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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병, 사회적 분담 못지않게 ‘젠더 정의’가 중요하다

고통으로 잠 못 이루는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엄마가 계단을 기어서 올랐을 때, 눈앞에서 견고한 문이 쾅 하고 닫히는 것 같았다. 지금 저 계단을 기어오르는 사람이 내 엄마라는 걸 인정할 수가 없었다. 너무 불쌍하고 참혹해서,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이 광경을 믿을 수가 없어서. 엄마에게 소리 지르고 싶었다. ‘엄마 왜 그래, 걸으라고. 지난주에도 걸어 올라갔잖아.’


이를 기점으로 엄마는 무너졌다. 거부하던 침대를 수용했고, 손이 떨려 숟가락을 혼자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식사 수발을 받아들였고, 대변을 보고 더이상 혼자 처리할 수 없음을 어렵게 인정했다. 나는 엄마의 급속한 쇠락에 망연자실, 모든 걸 다 처리해야 했지만 실상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우두망찰했다. 뒤늦게 노인장기요양등급 신청을 넣었지만,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언제 실사가 나올지 알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모든 게 아득했다.


정신 차려야지, 수습해야지, 할수록 막막해졌다. 엄마와 멀리 떨어진 도시에 사는 내가 어떻게 매일 오가며 보살핀단 말인가. 엄마와 같이 사는 조카는 오히려 나보다 씩씩한 체했지만, 나는 안다. 스물아홉 살의 이 녀석 또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는 것을. 이 아이 또한 기약 없이 할머니를 돌봐야 하는 시간 앞에서 무력해지리라는 것을. 어디를 두드려 보아도 기척 없는 견고히 닫힌 문 앞에서 나는 오래 서 있었다. 슬펐고, 두려웠고, 외로웠다.


간병, 개인이 부담하기엔 너무 힘겹고 외로운 시간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서성인 지 한 주가 지날 즈음, 몸의 이상 현상이 감지됐다. 이부자리에서 일어나 지지가 않았다. 말도 하기 싫었다. 먹기도 싫었다. 한밤중에 가슴이 두근거렸고 가뜩이나 부실한 잠이 더욱 깃들지 않았다. 문득, 지금과 같았던 어느 날들이 스쳐갔다. 집안의 가장이었던 삼십 대 초반의 초조하던 어느 날이. 우울증이 다시 왔다는 걸 알았다.


누군가 붙잡고 ‘토로’하고 싶었지만 상대를 찾기 어려웠다. ‘누가 이런 구질구질한 얘기를 듣고 싶겠어.’ 그런데 미칠 지경이었다. “중압감, 무력감, 불안, 초조, 슬픔, 두려움, 그리고 무엇보다 죄책감”이 마음속에서 웅성웅성 대는데 밖으로 끄집어낼 수가 없었다.


이상했다. 국가는 노인 돌봄 복지를 강화했고 정부가 민간에 위탁한 노인요양시설도 많아졌는데, 왜 내 고민은 해결되지 않는 걸까?


몇 해 전 요양원을 운영하는 지인이 있어 방문해본 적이 있다. 엄마를 염두에 둔 일종의 답사였다. 마침 노인들이 모여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요양보호사들이 도와주고 있었다. 음식을 흘깃 보았다. 우리 엄마는 입이 짧아 짭짤한 찬을 좋아하는데, 엄마 입맛에 맞을 음식은 없었다. 개인 공간을 보았다. 기본적으로 이인실이었다. 혼자 지내던 엄마가 낯선 사람과 방을 같이 쓸 수 있을까. 시설은 깨끗했지만, 엄마를 여기로 모실 수 있을지 결심이 서지 않았다.


내가 늙어 이렇게 낯선 곳에 보내진다면 어떤 감정이 들까. 나의 “자율성과 통제력, 개성과 고유성을 잃는 것이 두”려울 것이고, 어쩐지 버려진 느낌이 들 것 같다. 엄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때 우물쭈물했던 내 마음의 이유를, 그리고 이런 내 고민이 전혀 사소한 개인적인 경험이 아니라는 것을,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 질병, 돌봄, 노년에 대한 다른 이야기』(김영옥, 이지은, 전희경 저, 메이 편,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기획, 봄날의책)를 읽으며 알 수 있었다. 고마웠다. 책은 누구에게도 ‘토로’하지 못했던 내 고통에 응답해 주었다. 새벽 세 시에 혼자 울었다.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 질병, 돌봄, 노년에 대한 다른 이야기> 김영옥, 이지은, 전희경 저, 메이 편,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기획, 봄날의책, 2020년


