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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의 책장] 웹툰 『각자의 디데이』에서 보여주는 사랑
※ 이 리뷰는 웹툰 『각자의 디데이』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대 나의 초라한 마음을”
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 서게 되면 알게 된다. 나의 마음이 얼마나 연약하고 초라한지. 그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과, 밉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나를 얼마나 뚝딱거리게 만드는지. 엉거주춤하는 사이에 오해가 끼어들까 봐, 바보 같은 말을 내뱉어버릴까 봐, 걱정하다 보면 후회할 일들만 쌓여간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다만 곤란하고 당혹스러울 뿐이다. 방향 없이 굴러가는 사랑이 어디에 닿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당초 예상했던 곳과는 아주 다른 곳에 떨어진 사랑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음을 나는 받아들여야만 한다.
▲ 오묘 작가의 웹툰 『각자의 디데이』 |
웹툰 <각자의 디데이>(작가 오묘)는 어리둥절한 고등학생들의 얼굴을 차례로 비춘다. 색깔로 된 이름을 가진 연노랑과 진파란은 여자와 남자 사이에 사소한 공통점 하나만 있으면 엮기 좋아하는 '시스-헤테로-유성애 천국' 한국의 고등학교에서 서로의 소식을 (원치 않아도) 듣게 되고, 같은 반이 되자 분위기에 휩쓸려 연애를 시작한다.
축제가 다가오고 있고, 둘은 반의 대표로 댄스퍼레이드에 나가기로 한다. 반 친구들 모두가 댄스퍼레이드 우승을 기대하고 있다. 경품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연노랑과 진파란의 곤란은 그들이 얼마 전 헤어졌다는 데에 있다. 그들은 반 친구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 연인 관계를 (가짜지만) 잠시 연장하기로 한다.
연노랑과 진파란의 비밀스런 가짜연애가 조마조마하게 수명을 이어가는 곳 주변에는 친구들 김이로, 도서원, 선대일, 반장우, 문재하의 이야기가 함께 걸쳐져 있다. 친구들은 각자의 이야기와 비밀을 숨기고, 부딪히는 오해와 내놓을까 말까 망설이는 진심을 축제 곳곳에 놓아둔다. 주어진 시간은 단 3일, 디데이가 올 때까지 이들은 각자의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
초라한 마음은 어디로 가나. 외로이 떨어진 사랑의 골짜기에서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은 마음을 부둥켜 안고 네가 올 때까지 기다린다. 그러나 기다린다고 응답을 들을 용기가 나지는 않는다. 그 마음을 받아줄 수 있을지 없을지 미리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아 어떡하냐 정말, 하며 투덜거리는 사이에 어느새 너는 내 앞에 와 있다. 하 진짜 어떡하냐?
▲ 오묘 작가의 웹툰 『각자의 디데이』 1화 중에서. |
너의 앞에 서면
연노랑은 늘 도서원이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지 궁금했다. 도서원은 진파란의 오랜 소꿉친구이자, 진파란의 고백을 한 번 시원하게 걷어찬 적 있는 여자 사람 친구다. 자기가 모르는 진파란의 모습을 알고, 묘한 타이밍에 나타나는 여자 사람 친구, 신경 쓰이지 않을 수 없다. 축제 동안 도서원과 같이 다니며 알게 된 건, 도서원이 좋아하는 사람은 진파란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대체 누구람. 연노랑은 가끔 도서원이 자기를 차갑게 쏘아보는 이유가 궁금하다.
나의 욕심은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을까? 좋아하는 사람에게 제안할 수 있는 일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내 마음을 받아줘! 강요하는 건 말도 안 된다. 도서원은 어릴 때부터 인기가 많았고 원하지 않는 애정은 거부했다. 남자들은 대부분 무례했고, 승낙을 맡겨놓은 것처럼 굴었다. 차인 이후 도서원을 ‘싸가지 없다’라고 표현한 것까지 뻔한 반응이었다.
도서원은 왜 아무리 잘생긴 남자를 봐도 자기 마음이 설레지 않는지, 남자들은 왜 거절을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이는지 알 수 없었고, 연애에 대한 환멸을 느꼈다. 좋아하는 사람을 바로 알아볼 수 있는 방법 같은 게 어딨겠어, 라고 도서원은 생각했다. 칠푼이 같은 진파란이 연노랑을 좋아하고 있다며, ‘척 보면 딱 안다’는 그 확신을 비웃었지만 어딘가 뒤처지는 기분을 떨쳐내지는 못했다. 그러다 ‘귀엽고 말랑한’ 여자애를 하나 보게 된다. 그 애의 이름은 김이로다.
김이로는 연노랑의 절친이자 댄스부의 에이스다. 끼가 많은 김이로는 어릴 적부터 아이돌을 꿈꾸었지만 주변 사람들은 이로의 체중과 외관을 들먹이며 그 꿈에 한 마디씩을 얹었다. 악의 가 있는지 없는지 구분할 수 없는 비난과 평가에 김이로는 나름 익숙해졌지만, 자신의 노력과 인내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견디기 힘든 날도 있었다.
