 밖의 일만은 아니다. 톰 소여에게도, 허클베리 핀에게도 그들을 어떻게든 집 안에 얌전히 묶어두려는 어른들의 방해 공작이 있었다. 하지만 그 소년들이 어른들을 어떻게든 제치고 집 밖으로 모험을 떠났다가 다치거나 죽는다고 해서 불명예스럽게 치부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죽음마저도 명예롭게 추억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나 같은 여자아이들은, 사정이 달랐다. 만약 내가 부모님의 금지를 어기고 허클베리 핀처럼 나룻배에 몸을 싣고서 제주도로 훌쩍 떠났다가 강간이라도 당한다면, 그건 내게는 물론이거니와 온 집안의 수치가 될 것이다.


수치란 무엇일까? 왜 누군가는 집 밖으로 이동했다는 이유만으로 수치스러워해야 하는 것일까? 왜 남자아이들의 이동은 모험이거나 기행이고, 왜 여자아이들의 이동은 탈선이거나 비극인가?


▲ 작가 아밀과 그의 반려견 아궁이 함께 한 모습.


낯선 나라, 한인 커뮤니티에 갇힌 십대 시절


하지만 어떤 이동은 괜찮았다. 즉 여자아이가 부모님이나 선생님 같은 보호자의 손에 이끌려 어딘가로 가는 것은 괜찮았다. 나도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따라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대구, 부천, 인천, 서울의 곳곳을 전전했고 초등학교를 네 군데나 다녔다. 새로운 친구들에게 자기소개를 하는 데에 이골이 났다. 친해졌다가 금방 헤어지는 데에도 그럭저럭 익숙해졌다. 내게 기대되는 역할은 ‘이동당하는’ 처지에 적응하고 말썽 없이 조용히 지내는 것이었다. 어쨌든 어른들도 이사를 다니고 싶어서 다니는 게 아니라 형편이 어려워서 그런 거였으니 말이다. 착한 여자아이들은 어른의 사정을 이해해야 하는 법이었다.


열다섯 살 때, 열렬한 첫사랑에도 빠지고 거의 나 자신만큼이나 소중한 친구들도 사귀었을 무렵, 나는 인도네시아라는 낯선 나라의 수도로 떠나야 했다. 간신히 맺은 인간관계를 또 뒤엎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들에게 적응하는 것도 힘겨웠지만, 무엇보다도 자카르타의 열악한 대중교통 시설과 치안이 나를 괴롭게 했다. 사실 그 도시의 치안이 얼마나 나쁜지는 직접 겪어보지 못했으니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어른들은 그렇게 말했다. 환율 차이에 의존해 여유롭게 생활하는, 현지인들보다 피부색이 밝은 우리 같은 사람들은 범죄의 표적이 되기 쉬우므로, 특히 여자아이라면 감히 함부로 길거리를 나다녀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를 비롯한 한국인 소녀들은 운전기사나 아버지가 모는 자가용을 타고 집, 학교, 학원, 그리고 간간이 교회, 쇼핑몰만 오락가락하는 일상을 살았다. 일거수일투족이 부모님에게 보고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간혹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는 비행을 저질렀다가 발각된 아이들은 온 학교에 소문이 퍼졌다. 누가 같은 학교 선배와 섹스를 했다더라 하는 이야기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이른바 정상가족의 범주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났다 싶은 한국인들은 교포 사회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입방아의 대상이 되었다.


나는 숨이 막혔다. 그곳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 곳도 갈 수 없다고 느꼈다. 심지어 한국어로 된 책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국제 배송이 되는 인터넷 쇼핑도, 전자책도 없던 시절이었다.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한국에 다녀오는 인편을 통해 부탁해야 했고, 그러자면 내가 읽고자 하는 책들의 제목을 누군가에게는 알려야만 했다. 그야말로 사지가 묶인 기분이었다. 얼른 스무 살이 되어서 한국의 대학교에 들어가고 싶다고, 운신이 자유로운 서울에서 그리운 친구들을 만나 마음껏 놀고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버틸 뿐이었다. 인터넷 속 세상과 글자를 위안 삼으며.