엄마의 쇠락에 즉각 요양원을 대안으로 떠올릴 수 없었던 데에는, 국가가 책임지는 ‘공공 돌봄’에 누락된 무언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제도가 다양한 돌봄의 문제를 아우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예로 든 <한겨레> “대한민국 요양 보고서” 기획탐사 보도에서 그 간극을 설명하고 있다. 요양보호사의 열악한 노동 현실을 들여다보면, 돌봄의 질이 낮다는 이유로 나쁜 요양사라는 욕을 쉽게 뱉을 수 없을 것이다.


국가를 대리하는 민간 요양은 영리가 목적이다. 돈이 우선되는 돌봄의 현장에 누수가 생기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이 현장에서 고통받는 사람은 노인뿐 아니라 여성 돌봄노동자도 마찬가지다. 여성인 내 수고와 고통을 덜기 위해 보내는 시설에서조차, 결국 빌릴 수밖에 없는 것이 다른 여성의 손이다. 그것도 가난하고 늙고 아픈 여성의 손. 이런 시스템을 만들어 놓고서 국가는 책임을 다한 듯하고 있는 셈이다.


왜 남성의 경험은 지식이고, 여성의 경험은 불평일까


P도시에서 열린 여성 친화 도시 토론회에 참여했을 때의 일화다. 여성들의 고용 창출을 다루는데, 그 직업군이 한결같이 젠더화되어 있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이 돌봄이었다. 어린아이에서부터 초중등까지 그리고 마침내 노인 돌봄까지, 즉 ‘요람에서 무덤까지’ 돌봄은 여성의 전유물이었다. 조별 토론에서 내가 젠더화된 노동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자, 토론자 모두는(대부분 공직자였다) 그게 무엇이 문제냐며 매서운 눈초리를 던졌다. 어떻게든 직업을 구할 수 있으면 되는 것 아니냐며 일성을 지른 토론자는 여성이었다. 돌봄이 정의롭게 분배되지 않는 한, 정책과 제도 안으로 다시 포섭되는 ‘여성의 돌봄 전담’ 문제는 해결이 요원하다. 돌봄의 젠더화는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사회적 안전망, 의료 접근권, 간병 휴직 확대 등 제도가 뒷받침된다고 해서, 가족 돌봄 특히 여성의 돌봄이 현격히 감소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이유로 저자 전희경은 ‘젠더 정의’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아픈 몸으로 아픈 부모를 돌봐야 했던 저자는 “우리가 맺는 관계를 제외한 채 ‘국가의 책임’이나 ‘정책적 변화’만을 논하는 것은 공허하다”고 말한다. 그랬기에 그는 지인으로부터 돌보던 엄마를 죽이고 싶다는 통곡을 들었을 때, 한 마디 훈계 없이 어떻게 도와줄까라는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돌봄의 위기를 타자화하고 있는 독자라면 이 대목에서 나쁜 X들이라고 욕하겠지만, 나는 공감했다.


엄마의 급속한 쇠락 앞에 속수무책일 때, 나는 엄마가 돌아가셨으면 좋겠다고 감히 생각했다. 이런 자신이 용서되지 않는 분열로, 아픈 사람의 보호자가 느끼는 감정 중 압도적인 것은 죄책감일 수밖에 없다. 아버지가 쓰러져 중환자실에 누워계실 때, 그 상태로 한 달 정도 지나갈 때쯤 엄마는 이렇게 ‘토로’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면 좋겠다고. 엄마는 이십 년 전의 자신의 험악했던 마음과 어떻게 화해했을까. 이런 것이다. 개인에게 부과된 돌봄은 보호자를 이렇게 잔혹해지게 만드는 것이다.


돌봄 노동자의 90%가 여성이고 가족 내 돌봄 역시 80%가 여성이 차지하지만, 돌봄 경험에 대한 담론을 여성이 주도하고 있지는 못하다. 오히려 남성의 돌봄 경험을 다룬 책들이 더 눈에 띈다. 왜 남성의 경험은 지식이 되고 여성의 경험은 불평이 될까. 전희경은 누구의 돌봄이 사회적으로 인지되고, 책을 낼 정도로 중요한 지식, 경청할 만한 이야기로 인식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돌봄 대부분을 여성이 감당하고 있으면서, 여성의 돌봄 경험이 사회적 담론으로 대두되지 않는 이 불균형은, 여성의 돌봄이 모성처럼 자연화되어 있다는 반증이다.


