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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촬영장에서 비건 메뉴를 요구할 수 있을까?

<청년 페미니스트 예술인의 서사> 배우 손수현②


 

나는 연기를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다. 많은 프리랜서가 그렇듯 나 역시 다양한 사람들과 시시각각 바뀌는 일터에서 일한다. 비건(vegan, 식물성 음식만 먹으며 동물을 희생시켜 얻은 의류나 동물실험을 거친 화장품 등도 사용하지 않음)을 지향하고 난 뒤, 나는 사람들과 만나 일을 하는 과정에서 합의해야 할 사항이 한 가지 더 추가되고 말았다.


‘오늘 뭐 먹지?’


촬영 현장에 오는 밥차에는 보통 육류가 거의 주식으로 나오고 도시락을 먹으려 해도 거의 모든 반찬이 육류로 만들어진다. 중심지를 조금만 벗어나면 먹을 수 있는 것은 더 줄어든다. 보통 지정된 밥집에서 밥을 먹게 되는데 비건 식당일 리 없다. 그렇게 되면 한정된 메뉴에서 논-비건인 반찬들을 뺀 조금 더 한정된 메뉴를 3달 정도 되는 촬영기간 동안 먹게 되는 것이다.


가끔 다른 곳에서 식사하려면 급박하게 돌아가는 촬영지를 두고 왕복 30분을 달려야 하는 부담스러운 상황이 생기기도 했다. 체력을 필요로 하는 노동 환경에서는 체력을 보충할 수 있는 음식을 주로 선호하는데, 내가 속해있는 일터도 그런 경향이 있다. 장시간 동안 버텨야 하고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노동이기 때문에 육류를 섭취해 힘을 보강해야 한다는 생각이 뿌리 깊게 잡혀있는 듯하다. 앞에서 언급한 단백질 신화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과는 달리 단백질은 식물에 있다고 한다. 그 식물을 동물이 섭취하고 그 동물을 먹은 인간의 몸에 단백질이 쌓인다면 결국 동물은 단백질을 전달하는 매개일 뿐이라는 것이다. 나도 보양을 위해 동물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동물성 단백질을 섭취하지 못하면 쓰러질 거라고 확신했지만, 비건 시작하고 한 번도 안 쓰러졌다.


촬영장에서 뭔가 심각한 내 모습. ©손수현


아. 그런 적도 있다. 대본에 적힌 상황을 연기하기 위해 베이컨이 올라간 크림스파게티를 먹어야 했던 순간. 미리 대본을 받아보았던 상황이었지만 나는 다른 메뉴로 바꿔줄 수 있겠냐고 묻지 못했다. 베이컨을 슬쩍 옆으로 빼 크림이 묻은 파스타 면만 먹었다. 잘게 썰려있는 베이컨 몇 조각이 입으로 들어갔고 그냥 삼켰다. 베이컨 몇 조각 먹는 것보다 예민한 사람이 되는 것이 더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영화 <알라딘> 제작 과정에 관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주인공인 메나 마수드(Mena Massoud) 배우가 비건 지향이라는 것이었는데, 어떤 과정을 통해 육식을 하는 장면은 모두 사라지고 그 자리는 과일과 야채 등으로 채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여러 가지 상황들이 다르다. 나는 처음부터 내 비건 지향을 밝히지 않고 상황을 그냥 받아들였다. 내가 말했다면 그 상황은 바뀌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든다. 지레 겁먹고 말하지 못한 상황을 나 혼자 만든 걸까?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하면 상추는 안 불쌍하냐는 질문을 받는 것이 일상인 상황에서 비건 배우가 촬영장에서 무언가를 당당하게 요구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더군다나 그것이 어떤 권력 관계에 놓였을 때나 자본에 의한 시스템이 탄탄한 현장에서는 더 그러하다. 그것을 방증하듯 단편영화 현장에서는 비건을 지향하고 있다고 더 편하게 말을 할 수가 있다. 이것 또한 상대적일 수 있으나 나의 경우에는 그렇다. 얼마 전 촬영한 단편영화 현장에서 한 끼를 전원 비건 식으로 준비해 먹었던 적이 있는데 제작 피디님이 아주 고생했던 걸로 기억한다. 비건 음식을 도시락으로 조달할 수 있는 업체가 별로 없기 때문에 먼 거리를 굳이 힘들여가며 준비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현장도 드물다. 이 현장은 감독님이 비건 지향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내가 가진 힘에 따라 상황을 바꿀 수 있다. 적나라하지만 그게 사실인 것 모두가 안다. 송년회나 신년회는 보통 고깃집에서 한다. 회식도 마찬가지다. 나는 어느 정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군말 없이 따라가서 상추에 쌈을 싼다. 상추에 밥을 한 숟갈 퍼 올리며 생각한다. 다 같이 갈 수 있는 비건 식당이 많아지면 좋겠다.


