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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의 책장] 골드키위새 작가의 웹툰 『순정 히포크라테스』 

 

당신의 연애는 안전한가요

데이트 초기부터 헤어짐, 이별 후 과정까지 피해자의 눈으로 낱낱이 재해석하며, 데이트폭력이 일어나는 과정을 속 시원하게 보여주며 데이트폭력의 전모를 밝힌 책이다. 책의 전체 구성은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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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어 저편을 본다는 것

 

우리는 태어남과 동시에 작은 세상을 갖게 된다. 환경과 여건, 입장과 속성들로 각기 다른 세상에서, 일상이라는 이름의 특정한 궤도 위에서 움직인다. 어린 우리는 누군가 앞서 다져둔 궤도 위에서 자라와, 꼭 그만큼의 시야로 세상을 봐야 하는 줄 알기도 했다.

 

알지 못하는 것들이 한가득인 세상에서, 궤도 저편에 대한 호기심을 품에 안고 질문을 던지거나, 저편을 내다보고 싶어 했다. 그 질문들은 때때로 궤도를 견인하는 보편적 사회 통념이나 혹은 질문을 받은 이 개인의 판단에 따라 가로막혀 사라지기도 하고, 색다른 바깥을 보여주기도 했다.

 

어떤 어린이는 질문을 던질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질문을 던질 수 없는 곳에서 태어난 이들의 의문이나, 궤도에 적합하지 않은 속성을 지닌 존재들의 이야기는 이전의 궤도를 만든 이들, 그리고 궤도에 익숙해진 이들에게 혼란과 분노를 안겨다 주는 매개체에 불과했다.

 

*주의- 웹툰 <순정 히포크라테스>의 시즌 3. 14-15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다음웹툰, 작가 골드키위새, 순정 히포크라테스 시즌 2. 11화 중 http://webtoon.daum.net/webtoon/viewer/90447


<순정 히포크라테스>는 이러한 궤도 저편을 내다본 여성 캐릭터들의 이야기를 매력적으로 풀어낸다. 사해는 입주가정부인 할머니와 오빠와 함께 남의 집에서 살아가고 있다. 별로 특별할 것도 없던 어느 날, 사해는 화장실에 가고 싶어 ‘밤 9시 이후로는 집 주인들이 자야 하니 방에서 함부로 나가지 말라’는 할머니의 말을 어기고 방 밖으로 나가게 된다.

 

하지만 집이 익숙하지 않아, 길을 잃어 서재에 들어가게 된다. 우연찮게 들어온 서재를 신기해하던 사해는 그리스로마신화를 뽑아들고, 책을 읽던 중 집 주인 부부의 다툼을 듣게 된다. 다툼 직후 서재로 들어온 이 집의 며느리, 소원은 사해를 발견한다. 화장실에 가고 싶었던 사해가 실수로 소변을 보는 약간의 해프닝 이후, 사해의 범상치 않은 면모를 감지한 소원은 임신으로 인해 마침 시간이 남아돌 것 같다며 사해를 가르치기로 한다.

 

“그래도 공부는 꽤 해 볼만한 거야. 배움이란 건 닫혀 있는 문을 열고 저 너머를 보는 것과 비슷하거든. 설령 문이 닫힌다고 해도 한번 저 너머를 보게 되면 문을 열기 전으론... 그 너머에 뭐가 있는지 알기 전으론 돌아갈 수 없어.” -소원, 시즌 2. 12화 中

 

소원을 만나 공부하고, 의학 박사인 집 주인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사해는 의학에 대한 꿈을 꾸게 된다. 사람은 제각기 태어나 정해진 위치가 있다는 할머니의 말에 따라, ‘전 예뻐서 공부 안 해도 결혼해서 잘 살 수 있걸랑요, 여자는 공부 많이 해봤자 부질없어요.’라고 말하던 아이는 공부를 통해 재능을 자각하고, 질문을 던지며, 문 저편을 내다보는 존재가 되었다. 

 

문을 연 또 다른 이가 있다. 중학교에 다니고 있는 보듬은 좋아하는 배우의 커밍아웃에 감화되어 스스럼없이 지내던 친구에게 커밍아웃한다. 성적 경쟁이 치열한 중학교라는 세상에서, 문을 연 보듬의 존재는 학교 폭력의 대상이 되었다. 보듬은 자신이 잘못된 것인지 의문을 가지며 여러 책을 읽고, 이 모든 폭력은 야만과 무지에서 비롯된 것들임을 알게 된다. 전학을 통해 폭력의 궤도에서 벗어난 보듬은 조금씩 자신에게 집중하며 다시 공부에 노력을 쏟는다.