이제 와 생각하면 그때의 나는 19세기 서양의 유한계급 여성들의 처지와 비슷한 데가 있었던 것 같다. 부모나 남편의 허락 없이 혼자 외출할 수 없고, 책도 마음대로 읽을 수 없고, 문학적 상상력과 욕구는 편지 쓰기를 통해 해소하던 여자들. 누군가가 운전해주는 차를 타고 다니고, 누군가가 해주는 밥을 먹고, 쇼핑몰 같은 데에서 돈을 쓰는 것으로 소일하면서, 뭐가 그리 불만인지 답답하고 우울하다고 쨍알쨍알 히스테리를 부리던 여자들. ‘다락방의 미친 여자’들.


게이츠헤드 저택에 갇혀 있던 제인 에어처럼 나는 창밖을 멍하니 내다보며 이곳이 아닌 어딘가 다른 세상을, 진짜 삶과 진짜 사랑이 펼쳐지는 곳을 꿈꿨다. 사철 더운 날씨, 알아듣기 어려운 언어, 벽을 타고 다니는 도마뱀과 열대의 거대한 바퀴벌레, 산이라고는 없이 끝없는 지평선만 보이는 풍경을 죽도록 미워했다. <보바리 부인>의 엠마 보바리가 발자크와 상드의 소설을 읽으며 파리의 귀부인들과 오페라 극장과 레스토랑을 상상했듯이 나는 신경숙의 <바이올렛>을 읽으며 광화문 일대 거리를 몇 시간이고 걷는 상상을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으며 도회지의 재즈 바, 스파게티, 가볍고 충동적인 연애와 뜻없는 대화로 이루어지는 꿈결 같은 시간을 상상했다. 그리고 그런 상상을 스스로 수치스러워했다.


뭐가 그렇게 수치스러운 게 많았을까.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그곳을 박차고 나서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그곳의 삶에 적응하지도 못했다는 것이 부끄러워했던 것 같다. 내게 더없이 소중한 친구 Y가 서울에 있었고 우리는 서로를 애타게 그리워했지만, 나는 이역만리의 친구를 만나려고 배낭 하나 짊어지고 대뜸 집을 나섰던 <줄리와 늑대>의 미약스처럼 용감하지 못했다. 물론 용기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미약스와 나는 사정이 많이 달랐다. 미약스는 조혼 풍습 때문에 억지로 결혼했고, 자신을 강간하려 하는 남편을 피해 차디찬 북극의 자연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나를 둘러싼 세상에 도사리는 위험은 극야(極夜)나 늑대 무리나 북극곰이 아니라 바로 미약스의 남편 같은 남자들이었다. 우리는 너를 강간하고 죽일 것이며 그 죽음에는 수치 외엔 아무것도 없으리라는 위협. 나는 그 위협을 두려워하는 법을 배웠고 그 두려움에 순종하는 법을 배웠다. 그런 순종이야말로 여자에게 주어지는 삶의 방법이라는 것을 배웠다.


부모의 보호를 받으며 이동 당하다가 결혼하고, 결혼한 뒤에는 남편에 의해 이동 당하다가 자식을 낳고, 그 다음에는 자식을 위해 이동하는 것이 여자의 삶이라고. 내가 원하는 삶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나의 친구 Y와 함께 문학과 예술을 논하고, 같은 신념을 나누며 부조리에 맞서 싸우고, 전 세계 모든 곳을 탐험하고, 서로를 지켜주고 지지하며 어른이 되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종류의 사랑은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여자끼리 가능한 우정의 형태와 방식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그건 톰 소여와 허클베리 핀의 우정과 같을 수 없었다.  (기사 전체 보기: ‘곤경에 빠진 처녀’, 글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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