논-비건스러운 비주얼이지만 비건(vegan)인 비욘드미트 소세지 ©손수현


모든 식당에 비건 옵션이 있다면


대한민국에서 비건 지향 인구가 추정 200만 명이나(?) 된다고는 하지만 아직 비건을 실천하기에는 시스템적인 어려움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비건 지향인 내 친구 Y는 회사 근처에 갈만한 식당이 없어서 분식집에 간다. 회사 근처에 동물성 성분을 빼고 조리해 달라고 할 수 있는 식당이 그곳뿐이라고 한다. 그렇게 분식집에서 맹물로 끓인 순두부를 한 달 내내, 일 년 365일 내내 먹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럼 도시락을 싸서 다니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지만 여기저기 일에 치이는 직장인이 일 년 365일을 매끼 도시락을 싸서 다니는 게 쉽지 않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다. 어떤 가치를 지향하는 데에 있어 온전히 개인만이 노력해야 한다면 이건 확실히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 아닐까. 물론 조금씩 상황이 바뀌고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훨씬 더 빠른 변화가 필요하다.


이 순간에도 동물은 비윤리적인 환경에서 사육되고 인간에 의해 불필요하게 사용되며 결국 잔인하게 도살되고 만다. 소비가 있어야 공급이 생기는 구조를 거꾸로 바꿔보는 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일까? 모든 식당에 비건 옵션이 하나씩이라도 있다면, 모든 마트에 비건 코너가 있다면, 대기업에서 큰 자본을 투입해 ‘미트 제로’인 미트를 맛있게 만든다면, 그래서 대대적으로 론칭한다면, 그 상품을 이용해 롯데리아 같은 큰 프렌차이즈를 만든다면, 홍보한다면. 자본의 논리에 들어맞지 않는 말을 하고 있다는 것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자본에 근거한 다큐멘터리를 몇 편이나 봤음에도 꿈 같은 소리 하고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생명이 자본 밑에 깔려 있는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개인의 노력이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니다. 현상을 알기 위한 개인의 노력도 함께 동반되어야 하는 건 당연하다. 보통 논-비건인 사람들은 비건 지향이라 하면 채소만 아삭아삭 먹을 것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생각해보면 비건을 지향한다는 내가 고깃집에서, 횟집에서, 상추나 깻잎만 먹는 모습만 보았을테니 그렇게 생각하는 게 이상하지도 않다.


하지만 우리 생각과는 달리 비건 음식도 굉장히 다양하다. 논-비건 음식과 다를 바 없이 근사하게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런 인식 변화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나의비거니즘일기 해시태그에 동참하며, 비건 음식을 연구하는 친구 J는 매번 다양하고 근사한 비건 음식을 선보이는 ‘하루비건’이라는 팝업을 연다. 비건 레시피북도 많이 출판되고 있고, 근처 비건 식당을 쉽게 찾을 수 있는 위치 시스템 ‘채식한끼’ 어플도 유용하다.


비건 요리사 친구 J가 만들어준 비건 맥앤치즈. ©손수현


당연한 말이지만 관심이 생기면 보인다. 나는 평소에 사람들 머리 색 따위에 관심이 없다. 하지만 내가 염색이라도 하고 온 날이면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머리 색이 보인다. 이렇게 세상에 색깔이 다양한지 처음 깨달은 사람처럼 머리 색만 보인다. 조금만 더 관심을 가질 수 있다면 좋겠다. 나는 설령 ‘자신을 위해서라도’ 채식에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개개인에게 생겼으면 좋겠다. 나는 그냥 그렇게라도 시작하면 어떨까 생각한다. 사실 그게 더 빠른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육류를 소비하는 것이 줄어든다면, 나는 어쩌면 그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 거다.


물론 비건을 지향하는 목적이 언제까지나 개인적인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지속가능성이 없다는 위험성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애초에 아무런 목적조차 생기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동물을 기반에 깔고 있는 수많은 산업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있는 상황에서 동물권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는 있을까. 감수성은 어떻게 길러내야 하는 걸까.


생명을 감각하면 다른 세상이 보인다


얼마 전 한겨레 칼럼에서 이런 글을 봤다. ‘죽인 동물을 먹지 않겠다는 선택은 죽어있던 어떤 감각을 거짓말처럼 살아나게 했는데,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곰의 쓸개는 인간의 권리가 아니다. 그것은 곰의 권리다.’(홍은전, “그들의 쓸개” 중, 한겨레신문 4월 13일자) 나는 이 문장을 보는 순간 막연하게 느꼈던 감정이 언어로써 명확해졌다.


무언가를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홍은전 작가의 말처럼 ‘어떤 감각’이 아닐까. 내가 느낀 어떤 감각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면 이렇다. 위에서 언급했던 분식집에서 순두부만 먹는 친구 Y는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한다. Y가 아이들에게 묻는다. ‘오늘 고기 먹고 온 친구들 손 들어보세요.’ 아이들은 너도나도 번쩍 손을 든다. Y는 다시 묻는다. ‘오늘 동물 먹고 온 친구들 있나요?’ 고기를 먹었다고 손을 들었던 아이들이 웃으며 말한다. ‘에~ 동물을 어떻게 먹어요.’