“‘토로’만큼 중요한 것은 ‘토론’이다… 누군가의 토로를 수신하고, 돌보는 사람의 곁에 다가서고, 경청하고 이해할 수 있는 사회적 문해력이 문제다… 간병의 일상 켜켜이 쌓여 있는 ‘부정적인 감정들’에 대한 사유는, 그런 언어와 힘이 쌓일 때 비로소 가능하다.”(123p)


새벽 세 시에 고통으로 깨어 있는 이들에게


“모든 사람이 의존의 구조 속에 연결되지만 ‘의존적’이라는 낙인은 그 구조의 하층부를 떠받치고 있는 이들에게만 전가된다. 독립과 의존을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지배체제를 지속시키는 허구적 프레임인 것이다.”(57p)


“다치고, 아프고, 장애가 있고, 늙어가는 사람들이 평범한 시민이 아니라 예외적인 약자로 여겨지고… 돌봄의 시혜와 호의에 의존하는 사회라면… 우리는 아프고 늙는 것에 대해 영원히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62p)


부끄럽지만, 늙고 허약한 몸에 대해 나 역시 부정적인 생각을 견지해왔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엄마의 쇠락에 무너졌던 건 실상 엄마가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는 것도. 존엄한 죽음이라 일컬어지는 안락사를 찬성한 속내도 기실, ‘추하게 폐 끼치면서까지 살아야 해?’라는 늙음과 질병에 대한 혐오 때문이었다는 것도. 폐 끼치는 행위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의 분위기는 자신의 생명을 포기 또는 제거하는 안락사를 개인의 선택인 것처럼 믿게 했다. 엄마가 딸인 내게 폐가 되고, 엄마인 나는 또 딸에게 폐가 되는, 이 지긋지긋하게 반복되는 ‘의존’의 고리를 안락사라면 끊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독립과 의존이라는 이분법으로는 돌봄의 위기를 돌파할 수 없다. 저자는 이제 질문을 다른 방향으로 재구성하기를 제안한다. 누가 나를 돌봐줄 것인가가 아니라, 나는 누구를 돌볼 것인가로. 그리고 돌보는 실력뿐 아니라 ‘돌봄 받는 실력’ 모두 키워나갈 때, 돌봄은 고통 분담 이상의 것으로 기꺼운 시민적 돌봄이 된다고 역설한다. 의존이 “마음의 빚으로 이루어진 연대”라는 상호 관계임을 납득하고서야 나는, 저자가 주장하는 “시민적 돌봄”에 수긍할 수 있었다.


우선 나는 엄마의 몸을, 노쇠를 인정해야만 한다. 무능력한 엄마를 오랫동안 돌봐야 했던 나의 돌봄은 어느새 지배라는 형태로 왜곡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박탈당한 엄마의 사람됨을 늙고 아파도 살고 싶고 존중받고 싶은 시민됨으로 복원시켜야 한다.


하지만 허약한 의식은 불같은 감정을 이기지 못한다. 나는 자주 무너질 것이고 엄마를 원망할 테지만, 이런 나도 용서하고 싶다. 그래서 오늘도 아픈 몸으로 누군가를 돌보다 그만 자신에게, 자신이 돌보는 사람에게 살의를 느꼈을 그 누군가도 용서하고 싶다. 그럴 자격이 내게 없지만, 그들의 감정을 승인해 주고 싶다. 그들의 분열된 감정이 담론이 되기 위해 사회적 승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 첫 번째 승인자가 되고 싶다.


아프느라, 돌보느라, 새벽 세 시에 고통으로 깨어 있는 이들에게 이 책을 건네주고 싶다. 혹시 지쳐 읽지 못할까 봐 옮겨 본다. 부디 위로가 되길 바라며. (윤일희)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보호자는 불현듯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에 사로잡히지만, 동시에 도망칠 수 없다고 생각하거나, 차마 도망치지 못한다. 이 ‘차마’에 담긴 마음에 대해 생각한다. 많이 아픈 사람들 곁에서 돌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지금의 사회가 ‘보호자’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마음은 어째서 수시로 진창이 되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곁에 머물 수 있게 하는 용기는 어디에서 나올 수 있는지, 우리는 간병하는 이들로부터 배워야 한다. 그리고 ‘같이’ 배우지 않는다면 아무도 배우지 못한다.”(13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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