 

이블린 후커와 같은 학자들이 남긴 연구를 통해 세상이 바뀌었으며, 자신의 존재가 잘못되지 않았음을 현대과학이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한 보듬은 자신과 같은 입장의 사람들, 특히 어린 사람들이 편견이나 폭력으로 무너지고 있을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직업에 대한 희망을 갖고 의대에 진학하게 된다.

 

▲ 다음웹툰, 골드키위새 작가, 순정 히포크라테스 시즌 2. 3화 중  http://webtoon.daum.net/webtoon/viewer/88536


문을 연 자의 선택과 후회, 사랑에 대하여

 

두 사람은 문을 열었다는 이유로 인해 후회와 마주한다. 그리스로마신화,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의 이야기를 마음 한켠에 품은 사해의 꿈은 소아암 확진과 함께 흔들린다. 나는 박복할 팔자니 낳지 말라 그랬다, 왜 태어나서 이 고생을 겪냐며 한탄하는 할머니의 혼잣말은 사해로 하여금 ‘문 너머를 보지 말 걸 그랬다’라는 후회를 하게 만든다. 완치 이후로도 사해는 거듭 망설인다. 고등학교 3학년, 학자금 대출과 국립대 장학금을 고민한 사해는 이렇게까지 해서 가고 싶지 않다며 결국 의대 진학을 포기한다.

 

보듬은 벽장의 문을 연 이후 자신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에 대한 고민과 후회를 이어간다. 존재 자체에 대한 고민과 고통스러운 순간이 지속되자 더 이상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자살을 결심하고 옥상에 올라선다.

 

다시는 문을 열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두 사람의 선택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사해는 집 주인 아들 바로의 과외 수업을 하다 의대에 다시 원서를 넣게 되고, 진학 사실을 할머니에게 숨기려 하지만 실패한다.

 

보듬은 자신이 가장 힘든 순간 자신에게 별 의미 없이 손을 내밀어줬던 가해 주동자의 친구 지안을 사랑하게 되고, 지안은 연달아 입시에 실패한 상황에서 ‘내가 레즈비언이 될 테니 내 곁을 떠나지 말라’며 아낌없는 애정을 주는 보듬을 도피처로 택한다.

 

사해는 자신을 사랑하지만 결코 자신을 첫 번째로 사랑하지 않는, 남아선호사상을 바탕으로 사해를 차별대우한 할머니를 미워할 수 없다. 보듬은 보듬을 낮잡아보고 함부로 대하면서도 의지해오는 지안을 사랑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다. 두 사람은 스스로의 사랑의 크기가 결코 상대와 같아질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사랑을 멈추지 않는다.

 

“산다는 건 끝없는 선택의 연속이고 이 선택으로 내가 행복해질지 불행해질지 아무도 모르니 아마도 사람은 계속 살아가야 해서 불행한 건지도 몰라. 그치만 할머니. 내 선택이 내 불행이라면... 내 불행 역시 온전한 내 것이 되는 거야. 난 고통도 괴로움도 없는 내게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는 평화로운 그 어딘가보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행복과 불행이 지독하게 섞인 이 삶이 좋아.” -사해, 시즌 2. 16화 中

 

“위로가 필요한 지금에야 나한테 의지하겠지만, 조건에 맞는 사람이 나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버려지겠지. 지안이를 받아주면 언젠가 반드시 후회할 거야. 그치만 내 사랑엔 그 후회까지 포함이야.” -보듬, 시즌 3. 15화 中

 

인생의 중요했던 순간들, 궤도 위에서 가장 큰 의미를 가졌지만 동시에 폭력의 기억과도 맞닿아있는 존재를 사랑하는 두 인물의 선택은 독자들에게 의문을 남기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이 폭력의 기억을 딛고서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은 용기 있는 선택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온전히 미워할 수도, 공과 과를 가릴 수도 없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이 궤도 위에서, 우리는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사해와 보듬은 그들을 사랑하지 않지만 존재할 수 있게 했던 이들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방식을 통해 자신의 삶과 선택을 온전히 감당하기로 결정한다.

 

이 선택의 불행과 행복 모두를 짊어지기로 결정한, 견고한 두 사람의 사랑은 어떤 결과를 낳더라도 두 사람을 해칠 수 없을 것이다. 태어나 만난 세상을 넘어서 질문을 던지고 문을 열어젖히는 것은, 후회까지 온전히 감당하며 나의 선택과 삶을 사랑함을 의미하기에.

 

*필자 소개: 설목. “유니브페미 활동가. 분쟁하러 온 ‘믿는’ 페미니스트입니다.” 페미니스트의 책장은 대학 페미니스트 공동체 유니브페미(UnivFemi) 기획으로 채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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