편리와 이윤을 위한 착취가 하루라도 빨리 중단되어야 하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모든 생명은 귀중하기 때문이다. 존재 자체로 존중받음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있기 때문에 너무 쉽게 망각한다. 공기를 잊고 살 듯이 살아있음을 잊고 산다. 매일 생명을 먹기 때문에 그것이 생명이었음을 인지하지 못한다.


생각해보면 나 역시도 그랬다. 내가 대단한 사람이어서 비건을 지향할 수 있게 되었나? 절대 아니다. 나는 어느 날 느닷없이 생겨버린 알러지 때문에 채식을 시작했다. 그런 계기가 없었다면 장담컨대 나는 그 무엇도 의심하지 못하며 살았을 거라 확신한다. 나는 동물의 비윤리적인 착취 과정을 사실상 소비했다. 죽어가는 동물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며 뒤돌아 잊었다. 동물을 먹지는 않았지만 그뿐이었다.


다른 방식의 착취, 예를 들면 동물실험을 하는 화장품을 쓰는 것에 무감각했고 동물을 착취해 만들어내는 의류 등에 무감각했다. 좁은 케이지에 갇혀 실명할 때까지 마스카라를 발리는 토끼를 보며 숨이 막혔지만, 다음날 잊었다. 심지어 비건을 지향하고 나서도 한동안 그랬다.


앙꼬와 땅이의 한 때 ©손수현


생각해보면 나의 비거니즘을 지향하게 되는 과정은 페미니즘을 알게 되는 과정과 굉장히 유사한 방식으로 확장되었던 것 같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던 것들이 페미니즘을 접한 후 보이고 들리게 되었던 것처럼, 비건을 지향하고 난 후 나는 점점 그렇게 되어갔다.


무심히 지나치던 것들을 의심할 수 있게 되었고 뿌옇던 시야가 또렷해졌다.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정리가 되어갔고 머릿속에선 연결고리가 생겨났다. 완전 비건을 지향하고 몇 달 뒤, 오며 가며 매일 보던 정육점이 이상하게 보였던 순간이 그것이다. 동물이 생명으로 보이던 순간이었다. 생명임을 감각하자 나의 세상은 달라졌다. 그것은 모든 생활 기반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졌다.


나는 이 글에서 식생활 위주의 비건을 이야기했지만, 더 넓은 의미의 비건은 식생활을 포함해 동물이 착취되는 모든 것을 지양하는 생활 방식이라고 한다. 가죽이나 동물 털로 만들어지는 제품들이나, 식물성이라 하더라도 동물을 착취해 얻어내는 식재료들, 동물실험을 하는 담배나 화장품, 생활용품 등. 비건의 사전적 의미와는 다르지만, 더 나아가 인위적으로 자원을 파괴하여 얻어내는 모든 것의 소비를 지양한다.


비건을 지향한다고 함은 단순히 식생활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내 생활 전반을 점검하고 의심하는 일이었다. 물론 못 지키는 것들이 너무 많다. 나는 동물을 착취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아이러니함 속에서 결국 산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기반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인식하고 의심하고 노력하고 싶다. 더이상 빚만 지며 살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조금씩 감각을 되돌려 가고 싶다.


죽기 위해 태어나는 존재는 어디에도 없다


말이 길었다. 그래서 난 알러지가 사라졌을까? 슬프게도 안 사라졌다. 심지어 비염까지 생겨 여전히 환절기가 되면 콧물이 나고 재채기가 난다. 얼마 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병원에 가서 알러지 검사를 받았지만 몇 년 전과 똑같이 고양이 알러지 맥스 단계로 나왔다. 하지만 나는 지금 약을 먹지 않고도 아이들과 한 침대에서 잔다. 몇 년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일상을 공유한다.


땅이와 나. 고양이 알러지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이제는 약을 먹지 않고도 일상을 함께할 수 있다. ©손수현


재작년 12월에는 땅이라는 고양이가 셋째로 합류했고, 솜사라는 길냥이와 아기고양이 네 마리가 잠시 들렀다. 아가들은 수유를 마치고 좋은 곳으로 입양을 갔다. 솜사는 올해 9월까지 머물 예정이다. 알러지가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알러지를 견뎌낼 수 있는 면역이 생긴 모양이다. 그 면역은 비건을 지향함에서 왔을까? 조금 궁금하긴 하다. 하지만 비건을 실천하는 것이 더 이상 알러지가 나아지기 위함이 아님은 스스로 분명해졌다.


죽기 위해 태어나는 존재는 어디에도 없다. 이 자명한 사실을 깊숙이 인지하는 것이 곧 앞에서 누누이 얘기했던 어떤 ‘감각’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이미 그 감각은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에 내재되어 있다고 믿는다. 깨우기 위해 살아야 한다. 나는 이제 더이상 아무런 조건 없이 누릴 수 있는 편안함은 없다고 생각한다. 나의 편안함은 동물의 목숨이었다.


[필자 소개] 손수현. 배우. 2013년에 데뷔해 여러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했다. 최근 작품으로는 <마더 인 로>, <프론트맨> 등이 있다. 서울 연희동 언저리에서 세 마리의 고양이 가족과 오손도손 살고 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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