낙담한 김이로의 곁에는 연노랑이 있었고 도서원은 연노랑이 김이로를 위로해줄 수 있음을 질투했다. 도서원은 자신이 김이로를 위로할 수 있는 자리로 가고 싶었다. 우연은 가끔 예언 같아서 이 자리가 나를 위해 마련된 것이라는 착각을 준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랴. 우연히 둘은 양호실에서 마주치고, 도서원은 좋아하는 사람을 ‘척 보면 딱 안다’는 진파란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게 된다.
▲ 웹툰 『각자의 디데이』 중에서, 이로와 서원 |
이제 문제는 고백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걸 깨달으면, 알리고 싶어지지만 서원은 이미 체념하고 있다. 체념의 근거가 한국 사회 속 아직 걷히지 않은 레즈비언에 대한 혐오와 편견인지, 아니면 원하지 않는 마음을 강요받은 자신처럼, 이로 역시 자신의 애정을 원치 않으리라 예상해서인지는 모르지만, 서원은 그저 이로와 축제에서 춤을 추는 것으로 만족하려 한다.
스스로를 탓하는 사람에게 ‘정면승부’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맞서야 하는 갈등과 확인해야 하는 마음에 대해,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면 끝나는 일이다. 서원은 노랑과의 사이가 멀어진 일이나, 이로에 대한 애정의 갈피를 정하지 못하는 것 역시 자신의 탓으로 돌린다. 어쩌면 서원은 왜 자신의 애정을 받아주지 않느냐며 징징대는 남자들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다만 문제는 너의 앞에 서지 않으면, 너에게 묻지 않으면 너의 마음을 확인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공격받으면 뒤에 숨지 않고 나가서 싸우기를 마다하지 않는 서원도 이로 앞에 서는 일은 겨우겨우 용기를 내야만 가능했다.
서원에게는 그저 춤을 추자는 제안조차 건네기 쉽지 않다. 타이밍은 자꾸만 망가지고 먹구름이 몰려와 운동장을 적신다. 연애 같은 거, 고백 같은 거 바라지도 않은 서원에게 마지막 하나 남은 욕심도 흩어져간다. 이대로 좋은 추억을 남기는 일 따위 불가능하겠지, 절망한 도서원은 겨우 한 마디 건넨다. 너랑 춤추고 싶었다고. 이로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추자!’고 답하고, ‘괜찮겠어?’라고 되묻는 서원에게 ‘겨우 이 정도쯤이야’, 라고 덧붙인다.
앞에 서면 얼굴을 마주 보게 된다. 마주친 시선 뒤로 도망칠 길은 이제 없다. 응답의 디데이는 다가왔다. 수만 번 그려본 시나리오를 다 폐기한 채 떠듬떠듬 전하는 진심 위로 비가 내리고 이로는 서원의 손을 잡았다. 겨우 이 정도쯤의 일. 너의 앞에 선다는 건 겨우 이 정도의 진실을 확인하는 일이다. 우리가 함께 춤을 출 수 있다는 사실. 나의 겨우와 너의 겨우가 꼭 같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사실.
▲ 웹툰 『각자의 디데이』 43화 중 “나의 겨우와 너의 겨우가 이만큼이나 달라도 괜찮아” |
몇 번이고 지치지도 않는 듯 기대하고
노랑과 파란은 처음부터 잘 맞는 커플은 아니었다. 밀떡과 쌀떡같은 사소한 (그러나 중요한) 취향의 차이는 큰 문제도 아니었다. 공포영화를 싫어하는 파란에게 먼저 영화를 보자고 권유할 수 없는 노랑은 미리 혼자 영화를 보고, 사람들에게 미움받기 싫어 거절하지 못하는 노랑이 걱정되는 파란은 노래방에 가자는 친구들의 연락에 노랑을 누락시킨다.
연애를 시작하자고 말한 순간도 둘의 확신을 마모시키는 원인이 된다. 분위기에 휩쓸려 둘은 친해졌지만 먼저 연정을 품고 있던 파란이 ‘나는 우리 사귄다고 생각했는데’라고 말하며 타이밍을 뭉갰고, 얼렁뚱땅 사귀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애초에 우리 좋아했던 것은 맞나? 이렇게 잘 맞지 않는 건 문제가 있는 걸까? 서로에 대해 알수록 멀어지는 느낌이 들 때 연애는 지속될 수 있을까? 먹구름이 몰려오듯, 둘 사이에는 크고 작은 오해들과 엇갈림이 쌓여간다.
