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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청에 대한 도전적 해석, ‘목소리 듣기 운동’

아픈 몸, 무대에 서다⑨ 질병 세계의 언어 만들기


※ 질병을 둘러싼 차별, 낙인, 혐오 속에서 살아가는 ‘아픈 몸들의 목소리’로 만든 시민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배우들의 기록을 연재합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아픈 몸이 온전히 살아가기 위해 현재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질병 서사! 지난 몇 년간 이 이야기를 참 열심히 해왔다. 여기서 말하는 질병 서사는 당연히 질병을 극복하는 서사가 아닌 건강 중심 세계를 향한 저항 서사다. 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는 저항적 질병 서사를 통한 ‘아픈 몸들의 사회적 말하기와 개입’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 연재의 첫 번째 글에서 아픈 몸을 둘러싼 현실에 대해, ‘의사나 정책전문가들에 의해 규정되던 식민화된 몸을 벗어나, 스스로 발화하는 몸으로 변이하는 중’임을 이야기했다. 이후 6명의 배우들의 글은 ‘질병에 관한’ 이야기를 연극 연습과 공연을 통해 ‘몸’으로 해보면서 경험한 연결과 치유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번 글은 연극의 서사들이 어떤 방식으로 정상성과, 건강 중심 세계에 균열을 내고 저항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는지 짚어보려고 한다. 여전히 건강 중심 세계의 언어에 익숙한 당신의 마음에 질병 세계의 언어가 닿길 바라며.


환청은 ‘비정상인’의 증표이기만 할까?


“환청은 세상의 연약한 것들이 내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싶은 내 마음이었을 거야. 망상은 소외된 꿈들이 짓는 몹시도 뜨거운 희망.”


20년 넘게 조현병과 살고 있는 목우에게 환청은 그가 ‘정상’이 아닌 존재라는 증표다. 반복된 강제입원과 약물치료에도 불구하고 결코 사라지지 않는 목소리, 환청. 자신에게는 ‘실재’하지만, 그 ‘실재’가 곧 자신의 강제입원 근거가 되고 약물 속에 무기력하게 갇혀야 하는 이유가 된다. 현대 정신의학에서 ‘환청’은 약물로 삭제되어야 할 의미 없는 위험한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무대 위에서 환청을 재해석하며 열연하고 있는 시민 배우 목우 (촬영: 김덕중)


그런데 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에서 목우는 환청을 ‘연약한 것들이 내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싶은 마음’이라고 의미를 부여하며 긍정한다. 이 대사는 ‘목소리 듣기 운동’(hearing voice movement)에서 주장하는 철학을 담고 있다. 목소리 듣기 운동은 환청을 ‘병리적 증세’가 아닌 ‘특별한 경험’으로 전복시키는 정신장애인 당사자의 경험적 지식이 주도하는 운동이다. 즉, 약물로 ‘치료’되지 않는 환청에 대해 무조건 삭제하거나 부정할 게 아니라, 목소리를 함께 들어줌으로써 대처와 변화가 가능하다는 입장을 전제하고 있다.(송승연, “정신과적 증상인 ‘환청’이 ‘목소리’가 되었을 때”, 카톨릭뉴스 지금여기, 2019년 10월 8일자 기사 참조)


그러나 현대 정신의학에서 환청에 귀를 기울이고 관여하는 것은 비합리적이고 위험한 일로 규정된다. 따라서 이 운동은 세계적으로 다양한 토론과 논란을 야기시키며 전개되고 있고, 한국에서는 아직 시작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 현실에서 나는 목우님이 꼭 자신의 환청을 긍정하는 발화를 해보길 바랬다. 그와 몇 차례 ‘목소리 듣기 운동’에 관한 대화를 나누면서 그 가능성에 설레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오랜 세월 조현병과 살아왔고 정신과 약물의 효능을 인정하지만, 그것이 억압이 될 수 있다는 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목소리 듣기 운동’에서 더욱 가능성을 보았을 것이다.

*시민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온라인 관람 티켓 안내 https://socialfunch.org/dontbesorry

*다른몸들 페이스북 페이지 https://facebook.com/damom.action


만약 그가 “환청은 세상의 연약한 것들이 내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싶은 내 마음”이라는 말을 일반적 사회관계 안에서 했다면 ‘미친 소리’, 진료실에서 했다면 ‘약물 복용량 증가 처방’의 근거가 됐을 것이다. 그러나 연극 무대는 실제이자 가상의 공간이기 때문에 안전하게 발화할 수 있는 장이 되었다. 그는 비로소 무대 위에서나마, 수십 년 동안 환청과 살고 있으며 약물로 ‘치료’되지 않는 증세로 인해 평생 ‘환청이 들리는 이상한 사람’이라는 ‘낙인’을 넘어서 본 것이다. 처음으로 그 환청을 사람들 앞에서 긍정적으로 해석해 본 것이다.


