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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져 마땅한 세상을 다시 쓰는 법

[페미니스트의 책장] N. K. 제미신 『다섯 번째 계절』


‘이 점을 명심하라. 한 이야기의 끝은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

 모든 일은 전에도 있었던 일이다. 사람은 죽는다. 옛 질서는 무너진다.

 새 사회가 탄생한다. “세상이 끝났다”라는 말은 대개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행성은 변함없이 존재하기에.

 하지만 이것이 바로 세상이 끝나는 방식이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 끝나는 방식이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 끝나는 방식이다.

 완전히.’


여기 ‘네’가 있다. 너는 한 세상의 종말을 마주한다. ‘고요’라는 이름을 가진, 소란스럽고 흔들림이 끊이지 않는 대륙을 본다. 이 종말의 시작에 있는 어느 죽음을 본다. 사실 어느 죽음은 하나가 아니다. ‘너’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이 세상이고, 곧 너 개인이다. 읽는 ‘나’는 ‘너’로 불리며, 속절없이 세상에 빨려든다.


N. K. 제미신 『다섯 번째 계절』(The Fifth Season, 박슬라 옮김, 황금가지, 2019)


너의 세상은 이미 몇 번이고 끝장났다


이야기는 에쑨의 개인적 종말에서부터 시작된다. 너는 에쑨이다. 에쑨은 조산력(열 에너지와 운동 에너지, 기타 지진 활동을 다루는 것과 관련된 에너지를 조종하는 능력)을 지닌 ‘오로진’이라는 인종으로, 그 능력을 숨기며 ‘향’(comm)에서 가정을 이루고 살아온 중년의 여성이다.


제국의 관리를 받으며 통제되는 오로진만이 합법적으로 조산력을 발휘할 수 있는 당대, 오로진은 ‘로가’라는 멸칭으로 불리는 혐오의 대상이다. 이들은 특수 교육기관이 아닌 향에서는 살아갈 수 없다. 너는 너 자신과 네가 물려준 자식의 조산력을 숨기고, 조심하며, 향의 일원으로 그저 그렇게 조용히 살아가고 있었다. 너의 남편이 너의 자식을 때려죽이기 전까지.


다음 너는 다마야가 된다. 작은 향, 그다지 자신을 사랑해 주지 않는 가족에게 조산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들켜버린 오로진. 어린 다마야, 너는 돌아보지 않는 가족과 향민들을 떠나 제국의 오로진 특수 교육기관 펄크럼으로 향하게 된다. ‘오로진을 관리하는 수호자’라고 자신을 지칭하며 너를 인도하러 온 이는 너에게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겠느냐 질문하며 네 손가락을 부러뜨린다.


그는 너에게서 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면 네 온몸의 뼈를 낱낱이 부러뜨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너를 사랑한다고 이야기한다. 너는 그 순간 깨닫는다. 그가 필요로 하는 순간,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폭력을 행할 것이다. 너의 행동과 말에 상관없이 너는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너는 시에나이트가 된다. 펄크럼 교육기관의 우수한 인재이자, 뛰어난 소질을 지닌 펄크럼 오로진인 시에나이트, 너는 제국 오로진을 의미하는 검은 제복을 입고 조산력 통제 능력을 증명하는 네 개의 반지를 언제나 손에 끼고 있다. 너는 조언자를 배정받는다. 뛰어난 조산력과 통제 능력을 지닌 조언자를 만나, 제국의 안녕과 대지의 안정을 위한 후대의 오로진을 출산해야 한다.


너는 펄크럼 오로진이 되며 향에서의 쓰임새신분을 잃었지만, 번식사(일곱 가지 기본 쓰임새신분 중 하나. 선택적 교배를 통해 우수한 혈통을 유지하고 자신이 소속된 향이나 민족을 발전 또는 개량하는 일을 한다)의 일을 하는 것과 진배없다. 너는 이름조차 모르는 너의 조언자와 의무를 이행하기 위한 여정을 떠난다.



에쑨, 다마야, 시에나이트. 세 명의 너는 인종화의 경험을 겪는 여성의 삶을 살아간다. 하늘 위로 거대한 보석이 흐르고, 대지가 용솟음치며 사람들이 땅의 움직임 소리를 듣는 이 대륙에서, 너의 어떤 생각과 가치관 방향성, 타고난 이름은 의미를 잃는다. 너는 오로지 ‘오로진’, 즉 ‘로가’로서의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다.


대지가 울고 하늘이 잿빛으로 변해 폐색되어 해가 보이지 않는 다섯 번째 계절이 몇 년 몇 십 년을 반복해 찾아오는 이 세상에서, 그런 계절을 버텨내고 이겨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의 존재를 혐오하며 때려죽이는 이 세상에서, 하늘이 모래와 먼지로 뒤덮이거나 말거나 사실 너의 세상은 이미 몇 번이고 끝장이 났다.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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