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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범죄의 ‘증언’은 왜 진실을 의심받는가?

『까판의 문법』 ‘n번방’ 피해자와 연대하는 신생 윤리를 찾아서



파국의 자리에서 새롭게 솟아나는 것이 있다. 이 새로운 힘을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몰락의 에티카’라 불렀고, 사회학자 김홍중은 ‘사회학적 파상력’이라 이름 붙였다. 성범죄의 증언자 윤지오가 마녀사냥으로 무너졌을 때, 저자는 그 무너짐의 힘으로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 


언어를 갖지 못하고 쓰러져간 소리들에 미지의 몸을 부여하는 미학적 수행을 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이 책은 증언문학이다. 이때 미지의 몸은 주어진 진실에 복종하여 배제당하는 주체가 아니라, 스스로 진실을 구성해 내는 윤리적 주체이다.


철학자인 조정환은 트위터,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신문, 진술조서 등 모든 현장 언어들을 데이터화하고 분석하고 논박하며, 증언자 윤지오의 증언을 거짓으로 만드는 ‘증언혐오’의 메커니즘을 성찰한다. 500쪽에 달하는 책 두 권(『증언혐오』와 『까판의 문법』) 합이 1000쪽인 이 증언 대서사시는 작가가 직접 까판의 전장에서 까댓글의 포탄을 뒤집어쓰며 쓴 현장문학이다.


조정환 저 『까판의 문법』(살아남은 증언자를 매장하는 탈진실의 권력 기술)과 『증언혐오』(탈진실 시대에 공통진실 찾기) 갈무리, 2020


윤지오의 증언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논박하는 데 그가 사용한 무기는 이성과 논리인 듯 보이지만, 그 모두를 가동시킨 화력은 당파성과 정동(affects)이다. 케케묵은 386 용어 ‘당파성’이 아니라, 어떤 특정 시점에 서야만 증언자 윤지오에 대한 마녀사냥의 서사가 보인다는 의미에서다.


그 특정 시점은 언어를 갖지 못하는 ‘호모 사케르’(Homo Sacer, 조르조 아감벤이 설명한 ‘벌거벗은 생명’, 어떠한 시민적 권리도 없어서 희생시켜도 죄가 안 되는, 신성하면서도 동시에 저주받은 존재)의 시점이다. 교육받은-비장애인-이성애자-남성-시민의 말과 무직자-지적장애-성소수자-여성-난민의 소리 중 이 사회는 누구의 말을 더 신뢰하는가. ‘진정성’이라는 말은 이미 당파적이다.


우리가 객관적이어서 누구에게나 공평할 것이라 믿었던 그 진실은 이미 임자가 따로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들은 해방 후 고향에 돌아와 더러운 년이라고 손가락질당할까 봐 가족과 이웃에게 자신들이 당한 폭력을 증언할 수 없었다. 한국 대 일본이라는 국가의 언어, 역사의 언어로 번역되고 나서야, 이미 2차 피해의 60년을 보내고 나서야, 자신들이 당한 폭력을 증언할 수 있었다. ‘양공주’라 불리며 멸시받던 여성들은 미군에 의해 살해되었을 때, 갑자기 겨레의 누이가 된다. 민족, 국가라는 말은 이미 당파적이다.


‘텔레그램 n번방 성착취’ 피해자들에게 ‘너의 가족, 친구, 학교에 알리겠다’는 말이 어떻게 협박이 될 수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자. 성폭력 피해자들의 증언을 어떻게 가로막는지를 생각해 보자. 가족의 신성함과 피해자다움이라는 순수주의는 이미 당파적이다. 젠더는 이미 당파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성폭력은 권력형 성폭력이다.


2019년 5월 20일, 법무부 검찰 과거사위원회는 故 장자연씨 사건에 대한 심의 결과를 발표하면서 성범죄와 부실/조작 수사에 대해 공소시효 만료,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재수사하지 않도록 권고했다. 한편 건설업자로부터 별장 성접대 의혹을 받은 김학의 법무부 전 차관에 대해서는 ‘성범죄’를 제외한 채 수사를 벌였으며, 끝내 무혐의로 종결했다. 2019년 5월 24일 10여 개 여성단체 활동가들은 대검찰청 안과 밖에서 “권력층 범죄를 은폐, 조작하는 검찰이 공범”이라고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출처: 한국여성단체연합)


계약직 연예 노동자로서 자신이 당한 성착취를 고발하고자 한 故 장자연의 증언(장자연 문건)은 나온 지 1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사법의 언어로 번역조차 되지 못하고 있다. 증언자 윤지오는 오히려 사법적 언어(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 후원금 사기 등)로 고소당하고, 국가의 언어로 국경을 넘는 적색수배까지 당했다. (윤지오는 “이 정도 수사 의지였다면 장자연 사건은 10년 전에 해결되고도 남았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기자, 작가, 변호사, 교수, 신문, 방송, 경찰, 검찰, 법원 등 진실체계의 독점자들이 총 출동되어 증언자 한 명을 몰락시킨다.


윤지오의 음란, 허언, 사기에 대한 풍문으로 시작된 ‘까판의 문법’이 결국 어디에 복무하게 되는지는 자명하다. 저자는 ‘까판의 문법’이 비단 하위담론 영역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주류 담론으로 지배적 논리로 작동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진실 담론을 독점하고 있는 가부장적 가족-국가 질서는 누군가를 배제하는 원리로 작동되며 본질적으로 ‘벌거벗은 생명’을 창출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때문에 고통을 증언하는 진정성에 이미 켜켜이 엉켜있는 이 모든 당파성 투쟁은 청군과 백군처럼 같은 운동장에서 등질적인 힘으로 벌일 수 있는 투쟁이 아니다. 작가는 가해의 진실을 밝히려는 자와 은폐하려는 자 사이의 투쟁은 ‘그 관계 자체의 해체 없이는 해결할 수 없는 비(非)조정적 관계’라고 말한다.


따라서 고 장자연의 증언과 윤지오의 증언이 사법적 언어를 획득하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스스로의 언어를 획득하는 것이 중요하다. 고인을 단순히 성착취 피해자로 보지 않고, 자신이 당한 폭력을 증언하여 폭력체계를 고발하고 자신의 고통을 종식시키고자 노력한 적극적 증언자로 시점을 전환하려는 저자의 노력은 그래서 중요하다. 고인의 증언과 윤지오의 증언이 연대하고 있으며, 이 연대 공통장에 저자 역시 연대하고자 노력한 것이 이 책이다.


고 장자연의 죽음을 ‘사회적 타살’이라 부르는 것은 누구의 시점에 서서 이 목숨 건 증언을 바라볼 것인가라는 점에서 획기적이다. 독점된 진실체계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진실 주체로 세우려는 다중의 이런 노력에 ‘공통진실’이라는 신생의 이름을 저자는 만들어 낸다. 그것은 가부장 권력의 진실 독점에 맞선 진실 공통체이다.


그러니 우리는 ‘n번방’ 피해자들을 이 신생의 윤리에 초대해야 한다. 당신들 잘못이 아니다. 가족의 신성함, 우정의 순수성, 순결한 여성이라는 파시즘 안에서 두려워하지 말기를. ‘너의 가족, 친구, 학교에 알리겠다’라는 협박 얼마든지 해봐라. 가족도 우정도 여성도 그 이름들을 우리는 다시 새로 만들 것이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필자 소개] 이수영 미술작가. 탈진실 시대의 진실연대자, 복면증언자이다.

“복면증언” 캠페인 인스타그램 https://bit.ly/39NmHzy “복면증언” 캠페인 유튜브 https://bit.ly/2x0Vg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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