물론 환청에 대한 긍정적 해석을 시도해 본 것이 완전한 저항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현대 정신의학을 전면 부정한다는 의미는 더더욱 아니다. 다만 정신의학에서 반드시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자 ‘비정상인’의 증표라고 했던 환청에 대해 다른 의미를 붙이고, 의사가 아닌 한 그 증세에 대해 규정할 수 없는 의료권력 현실에 대해서도 균열을 내 본 것이다.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고 하지만 수십년 약물치료에도 제거되지 않았던 환청에 대해, 의사가 아닌 조현병 당사자가 자신의 환청은 병리적 증세가 아닌 ‘특별한 마음’이었다고 규정해 본 것. 이는 환청에 대한 전복적 해석일 뿐 아니라, 의료권력에 대한 저항이었다.


현대 의료권력은 거의 모든 면에서 강고한 위치를 갖지만, 특히 정신의학 분야에서 더욱 그렇다. 인간의 신체를 결박하고 구금할 수 있는 권한은 사법권력 이외에는 정신과 의사가 갖고 있다. 게다가 한국은 정신병원 강제입원율이 매우 높다. 이런 현실에서 강제입원의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목우의 목소리는 연극에서 더 많은 함의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아픈 몸도 일자리가 필요하다


“아픈 사람이 집에서 쉬지 왜 일을 하려고 해요?”

“의사가 일해도 된다고 했고, 비급여 약을 많이 먹고 있어서 돈이 필요해요. 우리 사회에서 암만큼 무서운 게 가난 아닌가요?”


직업교육 상담 교육을 받으러 간 유방암 생존자 쟤에게, 고용센터 직원은 왜 일을 하려고 하냐며 핀잔을 주고, 쟤는 그를 반박한다.


취업을 위해 고용센터를 찾아간 쟤에게 왜 취업을 하려고 하냐며 핀잔하는 고용센터 직원 (출처: 다른몸들)


이 대사는 최소한 두 가지를 고민하게 한다. 우선, 노동권의 성별성이다. 만약 쟤가 젊은 여성이 아닌 중년 남성이었다면 어땠을까? 고용센터 직원은 저토록 쉽게 ‘아픈데 왜 일하려고 하냐’고 핀잔을 주기보다, 아파도 일해야 하는 상황을 위로해주고 일자리를 걱정해주지 않았을까. 젊은 여성은 생계의 주체임에도 여전히 소비와 경제적 의존의 대상으로 쉽게 규정된다. 그래서 현재의 코로나19나 1997년 IMF 구제금융 때처럼 위기 국면마다 젊은 여성이 해고 0순위가 되고, 젊은 여성이 아플 때도 그에게 일자리가 필요하다는 것은 자주 간과된다.


두 번째는 ‘아픈 몸 노동권’이다. 질병과 함께 살더라도 젊은 여성에 비해 남성의 노동권은 좀 더 인정받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아픈 몸의 노동권은 우리 사회에서 보장되지 않는다. ‘아픈 몸 노동권’에 대해 좀 더 살펴보자. 아픈 몸이라고 할 때, 전적으로 치료에 집중해야 하는 시기가 있다. 반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아픈 몸이지만 지속적 치료나 관리를 병행하며 노동할 수 있고 권장될 뿐 아니라, 노동이 절박한 시기가 있다. 그리고 아픈 몸들의 상당수는 후자에 속한다. 의사들은 적절한 노동이 일상 복귀와 건강 관리에 오히려 도움이 된다고 말하고, 여러 통계는 적절한 노동이 건강 회복과 유지에 매우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 그리고 몸이 아프면 병원비는 물론 생활 관리에 더 많은 지출이 생긴다. 아플수록 더 많은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임노동이 절박해진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아픈 몸 노동권은 전혀 보장되지 않을 뿐 아니라, ‘아픈 몸 노동권’이라는 단어나 개념 자체도 사실상 없는 것으로 보인다. 아픈 몸에게 부여되는 것은 회복할 의무와 권리이지, 노동할 권리는 없다고 보는 듯하다. 물론 암환자 삶의 질 관련 담론에서 적당한 노동이 삶의 질에서 중요하다는 논의는 있지만, 생계와 노동권을 중심으로 한 본격적 담론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


암 경험자들은 종종 ‘암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서 목숨은 지켰지만, 일자리 지키기 싸움은 실패 했다’고 말한다. 목숨을 지키는 것보다 일자리 지키기가 더 어려웠다는 이야기다. 사회는 아픈 몸들이 질병과 ‘투쟁’을 하는 존재일 뿐 아니라, 일상을 살아가는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건강 중심 사회는 아픈 몸들에게 빠르게 건강한 몸으로 회복하라는 요구를 할 뿐, 이들이 아픈 몸으로 살아가야 하는 시기를 어떻게 헤쳐나가는지 관심이 없다. 아픈 몸으로 살아가야 하는 시기가 일시적일 수도 평생일 수도 있지만, 사회는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회복되지 않는 아픈 몸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성 없는 쓸모없는 존재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기사가 계속됩니다) 

 



트라우마, 가족, 중독 그리고 몸에 관한 기록 『남은 인생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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