노랑과 파란이 헤어진 이유는 간단했다. 비가 왔고 우산이 없었기 때문에. 머피의 법칙처럼 불운한 상황이 겹치고 겹쳤고, 누르고 있던 불만과 불안이 터져나왔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상대에게 가닿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 너의 마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 나쁜 시나리오만이 떠오를 때, 나쁜 시나리오를 증명하는 것 같은 의미심장한 단서가 슬쩍 나타나버릴 때, 나의 마음이 너의 마음보다 더 큰 건 아닐까? 착각할 때, 나의 시야는 좁아지고 상대를 원망하게 된다. 서로가 서로를 돌보고 생각할 여력이 없었던 둘은 확실한 말 없이 연애를 시작했던 것처럼, 확실한 말 없이 연애를 끝내 버린다.
노랑이 생각하는 스스로의 문제는 거절하지 못하는 자신의 소심함, 비난받을 때의 두려움을 숨기기 위한 착한 척이었다. 이별이라는 개인사를 반 친구들에게 그저 곧이곧대로 밝히지 못한 이유는 노랑의 트라우마 때문이기도 했다.
파란이 생각하는 스스로의 문제는 새가슴이었다. 싸움이 바로 헤어짐으로 연결될까 하는 걱정, 고난에 빠져있는 사람을 돌봐야 한다는 강박이었다. 파란은 노랑의 트라우마를 걱정했고, 싸움의 국면에서 노랑의 마음이 이미 떠났을지 모르니, 미리 이별을 예정해버린다.
▲ 오묘 작가의 웹툰 『각자의 디데이』 50화 중에서 |
둘의 문제는 배려였을지도 모른다.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려다 한 발자국 물러서고, 상대방의 마음을 단정 짓고 물어보지도 않은 채로 결정을 내리고, 결국 너에게 나는 특별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섣부른 추정에 다다른다. 너에 대한 나의 최종적인 배려는 너를 떠나는 것, 이라는 결론에서 이별이 발생한다.
파란이 절망하는 순간은 노랑이 자신감을 찾았을 때이다. 노랑은 주변 친구들로부터 자신의 문제가 사실 자기만의 고유한 장점임을 배운다. 노랑의 소심함은 배려이고, 착한 척은 격려고, 다정함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었다. 파란은 노랑의 장점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말해준 사람들의 목록에 자신이 포함되어있지 않음이 슬프다. 파란은 그저 노랑을 배려하려 했을 뿐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자리는 없어져 있었다.
노랑의 문제는 극복되었지만 파란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파란은 노랑이 여전히 자신을 좋아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당장 다시 사귀자 해! 라고 다그치고 싶지만 파란은 마냥 들뜬 기분, 행복한 기분을 만끽하기 두려워한다. 그것은 파란의 가족사 때문이기도 하지만, 노랑에게 다시 묻고, 응답을 들을 용기가 나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새로 시작할 연애는 이전과는 달라야 한다. 파란은 결국 자신의 배려가 사실 진짜 배려가 아니라는 걸, 싸움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알게 된다.
나의 최선 그리고 너의 최선
나는 나의 최선을 알고 있다고 착각한다. 너의 최선이 어디까지라고 지레짐작한다. 하지만 최선의 모양이 어떤지, 그 크기는 얼마인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말로써 꺼내놓는 것, 안전하고 준비된 상태에서 서로의 최선을 꺼내어 다투어보는 것.
많은 독자들이 <각자의 디데이>의 모든 인물들이 선하다는 것에 놀란다. 선한 캐릭터만으로 차 있는 이야기가 재밌을 수 있음에 놀란다. <각자의 디데이>가 선하면서도 재밌는 이야기일 수 있는 건, 실망과 아쉬움을 인물들이 외면하지 않기 때문이며 서로가 각자의 마음을 용기있게 마주하기 때문이다. 인물들의 모든 과정을 독자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가 오묘 작가의 맑은 그림체와 세심한 연출, 서로가 서로를 돌볼 수 있는 안온한 세계관 때문임을 더 부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싸우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마음이 있다. 마음의 면을 하나하나 덧대어 나갈 때 소중한 사람과의 시절이 더 견고해질 수 있다. 사랑을 지켜나가는 것, 마음을 지속해나가는 것은 각자가 각자의 최선을 기꺼이 내어놓는 것과 같다. 교문 앞에서는 잠시 손을 놓아야 하는 것처럼 어떤 시기에는 서로의 체온을 느낄 수 없고, 서로가 곁에 존재한다는 걸 알 수 없을 수도 있지만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 다시 손을 잡으면 그만이다.
“놓친 손은 다시 잡고 미워한 만큼 사랑하면서 몇 번이고 지치지도 않는 듯 기대하고 또 설레자.”
[필자 소개] 노창석. “유니브페미 활동가. 책을 만들고 글을 씁니다. 소하연이라는 이름으로는 시를 씁니다.” 페미니스트의 책장은 대학 페미니스트 공동체 유니브페미(UnivFemi) 기획으로 채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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