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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들이 만드는 환상 세계 ‘팬픽’은 무엇인가

<2020퀴어돌로지>③ 동성물 BL(Boy’s Love)와 GL(Girl’s Love)


케이팝 아이돌을 좋아했던 사람이라면 한번쯤 접하게 되는 것이 있다. 바로 팬픽/RPS(Real Person Slash, 알페스)다. 팬덤 이야기를 하면서 ‘팬픽/RPS’를 논하지 않는 건 팥없는 팥빵을 먹는 것과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팬픽과 RPS(알페스) 모두 아이돌 멤버들을 엮는 ‘커플링’을 기반으로 한 연성이 기본이다. 팬픽이 소설 형식을 띈다면 RPS는 ‘썰’이라 불리는 짧은 글부터 긴 글, 그림, 영상, 소설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요즘은 RPS가 통용적으로 쓰인다.


케이팝과 퀴어의 관계성을 추적하고 분석한 <2020 퀴어돌로지> 첫번째 세미나 “케이팝과 퀴어의 만남”에 이어, 두 번째 세미나는 “퀴어팬덤의 케이팝 서사놀이: RPS 혹은 팬픽”을 다뤘다.


서울퀴어세제션이 주최한 <2020 퀴어돌로지> 두 번째 세미나가 “퀴어팬덤의 케이팝 서사놀이: RPS 혹은 팬픽”을 주제로 11일 서울시NPO지원센터에서 열렸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주연 기자


“더 꿈을 꾸세요. 환상의 힘이 없으면 현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일본의 철학자이자 커밍아웃한 동성애자이며 소설 <데드라인>의 작가 치바 마사야의 말을 인용하면서,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김효진 조교수가 팬들이 만드는 환상 세계 팬픽/RPS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판타지와 현실: 일본 ‘야오이 논쟁’이 시사하는 것


국내에서 BL(Boys Love, 남성 간의 사랑을 이야기함) 관련한 논의를 지속해오고 있는 김효진 조교수는 “기본적으로 순수창작물인 BL과 (아이돌) 팬픽은 많은 유사성을 갖지만, 명백히 다른 역사와 작가 층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남성아이돌을 대상으로 하는 팬픽의 경우, BL 문법을 상당 부분 차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BL이 팬픽에 대한 논의를 할 때 중요한 참조점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최근 BL과 (특히 남성아이돌을 다루는) 팬픽/RPS는 공통적인 비판을 받고 있다. BL로 인해 여성캐릭터의 설 자리가 줄어든다는 거다. 그러나 김효진 조교수는 이러한 주장을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BL이 직면한 비판 중에서 ‘여성캐릭터의 부재’가 여성의 부재로 해석되는 현상, 즉 판타지로서 창작물 속에서 여성캐릭터라는 표상과 현실의 여성을 1 대 1로 등치시키고 이를 ‘당사자성’ 문제로 환원하는 최근의 흐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 ‘당사자성’을 보다 넓게 해석함으로써, 판타지와 표상이 현실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싶다.”


현장에는 각자 좋아하는 아이돌 앨범 및 2차 창작물 굿즈 나눔 코너도 마련됐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주연 기자


김효진 씨는 1990년대 일본에서 ‘야오이’(기존 작품에 등장하는 남성캐릭터들 간의 관계를 호모섹슈얼 로맨스로 패러디한 작품군을 일컫는다. 작가들은 대부분 여성이며, 그녀들 스스로 자기 작품에 ‘클래이맥스가 없고’, ‘완결이 없고’, ‘의미가 없다’고 평한 것이 어원으로 알려져 있다)에 대해 남성 동성애자 당사자가 문제를 제기했던 사례를 설명했다.


“1992년 미니코미 잡지 CHOISIR에 투고된 남성 동성애자 사토 마사키의 에세이 ‘야오이 같은 건 죽어버리면 좋겠다’에서 촉발된 이 논쟁은, 이후 야오이 애호가를 자임하는 몇몇 여성이 이에 응답하는 에세이를 기고하면서 3년간 지속되었다”는 것.


논쟁이 된 건 남성 동성애자가 느끼는 불쾌감, 야오이에서 그려내는 ‘멋진 게이’ 캐릭터가 가지는 한계와 남성 동성애자가 창작의 도구로 이용되는 점, 현실의 동성애자들이 겪는 어려움이 배제된 부분 등이다.


김 조교수는 “이런 비판이 제기되자 반성하고 (야오이물 창작을) 그만둬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야오이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타자로서 게이의 존재를 인식하고, 타자에 대한 인식과 야오이에 대한 애호가 어떤 방식으로 양립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도 나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야오이를 폐기한다고 해서 현실의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 그리고 여성의 욕망에 대한 사회적 억압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타자로서 게이의 존재를 인식하고 조금 더 나은 표상을 모색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판타지와 표상: ‘팬픽이반’이 시사하는 것


이후 일본 BL에선 이런 논의가 반영된 이야기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김효진 조교수는 요시나가 후미의 작품을 소개했다. <사랑이 없어도 먹고 살고 있습니다>에선 ‘BL작가와 그의 남성 동성애자 친구의 대화’를 통해 BL창작자/소비자로서의 고민을 털어놓는다. <어제 뭐 먹었어?>에서는 남성 동성애자 내부의 다양성을 보여 주는 동시에, 게이문화가 BL에서 그려내는 주인공들과 어떻게 다른지 묘사하기 시작했다.


요시나가 후미의 만화 <어제 뭐 먹었어?> 1권 표지(삼양출판사)


또한 “<어제 뭐 먹었어?>에서 등장하는 게이커플은 일본사회에 잠재되어 있는 사회적 차별과 억압을 겪는 당사자로 묘사되는 동시에, 이성애자 여성인 작가 요시나가를 대리한 비 (非)당사자의 측면을 동시에 갖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김효진 씨는 짚었다. BL애호가에게 있어서, BL에서 표상하는 남성의 신체는 ‘타인’이 아니라 ‘자신’이라는 사실이 자연스럽다는 미조구치 아키코의 분석도 덧붙였다. 남성으로 보여지지만, 남성이기만 한 건 아니라는 얘기다.


BL에 등장하는 “남성 신체의 캐릭터에게 남성성과 여성성이 적절히 분배되어 있고”, “<어제 뭐 먹었어?>의 경우도 일반적으로 여성으로 간주되는 특성들이 주인공 커플 안에서 균등하고 배분되어 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이 BL캐릭터들은 “(여성들) 자신의 대리로 자연화되어 있다는 걸 주목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김효진 조교수는 “이런 (BL이라는) 판타지와 표상, 현실의 관계를 가장 급진적으로 탐구한 사례는 사실 일본이 아니라 한국에 있다”고 말했다. “여성들의 남성 동성애 선호적 실천으로 시작된 이 ‘팬픽’이라는 양식은 결국 여성들 스스로의 젠더 및 섹슈얼리티를 재구축하는 데까지 나아간 급진적 문화사례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류진희, ‘팬픽: 동성(성)애 서사의 여성 공간’, 여성문학연구, 2008)라는 분석을 소개하면서, 팬픽과 ‘팬픽이반’이 가지는 의의를 조명했다.


“판타지인 창작물 세계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긍정받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것을 현실의 자신을 규정짓는 실천으로서 인식하고 행동했던 ‘팬픽이반’의 사례는 사실 그 어떤 판타지, 표상과 현실의 관계보다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시사한다.”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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