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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선량한 차별주의자”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김지혜 작가의 [선량한 차별주의자] 서평 에세이
“차별이 없다는 생각은 어쩌면 내가 차별하는 사람이 아니길 바란다는 간절한 희망일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히려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이 역설적으로 차별을 하고 있을 가능성은 높다.”(김지혜 <선량한 차별주의자> p26)
김지혜 강릉원주대 다문화학과 교수의 저서 <선량한 차별주의자> 창비, 2019
“세상 많이 좋아지지 않았나요?”
어느 날, 사람 좋은 지인 D가 환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폭력적이고 부정의한 일이 더 드라마틱하게 매일 벌어지는 세상이 뭐가 좋아졌다는 걸까? 그는 이렇게 좋아진 세상에 사니, 늘 감사하며 산다고 한다. 감사할 게 거의 없을 듯한데도 늘 감사해하며 일하는, 우리 아파트 미화원 아주머니를 마주치면 절로 수굿해지지만, D처럼 ‘남보다 잘 먹고 잘 사는’ 삶을 살면서 ‘미안하다’도 아니고 ‘감사하다’고 내세울 때는 마음이 불편하다.
인근에 P고등학교가 있다. D의 아이가 다니던 학교로, #스쿨미투가 있었던 학교다. 모 문학상을 수상한 유명 시인이 교사로 있다가 여학생들에게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게 알려져 공분을 샀다. 해당 교사는 문단과의 유착으로 학생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대학 진학은 물론이고, 진학 이후에도 문단과 연관된 삶을 꾸릴 수밖에 없는 학생들에게 그는 존재 자체로 권력이었다.
D는 이 사건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 여학생들 이해가 안 돼요. 왜 그렇게 당하고 있어요? 학교가 거기만 있는 것도 아니고 얼마든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잖아요.” D는 성폭력 사건의 전형적 반응인 ‘피해자 탓하기’를 하고 있었다. 사람 좋은, 그래서 무해한 듯 보이는 D가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되는 순간이다.
#스쿨미투를 한 P고등학교 여학생들은 자신에게 닥칠 수 있는 사회적 낙인과 불이익을 감수하고라도, 자신들과 같은 피해자가 다시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증언했을 것이다. 그리고 증언 이후 이어진 진실 공방은 이들을 2차 3차 멍들게 했을 것이다. 이 성폭력 사태에 대한 질문은 ‘어떤 구조가 교사의 성폭력에 공조했는가’와, ‘왜 학생들은 성폭력을 당하고도 그 피해를 즉각 말하고 도움을 구하지 못했을까’에 있어야 할 것이다. D의 선량한 차별은, 남성중심주의를 내면화한 자신의 관점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는 ‘인식의 부재’에 기인한다.
P고교 성폭력 피해 학생들은 진학을 위해 나름의 스펙을 쌓느라 고군분투했을 것이다. 그 노력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된다면? 교사의 성폭력을 바로 증언하지 못했다고 하여 누구도 이를 비난할 수는 없다. 유명 운동선수인 S가 오래 지속된 성폭력의 피해를 폭로했을 때, 그는 그간 피땀으로 이룬 모든 커리어를 걸어야 했을 것이다. 나는 당시 사회적으로 회자되고 있던 S의 사례를 들어, 즉각 성폭력 피해를 말하지 못했던 여학생들의 입장을 설명했다. D는 “S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이해돼요. 근데 그 여학생들은 그럴 필요가 없었잖아요.”라고 말했다.
이 경우 D의 차별주의적 인식은 능력(성과)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S라는 유명세를 가진, 자신의 분야에서 혁혁한 성과를 낸 피해자와, 딱히 유명하지도 가시적 성과를 내지도 못한 여학생들의 삶을 비교하며 ‘더 지킬 가치가 있는 삶이 있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성과를 내지 못한 삶도 당사자에겐 소중한 삶이고, 많은 것을 걸고 숨 가쁘게 뛰어온 인생일 터. 어떤 삶도 그 삶을 걸고 어떤 행위를 해야 할 때는 수많은 주저함을 뒤로하기 마련이다. 시기가 언제든, 큰 용기를 낸 이들에게 보낼 것은 든든한 ‘지지’여야지, 여태껏 숨기고 있었냐는 질책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구조적 차별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만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H는 신심이 독실한 종교인이다. 구조적 불공평의 문제에도 눈뜨고 있어 차별 문제가 제기될 때면 약자의 입장에 서곤 한다. 허나 나름 정의로운 H도 동성애자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냉혹하다. 그는 대학 기숙사에 들어가게 될 아들의 ‘룸메’가 동성애자만 아니면 된다고 말해 나를 기함시켰다.
기숙사에서 나쁜 혹은 좋은 룸메이트의 기준은 공동생활에 대한 예의와 배려에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H는 동성애자만 아니면 오케이라고 한다. H의 차별은 단순히 개인적 호불호의 차원에서 벌어지는 것일까? “성정체성을 떠나 이 나라를 지키는 훌륭한 군인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얘기하는 성전환 군인을 강제 전역시킨 우리 군의 태도를 보면, 차별을 구조적으로 생산해내고 공고히 하는 주체가 ‘권력’임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선량한 차별주의자>(김지혜 저, 창비, 2019)에서 제시하는 “선량한 차별”은 만연해 그 예를 다 거론하기 힘들다. 그래서 “내가 차별하지 않을 가능성은, 사실 없다”는 저자의 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마트에서 마주치는 다른 피부의 이주민들이 아직도 낯설어 다시 쳐다보게 될 때, 나는 내 시선의 폭력을 부정하기 어렵다.
“우리는 꽤 자주 누군가에게 경고를 보내기 위해 시선을 사용한다.”
모 단체 총회의장에서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이 회원 자격으로 참석해 힘들게 투표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나는 순간적으로 그가 딱하다고 생각했다. 그 상황에서 딱한 사람은 나 자신인데 말이다. 부끄럽게 살지 말자고 눈 부릅뜨고 인권 감수성을 갈고 닦겠다며 노력했어도, 부지불식간에 ‘우리’와 ‘그들’을 구분 짓고 있던 나 또한, 영락없이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은가.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쓴 김지혜 교수는 공론장에서 자신이 결정장애가 있다는 말을 한 후, 한 청중에게 질문을 받는다. 그냥 결정을 잘 못 한다고 해도 될 말을 왜 굳이 ‘결정장애’라고 표현했느냐는 질문에 저자는 우두망찰한다. 무언가에 ‘장애’를 붙일 때 부족함이나 열등함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일상에서 얼마나 습관적으로 장애라는 말을 비하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고정 관념은 자신의 가치체계를 드러내는 일종의 자기고백인 셈이다.”
‘모두를 위한 평등’엔 책임이 필요하다
저자는 차별주의의 극단을 차별금지법의 논란에서 찾는다. ‘성소수자를 빼고’ 차별금지법을 만들자는 주장은 “누구도 남겨두지 않는다”의 평등의 대원칙을 위반한다.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명백한 차별인 것을, 차별하면서 차별금지법을 만든다는 건 언어도단 이상의 부정의다.
저자는 페미니스트 정치철학자 아이리스 매리언 영이 주창한 ‘차이의 정치’를 언급하며, “차이를 관계적으로 이해해 상대화하는” 노력이 개인적으로도 집단적으로도 국가적으로도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개인 또는 집단에 대한 차별은 단일하게 일어나지 않는다. 차별은 성별, 성정체성, 장애, 인종, 민족, 계급, 학력, 나이 등이 교차되며 벌어진다. 같은 농구 선수라도, 귀화 선수 라건아(KCC)에게 가해진 차별(너희 나라로 가라, 검둥이…등의 욕설)과 여자 선수 박지수(KB)에게 가해진 차별(표정이 왜 저래, 싸가지 없다…등의 비방)은 같지 않다. 라건아에겐 인종과 민족이, 박지수에겐 젠더가 작동하며 차별과 혐오를 발생시키고 있다.
자, 그러니 모두 반성합시다! 다짐하면 차별이 사라질까?
“무의식적이었고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억압에 기여한 행동, 행위, 태도에 대해 사람들과 제도는 책임질 수 있고 책임을 져야 한다.” 여기서 ‘책임’이란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했던 행동을 성찰하고 습관과 태도를 바꾸어야 할” 책임을 말한다.(189p)
저자는 차별 없는 사회를 향한 대안으로, 조금은 뜬금없을 수 있는 윤가은 감독의 영화 <우리들>을 제시한다. 이 영화는 소녀들 집단 내 따돌림 문화가 어떻게 소녀라는 단일해 보이는 집단을 구획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면서, 배제를 이기고 연대할 수 있는 희망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피구 경기장에서 다수(강자)는 배제당하는 한 소녀를 “금 밟았다”, “너 나가”라며 억압한다. 이때, 소수(약자)인 한 소녀는 용기를 내 이렇게 외친다. “야, 한지아 금 안 밟았어.” 이로써 신경전을 벌이던 약자인 두 소녀의 갈등은 와해된다.
윤가은 감독 영화 <우리들>의 한 장면. 최수인 설혜인 주연, 2015
누구와 한 편이 될 것인가를 고민하고 그편에 서서 목소리로 지지를 표명하고 연대하려는 이 단초야말로 연대의 시작이 될 수 있다고, 이 책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전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아래 ‘우리들’과 ‘그들’은 이제 더이상 확정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우리들’과 ‘그들’이 유동적으로 전복되는 다층적 상황을 전제하고, 교차하는 차별의 지점에서 그 차별들을 알아채고 거두려는 노력이, 선량한 차별주의자라는 혐의를 벗을 수 있는 길이 아닐까. (윤일희)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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